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끔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 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 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
감수성이 한창 예민하던 학창시절에 그러 서럽고 나만 억울한 기분이 들면서 겨울잠 자는 동물처럼 한없이 웅크리고만 싶을 때 기형도 시인의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이 우울한 감정선을 공감케 하여 위로가 되었습니다. 요절한 시인이 남긴 시는 여전히 많은 이들이 좋아해 읽히고 외워집니다. 저 역시 제가 좋아하는 시인 ‘잎 속의 검은 입‘과 ‘빈 집‘을 자주 낭송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위로가 되는 기형도 시인의 시집과 함께 다가올 봄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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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강아지의 시간
보스턴 테란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시간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며 행복과 기쁨이 되어주는 생명체, 이 책은 그들의 이야기다. 




#인간의 오랜 친구


나는 몇 해 전 막내처럼 예뻐하던 강아지를 잃었다. 죽음 직전에서 힘겨워 하던, 생의 마지막이 코앞에 닥친 순간에도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쓰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내가 먼저 포기하고 내가 먼저 그 줄을 놓아버리고 숨이 멎을 때에 함께 있어주지 못한 것이 아직도 뼛속 깊이 후회스럽고, 문득문득 눈앞에 아른거리는 찰나의 순간들에 그러지 않으려 해도 눈물샘이 절로 열리고 만다. 이런 센티멘털한 감정을 유지한 채로 책을 받아 보았다. 북커버가 예뻐서 여전히 슬펐다. 인간과 개의 교감이 한껏 느껴지는 책 표지를 한참 바라보다가 읽기 시작했다. 



#어떤 강아지의 시간은?


필명으로만 활동하는 작가 보스턴 테란이 쓴 <어떤 강아지의 시간>은 미국에서 2009년에 출간한 작품인데 10년이란 세월을 건너 뛰고 왜 이제야 한국에 들여온 건지 궁금해 해외 웹을 찾아보았더니, 그의 대리자가 만든 공식 사이트에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책'이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이 책의 저자 보스턴 테란은 주로 미스터리 추리 소설을 쓰는 작가로 일본에 이미 몇 권의 책이 번역서로 나왔고 이 작품도 2017년 출간 이후로 꽤 반응이 좋았던 듯하다. 한국판이 뒤늦게 나온 이유도 아마 옆 나라 반응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보스턴 테란이 <어떤 강아지의 시간>을 쓰게 된 동기는 우연과도 같은 운명이었다. 미국의 역사적 이슈에도 관심이 많았던 작가는 미국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보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책을 썼다고 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과 강아지는 어느 날 작가가 우연히 보게 된 로드킬 사고와 연관이 있다. 퇴역 군인으로 보이는 남자의 차에 개가 치이는 것을 목격한 보스턴 테란은 부상 입은 개를 남자의 차에 옮기는 일을 도우면서 영감을 얻었다는 것이 공식 사이트의 소개 글이다. 나는 책을 다 읽은 뒤 이 정보를 습득했는데 소설 속 내용이 실화가 아님에도 너무나도 사실적이라는 기분이 들었던 점은 역시 그의 경험담이 녹아들었기 때문이겠지. 


<어떤 강아지의 시간>은 독특하게도 줄거리가 이미 프롤로그에 대부분 다 노출되어 있다. 첫 페이지를 펼쳐 프롤로그만 읽어도 전반적인 내용 파악이 다 되는 거다. 작가는 이런 방식의 배치로 무엇을 말하고자 한 걸까. 소설 전체가 액자식 구성인 이 작품은 이라크 폭격에 부대원을 대부분 잃고 혼자 멀쩡하게 살아남은 채 제대한 해병대 병장 출신 딘 히콕이 여러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쓴 소설이라는 콘셉트로 늙은 개의 마지막 여정과 2세의 탄생, 같은 이름을 지닌 아들 강아지의 험난한 모험을 다루고 있다. 개들의 이름은 GIV, 기브다. 


