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죄 죽이기 - 삶 속에서 죄를 죽이기 위한 9가지 방법, 개정판
존 오웬 지음, 김창대 옮김 / 브니엘출판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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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죄 죽이기

죄를 이겨나가는 즐거움 

 

 

청교도 신학의 최고봉 이라 하는 존오웬이라지만 그의 책은 처음이다. 이 책이 존 오웬의 대표작이라니 가히 궁금함이 앞섰다. 저자는 거듭해서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 거룩한 삶을 열망하라'고 외친다.

태초의 인간이 저지른 죄로 인해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라는 다소 불편한 출발은 우리가 그 죄를 여전히 물려받으면서 죄의 인간으로 태어나고 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 현실을 들여다보면 수긍이 갈 것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할 때 돌을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이 책은 의미있게 다가온다. 우리가 죄를 죽이려 죄를 자각하지 않거나 잊음으로 도리어 죄에 더욱 얽매이게 됨을 우리는 잘 안다. 어떤 죄는 무디어졌고, 어떤 죄는 심하게 가슴을 누르고, 또 어떤 죄는 기도하는 중 갑자기 생각남으로 바로 회개로 이어지는 것도 있다.

죄의 대한 그리스도인이나 현대인의 생각은 언제나 강박관념으로 다가온다. 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으며 죄가 늘 우리옆에 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동안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은 알 것이다. 실제로 죄를 짓지 않고 살기가 어디 그리 쉬웠던가? 죄의 움직임이라는 것이 외관상으로는 고요해보이지만 그것은 조류의 움직임이 활발한 매우 깊은 바닷물과 같다는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우리 인생은 어찌보면  죄가 극단으로 내 딛는 것을 동조하거나 방조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제목이 좀 불편하다. '내 안에 죄 죽이기' 과연 죽일 수 있나? 내 의지로 내 안의 죄가 다 사라지게 할 수는 있는 것인가? 처음에 이 책을 접할 때 솔직히 약간 이단은 아닐까하는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죄를 죽일 수 있다는 이론이 자못 궁금해졌다. 그러나 이 책은 이론을 떠나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하면 좋을까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은혜 안에서 죄의 지배를 벗어나라고 주장한다. 또한 마음의 죄를 느끼고 늘 인식하며 염두에 두라고 가르친다. 분명히 우리 안에는 죄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므로 우리 안에 있는 죄는 은혜를 통하여 이겨 내야만 진정 죄로부터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죄에서 해방되고자하는 열망이 없다면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다. 우리는 육체의 병이 생기면 괴로운 나머지 바쁘게 치료한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병인 죄도 초기에 발견하여 신속히 치료해야만 한다. 한번 악을 행하기는 어렵지만 그게 쌓이다 보면 악행이 점점 커지고 나중엔 그 행동이 악인줄도 모르고 행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원에  땅을 일구어 귀중한 화초 씨인 은혜를 받아 심었지만 주위에 잡초같은 죄를 방치해선 은혜가 자랄 수 없다. 우선 죄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죄와 싸워 이기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나는 이 책을 통해 죄 죽이기 보다는 은혜를 어떻게 자라게 할 수 있는지를 배울 수 있어서 더 좋다. 또한 중요한 것은 죄 앞에서 겸손해야 함을 배운다. 가장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믿었던 모세와 바울도 그들의 지식이 온전함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고 인정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그들에 미치지 못하는 우리의 지식이란 나약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죄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찔렀다는 걸 항상 기억하라. 우리는 죄의 결과에 대해서만 동요하지만 우리 안에는 무수히 많은 여러 종류의 죄들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늘 죄에 대한 경계를 가져야하며 스스로 죄 앞에 겸손해야 한다. 

나는 이 책을 다 읽고도 죄를 죽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다만 다스리려는 노력을 죽을때까지 경주하며 사는 법을 배웠다. 9장에서 이 책의 결론이 나오는데 그것은 바로 죄를 다스리기 위해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일 들이다. 죄를 통제하기 위해선 그리스도의 죽음의 토대위에서 믿음을 가지고 행동하라는 것이다. 내안의 죄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결론을 짓는다.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이 책의 한문장 한문장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책을 읽는 즐거움과 함께 죄를 이겨나가는 즐거움도 같이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죄를 다스리고 싶은가? 거룩한 삶을 살고 싶은가? 그럼 은혜안에 거하면 된다.

