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광기란 무엇인가
이병욱 지음 / 학지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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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의 집단적 광기를 직접 목격했던 프로이트는 인간의 초자아 기능에 심각한 결함이 생긴 도덕적 광기(moral insanity) 상태에 새로이 주목함으로써 인간 정신병리 이해의 폭을 더욱 크게 넓혔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도덕적 광기에는 적절한 약도 없고 정신치료도 별다른 효과가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도덕적 광기의 문제는 앞으로도 가장 큰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안정이라는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다.

도덕적 광기의 소유자가 지닌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일반 정신병 환자와는 달리 겉으로는 매우 멀쩡해 보인다는 점이다. 오히려 남달리 뛰어난 카리스마를 발휘하기도 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절대 권력의 자리에 오르거나 강력한 리더십으로 자신의 추종세력을 광적인 집단으로 유도함으로써 이성을 마비시키는 탁월한 재능도 지니고 있다. 그들의 존재는 정치적 이념의 영역뿐 아니라 종교, 예술, 학문, 대중문화 등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기 때문에 그 정체를 손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결국 세상을 어지럽히는 주범은 정신병원에 있는 환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병원 밖에 있는 도덕적 광기의 소유자들이라 할 수 있다.

역사 속에 드러난 도덕적 광기의 현현은 실로 참혹했다. 히틀러의 종족주의와 무솔리니의 파시즘, 스탈린의 피의 대숙청과 모택동이 벌인 문화 대혁명과 홍위병의 난동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훨씬 이전의 마녀사냥이나 원주민 학살, 왕이나 권력자들의 횡포로서의 살육이나 종교지도자에게 이끌린 집단 자살,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으며 억울하게 죽어갔다.

문학이나 대중음악, 드라마, 영화에서도 도덕적 광기는 널리 퍼져 나갔는데 이는 사람들에게 위험 불감증과 도덕적 불감증을 가져다주었다, 노골적인 성적 표현과 적나라한 폭력의 묘사가 담긴 음악과 문학 그리고 드라마와 영화에서 보여주는 각종 변태적이고 공포스러운 영상들은 금기시하던 성과 죽음에 대해 대놓고 드러내면서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보편타당한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현재는 광기의 세상이라는 말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규율과 규범들이 무너진 상태이며 뉴스를 보면 구멍 난 양심으로 인한 도덕적 광기의 향연이라도 벌이고 있는 것 같다. 인간관계의 무너짐은 말할 것도 없고 환경적으로도 심각하게 세상은 손상되어 가고 있다.

타인의 삶을 착취하고 고통을 안겨주는 대가로 자신만의 욕망을 채우는 일부 반사회적 지도계층과 그들을 추종하며 소비만을 촉진하는 언론과 미디어는 민중의식을 마비시키고 괴물들을 양산하고 있다. 그들이 전하는 왜곡된 메시지로 인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정의이고 불의인지 구분하기 매우 어려워진 혼돈의 시대를 살고 있다.

도덕적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은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보는데 비대해진 자아 때문에 쉽게 정신적인 치료를 받으러 오지도 않지만 설사 정신분석이나 심리치료를 받으러 온다 해도 상담사나 의사가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치료나 도덕적 양심의 회복이 거의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함께 잘 살아가기 위해서 이러한 도덕적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눈부시게 발전한 정신 약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들의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고칠 수 있는 약은 없다. 현재까지 유일한 치료 방법은 정신분석이나 정신치료적 도움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치료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치료가 효과있을리 만무하다.