강아지 기브가 주인공이면서도, 주로 사람들의 이야기 위주로 전개되기에 <어떤 강아지의 시간>을 동물 소설 정도로만 단정 짓기에는 여타 동물을 주제로 쓴 작품과는 그 결이 다르다. 이 책은 영적인 이야기, 신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운명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또한 여러 등장인물은 각자 역할에 맞게 설정된 자들이다. 아무런 의미 없이 겪는 고통은 없다. 우연과 필연이 얽히고설켜 운명은 만들어진다.  


교통사고로 가족을 잃고 뇌 손상에 의해 개와 비슷한 후각 능력이 생긴 여자, 아버지에게 폭력과 위해를 당한 카인과 아벨의 현신 같은 형제, 홍수 속에서 고양이를 구하다가 죽음을 맞은 선한 소녀, 전쟁터에서 혼자 멀쩡하게 살아남아 자살을 생각하는 남자. 애나 페레나, 이언, 루시 루스, 딘 히콕. 이들이 기브와 운명적으로 만나 교감을 나누고 때론 위기를 겪으며 이야기가 펼쳐짐과 동시에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 9/11 테러, 이라크 전쟁 파병, 허리케인 카트리나, 뉴올리언스 홍수, 캘리포니아 산불 이슈가 다뤄진다. 게다가 미국 각지의 지명이 자주 등장을 하는데 강아지 이름 '기브'도 미국의 지명과 관련이 있었다. 이처럼 미국의 역사와 미국의 각 지역 서술은 보스턴 테란이 의도하고 쓴 것으로 보인다.  



#계몽적이고도 교훈적인 이야기


<어떤 강아지의 시간>을 읽으면서 자주 했던 생각인데 강아지 기브의 이야기를 바탕에 깔고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느껴졌다는 거다. 이는 번역서 제목 어떤 강아지의 시간으로만 놓고 보자면 생뚱맞은 이야기일지도 모르나 이 소설 원서의 원제를  살펴보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부분이다. 


Giv: The Story of a Dog and America 


저자는 이 소설에서 기브라는 강아지의 여정을 통해 사람, 지역, 역사적 사건. 그러니까 '미국 그 자체'를 이야기하고자 했던 거다. 그리고 반항심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언급되는데 순수한 반항심이 미국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보스턴 테란은 주장한다. 기브는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 배신과 가해의 상처에도 변함없이 선한 마음씨를 나타내는 일종의 상징이며 각종 테러와 파병 재난에 의해 상처받은 미국인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인간의 오랜 친구' 대표였다. 그래서 미국인이 아닌 우리의 정서에는 마치 '인디펜던스 데이' 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무비에서 느껴지는 미국식 내셔널리즘에 대한 정서적 위화감을 조금은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미국을, 미국에 의해, 미국을 위해 쓴 소설이라는 게 내 감상이다. 



#떠나보내며


어쨌거나 <어떤 강아지의 시간>은 동물을 좋아하고 강아지를 가족처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읽고 싶을 만한 책이고, 또 읽으면서 공감 가는 부분이 많다. 내가 그랬으니까. 내 이야기로 돌아와서, 나는 작은 요크셔테리어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그로부터 1년여의 시간을 견디다 말티즈를 새로운 가족으로 만났다. 마냥 해맑게 퐁퐁 뛰어다니는 지금의 막내도 정말 사랑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 작던 몸이, 촉촉하고 순하던 눈동자가 여전히 눈에 밟힌다. 따라서 이걸 읽고 느낀 여러 감정을 차곡차곡 정리한 다음, 무지개다리 건너편 천국에서 쉬고 있을 내 어여쁜 강아지의 보금자리 한편에다 고이 놓아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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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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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이라는 것. 사람에게 처음이란, 부러 기억하려 들지 않아도 잊히지 않는 것이며 두고두고 가끔씩 툭 튀어나오는 기억의 한자락일 겁니다. 그런 처음에 사랑을 붙인 첫사랑이라는 단어는 또 얼마나 설레는 단어인지요. 풋풋하고 서툴지만 그래서 더 귀한 감정일 겁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고통과 아픔의 상흔이기도 할 겁니다. 여기에 그런 첫사랑이 있습니다.