 

존 오웬 (John Owen, 1616-1683) 존 오웬은 영국 청교도 신학자와 설교자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인물로 ‘청교도의 황태자’ 또는 ‘영국의 칼빈’이라고 불리며, 어거스틴, 루터,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교회사 최고의 영적 거인 중 한 사람이다. 존 오웬은 열두 살에 옥스퍼드의 퀸즈대학에 입학해 1632년에 학사, 1635년에 석사를 마쳤으며, 후에 옥스퍼드 부총장까지 역임했다. 특히 오웬은 십대 학창시절 동안 매일 18∼20시간씩 엄청나게 공부에 매진하면서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와 같은 고전어의 통달과 고전문학과 역사와 철학과 랍비문학에 대한 해박한 인문학적 지식을 쌓았으며,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고대 교부들,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중세 스콜라 신학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이러한 바탕 위에 개혁신학을 구축하여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오웬은 학문과 경건을 결합한 대표적인 인물로서 히브리서에 관한 교회사 최고의 책이라 할 수 있는 4000페이지 7권으로 된 히브리서 강해를 비롯하여 주옥같은 50권 이상의 단행본과 수많은 설교들은 1850∼55년 굴드에 의해 24권의 전집으로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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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에서 빈둥거리다 길을 찾다 - 명문가 고택 편 이용재의 궁극의 문화기행 시리즈 3
이용재.이화영 지음 / 도미노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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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문은 있지만 현실에 안 나가는 선비가 한량이다. 요즘은 현실감각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을 한량이라고 하지만 옛 한량들은 현실감각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세속의 때를 묻히기 싫었을 뿐. 그들이 그렇게 살면서 찾고자 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찾다 보면 거기에 길이 있고 답이 있다.
- 저자의 인터뷰 서문 중에서

저자 이용재는 건축잡지 쪽에선 선배이기도 하다. 단 한번도 얼굴 마주쳐 본적이 없는;;;. 먹고 살기 힘든 건축잡지 사정은 그 만큼이나 나도 뼈저리게 느꼈던 바다.  나도 건축잡지 편집장 직을 때려 치우고 돈이 좀 되는 건축자재에서 10년 세월을 보냈다. 그 10년 세월을 이용재 선배는 길에서 보냈다. 택시운전수를 하면서 문화기행을 다니고 또 글을 쓰고;;; 그러다가 2007년 <딸과 함께 떠나는 건축여행>이 대박이 나버렸다. 택시기사 5년만에 이뤄낸 성과! 이제 그는 진짜 한량이 되었다. 본인은 한사코 빈둥거렸다지만 이번 낸 <고택에서 빈둥거리다 길을 찾다>에서 보듯 21개의 전국에 산재한 명문 고택들을 찾아다니고 또 책을 만들어 낸 것을 보면 말만 빈둥거린 것이다. 그는 치열하게 자신의 삶과 대면했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길에서, 고택에서 찾아내었다. 빈둥거림을 미학의 경지에까지 끌어 올린 선배에게 박수를 보낸다. 게다가 그의 딸 이화영까지 이번 책에 공동저자로 나서서 이 책의 읽은 즐거움을 배가 시켜 놓았다.

60년생과 91년생, 한 세대라는 간극이 공동집필로 메꿔진듯하다. 도대체 이 맛깔스런 책은 누가 더 기여를 한거유? 암튼 이제 영국으로 디자인 공부하러 간다는 딸에게 이 서평으로 응원 메시지 대신 전한다. 그리고 이제 제주에 낙향해서 선배말처럼 한량으로 살아보려는 나에게 이 책이 너무나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도 아울러 전한다.

