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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날씨들의 기억
천세진 지음 / 백조 / 2024년 6월
평점 :
산문집 『작은 날씨들의 기억』에 등장하는 날씨는 물리적 세계의 날씨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세계의 날씨를 의미한다. 물리 세계의 날씨를 ‘대기후’와 ‘미기후’로 나누는 것처럼, 인간의 삶에도 물리 세계의 날씨처럼 넓은 영역에 걸쳐 영향을 미치는 큰 날씨와 작은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작은 날씨가 있다.
저자는 한 개인의 삶에 영향을 가장 크게 미치는 것은 거대 서사나 역사적이고 스펙터클한 사건들로 구성되는‘큰 날씨’가 아니라, 생명을 지속하게 만들지만 정작 주목받지는 못하는 소소한 일상으로 이루어지는 ‘작은 날씨’라며, 일상적으로 찾아드는 작은 일들에 대한 미시적이고 미학적인 해석이야말로 생을 진정 풍부하게 만든다고 말하고 있다.
『작은 날씨들의 기억』은 <풍경 이야기>, <아카이브 이야기>, <시간 이야기>, <거울 이야기>의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공간, 시간, 자신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애착하는 사물들, 자아를 비치는 다양한 유무형의 사물들과 나누는 내밀한 대화를 담고 있다.
저자가 공간과 시간에서 골라낸 경험들과 애착을 가진 자전거, 모래, 계단 같은 사물들, 취향에 따라 만나는 책, 영화, 미술, 음악 등의 장르에서 만난 작품들의 세계를 일상화한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인문학적 사유를 담은 내밀함 또한 빼놓지 않고 있다.
일상을 담으면서도 인문학에서 멀어지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삶에 적용해야 할 거창한 이론을 주장하거나 자기계발서들이 주문하는 상식적인 팁을 나열하지도 대입하지도 않는다. 맑게 증류한 생각을 담아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소재들을 가져왔으면서도 상식적으로 접근하지도 않는다.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가보지 않은 여행가’라고 불렸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도, 먼 이국의 타클라마칸 사막에 대한 동경을 고백한다.
“모든 길을 다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없어. 하나의 길을 가고도 천 개의 길을 상상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지. 얼마나 게으른지 알겠지? 말이 안 된다고 하겠지만 ‘가보지 않은 여행가’라고 불렸으면 좋겠어. ”- <마음이라는 미디어> 중에서
“어째서 타클라마칸에서는 오아시스와 파타 모르가나가 사라지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일까.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는 의미를 지닌 끝없는 붉은 사막인 타클라마칸에는 어째서 눈을 현혹하는 유령이 아니고 귀를 현혹하는 유령이 사는 것일까. 사막 주변에 사는 이들의 밝은 눈을 속일 수 없었던 사막의 유령이 귀를 현혹하는 법을 배운 때문일지 모른다. 목소리로 속이던 버릇을 길을 잃은 이방인들에게 썼을 것이다.” - <3. 모래알의 노래> 중에서
저자는 『작은 날씨들의 기억』 곳곳에서 이 세계가 너무 큰 것에 집착하고 그 결과로 만들어진 큰 슬픔들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말한다. 큰 것이 화려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작은 슬픔과 다른 작은 것들을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사회가 진정 평화로운 사회라고 말한다.
“평범한 세상에서는 고통들이 다들 고만고만하다. 고통이 명백한 세상은 특정 비극이 극대화된 세상이다. 전쟁, 가혹한 독재,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혹독한 자연재해가 닥쳤을 때 비극은 선명하게 나타나고 고통은 명백해진다.” (슬픔을 고르는 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