성석제 작가의 소설 선집 '첫사랑'은 표제 단편 '첫사랑'이 인터넷에서 회자되며 꾸준한 사랑을 받았기에 이 제목으로 선집이 나오게 된 듯합니다. 그만큼 여운이 깊게 남는 작품이라서 총 7편의 소설 중 '첫사랑' 위주로 리뷰를 씁니다. 화자인 '나'는 그저 평범한 남학생입니다. 어찌 보면 반듯한 모범생이며 일탈을 즐기지 않고 소위 노는 동급생을 경멸하고 상대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 '나'에게 '너'라는 문제아가 관심을 가집니다. 그냥 노는 아이도 아닌, 일진이나 짱 소리가 붙을 만큼 덩치가 크고 위협적인 '너'는 자꾸만 '나'의 주위를 맴돕니다. '나'는 밀어내고 '너'는 밀려나도 다시 다가옵니다. 단순한 우정은 아닌 듯 보입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렇습니다. 스스로 제어를 할 수 없죠. 누군가를 좋아하자고 이성이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심장이 반응을 하는 겁니다. 누군가를 좋아함이란 교통사고와도 같다는 말처럼 어느 순간 치이고 마는 감정입니다. 너는 왜 그러니?라고 물어도 명확한 답은 없습니다. 좋은데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어쨌든 '너'는 '나'와 일탈을 했고 '나'를 보호한 '너'는 혼자 다 감당하고 학교를 떠납니다. '너'를 싫어하고 거부하던 '나'는 어느새 '너'와 같은 감정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석제의 '첫사랑'은 성장통을 겪은 이후에서야 다 자라버린 '나'로 끝이 납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기에 더 아름답다고 합니다. 이 소설 '첫사랑' 또한 그래서 더 여운이 남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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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희 컬렉션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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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리베라투르 수상작 오정희 작가의 '새'는 한국인이 해외 문학상에서 최초로 수상한 기록입니다.

1996년에 최초 출간한 '새'는 오정희 작가의 첫번째 장편소설로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스테디 셀러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녀의 섬세하고도 유려한 문체는 한국 문학을 대표할 만한 여성 작가의 진면목을 보여주기에 소설가 지망생들이 필사를 하며 문장력을 향상시키는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새'는 불우한 어린 남매의 이야기입니다. 단란하고 화목하던 가족이 자연재해로 인해 모든 것을 읽고 대도시의 빈민이 되면서 가정은 파괴되고 아이들은 버림을 당합니다. 사회의 약자이자 가장 큰 피해자인 어린 소녀의 시각에서 보는 세상은 가혹하기만 합니다. 우미와 우일 두 남매에게는 산다는 것 자체가 투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목의 '새'는 우미가 보는 우일입니다. 믿을 수 없어서 믿지 않는 현실. 죽은 동생이 살아 있다는 환상. 새장에 갇힌 새를 풀어주면서 자유의 몸이 되어 훨훨 날아가기를 바라는 누나의 마음이었습니다. 어린 소녀가 동심을 잃고 점점 미쳐 가는 모습에서 서글픔과 먹먹함을 느꼈습니다. 


울타리가 되어주는 가정이 해체되면 아이들이 어떤 고통을 겪는지를 이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또 다른 우미와 우일들에게 부디 언젠가는 행복이 오길 바라며 책을 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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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외딴 성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서혜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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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이 작품, <거울 속 외딴 성>의 존재를 알고 관심을 두게 된 계기는 2018년 일본 서점대상 1위 수상작이기 때문이다.

