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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밖을 서성이다 - 길에 관한 인문학 에세이
김병용 지음 / 모악 / 2021년 10월
평점 :
김병용 작가의 『풍경 밖을 서성이다』를 어제와 오늘 읽었다. 김병용 작가는 바위를 '운근(雲根, 구름의 뿌리)'이라고 부르는 동네, 진안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바위를 부르는 숱한 이름을 들어왔지만 구름에 깊은 시선을 두고, 그 구름이 바위가 많은 산을 지날 때, 그 모습을 마음 깊이 포착하여 ‘구름의 뿌리’라는 이름을 지어준 사람들이라니! 거대한 바위산인 마이산이 있는 곳이 진안이라지만, 그곳을 지난 구름은 다른 고장으로도 흘러갔는데, ‘구름의 뿌리’라니! 그 놀라운 상상력의 말을 듣는 순간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간은 분명 흘러간다. 하지만 흘러만 가는 것이 아니라 공간에, 인간이 만든 구조물과 길에 자꾸 쌓인다. 주상절리는 흙과 바위가 쌓여 비틀린 것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쌓여 비틀린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공간과 시간을 다른 움직임을 가진 것으로 분리하여 생각한다. 공간은 움직이지 않고, 시간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반만 맞고 반은 틀렸다.
공간이 움직이고, 시간이 움직이지 않기도 한다. 당신의 첫 구애가 차디차게 거부당했을 때의 그 시간이 여전히 당신의 기억 속에 똬리 틀고 있는 것처럼 어떤 시간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변해버린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그렇게 서로 움직임을 주고받는 공간과 시간의 일들에 대하여 『풍경 밖을 서성이다』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은 지형지물과 때로는 대화하고 때로는 제압하는 방식으로 길을 놓았다. 이처럼, 길이란 움직이는 인간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늘 움직이는 인간들과 그 인간의 욕구나 필요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길. (P. 73)
길이 우리를 위로해 주기만을 기다릴 것인가, 길도 위로가 필요할 때가 있다. 통행로의 기능을 다 한 옛 도로들은 이제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제 갈 길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지, 사람들에 의해 혹사당한 상처로 인해 복귀에 어려움은 없는 것인지, 둘러보고 살펴보는 것이 그동안 이 길을 이용한 사람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이고 애정이다. (P. 128)
길을 걷는 일은 책을 읽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가 걷는 길은 우리 앞에 새롭게 펼쳐진 책장이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어떤 뜻이 새겨져 있다. 길에 나서기 전에 우리가 알았던 것이 사전적 정보라면, 길 위에서 만나는 것은 그 맥락이다. (P. 150)
길을 나서고 낯선 곳에서 난생 처음 만나는 사건을 겪는 일이란 게 결국은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던져 남들을 위해 길을 닦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P. 202)
김병용 소설가가 『풍경 밖을 서성이다』에서 내내 이야기하고자 하는 골격들이 인용한 문장들에 들어있지 않을까 싶다. 추측이라고 할 수도 있다. 불운하게도, 김병용 작가가 소개한 공간들의 일부를 겨우 알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전주 살이가 겨우 몇 년에 불과하다는 핑계를 대더라도 지나치다 싶을 만큼 그가 소개한 공간과 길을 모른다. 전주와 전북의 공간과 길을 아주 적게 보고 적게 걸은 처지에서 가늠하는 생각인지라 헛짚은 것일 수도 있지만, 분명 인용한 문장들에 길의 의미를 무게 있게 실어놓은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풍경 밖을 서성이다』는 전주와 전북이라는 공간과 길에서 이루어진 시간의 적층(積層)을 세심하게 읽어낸 책이라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공간과 길을 세밀하게 읽다보면 지리지(地理志)에 가까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외길로 들어가지 않도록 이끌고 간 것은 김병용 작가가 소설가로서도 보여준 바 있는 뛰어난 문장과 웅숭깊은 심미안이고, 깊이 있는 사유의 시선이 『풍경 밖을 서성이다』를 삶이 깃든 공간에서 우려낸 길의 인문학 에세이가 되게 만들었다.
길을 떠나는 일이 절박한 생계의 영역에서, 놀이의 영역으로 옮아간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걸음은 가볍다. 시대가 달라졌으니 가벼운 걸음이 흠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렇게 걸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걸어야 한다. 하지만 머릿속을 조금은 비워두자. 길에 오랫동안 쌓인, 고단한 삶들이 쏟아놓은 절박의 무게를 가늠해보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