대중심리의 역설은 진실을 원하는 듯하면서 정작 진실을 두려워한다는 것이고 진실로 믿었던 것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것도 두려워한다. 반사회적 인간을 그런 약점을 잘 간파하고 이용하고 파고든다. 개개인이 그런 마수에 걸리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는 정신과 도덕적 양심을 가져야 한다. 나아가서 혼자의 힘보다 건전한 상식과 윤리의 공유에 따른 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입시제도로 인한 학업 과열로 포기한 도덕과 인성교육은 살려내고 아이들이 자신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부모님과 선생님의 권위 회복으로 광기 어린 우상화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고 잘못은 함께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 되어주어야 한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도 없고 절대적으로 그른 것도 없는 중도의 미덕을 실천하여 나의 가치뿐 아니라 상대방의 가치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교묘히 파고드는 반사회적 인간의 꼬임이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분석적 안목과 비판적 수용이 필요하고 이성적 비판을 가할 수 있는 냉정함과 침착성 또한 필요하다. 이웃에 대한 무관심이나 적개심을 버리고 사랑과 관용을 바탕에 둔 믿음을 회복할 때 건전하고 든든한 사회의 울타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현재 사회는 도덕적 광기와 반사회적 인간이 과거처럼 독재나 전체주의를 표방하며 드러나기보다는 정신을 세뇌하거나 문화를 잠식하여 멋대로 조정하고 삶을 파괴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국가적으로 재정비된 도덕성과 사회의 울타리가 있고 그 안에서 서로를 연대하는 힘과 깨어있는 정신이 함께 한다면 우리의 미래가 그리 어둡지만은 않으리라 믿어본다.

#학지사 #학지사서평단 #서평 #서평단 #신간도서 #도덕적광기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서평/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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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이 각시는 당신이 아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심조원 지음 / 곰곰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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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렁이 각시는 당신이 아는 그-----런 얘기가 아니다>는 제목을 봤을 때부터 궁금증이 마음에 불을 붙였다. 나는 아침드라마 같은 막장 서사나 교훈으로 약자들을 꽁꽁 옭아매는 그런 옛이야기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상하게 옛이야기 안에는 나의 마음을 흔드는 어떤 부분이 늘 있었다. 역사는 승리한 자들의 것이라는 말처럼 구술로 전해 내려오던 옛이야기들은 문자로 기술되어 학교나 사회, 문화 안으로 들어오면서 많은 부분이 장막과 휘장으로 둘러싸였으리라. 그렇게 가려지고 포장된 부분들은 어떤 식으로든 서사 안에 남아 나의 무의식을 자극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첫 번째 목차는 ‘어디든 가는 나-----쁜 여자들’ 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분명 앞에 선행하는 한 문장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떠올려도 입안에서만 맴돌고 생각이 나지 않아 나는 바로 검색에 들어갔다. 검색을 시작하자 뜨는 문구 바로 그 문장이었다. 내가 무릎을 탁치며 감탄했던 문장. “착한 여자는 천국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우리 사회는 어디든 가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디든 가는 여자는 나쁜 여자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 아이를 양육해야하고 밥을 하고, 빨래를 하고, 집을 깨끗이 하고, 아름다운 외모로 다소곳이 앉아 남편을 기다려 수발을 들어 주어야 하는데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갈수 있는 욕망하는 여자라니 안 될 말이지 않는가.

우렁이 색시는 자기만의 방이 있었을 때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이 있었고, 방귀쟁이 며느리는 마음껏 소리를 내고 냄새를 피울 수 있었으며 선녀는 자신의 영혼인 날개옷을 입고 훨훨 하늘나라로 돌아갈 수 있다. 남편과 시아버지와 가부장 사회 속 여자들은 있어도 없는 척, 없어도 있는 척 자신의 욕망을 숨기고 살았지만 완전히 그렇게 살지는 않았다. 특히 구술로 전해지는 서사에서는 세상의 강압과 폭력에 대해 더욱 과감하게 자신들의 욕망을 존중하려는 노력과 시도들을 멈추지 않았다.