서점대상은 여타 문학상과는 근본 취지가 다르다. 2004년 1회를 시작으로 올해 15회째 열린 서점대상은 애초에 출판 업계의 부흥을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매장에서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것'이 설립 경위라고 한다. 이 상의 심사위원도 저명한 작가나 문학계 유명 인사가 아닌, 평범한 서점 직원들이며 현장에서 책을 판매하는 그들의 투표로 선정되는 상이다. 재미있고, 고객에게 추천해주고 싶고, 서점에서 팔고 싶은 책을 서점 직원들이 직접 읽어보고 투표하는 이 시스템은 어쩌면 다른 문학상에 비해 훨씬 더 합리적이며 실리적인 방식이다.


<거울 속 외딴 성>은 이런 서점대상에서 651점이라는 놀라운 점수를 획득했다. 2위 283.5점의 책과 무려 367.5점이나 차이가 났는데 1위 최고점일 뿐만 아니라 2위와의 점수 차까지 이 시상식 사상 최초의 기록이란다.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역대 최고 점수를 경신하기까지 했으며 무슨 내용이기에 2위와의 점수 차가 그리도 많이 난 건지, 당연하게도 호기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2016년 서점대상 1위 도서 미야시타 나츠의 <양과 강철의 숲>과 2017년 서점대상 1위 도서 온다 리쿠의 <꿀벌과 천둥>을 모두 소장하고 있고 이 두 소설의 작품성을 알고 있기에 1위 수상작의 가치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래서 더 궁금했던 거다. 


저자 츠지무라 미즈키의 책은 <거울 속 외딴 성>으로 처음 접했고, 솔직히 말하면 이런 작가가 있다는 것도 이번에야 알았다. 2004년 데뷔작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멈춘다>로 메피스토상을, <츠나구>로는 요시카와 에이지 신인문학상을, <열쇠 없는 꿈을 꾸다>로 나오키상까지 받았었다니. 왜 이제야 알았을까. 2017년 작품이자 2018년 일본 서점대상 수상작이며 이번 서평 도서이기도 한 <거울 속 외딴 성>이 그녀의 대표작으로 칭송받고 있으니 이제부터라도 차근차근 알아가면 될 일이다. 충분히 더 알고 싶어지는 작가니까. 



<거울 속 외딴 성>은 크게 총 3부로 나뉘어 있는데 이는 일본 중학교의 학기제가 3학기인 트라이메스터제라서다. 우리와는 학기제가 다르고 -우리나라는 2학기인 시메스터제를 시행 중이다일본 학기에 대한 언급이 자주 나오므로 미리 알고 읽으면 더 좋을 듯하다. 4월부터 8월까지가 1학기이자 제1부, 9월부터 12월까지가 2학기이자 제2부, 1월부터 3월까지가 3학기이자 제3부이며 1부에 포함되었어야 할 4월은 등장인물들이 각각의 사연으로 인해 학교를 다니지 않게 된 시기여서 한 달의 공백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중학교 1학년 신입생 여자아이, 안자이 고코로. 1부는 고코로 -'고코로'는 일본어로 '마음'을 의미하는 단어이며 주인공의 이름도 히라가나로 こころ다의 내면 심리에 대한 서술이 주를 이루며 고코로가 학교를 거부하게 된 이유, 친구로 여겼던 전학생 모에와의 엇갈림, 미오리 무리에게 받은 고통, 등교 거부아 대상 대안학교 격인 '스쿨' 소속 기타지마 선생님과의 만남, 늑대 가면을 쓴 소녀에게 선택받아 거울 속 성에 불려가게 된 상황, 자신과 같은 처지인 '학교에 안 가는' 아이들과의 만남이 전개된다. 


거울 속 외딴 성, 그곳에 간 고코로는 늑대님에게 열쇠를 찾으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곳의 규칙 -단 한 명 만이 '소원의 방' 열쇠를 찾아 소원을 이룰 수 있으며, 만약 누군가가 소원을 이루면 성은 즉시 폐쇄되고 모두의 기억은 사라진다과 주의사항 -기간은 내년 3월 30일까지이며 매일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만 성이 열리고 그 이후에는 늑대에게 잡아먹힌다을 전달받는다. 중3인 아키와 스바루, 중2인 후카와 마사무네, 중1이고 고코로와 동갑인 리온과 우레시노. 각각의 사연이 있는 이 여섯 아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고코로는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얻고 이 성에서의 추억과 친구 관계 또한 잃고 싶지 않게 된다. 다른 아이들도 고코로와 마찬가지여서, 서로 아웅다웅 싸우거나 눈치 보고 경쟁하며 '소원 열쇠 찾기'에만 열중할 줄 알았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이야기가 흘러간다. 평범한 일상처럼 건전하고 바람직하게.  