21세기 디지털시대에 웬 고택 이야기? 게다가 고택으로 우려먹은 책들도 사실 서점가에 넘쳐나는데. 하지만 이용재는 고루하고 따분하다는 고택에 대한 선입견을 부셔버린다. 그만의 해학적인 글쓰기를 통해서다. 페이지마다 한 두줄로 쓰여진  그의 해학적인 코멘트를 읽어보라. 게다가 촌철살인 같은 그 짧은 단문들이라니;; 생각을 표현하는데 단어 몇개 뿐인 문장의 나열로도 충분한 의미를 전달하는 그의 글쓰기를 보고 새삼 내 잡문이 부끄러워진다. 책에는 일단 사진이 많다. 287페이지나 되니 작은 분량도 아니지만 마치 잡지를 보듯 편한 레이아웃과 글읽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아무래도 고택투어 전문 여행사도 생겨날 판이다. 

그가 고택을 바라보는 시각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그에겐 오래된 미래를 만나는 공간이다. 그가 찾아다닌 고택들은 괜히 명문가가 아니다. 그냥 오래됐다고 고택이 아니다. 저자는 하얀 공간, 무념의 비워진 공간을 꿋꿋한 ‘선비정신’으로 오랜 세월 채워 온 명문가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 넣었다. 그래서 고택에 남겨진 선인들의 삶의 자취를 과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미래로 치환시켜 놓았다. 그는 왜 고택에서 빈둥거려 보라고 했을까? 고택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길은, 물론 깨달음은 애써 찾는다고 찾아지는 게 아니다. 선비정신이 깃든 곳에서 마음을 비우고 어린아이처럼 빈둥거리는 것! 그 자체가 새로운 인생체험이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나를 돌아보는 시간, 잊고 살던 것들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 되지 않겠는가.

그가 만일 고택의 건축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을 냈더라면 그저그런 책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대여섯권의 책을 집필하면서 그는 많이 약아졌다. 이제 그는 장안의 지가를 올릴만한 이야기꾼이 되어버렸다. 고택에서 찾아낸 권력과 인생의 허망함, 꼿꼿한 선비의 절개, 학문과 예술, 나눔과 베품 등을 그만의 인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버무려 놓았다. 많은 건축가들이 건축을 인문학의 반열에 올려 보려고 무진 애를 썼으나 감히 말하건데 이용재 선배가 이제서야 확실하게 그 길을 텃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그는 설계하는 건축가는 아니다. 하지만 대중들이 건축이란 법규와 재테크의 수단이란 굴레 속에서 헤맬때 그는 건축을 이해하는 방법론을 너무나 쉽게 풀어놓았다. 그것이 공학이 아닌 인문학적인 건축 바라보기의 시작이다. 이제 고택에서 시작했으니 그가 써대야 할 인문학적 건축 바라보기는 그 소재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더불어 사람들의 건축에 대한 안목, 그리고 건축가를 이해하는 안목이 높아져서 우리네 건축문화의 질이 한결 높아질 걸 생각하니 흐뭇하기까지 하다.    

이 책 서문에 넣은 소설가 이경자의 글에서 한 가지만 고치고 싶다. "건축가 김수근이 건축은 냉동음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라는 첫 문장이다. 원래는 바흐가 말한 '건축은 동결된 음악'이란 표현인데 김수근 선생이 그리 표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냉동음악'과 '동결된 음악'은 표현의 미세한 차이가 아닌 것 같다. 건축판의 식자들은 결코 냉동음악이란 표현을 쓰지 않는다. 다음 판에서는 수정했으면 좋겠다. 각설하고 저자는 고택이라는 동결된 음악을 잘 해동해서 맛깔스런 요리로 밥상 위에 올려 놓았다. 독자들은 그저 숟가락만 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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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람다 2011-10-04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나를 끌고 가는 너는 누구냐 - 개정판 마인드북 시리즈 1
박옥수 지음 / 온마인드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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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내 서점가에는 <나를 끌고 가는 너는 누구냐>가 장안의 지가를 올리고 있다. 일상적인 성공 무용담이나 처세술이 아닌, 출판 업계 최초로 ‘마음’에 대한 명쾌한 분석과 해석을 제공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저자는 지난 2009년에 중국 공청단(공산주의청년단)의 요청으로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을 들은 중국의 한 국영서점에서 책을 출간하고 싶다며 원고를 요청했고, 같은 내용을 한국에서 먼저 출간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목회자이기도 한 저자는 젊은 청소년들을 많이 만나면서 아직 인생 경험이 적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어떤 생각에 그냥 끌려가 인생을 망치는 경우를 많이 봤다고 했다. 그래서 젊은 청소년들이 자신의 생각에서 벗어나 좀 더 밝고 긍정적인 삶을 살기 바라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고 한다.
 