<여우누이>를 보면 여느 여성 악당과 달리 피해자 서사가 없으며, <내 복에 산다>에서는 예쁜 고명 막내딸이 똑 부러지는 자기주장으로 아버지에게 쫓겨나지만 숯덩이 안에서 황금을 찾아내 뜨거운 생명력을 불처럼 일으킨다. 가장 공감이 가는 이야기는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 이야기인데 여기에 할머니의 조력자로 등장해서 호랑이를 물리치는 캐릭터들을 보면 (이 책 안에서는 예수님과 12제자에 빗대서 아주 흥미로운 비유를 선사했다) 애잔한 마음이다가 결국에는 더욱 큰 힘을 받는 감동을 만나게 된다.
호랑이가 노리는 것은 늙고 궁핍하며 산 속에 홀로 사는 여자의 몸이다. 치사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다. 보호해줄 사회의 안전망도 의지할 이도 없이 외떨어져 살아가는 가장 약한 자에게 동물의 왕이나 되는 거대한 존재가 입맛을 다시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지금의 사회와도 전혀 다르지 않다. 옛날의 호랑이는 더욱 뻔뻔하고 겉으로 드러났다면 현실의 호랑이는 좀 더 복잡하고 드러나지 않는다. 성폭력자의 대부분이 아는 사람이거나 절대 그럴 리 없는 사람들 중 하나라는 것 보면 알 수 있다.

할머니는 누구에게도 도와달라고도 하지 않는다. 세상의 눈과 말은 모두 호랑이의 편이란 걸 알기 때문에 팥죽이나 배불리 먹고 죽을 수 있게 해달라고 협상한다. 여름내 힘들게 지은 농사로 얻은 팥을 몽땅 넣고 큰 가마솥에 삶자 점점 뻘겋게 끓어오르는 팥죽 그것과 함께 서서히 끓어오르는 할머니의 서러움과 분노는 보이지 않던 이웃들을 깨운다. 달걀이 알밤이 송곳이 바늘이 지게가 멍석이 맷돌이 절구통이 자라가 가래가 파리가 개똥이 저마다 팥죽 한 그릇을 달란다. 하나같이 누추하고 하찮은 것들 할머니의 삶과 늘 함께하는 동지들이다.

마침내 호랑이가 할머니를 잡아먹으러 왔을 때 이 누추하고 보이지 않던 존재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착착 자신의 일을 해 낸다. 달걀은 뜨거운 불덩이가 되어 호랑이 눈에 탁 뛰어 들고 그걸 씻어 내려고 물동이에 손을 넣자 자라가 콱 물고 늘어지고 맷돌짝이 천장에서 떨어져 대가리를 깨트리고 송곳이 밑구녕을 푹 찔러 호랑이가 죽었다. 멍석이 들어오더니 뚜르르 말아서 지게가 턱 걸머지더니 가래가 구덩이에 파묻고 제사를 지냈다. 할머니는 손가락 하나 델 것 없이 깨끗이 호랑이가 해결된 것이다. 마치 그곳에 없던 것처럼. 이것이 진정한 연대가 아닐까. 말 뿐인 동정이나 공감, 가르치려는듯한 제스쳐가 아닌 제대로 약한 것들의 연합.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한가지로 그 무서운 호랑이를 물리친 것이다.

최후의 만찬이었던 팥죽은 죽음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봄을 약속하는 축제의 만찬이 되었다. 그 옛날 <팥죽 할머니와 호랑이>이야기가 신기하게도 개인주의와 자의식 과잉 상태인 지금의 내게 하나의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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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의 죽음 작품 해설과 함께 읽는 작가앨범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고정순 그림, 박현섭 옮김, 이수경 해설 / 길벗어린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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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의 죽음」은 믿을 만한 타자가 결여된 세상 속에서 설 곳을 잃어가는 주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장관인 브리잘로프가 체르뱌코프에게 정확한 언행으로 사과를 받아주고 사건을 일단락 지었거나 아내든 누구든 그의 불안을 들어주고 지지와 동의를 해주었다면 과연 그가 죽음에 까지 이르렀을까. 누구나 할 수 있는 재채기 때문에 그가 불안에 빠지고 병적인 강박과 집착, 편집증적 사고, 박해망상까지 경험하다가 결국 사망한 것은 순전히 체르뱌코프 개인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부모, 선생님, 정부, 국가와 같은 큰 타자의 힘이 막강하고 그들의 보호와 책임 아래 있을 때 주체의 자유는 제한적이었고 삶은 지금 보다 단순했다. 어떤 가문에서 태어나고 어떤 신분을 가졌으며 어떤 종교와 어떤 국가 아래 있다는 것으로 내 역할과 의무가 결정되었다. 말하자면 내 이름이 정해준 선을 지킨다면 큰 문제될 것이 없는 사회였다.