 

지루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책장이 빨리 넘어가지도 않는 1부였다. 다만, 고코로의 내면 심리를 충분히 이해했고 공감을 했고 안타까웠다. 츠지무라 미즈키는 청소년기 주인공의 심리 묘사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데 아무래도 학창시절 본인의 경험이 분명 녹아있을 거란 짐작이 간다. 이런 내면 묘사는 억지로 꾸며서 쓰면 읽는 사람에게 작위적으로 느껴질 소지가 충분한데 그런 거부감이 전혀 없었고 읽으면 읽는 그대로 와닿았다. 이것만으로도 저자의 필력을 체감하기에 충분했다. 


일곱 아이가 상황 파악을 시작한 2부와 모든 진실과 반전이 밝혀지는 3부는 자세하게 적으면 스포일러가 될 만한 요소가 가득하기에, 그런 부분을 최대한 쳐내 가면서 서평을 쓰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틈틈이 기록한 노트에는 '본격적으로 흥미진진해지는 전개는 275페이지부터'라고 적혀있다. 정말이지 이때부터는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몰입도가 높아진다. 지루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몹시 흥미로운 나머지 안 읽은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조차 아까울 정도였다. 아키가 다니는 중학교의 교복을 입고 성에 오고부터다.


나는 295페이지 즈음, '거울의 비밀'을 눈치챘다. 마사무네의 입을 빌려 주장을 펼친 저자의 맥거핀 장치 때문에 약간의 혼동은 있었지만,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373페이지 즈음, '기타지마 선생님'에 대한 소름 끼치는 추측을 해버렸다. 기록 노트를 다시 살펴보고 소름이 다 돋았다. 그 당시에는 엉뚱한 추리였지만 결국 그게 들어맞았다. 385페이지 즈음, '늑대님의 정체'를 눈치챘다. 스포일러 때문에 이렇게밖에 표현 못 하는 게 안타깝고 답답하지만, 아직 읽기 전 이 서평을 먼저 접한 사람들이 스포일러를 밟고 실망하게 하고 싶지는 않기에 최대한 다듬고 다듬어서 그들이 김새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내 기준, 반전이 반전 같지 않고 다 미리 다 유추해버린 바람에, 추리 서스펜스적 요소를 기대하고 볼 사람에게는 아쉬운 작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은 아이들의 성장 소설이다.

물론 <거울 속 외딴 성>은 표면적으로는 학교 부적응 중학생들의 성장 이야기지만, 더 넓게 보면 사회 속 군중 사이에서 방황하고 고민하는, 나약한 우리, 모든 이들에게 작가가 전하는 위로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어른이 되었다고, 몸이 다 자랐다고 해서 마음이 그와 같은 속도로 자라지는 않는다. 누구에게나 말 못 할 아픔이 있고 그 아픔은 남들이 전부 이해해줄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며, 나에게는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든 일이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 있다.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위로를 받고 싶은 거다.


괜찮다. 잘할 수 있다. 어디든 갈 수 있다. 게다가 어디를 간다한들 좋은 일만 기다리고 있을 리 없다. 싫은 사람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싸우는 것이 싫다면 싸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까 돌아가 보자고 생각했다. 

학교로.


<거울 속 외딴 성>은 그저 읽은 후 만족하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해주고 싶고 권하고 싶을 만큼 좋은 책이며, 서점대상의 취지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책이다. 읽으면 위안이 된다. 위로받고 싶을 때 이 책을 꼭 읽어보길 바라면서 선물해주고 싶은 책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청소년 권장 도서로 삼아도 좋을 듯하다.



