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름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1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리 홀레 시리즈의 국내 번역은 시리즈의 7번째 작품인 스노우맨부터 시작한다. 역대 최고의 흥행작인데다 헐리우드 영화 판권 계약까지 마쳤으니 국내에 첫 선을 보이기엔 안성맞춤인 작품이었다. 다만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시리즈를 역순으로 읽게 된(그렇게 번역, 출간되니까) 부작용, 그러니까 시리즈에 대한 스포일러를 잔뜩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나 같은 사람들만 씩씩거리게 됐을 뿐이다. 어쨌든 처음 접한 스노우맨의 해리 홀레는 이미 지쳐버린 중년의 알코올 중독자였고 갖은 악습과 고집불통이 몸에 밴 꼰대였지만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악당을 물리치기 위해 악당의 피를 뒤집어써야만 했던 영웅의 초라한 뒷모습처럼, 그의 내면에 담긴 괴로움과 쓸쓸함이 충분히 이해됐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의 부족하고 모난 부분조차 인간적으로 느껴졌기에 애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지켜보게 됐다. 그러나 이런 안타까움도 잠시. 스노우맨 바로 다음권인 레오파드 부터는 이해라는 범주를 넘어서 짜증을 불러 일으키기 시작했다.


내가 모든 매체를 통틀어 가장 싫어하는 요소는 주요 등장인물의 의미 없는 죽음이다. 이야기란 수많은 인생을 담고 있는 것이기에, 죽음이라는 되돌릴 수 없는 강력한 장치는 의미를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향하는 곳이 비중이 높고 주인공과 가까운 관계라면 더더욱. 그것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그 인물들이 담고 있는 인생에 대한 존중이니까. 그런데 이 시리즈는 그런 거 없다. 존중, 그게 뭔가요, 먹는 건가요? 아니면 콧구멍에서 킁하고 뱉어내는 콧물인가요?


해리 홀레 시리즈에서 비중이 높고 주인공과 가까운 관계라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망자는 다음과 같다.

엘렌 옐텔 / 잭 할보르센 / 비아르네 묄레르 / 베아테 뢴


이 중 그나마 의미 있는 죽음이라고 납득할 수 있는 건 엘렌 정도(오슬로3부작 내내 해리의 모터베이션이 된다), 나머지는 왜 죽었는지 의미를 모르겠는, 그야말로 개죽음을 당한 인물들이다. 뭐, 작가에겐 의미 있는 죽음이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흐름상 갈등을 유발할 새로운 인물을 넣거나(할보르센&뮐레르) 필요 없는 인물을 퇴장시켜야 했는데(베아테 뢴) 가장 쉽고 편하면서도 자극적인 방법이 기존 인물의 사망이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 등장인물들에게도 각자의 인생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인생들은 해리 홀레 시리즈 속에서 충분히 존중받지 못한 채 의미 없이 말초신경 한번 자극하고 끝내버릴만한 하찮은 것 따윈 아니었다. 특히 폴리스에서 사망한 베아테 뢴의 경우엔 더더욱.


베이테는 과학수사과 소속으로 두뇌 일부의 특수한 상태 때문에 한번 본 얼굴은 절대 잊지 않는 능력을 지녔다. 이 능력은 해리 홀레가 수사를 하는데 아주 유용하게 사용된다. 하지만 소설이 2010년대로 넘어오면서 그 능력은 빛을 바라고 베아테도 얼굴 인식 능력보단 과학수사과가 갖고 있는 자원으로 해리를 지원하는 역할을 주로 맡게 된다. 첩보물에 단골로 등장하는 컴퓨터 얼굴인식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걸 이제는 웬만한 일반인조차 다 아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해리 홀레 시리즈도 최첨단 시대에 발맞추기 위해 베아테의 능력보단 컴퓨터에 능숙한 등장인물이 더 필요했을 거다. 하지만 그 인물들의 등장을 위해 꼭 구시대의 인물을 사망으로 퇴장시킬 필요는 없었다. 그것도 산 채로 토막 나 죽었다는 설정은 더더욱 필요 없었다. 


시리즈의 시작부터 폴리스에 이르기까지 베아테의 인생은 엄청난 우여곡절을 겪는다. 시리즈 초반 해리의 동료 할보르센과 연인 관계로 발전했지만, 할보르센은 사건 해결 도중 사망했고, 그녀는 졸지에 유복자를 임신한 미망인이 되어버린다. 그럼에도 베아테는 의연하게 슬픔을 견뎌내며 꿋꿋하게 아이를 낳아 어머니와 함께 양육하는데, 이는 그녀의 아버지가 경찰로 순직한 후 역시 꿋꿋하게 자신을 길러낸 어머니의 모습을 보아온 덕분이었다. 그런데 이런 베아테의 인생을 어떻게 그렇게 극단적인 것으로 몰아갈 수 있단 말인가. 사회정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사망한 아버지와 연인을 앞서 보내고 평생 꿋꿋하게 노력해온 그녀의 인생을 말이다. 아무런 존중도 없이, 의미도 없이. 그저 뻔한 사냥감 하나로 전락시킨다는 건 베아테와 같은 수많은 인생들을 모독하는 일 아닌가. 남편과 하나뿐인 자식이 범죄에 희생당한 베아테 어머니 인생은? 본인이 태어나기 전에 범죄자에게 살해당한 아버지와 학교 들어갈 무렵 그보다 훨씬 잔혹하게 살해당한 어머니, 그리고 역시 범죄자에게 살해당한 경찰 출신 외할아버지를 둔 베아테 아들의 인생은? 에필로그에서 베아테의 사진 올려놓고 추억하는 장면 하나 나왔다고 해서 이 모든 인생들에 대한 존중이 이루어졌다고 여기는 것은 기만이다.