"나는 원래 작가가 아닌 목사다. 성경을 깊이 대하다 보니 성경에 ‘마음의 세계’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나타나 있는 것을 발견했고, 성경말씀을 통해 나 자신도 참 많이 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어도 깊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몰랐을 뿐이다. 사람의 마음에 대해 정확히 짚어주는 데 성경만큼 좋은 이야기가 없어서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끄는 것 같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잘못된 생각에 끌리는 부분도 있다. 갑자기 자살하고 싶다거나 도박하고 싶다는 등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끌리는 경우다. 과연 이런 생각을 억제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려 하는 것은 누구며, 반대로 충동적으로 죄를 짓는 마음은 어디서 왔는지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싶다."(저자의 경향신문 인터뷰 내용에서 발췌) 

이 책은 저자도 밝혔듯이 큰 틀거리는 성경의 돌아온 탕자이야기(누가복음 15장)를 모티브로 삼고 있다. 또한 자신의 사역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씨줄로 그리고 젊은이들의 해외봉사활동 사진과 그 소감을 담은 짧은 단문들을 날줄로 엮은 책이다. 그러면서도 종교적인 색채는 거의 드러나지 않게 해서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고 할지라도 무난하게 읽히게끔 되어 있다.

이 책은 총 10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번째, '마음' 강물처럼 마음에도 흐르는 길이 있다고 한다. 자신의 마음의 흐름을 관찰해 보면 문제의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두번째, '욕구' 저자는 욕구는 꺽고 마음은 낮추라고 권면한다. 세번째, '자제력' 저자는 절제하는 능력이야말로 젊음을 맘껏 발산케 해주는 안전장치라고 단언한다. 이 장은 상당히 공감을 일으킨다. 네번째, '지혜' 참된 지혜는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다섯번째, '고립' 사람들이 불행을 느끼는 것은 서로의 마음이 흐르지 않고 갇혀 있을 때라는 것이다. 여섯째, '교류' 문제는 혼자 풀려고 해서 풀리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다. 일곱번째, '변화'상대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그를 사랑하라! 여덟번째, '발견'다른 마음과 연결되면 새 삶이 시작된다. 발견이 이루어지려면 물론 관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 시작이 타인을 이해하는데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아홉번째, '행복' 사람의 맛을 느끼며 살아야 행복하다. 사람은 결국 사회적 동물이 아닌가? 마지막 열번째, '대화' 마음을 열라는 것이다. 물이 원수라고 해서 마시지 않고 살 수 없듯이 원수와도 대화로 문제를 풀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주제들을 현학적이지 않은 일상의 소박한 언어로 자신의 삶 속에서 건져낸 감동적인 이야기들로 빼곡하게 채워놓고 있다. 게다가 많은 젊은이들이 마음의 세계를 배운적도 없고 또 가르쳐주는 곳도 딱히 없는 현실에서 마인드 내비게이션이라는 부재를 달고 있는 이 책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처럼 보인다. 이 책을 통해 젊은이들이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운다면 그들의 인생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아니 딱히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이 책의 행간을 따라 읽다보면 분명 앞서 예시한 10가지 중 어떤 점이 자신에게 부족한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독자들이 지금보다 더 행복해 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잠기게 될 것이다. 게다가 보석처럼 페이지 곳곳마다 박혀 있는 해외봉사현장에서 찍은 젊은이들의 사진과 봉사소감은 읽는 내내 진한 감동을 전해 준다. 분명 그 사진과 글만으로도 이 책은 장안의 지가를 올릴만한 힘이 있다.

 
덧붙이는 말

그러나, 정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못내 걸리는 것이 있다. 저자가 이 책 제목에서 던진 물음 '나를 끌고가는 것'의 정체에 대한 결론이자 이 책의 내용이 담고 있는 메시지다. 솔직히 말하면 이 부분이 제일 마음에 걸린다. 북 디자인을 보면 '나를 끌고가는' 부분보다 '너는 누구냐'가 큰 서체로 되어 있다. 즉 그 정체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는 장치이다. 실제로도 이 책 제목에 끌렸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정체에 대한 결론은 좀 그렇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안다…. 그런데 정작 자기 마음이 어떻게 생겼는지, 또 자기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는 모른다. 마음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기에 마음이 가장중요한데도, 마음의 구조를 모르니 다룰 줄을 모른다." 