번역서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초판 1쇄 곳곳에서 발견한 오자와 오역이 꽤 심각하다. 고코로를 '코로토'라고 잘못 친 오자는 애교 수준이다. 601 페이지 우레시노와 후카의 '일 년'은 명백한 오역이다. 동화 제목 《헨젤과 그레텔은 처음부터 끝까지 '헨델'과 그레텔이라고 나온다.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작곡가 헨델이 타임머신을 타고 동화 속으로 들어가서 그레텔과 함께 빵 부스러기를 뿌리고 다닌 걸까. 그러고 보니, 메시아를 틀어놓고 거울 속 외딴 성을 읽으면 딱일 것 같긴 하다. 책에 묘사된 성 내부 이미지와도 꽤나 잘 어울리고. 어쨌거나 초반까지는 오자겠지 하고 넘겼는데 막판까지 '헨델'과 그레텔이라고 나오니 '누군진 모르겠지만, 이 사람은 헨젤을 헨델로 잘못 알고 있구나.'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레텔의 친오빠 '헨젤'은 이 책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독일어 원어로 이고 일본어로는 ヘンゼル이니 어떻게 읽어도 '헨델'이 아니라, '헨젤'인데 말이다. 역주에도 오류가 있다. 패미컴은 닌텐도사에서 개발한 '비디오 게임기'의 약칭이다. 일본은 특히나 명칭 줄여 쓰기를 잘하기 때문에 패밀리 컴퓨터를 패미컴이라고 줄이지만, 이건 컴퓨터가 아니다. 역자가 이걸 컴퓨터라고 주석을 달아서 어리둥절했다.


그 외에도 중간중간 문맥적으로 매끄럽지 못한 문장이나 탈자, 띄어쓰기 오류가 종종 눈에 밟혔으나, 전반적으로는 책 읽기 불편할 정도의 거슬림은 아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래도 이 좋은 작품을 이렇게 밖에 편집을 못한 건가 하는 아쉬움은 분명 남는다. 출판 전에 많이 급했던 걸까. 작년 5월경 일본에서 출판된 소설이고 서점대상 결과 발표도 올해 4월경인데 뭐가 그리 급했기에 수많은 오자와 탈자와 오역이 가득한 것인지. 종이책 초판 1쇄는 나에게 늘 소장할 가치가 있는 판본이지만, 이런 문제가 있다면 어서 모든 오류가 수정된 다음 쇄가 나오길 바랄 수밖에. 나는 서평을 위해 찬찬히 훑고 정독했고, 단어 토씨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도 몇 시간씩 집중해 3일 동안 완독했는데 단 며칠간의 교정·교열이 어려운 일이었는지 출판사에 물어보고 싶을 뿐이다. 출판 이후 재수정을 거치는 게 더 골치 아프고 번거로우며 비용도 많이 발생하지 않을까? 그리고 아무리 서평용으로 증정하는 도서라지만, 파본급 내지의 찢김도 아쉬운 부분이다. 만약 활자 부분까지 찢겨져 있었다면 당장에 교환 요청을 했을 거다. 종이 질은 우수하나 책장에 얼룩 자국 같은 것도 눈에 띄었고 인쇄용 표시인 듯한 숫자도 실 제본 부위에서 발견되었다. 구매 전에 한 장씩 직접 다 펼쳐서 살펴볼 수 없다면 이런 책이 얻어걸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 철저한 책 상태 검수가 필요해 보인다. 

이것이 별점 하나를 뺀 이유다.



