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들썩했던 소문은 고3 수험 생활과 모의고사에 잦아들었다. 희진의 말처럼 남 이야기를 수군거리는 것은 자신에게 집중할 일 없는 사람들의 가벼운 유흥에 불과했다.
"네 어두운 그늘까지 사랑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 말을 들으니 해가 내리쬐는 한낮인데도 어두운 그늘이지는 듯했다. 도담은 목적 없이 캠퍼스를 걸었다. 소나기가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비에 우산 없는 남학생들이 저들끼리 욕설을 뱉고 웃으며 뛰어갔다. 그들이 어리게 느껴졌다. 그들과비슷한 나이인 태준은 남들처럼 추억을 만들고 웃고 즐기는연애를 바랄 뿐이었다. 상대방의 지옥을 짊어진다는 선택지는없었다. 연애라는 건 상대방이라는 책을 읽는 거라고, 그렇게두 배의 시간을 살 수 있는 거라고, 태준은 말한 적이 있었다. 도담은 자신이 펼치고 싶지 않은 책, 끝까지 읽고 싶지 않은책처럼 느껴졌다. 전부 말뿐이었다.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은태준에게 자신이 그토록 상처를 받은 게 놀라웠다.
사랑이면 다 되는 걸까. 도담은 술을 마시며 창석을 생각했다. 엄마는 내가 해솔과 만나서는 안 된다는데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고 싶었다. "예지야, 넌 감정에도 정당함이 있다고 생각해?" 술에 취한 도담이 예지에게 물었다. "감정에 정당함이 있냐고?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배신감보다도 관계를 잃었다는 게 더 괴롭더라고요. 그 이후로 다시는 그런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런 과거 때문에 연애는 안 하고 애매모호한 만남만 한다고요? 에이, 핑계 좋네요." 어쩐지 도담의 입에서는 냉소적인 말이 튀어나왔다. 승주가 사랑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남자이면서 그런 자신을 잘포장한 것 같았다. "그런가요?" 승주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반문했다. 도담은 아차 싶었다. 무례했다. 어쩌면 승주는 자신의 가장어려운 문제를 이야기한 걸 수도 있었다. 자신이 겪은 일과 비교하며 남의 상처를 가볍게 치부하는 냉소적인 태도는 20대내내 도담이 극복하려 했던 것이었다. 상처를 자랑처럼 내세우는 사람은 얼마나 가난한가. 나는 한 치도 변하지 않았구나. 도담은 익숙한 자기혐오에 휩싸였다.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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