개개인의 자유가 존중되고 삶이 복잡해질수록 선은 모호해졌다. 기준과 원칙은 멀리서 보면 흐릿해 졌지만 가까이에서는 세세하고 다양하게 난립했다. 매뉴얼 이외에 더 신경 써서 지켜야 할 것들과 처리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더 많은 눈과 더 많은 목소리들이 우리 주변을 에워싸고 있고 주체의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어떤 행동이나 말도 심판대에 오르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더군다나 인기몰이에만 관심이 있는 소비사회의 패턴이 만연한 지금의 사회는 공인이 아님에도 늘 타자의 판단과 선택에 휘둘리며 살아가게 된다.

체르뱌코프가 얼마나 조심하고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는가에 대해서는 그가 등장하는 장면마다 드러나 있다. 잘못 그려서 지워진 선들의 무시 못 할 존재감과 시종일관 입 주변이나 얼굴 주변에 등장하는 수정액 자국들은 그가 얼마나 신중하게 말과 행동을 고르는지 보여준다. 누구든 곁에서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침에 직장에서 마주친 동료가, 상사가, 친구가, 아내가 그렇게 경직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넌 괜찮다고 말해주었다면 말이다.

큰 타자에 대한 믿음의 결여와 책임의 전가 그리고 더 좋은 것, 더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만을 쫒는 소비사회는 개개인의 불안을 증폭시킬 수밖에 없다. 오랜 옛날부터 생존을 위한 경고 시스템으로써 스위치 역할을 하던 불안은 이제는 매순간 켜져 있어 타인이나 주변을 돌아보기커녕 자기 스스로에게 조차 여유나 휴식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재채기 같은 작은 실수 아니 실수라고 할 수 조차 없는 일마저도 언제든 자신을 저격하는 거대한 사건으로 둔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체르뱌코프는 정신적으로 약하고 강박적이며 지나치게 예민하여 쓸데없는 걱정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든 바로 우리, 나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안은 잠시라도 가만히 나 자신을 내버려 둘 수 없고 뭐든 하고 있지 않으면 시시각각 따라 붙는 자기검열의 꼬리잡기와도 같다. 진정한 관계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잃고 삶에서는 내가 나를 잃어가는 이 세상 속에서 체르뱌코프와 브리잘로프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큰 타자들의 몰락을 부정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거대한 몰락을 책임져 줄 수 있고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힘을 찾는 것이 아닐까 한다.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작은 힘들의 모임 개개인의 삶을 돌보면서 타인의 삶도 돌아볼 수 있는 소타자들의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주체의 고유성과 권리를 존중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함께 책임져 주고 방법을 모색하는 부모와 선생님, 나아가서 약자나 특이성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회적 연대와 단합 이러한 크고 작은 노력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회성이나 보여주기식이 아닌 이러한 지속적 노력들이 있다면 예민함이나 불안함이 쉽게 병적상태로 넘어가서 죽음에 다다르게까지 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온몸으로 엄청난 화를 뿜어내며 꺼져! 라고 장관이 말하는 순간 체르뱌코프의 배 속에서 뭔가가 터져 버렸다. 그것은 과부하 상태로 간신히 버티던 그 안의 두꺼비집이 일시에 퍽하고 나가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책의 시작에서 작지만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던 체르뱌코프의 인생은 책의 마지막에 암전을 이룬다. 새카맣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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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고양이와 쥐
바두르 오스카르손 지음, 권루시안 옮김 / 진선아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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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고양이와 쥐>, <수짱과 고양이> 두 책 모두 우정, 신뢰, 친구의 소중함이라는 키워드로 책소개가 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게는 그 키워드들이 맞지 않는 열쇠처럼 헛발질을 친다.

