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라면 정조처럼 - 정조대왕의 숨겨진 리더십 코드 5049
김준혁 지음 / 더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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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으로 유명한 명군이었지만 조선왕조의 정치란 음침하면서도 다소 모순적이다. 우리가 기존에 알고있는 왕들이라면 화려해보이지만 결코 화려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왕이나 신료들이나 권력다툼앞에서 거 되게 피곤하게 사는 군하고 느꼈다..

조선이 왕도정치를 내세운 군주독재정치이다보니 왕에게 신료란 쓰고버리고마는 존재이고 백성은 더한 불쏘시개같은 존재였다.정조도 예외가 아니었을텐데 그는 달랐다. 유난히 의심많은 영조밑에서 고단한 세손시절을 견디어 왕위계승을하고 당쟁을 버티며 정사를 이끄는 군주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다.아침에 일어나 잘때까지 공부하며 조정대사를 논 할만큼 개인적시간도 없다.그리고 노론대신과의 줄다리기로 고민으로 ,밤늦도록 잠들지못하는 고통을 읽어보라...
리더는 책임도 큰 법이다.스스로 성리학자였던만큼 개혁이 한계가 있다는 것이 아쉽다.
벼슬관계도 당색에 따른 안배인만큼 시파가 세를 키우기까지 세손이었던 정조는 든든한 배경 따윈 애초부터 없었다.
그래서인가 그는 시파를 키우려했다.
왕도 왕이지만 그아래서 눈치보고 줄서야하는 권력다툼, 이건 보통 피곤한 일이 아니다. 세도가의 뒷받침이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도않은 군주는 보위에 오르기 까지 조정내의 암투와 조정대신들의 정쟁 속에서 눈치를 보며 줄타기를 해야하는 데 조정의 암투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실록을 보면 나타난다.
그래도 식견이 남달라 조선왕조 최초로 먼 미래를 내다보고 식목정책을 추진한다.거기에 신혜통공을 실시하여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자유로운 상업발달을 도모하는 경제 개혁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용한다는 전교를 승정원의 승지가 국왕의 전교를 대돌리며 반대했다는 것만봐도 군주노릇하기가 쉽지않다.
권력투쟁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질투와 의심에 눈먼 영조에게 자신의 위치가 목숨마저 위태롭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인데. 이건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다. 처신하지 못하거나 하면 그냥 죽음으로 내몰릴 수도 있는 극과 극의 자리이다.
그래서 왕권강화를 위해 남인들을 등용했다.정 약용 박제가등 실학이 융성했던 것도 이때문이었다.
결국 세손시절 친우였던 홍국영이 도를 넘어서자 숙청될것임을 예견했다는 학설이 있다.그만큼 정조는 참소하는 이들을 이용하고 버린 까닭이다.즉 군주였던만큼 측근들이 정적이 된것이다.
한편으로 국방과 무관출신의 중요성을 부각되는 것을 꺼린 조선에서 장용원을 설치해 근위대로 삼은 그의 앞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끝임없는 노론의 견제와 대신들간의 권력다툼 , 막중한 의무 밖에 없었다. 오직 당쟁의 폐해속에 성군이 되어어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누구보다 더 고된 일생을 살다가 간 것이다.
그가 갑자기 승하한 것도 독살이였다는 의심이 짙다.혹은 반대파에서 숙청을 대비해 미리 죽였거나..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 권력 유지를 위해 뒤에서 , 아니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신권을 견제하려는 이런 노력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왕권유지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국사 최초의 사회복지인 흠흠칙서등을 보면 충효를 내세워 민초들을 먹이고 돌보는 것이 군주의 도리라 여겼던 것을 알수있다.
정조같은 대통령이나 리더를 얻기쉽지않다.
그러나 정조가 오래 살아남았어도 조선이 평탄했을지는 미지수다.그도 독재군주라 개혁이라는 이름아래 독재정치와 정약용같은 친위세력을 구하려한 몸부림치는 모습이 드러난다.다소 씁쓸하다면 결국 백성을 위한다는 기치아래 리더로서 권력의 정점에 선 사람은 , 오직 왕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인간적 군주의 고뇌가 진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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