 
결국 그것은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이며 마음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라는 결론은 정말로 심각하다. 책의 어느 한 부분을 문제삼는 것은 아니다. 전체적인 결론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저자의 신분이 목회자'가 아니라면 그다지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 '인생살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문을 바꿔보자. "너를 끌고 가는 나는 누구냐?" 그 '나'는 결국 '마음'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게 '마음'이라면 저자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나 불교가, 아니 여타 종교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좁디좁은 내 마음, 너의 마음들이 절제하고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고 또 수행한다고 하여도 인생의 궁극적인 의문의 해답은 찾을 수 없다. 그저 사는 동안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뿐이다. 저자는 10개의 장에 추가로 나머지 한 장을 더 채워 넣어야할 것 같다. 나를 끌고 가는 그 '마음'을 움직이는 존재. 너를 끌고 가는 내가 누구냐에 대한 고백이다. 화룡점정이어야 할 그것이 이 책에는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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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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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와 데일리서프의 열렬한 독자인 평자가 제주에 내려와 6개월을 소요하며 한 것이라곤 그저 걷기였다. 요즘 제주올레가 유행이지 않은가;;; 신문도 TV도 보진 않지만 그래도 블로그질은 한다. 올레 걸으며 사진찍은 걸 올리고 소통놀이를 하는 것이다. 최근엔 서평놀이에도 재미를 붙였다. <강남좌파>를 선택한 건 반년가까이 정치에 대한 궁금증을 덮고 살아선지 정치인에 대한 인물평이 궁금해지더라는 것이다. 인물평론하면 강준만 아닌가. 저자는 <강남좌파>를 통해 평소 그다운 어법으로 그저 손쉽게 책을 한 권 또 만들어냈다. 어차피 좀 있으면 대선게임이 시작될 것이고;;; 
 
신간 <강남좌파>의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건 정치인들이다. 오세훈, 박근혜, 손학규, 문재인, 유시민, 노무현, 조국의 얼굴이 들어 있다. 이 정치인들을 한데 묶어주는 이념적 코드는 과연 있기나 한 걸까? 다소 막무가내 같지만 저자는 표지에 등장한 정치인 들 뿐만 아니라 '모든 정치인은 강남좌파'라고 규정지어 버린다. 강준만의 한국정치를 들여다보는 프리즘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왜 단 한 색깔일까;;; 물론 저자는 강남좌파를 다시 소분류해 놓고 있긴 하다. 강남좌파의 성격에 따라 구분하면 경제적, 문화적, 연고적 강남좌파란 조어가 나오고 주체의 위상을 기준으로 나누면 공적, 중간적, 사적(일반시민) 강남좌파 구분이 가능하다. 그리고 실천의 의미로 나누면  이타적, 합리적, 기회주의적 강남좌파로 구분된다고 한다. 이게 무슨 말 장난인가;; 이런 식의 분류라면 대한민국 국민절반 이상이 다 강남좌파다. 평자도 한 때는 강남에서 직장 다녔고 강남에서 살면서 스스로를 강남좌파 운운하고 다닌 적은 있다. 이렇게 뭉뚱그려서 모두를 한 통속으로 만들어야만 하는 또 다른 의도가 있는 지는 잘 모르겠다. 게다가 '강남좌파'라는 프레임을 '엘리트주의' 문제로 결론짓는다.  '강남좌파의 원조는 노무현'이라는 글을 필두로 시작해 정통 엘리트가 아닌 '천민엘리트'들이 득세하는 꼴을 저자는 못마땅해 한다. 세상을 바꿀 의지는 전혀 없으면서도 바꿔야 한다고 외쳐대는 것이 곧 좌파적 비젼이고 그것이 좌파적 한계라고 규정 짓는 저자도 스스로를 강남좌파라고 인정할까? 

