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모습에 속지 말라고, 현실이라는 건 언제나 단 하나뿐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택시 운전기사, 또한 그 말을 되새기며 철책을 넘어 고속도로의 비상계단을 내려가는 한 여자가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화제작 ‘1Q84는 현실의 세계와 현실이 아닌 세계의 경계선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 기나긴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소설은 웬만한 장편소설 네 권 정도의 분량을 자랑하는 그야말로 대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함을 느끼게 하기는커녕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몰입감을 독자들에게 선물하고 있다. 택시 운전기사가 여주인공에게 그런 말을 한 이유, 이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1Q84의 의미, 그리고 같은 세계의 어딘가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간직하며 살고 있는 두 남녀주인공인은 재회할 수 있을지……. 수많은 궁금증을 유발시키는 장치들을 곳곳에 배치해두었다. 아! 남자주인공이 만나게 되는 신비의 소녀에 대한 궁금증도 빼놓을 수 없다.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 더 정확하게는 여자들을 불행하게 만든 남자들을 저쪽 세계로 보내버리는 살인자이면서 사람들에게 운동을 지도하는 인스트럭터이기도 한 아오마메, 그녀에게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한 남자가 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덴고. 열 살 때 좋아해서 손을 잡았던 기억을 간직하며 살고 있다. 그 짧았던 순간, 그러나 그 강렬했던 기억 때문에 1Q84라는 새로운 세계로 와버린 아오마메는 언제부터인가 풍경이 변하고 자신이 존재하는 장소의 룰이 바뀌었음을 알게 된다.
소설가 지망생이면서 입시학원의 유능한 수학강사이기도 한 덴고, 어느 날 문예지 편집자인 고마쓰가 조금 특별한 아이디어가 있다고 말하며 그에게 후카에리라는 소녀가 쓴 소설 응모작 <공기 번데기>의 리라이팅을 부탁한다. 이 일로 인해 후카에리를 만나게 되면서부터 덴고의 삶은 출구를 찾기 힘든 숲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조금 특별한 아이디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그가 느꼈던 불길한 울림은 현실로 다가온다. 자신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상실되어 가고 소설 속에 묘사했던 세계는 진짜가 된다.
1Q84의 모티브는 조지 오웰의 1984이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빅 브라더라는 독재자를 등장시켰고 그 용어는 그 이후 사회적 아이콘이 되었다. 그렇다면 무라카미 하루키는 <1Q84>에서 무엇을 등장시켜 사회적 아이콘으로 만들고 있을까.
"실제 이 세계에는 더 이상 빅 브라더가 나설 자리는 없네. 그 대신 리틀 피플이라는 것이 등장했어. 상당히 흥미로운 언어적 대비라고 생각지 않나? “
“리틀 피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야. 그것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조차 우리는 알지 못하지. 하지만 그건 분명하게 우리의 발밑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어.”
에비스노 선생의 말처럼 이 소설에는 빅 브라더 대신 리틀 피플이 등장한다. 빅 브라더가 나설 자리가 없는 이 세계에 대타로 등장한 리틀 피플,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고 선한지 악한지,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 그 어떤 것도 알려져 있지 존재이다. 그런데 과연 리틀 피플이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는 리틀 피플과 같은 존재가 없는 것일까.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특징으로 많이 언급되는 것 중에 “입체적이다.” “그림을 보는 것 같다.” 라는 말이 있다.
1층 홀에서는 네 명의 여자들이 둥근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마를 맞대고 작은 소리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오마메의 눈에 그것은 현실의 풍경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들은 가상의 그림에서 구도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림 제목은 ”비밀을 함께 나누는 여자들“쯤 될까. 아오마메가 그 앞을 지나가도 그녀들이 만들어낸 구도를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이 책은 각 장마다 부제가 존재한다. 위에 인용한 문장에서 “비밀을 함께 나누는 여자들”은 ‘1Q84' 1권 제19장의 부제이다. 그냥 얼핏 보면 평범한 문장이지만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거장이나 천재라는 말을 듣는 이들에겐 확실히 특별함이 있다. 타인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말이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열광하는 것이리라. 나와 같이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참 부러운 특별함이다.
덴고는 소설을 쓰고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그 이야기는 달이 두 개인 세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두 개의 달이 뜬다면 인간의 머리는 더 이상해지는 거 아니냐고, 정상이 아닌 일이 줄줄이 생길 것 같다고 걸프렌드는 말한다. 1Q84를 읽다 보면 정말 그런 세계가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기도 한다. 지금 있는 달 한 개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괴로운데 말이다.
하루키의 작품들에 많이 등장하는 테마 중에 하나가 바로 ‘상실’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그 상실의 느낌이 조금씩 다르게 다가온다.
그러나 이윽고 썰물이 되자 나는 혼자 모래밭에 남겨져 있었다. 나는 무력해서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슬픔은 깊은 어두움으로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서 울곤 했다. 운다기보다 마치 땀처럼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다.
위는 ‘상실의 시대’의 한 대목이다. 상실의 슬픔을 처절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이 소설은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럼 ‘1Q84에서의 상실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가.
슬슬 고양이들이 올 시간이다. 그는 자신이 상실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곳은 고양이 마을 같은 게 아니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곳은 그가 상실되어야 할 장소였다. 그곳은 그 자신을 위해 준비된 이 세상에는 없는 장소였다. 그리고 열차가 그를 다시 원래의 세계로 데려가기 위해 그 역에 정차하는 일은 이제 영원히 없는 것이다.
작품의 시점이나 분위기가 달라서인지 상실의 감정이 조금은 담담하게 느껴진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전작들과 비교, 대조를 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또 그런 방법이 독서를 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오마메에게 있어 덴고와의 기억이 지울 수 없는 것이었듯이 덴고 역시 아오마메와의 기억은 용기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항상 격려해주었다. ‘너는 고독하지 않다.’고…….
사람은, 그리고 우리의 삶 주변에는 언제나 많은 타인들이 존재한다. 우리들이 존재하는 세계자체가 공동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고독을 느낀다. 자신에게 따스함을 전해줄 누군가를 소망한다. 그런 점을 생각해 볼 때 아오마메와 덴고는 행복한 존재들이다.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소설 곳곳에 적절하게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감정은 ‘1Q84'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포인트이다.
책의 후반부에 가서야 덴고는 이 세계가 변했음을 알게 된다. 자신의 소설에 묘사했던 것처럼 두 개의 달이 뜨는,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그런 세계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세계의 어딘가에는 아오마메가 존재한다. 또한 덴고에게는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다. 그는 생각한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자고.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찾겠다고 결심한다.
아오마메를 찾자, 덴고는 새삼 마음먹었다. 무슨 일이 있건, 그곳이 어떤 세계이건, 그리고 그녀가 누구이건.
‘1Q84' 제3권이 내년 여름에 출간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재 이 소설은 완결된 상태가 아니다. 2권의 결말이 아오마메를 찾기로 한 덴고에서 끝났으니까 아마도 3권은 두 사람의 재회를 다루지 않을까 하는 예측을 조심스레 해본다. 완전한 결말을 기다리는 동안 하루키가 1,2권에 숨겨둔 수많은 퍼즐들을 풀어보자.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꾸며낸 세계,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믿는다면 모두 다 진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