이게 정말 우정일까?
이게 친구의 소중함 이라고?
아, 물론 그런 느낌이 있다. 아니라고는 할 수없긴 한데 분명 뭔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게 뭘까.

개와 고양이와 쥐는 과거의 원수같은 사이에서 한지붕 아래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왜 표지 부터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각자 다른 곳을 보고 있을까.

면지에는 스탠드 조명과 소파가 빼곡히 반복반복 수없이 그려져 있고 바로 다음 장에는 파리마저 지루해서 잠들어 있다.(끊임없이 날고 음식을 찾고 다리를 비벼야할 파리가 자다니! 생의 의지가 전혀 없는 파리다.)

개는 고양이를 냅다 쫒으며 왈왈 짖어대고 싶고 고양이는 하악질을 하며 쥐에게 달려들고 싶고 쥐는 개를 꾀어내서 고양이를 약올리고 싶었지만 모두가 평화롭게 앉아 있어야만 했다.

쥐는 치즈를 보아도 관심이 없었고 고양이는 털실로 노는 게 재밌지 않았고 개는 산책을 나가도 어디로 갈지 기억이 나지 않아 오줌 누는 장소에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서로 쫒기고 쫒는 게 일인 고양이와 개와 쥐는 더 이상 아무도 쫒고 쫒기지 않았다.

욕망이 사라진 세상,
본성을 누르고 모든 것이 풍요롭고 평화로와서 더 이상 아무것도 욕망할 필요가 없어진 세상에서 삶은 어떤 것이 의미가 있을까. 삶에서 이전과는 다른 어떤 의미를 찾아내야 할까. 어떤 목표를, 어떤 소명을 찾아야 하는 걸까.

마지막에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쥐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합니다. '오랜만에 참 좋다....' 라고.
이것은 서로 소통을 할 수 있어서 좋다라기 보다 오랜만에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어서 좋다는 말로 들립니다.

여기서 부터 시작해야 겠죠? 개와 고양이와 쥐가 친구가 되려면요.
왜 오랜만에 좋았던 거지?
왜 우리는 배부르고 평화로운데 심심하기만 했던 거지?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개를 신나게 왈왈 짖으며 달리게 하고
고양이를 시간가는 줄 모르게 털실과 놀게 하고
쥐가 맛있는 치즈 조각을 찾아 열심히 돌아다니게 하는 그것!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 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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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짱과 고양이 사노 요코 그림책 1
사노 요코 지음, 황진희 옮김 / 길벗어린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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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있는 사람이란 같은 곳을 보면서 다른 곳을 보는 사람이다.
곁을 주는 사람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이란 가족이나 친구를 말한다. 본래적으로 내가 속한 가족들에게서 최초로 함께라는 의미를 배우겠지만 더욱 피부에 와닿게 깨닳음을 주는 것은 가족이 아닌 남을 좋아하고 사랑하게 될 때다.

나와 함께 하지만 함께 라는 것이 항상 같은 곳을 바라보고 의미나 목표를 공유 한다는 말은 아니다.
같은 것을 좋아하더라도 좋아하는 부분이나 방식, 이유, 그 표현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과 함께 하며 배운다.

같은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같은 것을 좋아하는 것이 우리 사이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내가 정말 너와 같은 것을 좋아하고 있는지
단지 너를 좋아할 뿐인 것은 아닌지
너와 내가 좋아하는 그것이 없어졌을 때
또는 너의 존재가 내게서 떠나갔을 때
나는 어디를 향하고 무엇을 보는지 를 생각하게 된다.

어린아이들은 대부분 직관적으로 너를 사랑하는 것인지 네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인지 안다. 시기와 질투 갈등을 마주하겠지만 사랑하는 대상이 변질되진 않는다. 싸우고도 앙금없이 금방 다시 친해질 수 있다는 건 어린시절에만 가능한 일이다.

어른이 되면서 겪는 많은 경험치 속에 지식과 통찰이 쌓이고 더 나아가 지혜를 깨닫는 다지만 결국 최초에 내가 원했던 것 내가 바라던 것을 어린 아이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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