정치인들을 증오하게 만드는 건 현실감감이 결여된 정치인 스스로 자초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잘못된 언론 프레임에 의해서일 경우가 더 많다. 강준만에 의하면 그 현실감각이란 결국 소통과 화합능력이라는 거다. 이 능력이 출중하면 언론 프레임에 의한 부당한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저자는 맺는말에서 특정 이념과 노선 그리고 당파성을 앞세우는 정치인들에 의해 언로가 지배당하는 현실에서 존경받는 정치인이 나올 가능성은 극히 작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는 말자고 귀결 짓는다.

고래로 한국사회는 사건 중심이 아니라 인물중심의 문화적 관념론에 갇혀 있다는 저자의 주장엔 동의한다. 그러나 서서히 변하고 있다. 노무현보다 더 훌륭하고 이명박보다 더 나은(?) 지도자가 나타나길 기대하는 건 넌센스라는 걸 사람들이 알아채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작금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과거의 유산을 승계하라느니 극복하라느니 '넌 이게 문제고, 넌 저게 문제야'라고  백날 떠들어 봐야 쇠 귀에 경 읽기다. 그래서 강준만은 외롭다. 그는 경 읽는 팔자이기 때문이다. 그보고 경 읽기를 그만두라는 비아냥은 아니다. 그저 그가 외로운 자리를 택했다는 의미다. 

땅덩어리가 작은 나라여서일까? 많지도 않은 인물에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제로섬게임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도 외로움을 느끼기는 마찬가지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되었을지 모르나 아직도 우리는 민주적 사고 시스템이 부재한 사회에 살고 있다. 이걸 구축하는게 어느 초인이, 아니 어느 미륵이 나타나서 하루아침에 뚝딱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도대체 그 빌어먹을 미륵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새벽이 오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다. 미륵이 오건 말건 아침은 만들어 먹어야 하고 세상은 굴러가야 하기에 역사의 새벽잠을 깨워야 한다. 독자들을 그 인식에 도달하게 한다면 그래도 이 책은 세상에 나온 보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저자의 의도이건 아니건간에;;; 그리고 미륵이 미륵을 낳는다는 '엘리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 이야기나 어서 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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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향한 이정표 - 이슬람 원리주의 혁명의 실천적 지침서
사이드 쿠틉 지음, 서정민 옮김 / 평사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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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0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20년 뒤인 2001년 9월 11일, 두 대의 비행기가 맨해튼 상공을 가로질러 패권국가 미국의 아이콘이었던 무역센터 쌍둥이 타워에 돌진했다.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두 사건의 공동점은 과격 이슬람단체의 소행이라는 것이고 그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이가 사이드 쿠틉이라는 것이다. 그는 흔히 '이슬람 원리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이 말은 그의 삶과 사상이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 전반에 얼마나 심대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알 카에다를 비롯한 이슬람 과격단체의 구성원들이 필독하는 혁명의 교과서이자 알 자와히리와 오사마 빈 라덴이 스승으로 여기는 사이드 쿠틉 사상의 정수를 담고 있는 이 책 <진리를 향한 이정표>는 단순히 무장 세력을 선동하기 위한 책자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화의 길목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이슬람권의 내부 갈등과 문제점들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지 않고 현대 이슬람 사회와 이슬람 정치운동을 논한다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책은 이미 전 세계 14억 무슬림들에게는 고전 중의 고전이자 흔들림 없는 삶의 이정표로 자리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자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인으로 이웃 종교인 이슬람의 기본 원리에 대한 궁금증도 해결할 필요도 있어서 선택한 책이다. 저자가 지적했듯이 이슬람은 국가나 민족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결국 국내로 그 세력을 확장할 것이고 이 책에 대한 의미는 앞으로 더 도전적으로 다가올 듯하다.


라 일라하 일랄라 ―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진리를 향한 이정표>에서 저자는 현재 이슬람권의 상황이 이슬람 이전의 상황인 ‘자힐리야(신의 가르침에 대한 무지, 이슬람 출현 이전의 시기 또는 그 상태)’라고 규정하며 이슬람 질서와 타락하고 무지한 자힐리야의 질서라는 철저히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사회를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비 이슬람적인 상황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서는 이슬람의 신성 가르침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 설명하며 이런 현상이 가져온 결과로 인간은 개인의 욕망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동물적 삶을 살아갈 뿐이라 주장, 그 해결책이 바로 이슬람 이념을 바탕에 두고 오직 알라에 대한 완전한 복종을 통해 지하드를 통해 자힐리야를 제거하고 이슬람 사회를 부활시켜야한다는 행동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그는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기치를 해석하면서 이슬람의 태동부터 지하드가 필수불가결한 원리였음을 밝혀내고 있다. 


