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만든 먼나라 이웃나라 14 : 중국 2 현대편 먼나라 이웃나라 14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새로 만든 먼나라 이웃나라 14(2. 현대편) 중국 편 중에서 두 번째 책입니다일본 다음으로 우리나라와 외교를 맺고 있는 중국의 현대사도 알아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사서 보았는데 현재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나라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어떻게 평화 조약을 맺었는지 궁금했던 내용은 "반둥 회의" 부분이었습니다. " 반둥 회의는 인도의 네루 총리,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 중화인민공화국 총리 저우언라이이집트 대통령 나세르가 중심이 되어 개최를 목표로 한 회의의 총칭인데, 1955년에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제1차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2차 회의는 개최되지 않았고, 따라서 반둥 회의가 AA 회의를 나타낼 수 있었고, 참가국들은 그 대부분이 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29개국이며, 이 회의는 제5 평화 원칙을 확장한 평화 10원칙으로 정해졌습니다아시아 국가들이 영국과 프랑스, 미국과 네덜란드 등 유럽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가운데, 유럽 국가는 일본에 의해 점령되었던 동남아시아를 다시 식민화를 시도했고, 또한 새로운 미국과 소련의 냉전 구조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파급 때문에 안타깝게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한국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런 가운데에서 네루와 저우언라이는 1954년에 열린 정상 회담에서 평화 5원칙을 발표하고, 1954428~ 52일에 스리랑카의 콜롬보에서 개최되었던 콜롬보 회의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를 개최하는 계획을 세웠고, 콜롬보 회의에는 알리 사스토로아민지(인도네시아 수상), 쉬리 밴디트 쟈와하루라루 네루 (인도 수상), 모하메드 알리지나(파키스탄 총리), 존 코타라와라(스리랑카 총리), 우누(버마 총리) 5명이 참석했고, 이 회의에서 인도네시아 총리가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다른 4명도 찬성을 하여 1단계로 보고르에서 19541228 ~ 29일 준비 회의를 가졌고, 인도, 동남아시아 5개국이 개최한 콜롬보 회의에서는 인도 차이나 전쟁의 조기 중단이 상정되었으며콜롬보 회의에 참가한 5개국은 "콜롬보 그룹"이라고 부르는데, 이 회의의 안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첫째, 아시아 아프리카 간의 협력, 상호 이익, 우호의 추진, 둘째, 대표 각국 관계 및 사회 정치 문화 문제의 검토, 셋째, 국가의 주권, 민족 문제, 식민주의 등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에 특히 중요한 여러 문제의 검토, 넷째, 현대의 세계, 특히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위와 세계 평화의 추진을 위해 가능한 공헌 검토 외에 10가지 원칙으로 1. 기본적인 인권과 유연 헌장의 목적과 원칙을 존중, 2. 모든 국가의 주권과 영토 보전을 존중, 3. 모든 인류의 평등과 크고 작은 모든 나라의 평등을 승인, 4. 타국의 내정에 불간섭, 5. 유엔 헌장에 의한 단독 또는 집단적인 국토방위권을 존중, 6. 집단적 방위를 강국 특정 이익을 위해 이용하지 않는다. 또한 다른 나라에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 , 7. 침략이나 침략의 위협이나 무력행사는 타국의 영토 보전이나 정치적 독립을 침범하지 않는다. , 8. 국제 분쟁은 평화적 수단에 의해 해결, 9. 상호 이익과 협력을 촉진, 10. 정의와 국제 의무를 존중의 이 선언으로 비동맹과 중립주의, 상호 협력 등의 정신을 담은 것으로 서방 자본주의 국가와 동방 사회주의 국가에 의해 양분되던 국제 정치 무대에 '3세계'라는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알렸고, 신생국의 수가 계속 늘어나는 상황 속에서 반둥회의를 계기로 등장한 '비동맹' 그룹은 점차 힘을 더해갔고 이들은 60, 70년대를 지나면서 국제 정치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중국의 현대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하고 관심이 있으시는 분들께 이 책을 읽어보시기를 추천 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경제, 문화제국으로 성장해 있는 중국. 청나라 말부터 오늘에 이르는 역사는 갖은 수난과 고통의 연속이었고 외세의 침략 앞에서 스스로를 바꾸려는 자기 개혁의 몸부림이 어찌하여 일본은 성공하고 중국이 실패했었는지, 경제 대국을 노리며 승승장구했던 일본이 왜 오늘날 비틀거리며, 폄하되고 멸시받던 중국이 최강국을 향한 힘찬 웅비를 거듭하는지 나와있으며 중국은 절대로 '두 개의 중국'을 허용하지 않는 그들의 역사 철칙입니다. 그러나 타이완이 또 하나의 중국임을 주장하고 있고 티베트나 신장 위그르 자치구를 비롯한 소수 민족 문제가 계속 도사리고 있지만 어느 편을 들기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외교를 하면서 과거사와 동북공정으로 인해 양국 간이 갈등을 빚고있지만 자국의 이익만 도모하겠다는 독선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이웃 나라와의 상생의 길을 추구하는 열린 자세로 중국이 다시 한 번 문제를 재검토를 하고 우리나라와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중국의 근대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을 때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0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가 가까운 나라로 여행을 갈 때 일본 다음으로 중국을 많이 찾아가며, 우리나라와 외교를 맺고있으나 가끔 동북공정과 과거사 문제로 인해 갈등을 겪기도 합니다. 