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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빅 픽처. 제목처럼 영어를 쓰는 미국사람이 쓴 미국 소설이다. 더글라스 케네디라는 작가를 모르지만 그의 문장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을 준다. 이 느낌을 나는 '미국소설의 전통'이라고 뭉뚱그려 명명하는데, 이러한 표현을 쓸 때마다 한편으로는 내가 미국소설의 전통을 얼마나 알고 있다고 전통 운운하는지 가당찮다는 생각을 한다. 게다가 나는 영어에는 까막눈인 조선인 아닌가! 당연히 그의 영어로 된 문장을 보지 못했고, 따라서 그의 문장에 대해 뭐라고 끄적거리는 것은 매우 꼴값짓이다. 차라리 미국소설 번역가들의 문체와 그들의 번역 메뉴얼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고 정확한 비판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으니, 내 느낌을 정확하게 옮기는 것에 의의를 두자. 결국 이 글은 가당찮은 결론에 이를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떠올려 보자. 아니면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려 보든가. 그것도 아니면 뭐 존 그리샴이나 스티브 킹 같은 요즘 작가(?)의 문장을 떠올려보는 것도 괜찮겠다. 무엇이 떠오르는가?(지금 누구한테 묻고 있는 거야!) 짧지만 과장된 대화체, 욕설, 동부와 서부에 대한 풍자들, 여러가지 취향 및 소비문화에 대한 끝없는 나열, 대충 이 정도가 생각난다. 그리고 앞에서 나열한 것들을 그대로 <빅 픽처>라는 소설의 문장에 대입시켜보면 뭐 대충 값이 떨어진다. 똑같지! 이건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얘네들의 사고방식 문제인 것 같다. 범위를 확장해서 이 소설에도 자주 등장하는 잡지들의 문체를 생각해보는 것도 이 문제를 고려하는 데에 유익할 것이다. 게다가 그런 잡지들의 한국어판 문장들을 생각해보라! 이죽거리되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라는 듯 쿨~한 편집장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지 않은가. 미국소설 번역투 문장 따라잡기는 이 정도로 해두자.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문제는 '인간은 과거와 단절할 수 있는가?' 혹은 '과거를 껴안고 현재를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다. 이 소설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과거와 단절할 수 없으며, (자살하거나 타살되지 않고)그것을 껴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우연과 몇몇 인물들의 개입이 필요하다.
주인공은 사진 찍는 일을 사랑하지만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변호사가 된다. 두둑한 연봉에 예쁜 부인과 귀여운 아들, 사회에서 존경받는 전문직 종사자, 누구나 꿈에 그리는 그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누구나 이러한 삶을 꿈꾸는가? 아닌 사람들이 있다. 예술이니, 진리니 뭐 이런 거에 목 메다는 인간들이 어디든 꼭 있기 마련이며, 미국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참 아이러니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수없이 듣는다. 서울에서 잘 나가던 전문직 종사자가 아무도 없는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 원시인처럼 사는 이야기. 사람들은 항상 이러한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 그래서 통속적인 구도의 이야기가 먹히는 것이다. 부인은 바람을 피고 남편은 부인의 정부가 누군지 염탐하거나 이혼소송이 어떻게 진행될 지 고민한다. 이 얼마나 통속적인 구도인가. 그러나 통속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지금/이곳의 인간심리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속성 아니겠는가. 여기까지에는 독자들의 시선을 붙들기 위한 다양한 수작들이 녹아들어 있다. 흔히 보거나 들을 수 없는 전문직 종사자들의 뒷이야기를 엿듣는 것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유명인들의 화려한 생활과 그들만의 언어는 낯선만큼 매혹적이다. 이제 웬만큼 독자의 눈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작가는 자신이 하려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아니, 인물들을 조종하기 시작한다. 일단 좀 지루할 수 있으니, 사건을 하나 큰 걸 만들자! 그래서 주인공은 부인의 정부를 죽인다. 그리고 그 뒷처리하는 과정을 아주 열심히 디테일하게 설명해준다.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봐! 