쿠란적 방식의 본질에 대한 해석

이슬람의 경전인 쿠란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무슬림의 삶의 영역에까지 파고들어가 있다. 이슬람은 단순히 정치와 권력 경제적 집단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간혹 있지만 <진리를 향한 이정표>는 이슬람적 삶의 방식은 철저히 종교적이며 실천적 삶을 요구하는 신앙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책의 저자는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 속에서 무슬림 공동체가 믿고 의지해야할 것과 싸워야할 대상을 명확히 구분하고 알라를 위해 그리고 신앙적 삶의 방식의 고수를 위한 투쟁의 방향을 적극적으로 취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단지 어느 한 사상가의 영향이 아닌 쿠란의 메시지의 본질에 대한 해석과 무슬림 공동체의 삶의 정신을 담고 있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무슬림의 행동을 단순히 종교적 행위에서만 찾고 접근하는 방식이 가지는 한계를 확인할 수 있는 책속의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쿠란을 제외한 이슬람 종교학교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꼭 읽어야할 책으로 소개되는 이유를 가르쳐 준다.
 

이론적 지침서의 한계를 뛰어넘은 실천적 지침서

종교의 기본은 믿음에서 나오는 신앙의 삶의 지침과 변화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단순히 이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을 원리주의자들은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때로는 과격하게 그리고 무모하게 보이는 행동일지라도 '원리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가르침을 지키는 삶의 실천이기에 그들 자신에게는 모순이 없다. 진리를 향해서 고개를 돌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나아가는 삶을 통해 저자는 무슬림 공동체와 구성원들의 삶을 가르친다. 지나칠 정도로 과격하다고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오늘날 이슬람이 세속화와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이고 지켜지는 길이자 진리라는 점에서 굳건한 지지속에서 유지될 것이다. 충돌하는 두 문명 즉 이슬람과 그 이외의 세상이 조우하고 융합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이슬람문명의 부흥을 꿈꾸던 혁명아 사이드 쿠틉

사이드 쿠틉은 이슬람 문명의 부흥 더 나아가 이슬람이 인류의 리더쉽을 확보하고 현대 서구 문명이 갖지못한 질적인 가치를 구축할 수 있다는 상당히 놀라운 비젼을 제시한 학자였다. 이슬람만이 가진 질적인 가치 중 최고의 것은 알라 이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확고한 믿음이다. 세상 모든 민족들이 종교다원화나 신의 권위를 부정하는 세상(자힐리야)에 살지만 무슬림들은 다르다. 그들에게는 오직 알라만이 있을 뿐이다. 저자는 집필동기로 이것이 진리이며 이를 위해 선봉에 서는 자들을 위한 이정표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그는 이를 위해 제일 먼저 쿠란과 하디스(마호멧의 언행록을 기록한 책)를 지목한다. 그리고 세속주의나 타종교에 물들지 않은 이슬람의 순수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경주한다. 그가 주목한 것은 이슬람 초기의 독특한 배움의 방법이다. 쿠란의 가르침을 행하게 하는 것. 그를 위해 많은 구절이 아니라 최대 10구절 이내의 경전을 암송하고 몸소 실천하게 만드는 것이다. 쿠틉은 학자로서 쿠란을 대한 것이 아니라 행동가로서 쿠란의 가르침을 대하는 것이 이슬람의 순수한 근원으로 들어간다고 보았다. 그리고 지금껏 각자가 살아온 자힐리야와 단절을 주문한다. 그는 이 단절을 효과적으로 실천하기 위한 이론과 방법론을 모색하며 그 자신이 실천적 삶을 경주한 궁극적으로 이슬람 문명의 부흥을 꿈꾸던 진정한 혁명아였다.


"모든 영광을 알라에게! 나는 15년동안 지하드를 수행했고, 이제 순교자의 길을 간다." (1966년 4월 사형판결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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