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이하 어나벨)를 베스트셀러로 만든 것은 무엇일까.
우선 신경숙이라는 작가의 이름값이 소설의 인기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서정적이고 은유적인 문체로 ‘청춘’의 정의를 이야기하는 솜씨도 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방황하는 젊음을 그리는 장면은 언뜻 생각하면 급류처럼 사납고 혼란스러울 것 같은데도 실제는 독자의 상상과 많이 다르다. 마지막까지 고민하고 자문하는 인물들, 우리가 또 하나의 그들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이 소설을 제대로 읽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약 2년 전,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대히트했던 이유가 모든 이들이 간직하고 있는 엄마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다면 ‘어나벨’의 원동력은 누구나 앓아봤을 혹은 앓고 있을 청춘의 열병이다.
그것은 질풍노도처럼 밀려온다.
대학 때 은사인 윤교수가 병원에 입원해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전화를 받은 정윤은 윤교수와의 첫 대면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때 그녀는 스무 살이었다. 윤은 스무 살의 자신을 추억한다. 대학 동창인 명서, 미루, 그리고 또 한 명의 친구인 단이와 함께 했었던 젊은 날, 이야기는 다시 오지 않을 그 날로 시간을 되돌리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단테는 “오늘이라는 날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했다. 나는 오늘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 것일까?
신경숙 작가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이 소설에서 어쩌든 슬픔을 딛고 사랑 가까이 가보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이 읽히기를, 비관보다는 낙관 쪽에 한쪽 손가락이 가 닿게 되기를 바란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병을 앓던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갈 필요가 없는 병원의 대기실에 가 앉아 있었고 학교를 휴학한 윤이 단이와 첫 키스를 한 뒤에 소리를 내며 웃는 것이나 아픈 기억이 있는 집에 윤과 함께 가보는 마루의 모습 등은 저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게 하는 장치이다. 알게 모르게 배치되어 있는 장치와 의미들을 탐색하는 것도 어나벨을 읽는데 재미를 더해준다.
이 소설은 최신작임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약간 엔틱하다. 인터넷, 휴대폰 대신 전화기와 노트가 등장하는 어나벨은 독자의 나이에 따라 각기 조금씩은 다른 느낌을 줄 것이다. 윤이 마음속에서 의문이 솟아날 때마다 하는 행동인 도시 걷기, 타자기,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 어떤 이는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이는 읽으면서 의아해할 것이 분명하다. (사실 나도 그러했으니 말이다.)
4명의 주요등장인물 중 굳이 우선순위를 따져보자면 제1순위는 윤, 2순위는 명서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소설 전체적으로 4명은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서로가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각자의 상처를 지니고 있으며 상대를 의지했고 아픔이 치유, 회복되기를 바랐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시간은 언제나 밀려오지만 똑같은 날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젊은 날에 인식하고 있었다면 뭔가 달라졌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랬다면 누군가는 작별하지 않고 누군가는 살아남았을지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또 다른 일이 시작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p. 11)
표지를 인상적으로 장식한 그림에 대해 간략히 적어볼까 한다. 그 그림은 ‘존 앳킨슨 그림쇼’라는 화가의 ‘와피데일’(영국의 한 골짜기 지명)이라는 작품이다. 작가가 직접 고른 표지여서 더 그런지도 몰라도 이 소설과 아주 잘 어울린다. 그러고 보면 요즘의 책 표지들은 예사롭지가 않아 보인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는 의미심장한 문장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끝으로 적어볼까 한다. 청춘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음미해보면 좋을 듯하다.
-여러분은 각기 크리스토프인 동시에 그의 등에 업힌 아이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험난한 세상에서 온갖 고난을 헤쳐나가며 강 저편으로 건너가는 와중에 있네. 내가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종교 애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야. 우리 모두는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으로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는 여행자일세. 그러나 물살이 거세기 때문에 그냥 건너갈 수는 없어. 우리는 무엇엔가에 의지해서 이 강물을 건너야 해. 그 무엇이 바로 여러분이 하고자 하는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들이기도 할 테지. 지금 여러분은 당장 그것이 여러분을 태워서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게 해주는 배나 뗏목이 되어 줄 것으로 생각할 거야.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이 여러분을 태워 실어나르는 게 아니라 반대로 여러분이 그것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p. 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