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 그의 부고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바로 그 눈이었습니다. 멀건 콩나물국에서 콩나물을 골라 먹다 말고 멈칫 나를 보던 눈. 그가 콩나물을 다 먹어버릴까봐 긴장하고 있던 나를 우물거리는 그의 입술을 혐오하며 쏘아보고 있던 나를 묵묵히 마주 바라보던 나와 똑같은 짐승이었던 그의 차갑고 공허한 두 눈. - P107

날마다 이 손의 흉터를 들여다봅니다. 뼈가 드러났던 이 자리, 날마다 희끗한 진물을 받으며 썩어들어갔던 자리를 쓸어봅니다. 평범한 모나미 검정 볼펜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숨을 죽이고 기다립니다. 흙탕물처럼 시간이 나를 쓸어가길 기다립니다. 내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 P135

그러니까 형, 영혼이란 건 아무것도 아닌 건가.
아니, 그건 무슨 유리 같은 건가.
유리는 투명하고 깨지기 쉽지. 그게 유리의 본성이지. 그러니까 유리로 만든 물건은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거지. 금이 가거나 부서지면 못쓰게 되니까 버려야 하니까.
예전에 우린 깨지지 않은 유리를 갖고 있었지. 그게 유린지 뭔지 확인도 안해본, 단단하고 투명한 진짜였지. 그러니까 우린, 부서지면서 우리가 영혼을 갖고 있었단 걸 보여준 거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인간이었단 걸 증명한 거야. - P130

죽지 마.

죽지 말아요.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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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그녀에게 귀엽게 생겼다고 말하던 때가 있었다. 눈코입이 조금씩 튀어나온 게 밉지 않고 귀엽구나, 머리는 꼭 흑인 댄서같구나. 미용실에서 파마 안해도 되겠다야. 그러나 열아홉살의 여름이 지나자 누구도 그녀에게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스물네살이고 사람들은 그녀가 사랑스럽기를 기대했다. 사과처럼 볼이 붉기를, 반짝이는 삶의 기쁨이 예쁘장한 볼우물에 고이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은 빨리 늙기를 원했다. 빌어먹을 생명이 너무 길게 이어지지 않기를 원했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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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길었던 하루가 끝나면 침묵할 시간이 필요하다. 난롯불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듯, 침묵의 미미한 온기를 향해 굳은 손을 뻗어 펼칠 시간이.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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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송이가 성글게 흩날린다.
가로등의 불빛이 닿지 않는 검은 허공에.
말없는 검은 나뭇가지들 위에.
고개를 수그리고 걷는 행인들의 머리에.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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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가 내린 흙을 밟을 때, 반쯤 얼어 있는 땅의 감촉이 운동화 바닥을 통과해 발바닥에 느껴지는 순간을 그녀는 좋아한다. 아무도 밟지 않은 첫서리는 고운 소금 같다.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부터 태양의 빛은 조금 더 창백해진다. 사람들의 입에서 흰 입김이 홀러나온다. 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리며 차츰 가벼워진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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