영국 대표 작가들의 대표적인 단편소설만 묶어 놓았다는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약간 미심쩍은 생각이 들었다. 영국은 미국과 같은 글과 문화를 소유한 정서적으로 가까운 나라이기에 문학의 차이가 크게 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과 영국문학을 구별한다는 것이 무의미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단편선집을 구성한 쟁쟁한 작가들의 이름을 보고 미심쩍은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책을 읽어나가기로 했다. 이 책에는 찰스 디킨스부터 도리스 레씽에 이르기까지 약 100여년에 걸친 영국 단편문학들이 담겨 있다. 이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영국은 영국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고 또한 가장 극심한 변화의 시기이기도 했다. 전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그에 따른 막대한 부를 소유하게 되었지만 너무나 갑작스럽고 변화로 인하여 계층간의 빈부격차가 가속화되고 극심한 사회 갈등이 야기된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이런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던 작가들이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서 집필한 이야기들이기에 당시의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들이 여실히 엿보인다. 이 100여년간의 시기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이전 시대에서 뚜렷하게 보이지 않던 여성작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였다. 이 여성작가들의 작품들은 이제까지 사회구조에 의해 억눌려있던 의식에 표출이자 사회의 구성원으로써의 각성에 대한 뚜렷한 증거였다. 이들의 등장은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이였던 문학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리고 그 신선한 충격은 지금도 그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 그대로 전달이 되고 있는데, 달리 말하자면 아직도 당시 사회에서 야기되고 깨달은 여성문제들이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들의 작품에서 오는 신선한 충격의 끝맛이 조금 씁쓸했다. 내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은 책의 제일 처음에 실려있는 찰스 디킨스의 "신호수"였다. 사실 나는 처음에 신호수라고 해서 新호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차역에서 깃발을 흔드는 신호수를 일걷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혼자 폭소를 하고 말았다. 물론 이런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제체두고라도 이 단편은 대단히 흥미로웠다. 소재자체가 독특하고 강렬한 까닭도 있었지만 약 100여년전에 집필된 단편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글솜씨와 구성이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이 책의 표제로 사용된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와 제임스 조이스의 애러비와 구름한점도 인상 깊었다. 특히 제임스 조이스는 율리시즈라는 그의 대표작 대한 선입견으로 다른 작품들을 도무지 읽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는데 이 단편집 덕분에 그의 작품에 맛을 알게 게 되었으니 이 또한 이 단편선집을 읽는 즐거움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버지니아 울프의 유품이라는 작품도 눈에 띄었는데 당시 규격화 되어 있던 여성의 성역활과 그런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무관심한 시선의 비판이라는 점에서 자칫 진부해질 수 있는 소재의 이야기가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처음 이 단편선집에 대해 느낀 내 미심쩍음은 곧 현대 영국문학에 대한 아쉬움으로 변해갔다. 최근에 현대 영국문학 작품들을 몇편 읽어 보았지만 현대 영국문학들은 마치 미국에서 세계 패권을 뺏앗겨버린 후에 저물어버린 그들 나라의 힘처럼 더 이상 영국 특유의 문학이라는 개성을 뽐내지 못하고 시들어 버린 느낌이였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여왕시절의 날카롭게 핵심을 찔러대던 영국 작가들의 정신과 기질은 어디로 간 것일까? 분명 그들의 혈관 어느곳에는 그것들이 남아 있을텐데 말이다. 이 단편선집은 상당히 잘 짜여진 책이다. 표지와 책의 구성에도 신경을 쓴 느낌이 역력하고, 처음 작품 시작 시 소개해놓은 각 작가들의 간략한 약력과 작품들의 말미에 더 읽어볼만한 책들을 추천해 독자들의 이해를 도운 점들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러나 내가 신호수를 읽을 때처럼 작품에 표기에 혼동을 느낄만한 부분에 한자를 덧붙이지 않은 점은 조금 아쉬웠다. 몇몇 단어들의 표기에서 잠시 헷갈리는 경우가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단점을 제외한다면 근래에 읽은 순문학책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이였고, 그간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받던 단편작품들을 엮어 책으로 출판했다는 점에서 큰 점수를 주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단편선집이 재미있다는 것이 이 책을 읽고 얻은 가장 큰 보람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