베아테의 인생에 대한 존중이 있었다면, 베아테를 죽이지 말고 경찰을 퇴직시켰거나 다른 나라나 다른 도시에 일자리를 잡고 떠나보내는 것으로 마무리했어야 했다. 라켈에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어쩔 수 없이 꼭 죽여야 했다면 베아테가 죽는 순간까지 경찰다운 모습을 보이는 장면이 나오거나, 평소 똑똑한 그녀의 캐릭터에 맞게 다잉 메세지를 남겨 수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했어야 했다. 아니면 최소한 엘렌의 경우처럼 베아테의 죽음이 해리에게 강력한 모터베이션이 되어야 했다. 그게 시리즈 3편부터 10편까지 등장한 인물과 그 인생에 대한 예의였다. 하지만 그런 장면은 단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배려, 그런 존중 같은 건 이 소설에 없다. 베아테가 죽었어? 엉엉. 부둥부둥. 슬픔 극뽁! 범인 잡자! 끗. 내가 대체 왜 이 소설을 읽고 있는 걸까 처음으로 회의감이 들었다.


설마 아닐 거야, 폴리스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도, 그렇게 뒤통수를 맞아놓고도 이게 끝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다음 편인 목마름에 폴리스의 메인 빌런이 이어서 등장한다니까 숨겨진 뭔가가 있을 거라고, 베아테의 죽음이 이렇게 개죽음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동안 읽어온 요 네스뵈라는 작가가 그렇게 가볍게 한 인생을 끝내지 않았을 거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내 스스로를 향한 희망고문일 뿐, 그런 내용 같은 건 단 1도 없었다. 베아테에 대한 언급은 딱 한번 나오는데 사람 얼굴 기억 잘하는 동료 하나가 있었죠, 가 끝이다. 심지어 해리는 그 말을 할 때도 아무렇지 않다. 바다 건너 미국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이 죽었다는 걸 말할 때처럼. 바다 건너 와이키키 해변에 사는 와이키키씨가 어젯밤에 지렁이 보고 놀라 뒷걸음질 치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대요. 끗. 이쯤 되니 서브 빌런 중 하나인 트룰스 베르트센이 더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시리즈를 이어갈수록 재수가 없어지는 미카엘 벨만의 몰락이 마지막 장까지도 확실하게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도 납득되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대체 이 서브 빌런을 언제까지 써먹으려고 또 이렇게 마무리 짓는 건지. 그렇게 섹스씬을 쓰고 싶으면 미카엘 벨만을 방패막이로 쓰지 말고 아예 본격적으로 19금 소설을 쓰면 되지 않나? 아마 99 퍼센트의 확률로 공중 화장실에서 키가 크고 수박만 한 가슴을 한 트렌스젠더와 섹스를 하다 절정에 달하면 목을 조르며 헐떡이는 내용이겠지만. 아마 10년 전의 나한테 넌 나중에 스칸디나비아에 살고 있는 한 작가의 섹스 판타지를 알게 될 거라고 말한다면 이렇게 대답했을 거다. 그런 건 무라카미 하루키 하나면 된다고! 그리고 이제 슬슬 요 네스뵈의 장광설도 동네 할배의 꼰대질처럼 느껴져 책을 읽을 때마다 지치는 기분이다. 솔직히 그 장광설들(뱀파이어의 기원이 어떻고 저떻고 - 매 소설마다 등장하는 배경 지식에 대한 설명들인데 레오파드부터 길어진다 싶더니 이젠 아주 몇 페이지씩 잡아먹는다) 통으로 빼도 이야기 전개에 전혀 상관없다. 작가 본인이 지식 자랑을 못할 뿐이지. 


올레그가 경찰을 지망하고 해리가 그런 올레그를 응원한다는 이야기엔선 내 눈을 의심했다. 엄청난 반어법인 건가, 아니면 올레그도 곧 사망하는 얘기가 나오는 건가, 혼자 알쏭달쏭해 했지만,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냥 글자 그대로, 문장 그대로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물론 술꾼이든 뽕쟁이든, 중독 증상을 극복하고 평범한 직업을 얻고 일상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크게 문제 될 건 없다. 오히려 그런 약점들이 인간적인 모습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런데 살인을 한 사람이 경찰을 지망해서 사회 수호에 이바지하고 싶어 한다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소설에서든 현실에서든. 올레그가 죽인 대상이 쓰레기 같은 뽕쟁이에 살날이 머지않은 인간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심지어 그 살해 대상이 절친한 친구에다 살해한 이유가 그 인간의 참을 수 없는 막장 행각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마약을 독차지하기 위해서였다면 더더욱 경찰을 지망해선 안됐다. 올레그가 성인이 된 모습으로 등장한다면 어머니인 라켈을 따라 변호사가 되지 않을까 어렴풋이 예상하곤 했었는데, 그의 심지는 참으로 깊고도 깊었다. 어린 시절 희망했던 경찰의 꿈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다니. 이래서 마약을 하면 안 되는 거다. 양심이 사라져버린다고. 이런 애를 마약 하면 그럴 수 있다고 두둔하는 해리 홀레라는 캐릭터도 양심 없긴 도찐개찐이다. 설마 나만 꽉 막힌 유교 인간이라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혹시 노르웨이의 도덕관념은 이게 다 용인되는 걸까. 그렇다면 내 안의 도덕이라는 단어를 다시 정의해야 할 것 같은데.


제발 다음 편에선 의미 없는 죽음이 없길. 그리고 여자들이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것도 줄어들길 바라본다. 하지만 요원한 일이겠지. 해리 홀레 시리즈란 그런 것이니까. 그런 것이라 해리 홀레 시리즈라고 하는 거니까. 해리 홀레 시리즈와의 작별을 준비하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