어쨌거나 교정·교열이나 파본 문제가 아쉽다고 할지라도, 책 외형만큼은 칭찬을 해주고 싶다. 양장본 자체가 아주 견고해서 마음에 쏙 들었다. <거울 속 외딴 성> 종이책을 받은 첫 소감은 '튼튼하다'였다. 비닐봉투에 아무런 완충재도 없이 책 한 권만 달랑 들어있었는데도 모서리에 조금의 찌그러짐조차 없어서 의외였고 신기했다. 완충 처리된 안전 봉투에 싸여 오는 책들조차 모서리가 늘 찌그러져서 교환을 받곤 했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아 그만큼 양장 재질이 단단하다는 걸 몸소 증명해주었다. 양장본 제본과 만듦새는 근래 접한 양장본 중에 제일 만족스러웠다. 깨진 거울 조각 느낌이 나는 책 제목 문자도 독특하고 홀로그램 박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책과 잘 어울리는 디자인의 소장본이라고 인식하게 되니 책에 더더욱 애착이 생겼다. 


작품 자체도 더할 나위 없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앞서 지적한 번역서의 하자만 아니라면 아무런 아쉬움도 없이, 충만한 만족감만 드는 책이리라. 모든 오류가 해결이 되면 주변에 꼭 추천하거나 선물을 해주고 싶다. 이 책이 왜, 현장에서 직접 책을 판매하는 일본 서점 직원들에게 역대 최고점까지 받고 2위와 엄청난 점수 차로 서점대상 1위에 선정이 되었는지 이제는 안다. 처음에 들었던 궁금증이 싹 해소될 만큼, <거울 속 외딴 성>을 다 읽고 나니 무조건 납득이 갔다.


착한 내용과 기분 좋은 마무리로 정서적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책일수록,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서평을 쓰기가 쉽지 않다. 나에게는 이 책이 그러했다. 무엇으로 서두를 놓고 내용을 채워야 할지 막막해 완독 후 며칠간 서평 쓰기를 주저했었다. 지금도 의식의 흐름대로 타이핑을 하고는 있지만, 평소의 서평과는 다른 전개가 된 것 같기도 하다. 마냥 좋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여운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은 탓인지. 명확하고 적합하게 정의 내리긴 어렵지만, 하나는 확신한다.  

<거울 속 외딴 성>을 꼭 읽어야 할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고도 많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수미상관법을 활용하여 여운을 극대화한 플롯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런 꿈을 꿀 때가 있다.

전학생이 다가온다.

그 아이는 뭐든 못하는 게 없는 멋진 아이.

반에서 가장 명랑하고 인정 많고 운동도 잘하고 게다가 공부도 잘한다. 다들 그 아이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아이는 많은 아이들 중에 내가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얼굴에 해님같이 눈부시고 따사로운 웃음을 두둥실 떠올리며 나에게 다가와 "고코로, 오랜만이야!" 하고 인사한다. 주위에 있던 아이들이 모두 숨을 삼키는 가운데 "이렇게 다시 만나네. 그치?" 하고 나를 마주 보고서 눈을 깜빡인다. 

모두가 모르는 곳에서 우리는 벌써 친구.

나는 운동도 잘 못하고, 공부도 잘 못하고, 특별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도,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장점이 하나도 없는데도, 어쩌다가 다른 아이들보다 먼저 그 아이와 알고 지냈다는 인연 하나만으로 반에서 그 아이의 가장 친한 친구로 선택받는다. 

그래서 화장실에 갈 때도, 교실에서 교실로 이동할 때도, 쉬는 시간에도,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니다. 

미오리네 그룹이 그 아이와 아무리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 해도 그 아이는 "나는 고코로랑 있을 거야.'라고 나를 선택해준다. 

그런 기적이 일어나면 좋겠다고 고코로는 생각한다. 


그런 기적이 일어날 리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담담하게 들려서 더 서글프고 마음 아팠던 고코로의 바람.  

고코로가 꾼 꿈, 바라던 기적은. 결국, 일어났다.


예를 들어…….

예를 들어 꿈을 꿀 때가 있다.

전학생이 다가온다.

그 아이는 많은 반 아이들 중에 내가 있는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그 얼굴에 해님같이 눈부시고 다정한 웃음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안녕."

그가 고코로를 향해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고코로에게 기적을 선사한 '그 아이'가 누구인지는 책을 통해 직접 확인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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