내가 얼마나 공을 들여 시체를 쪼개고 폭탄을 만들고 법률 상식들을 나열하는지 보라구! 이게 소설이든 뭐든 내가 이 정도 했으면 할만큼 한 거라구!' 그러니까 이 소설이 1인칭 주인공 시점인 건 문제를 삼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부인의 정부를 죽이고, 그 정부로 변신하여 남은 인생을 살다가 우연한 기회로 유명 사진가가 되었지만 또 다시 몹쓸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정부로는 죽고) 또 다른 누군가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어떻게 있을 수 있으며, 그 내면이 이럴 수 있는가, 뭐 이런 식의 질문은 사양하겠다는 것이다. 이건 미국소설이니까! 이건 일종의 게임이다. 현실에서 허용될 만한 비현실적인 이야기의 연쇄를 만들어내는 게임.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주 평온했다.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구도로 볼 때 절대 불쾌한 결말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것이다. 예상대로 주인공은 또 다른 상처를 가지고 있는 인물에 의해 구제된다. 평범한 수준의 윤리의식을 갖고 있는 독자들이 딱 허용할 수 있을 만큼의 삶을 주인공에게 남겨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설의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 할텐데... 사실 이 부분을 말하는 것은 좀 껄끄럽다. 가장 먼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 작가의 글쓰기 방식 혹은 미국소설의 전통과 관련된 것인데... 과연 내가 서두에서 밝혀둔 저런 고상한 문제를 작가가 과연 심각하게 고려했을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이건 미국소설가에 대한 편견 때문이 아니라, 내가 바보가 되기 싫어서일 것이다. 만약 이 작가가 미국소설의 전통(?)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고 그 흐름 속에서 그들의 룰에 따라 서사를 만들어낸 것인데, 거기에 동양의 촌스런 독자가 조선문학의 전통이 갖는 윤리의식으로 무장하여 비판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 의문이 드는 것이다. 촌데레가 되는 것을 무릅쓰고 생각해보면, 작가의 윤리의식은 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주인공을 죽일 순 없잖아?'
'누구냐 넌?'
'니가 만들어낸 더글라스 케네디다;'
'오~그럴싸해'
'뭐가 문제야?'
'글쎄, 내가 보기엔 주인공이 너무 냉정해. 저런 상황에서 어쩌면 저렇게 침착할 수 있지?'
'이봐, 저 친구는 뉴욕에서도 잘 나가는 변호사라구. 나는 플롯의 논리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았어.'
'내 말이 그 말이야. 저건 뉴욕의 잘 나가는 변호사에게만 가능한 일이야. 게다가 굉장히 많은 우연이 필요하지.'
'세상에 유별난 직업은 없어. 변호사는 좋은 직업이잖아. 그리고 세상은 어차피 우연투성이야.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그 우연에서 필연을 찾아내고 있지.'
'좋은 말이군. 우연에서 필연을 찾아낸다라... 물론 그 '필연'이라는 말은 사후적인 인식이겠지?'
'네가 무슨 말을 할 지 알고 있어. 자기합리화라고 말하고 싶겠지. 하지만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언제까지나 지금/이곳에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것 아닐까?'
'물론 그렇지. 그리고 너는 지금/이곳에서 가장 윤리적인 생존 방식을 주인공에게 부여한 것이고. 죄와 벌은 19세기적인 방식이니까. 안 그래?'
'알았어. 빌어먹을 죄와 벌도 좋고 자기합리화도 좋아. 그럼 너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니?'
'글쎄... 나에게도 뭔가 뚜렷한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정말 저런 인물이 존재한다면, 자신의 죄의식을 떨치려는 노력만큼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인식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단지 밤에 잠을 못 자거나, 약물을 복용한다거나 그런 방식이 아니라 그 죄에 대한 치열한 탐색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어. 저 상태라면 주인공은 기계가 되고 말거야. 과거를 껴안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기억하지만 현재를 위해 과거는 망각하고 치유해야 할 무언가로 규정되는 것 같아. 그 둘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고 봐.'
재미없네. 그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