과거에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던 중국이 산업화를 이룬 영국을 비롯한 서구열강들은 중국시장을 개방하여 무역역조를 시정하고 자국 자본주의의 이윤을 극대화하고자 중국을 침탈하기 시작했고 아편전쟁을 계기로 우세한 화력을 바탕으로 밀려오는 서양세력들에 대해 청나라 조정은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했고, 잇따른 패전과 거액의 배상금 지불로 중국인들의 자존심과 국민경제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습니다. 새로운 국민 국가 수립의 염원 속에 최초의 공화제 정부인 중화민국이 탄생하였고, 그러나 각지에서 일어난 군벌의 난립 속에 효율적인 국가체제를 이루지 못하던 중, 러시아 혁명 이후 새로이 탄생한 공산당 세력과 국민당 세력이 서로 대립하게 되었으며, 열강의 침입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경제대공황을 전쟁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던 일본이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국공합작이라는 공동전선을 형성하여 일본을 물리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중국의 개혁, 변화를 볼 수 있는 과정을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로 만든 먼나라 이웃나라 13 : 중국 1 근대편 먼나라 이웃나라 13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세계경제대국으로 앞서 있으며 자신들의 중화사상 자부심이 강한 중국이지만 아편 전쟁에서 영국에게 패배하고 심지어 일본에게까지 국토의 일부를 빼앗기고 강탈과 수모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화려하고 장대하지만 상처와 굴곡도 많았던 중국의 근대사를 알고 싶을 때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로 만든 먼나라 이웃나라 13 : 중국 1 근대편 먼나라 이웃나라 13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새로 만든 먼나라 이웃나라 13,14 는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1. 근대편 2. 현대편) 중국 편 중에서 첫 번째 책입니다. 일본 다음으로 우리나라와 교류를 맺고 있고 세계경제대국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미국과 무역, 경제 패권 경쟁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2. 개혁을 위한 몸부림 변법자강운동에 대해 유심히 봤는데 아시아를 대표하는 나라이자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영토를 넓히려고 침략했던 서구열강에게 전쟁에서 패배하고 서양문물을 빨리 받아들이고 근대화로 무장한 일본으로부터 어의없게 지는 청일전쟁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국력을 잃게 되자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중국이 청일전쟁 패전과 그에 따른 제국주의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로, 젊은 독서인층은 망국의 위기감을 절감하였고 그들은 패전의 경험에서, 유럽의 무기·기술만을 도입하려는 양무운동의 한계를 깨닫고, 전통적인 정치체제·교육제도 개혁으로서 부국강병을 실현해야만 자신들이 근대세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음을 주장하였고, 헌법제정, 국회개설, 과거제 개혁과 양식학교 설립, 산업의 보호육성 등을 구체적 목표로 정하고, 주요도시에 학교를 설립하고, 신문을 발행하여, 관료나 독서인층을 대상으로 계몽·선전활동을 펼쳤으며 외국인 선교사와 일부 고관들 중에도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어, 고관들의 후원으로 캉유웨이는 황제에게 의견을 구신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황제는 그의 의견에 공명하여 량치차오·담사동 등 변법파를 등용하여 그들의 주장을 실행하였고, 그러나 이 운동은 서태후의 쿠데타(무술정변)로 인해 좌절되고, 컁유웨이와 량치차오는 망명하였습니다. 이 계기로 20세기에 헌법제정·국회개설을 목표로 한 입헌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청조타도·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한 쑨원 등의 혁명운동이 활발해졌습니다. 이러한 학회 활동이 활발해진 것은 지식인 사회에 민족주의가 확산되어 전통적으로 혈연 외에는 사람을 믿지 않아 공적 단체 만드는 것을 기피하던 중국인들이 혈연·지연을 초월하여 전국적인 지식인 조직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고 학회의 창립과 함께 중국의 언론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으며 1890년 중반, 홍콩· 상하이를 중심으로 열 두 개의 일간 신문이 발행되었는데 이들 모두 발행 목표가 같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신문·잡지는 사상 소통의 장이 되어 국가의 위기 속에 하나로 뭉친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정치 참여와 필요성과 의무를 강조해 중국인들의 정치의식을 강화하고 근대적 여론을 형생해 가는 것을 목표로 했고, 이처럼 신교육, 학회 활동, 언론 등에 의해 새로운 중국 지식이 계층이 나왔는데 이 모두가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으나 100일 유신이 남긴 유산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갑신정변처럼 엘리트 위주의 개혁으로 민중의 지지를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하지만  청의 조정은 물론이고 상당수의 한인 관료부터 전제군주정 내에서 이권을 누리는 한통속인 이상 무력을 갖지 못하는 개혁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확인시켜주었으며 이후 개혁은 이제 정치체제의 변혁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중국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어하거나 그들이 어떻게 변화와 개혁을 이어나갔는지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 읽어보시기를 추천 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