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꾼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작가의 소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친다. 그래서 유쾌한 이야기가 이어지더라도 항상 안타까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겨야 한다. 게다가 이번에는 장편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지 모르는 일이다. 등장 인물이 한 명 한 명 소개될 때마다 이 사람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다음 이야기를 읽어 나갔다. 큰 삼촌은 안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1인 중 한 명이었지만 아쉽게도 왠지 죽어야 하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안 죽을 것 같은 인물이었지만 죽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너무 멀리까지 가셨다. 왜 가셨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죽었다.(어머니와 아버지는 좀 마음에 안 든다. 멀리 떠난 것도, 첨성대에 깔려죽은 것도)

이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으며 각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에피소드들은 잘 짜여진 시트콤처럼 재밌게 굴러간다. '편의점에서의 미친 여자 구경 편'은 정말 끝내줬다. 늦은 새벽 깜깜한 세상 속에 홀로 빛나고 있는 편의점은 그것 자체로 멋진 무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관객이 없는 것이 아쉽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이 소설 속 즐거운 에피소드들은 항상 쓸쓸한 사연들을 품고 있는 것이어서 깔깔 웃을 수는 없다. 방심했다가는 또 누군가 갑작스럽게 죽어나가니까. 아이를 지켜봐주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떠났다.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죽음을 본 아이는 조숙하지만 엉뚱한 청소년이 되었다. 너무 많은 죽음을 보았다는 말 보다는 많은 삶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죽는 것이 삶이다'라고까지 말 할 필요는 없겠지만 남겨진 사람 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이들의 웃음과 친절과 서운함과 소심함과 눈물과 복수와 분노와 주도면밀함과 밝음과 어둠과 고백과 관찰과 편지와 아둔함과 민첩함과 사랑과 유쾌함과 숨쉬기와 일관성 때문에 이 소설은 그럭저럭 책값을 했다고 생각한다. 잠든 사과나무도(멋진 장면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아리송한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의 삶을 구경하며 사는 것이 정말 인생인 걸까? 추측컨대 보통 사람들의 인생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소설가라는 사람들의 삶이 이런 것이지 않을까? 이 소설가는 그 중에서도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데 일가견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왜 이 소설은 유독 허한 걸까. 점점 더 심해질 것 같다. 작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더블 side B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창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 많은 일들이 일어나도 창 안에서 지켜보는 마음은 불평스럽다. 세상을 바꿀 듯한 일도 결코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그 일들이 세상을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는 듯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는 스스로에게도 불만스럽고, 무언가를 바꾸지 못하지만 그래도 붐붐하고 있는 일들 사이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에 풀이 죽는다. 폴짝 뛰어오르다보면 어느 순간 저 우주공간으로 도약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은 어느 비좁은 틈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기에 이렇게 주저 앉아 할딱거리며 들숨날숨 날숨들숨 호흡을 이어가다보면 저 멀리서 들려오는 기타소리는 마지막 엔딩을 향하여 피치를 올리고, 사라져가는 엠프 소리에 낯선 개구리 소리가 오버랩되는 것이다. 저 개골개굴 개구리들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 혁신이 필요하지만 그런 것은 자동차나 휴대폰을 만드는 대기업의 구조조정본부 회의실에서나 사용하는 것이기에 활력이라는 말로 바꿔 머릿속에서 떼구르르 굴려보지만, 아 서른이구나, 서른이라는 생각이 들자 정말 활력이 필요한 나이가 슬슬 다가오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뭔가 홍삼원이라도 먹어야 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에 지갑을 열어보지 않았지만 지갑 속에는 만이천원이 들어 있을 것이기에, 그것이 가지고 있는 현금의 전부이며, 앞으로도 당분간 이 상태가 계속될 것이기에, 활력이 아닌 혁신도 아닌 개과천선도 아닌 자유도 아닌 민주주의도 아닌 법인화 반대도 아닌 법인화 찬성도 아닌 학생도 아닌 직장인도 아닌 연구자도 아닌 애호가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닌 그렇다고 아무것이나 할 때가 다가왔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결국 부정문이나 부정사나 부정어나 부정부패나 부정 결핍인가. 부정과 결핍 사이에서 정신을 잃고 헤매다보면 시간은 새벽을 향해, 4시, 잠들 때까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        

 

박민규. 허무주의자이자 (자기비판을 넘어선)자기모멸적인 작가의 아름답고 추한 세계에 대한 상식세계 독자와의 우주적인 밀고 당기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녁의 구애 - 2011년 제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편혜영은 변하고 있는 걸까? 작년인가 편혜영의 변화, 혹은 변화의 징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아오이 가든', '사육장쪽으로', '저녁의 구애'를 한 줄로 세워놓으면 변화의 흔적이 분명 보인다. 몇몇 인터뷰에서도 확인되는 것처럼 작가는 '아오이 가든'의 그로테스크한 세계(일종의 알레고리라 해도 좋을)에서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교외나 중소도시 같은 현실의 세계로 이동하는 듯하다. 그녀의 출발점이 아오이 가든이라는 환상적 공간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편혜영의 소설은 현실로 이동하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상적 공간에서 현실적 공간으로의 이동이라는 관점에서 그녀의 소설을 설명하는 것은 반쪽 독해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편혜영이 등단과 함께 주목받았던 것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신선함 혹은 새로움 때문이었다. 어떤 이(사실 대부분)는 그러한 이미지를 현실에 대한 은유로 읽기도 했다. 그런데 편혜영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것를 현실에 대한 은유로 이해할 경우 편혜영의 '변화'는 이중으로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편혜영의 소설에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점차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편혜영의 변화는 작가의 개성 상실로 이해될 공산이 커진다. 둘째, 편혜영이 지금까지 보여준 소설가로서의 역량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저녁의 구애'가 보여준 성취 때문이다. '저녁의 구애'라는 작품집에 수록된 단편들의 완성도는 긍정적인 의미로 근래 한국소설에서 보기 힘들 정도의 수준이었다. 서사의 흐름을 손에 쥔 듯한 플롯의 완성도, 그것을 균형잡힌 분위기로 만들어낸 어조와 호흡 모두 고수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와 함께 초기부터 유지되어 온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정체 역시 분명해지는 느낌이다. 여전히 편혜영의 소설들은 그로테스크하다. 초기 소설의 그것이 피가 난무하고 괴물들이 튀어 나오는 과잉된 그로테스크함이었다면 지금 편혜영의 소설은 조용하게 그로테스크하다. 그러나 초기의 소설에서 과잉된 이미지를 걷어내면 본질은 동일하다. 편혜영의 소설에 나타나는 그로테스크함은 예전에도 지금도 현실을 은유하는 공간과 이미지의 특이성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 속에 존재하는 괴물같은 측면의 미묘한 드러남과 감춤 때문에 발생한다. 인간의 감정은 현실 속에서 만들어지고 학습되는 것이라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나에게 타인의 감정은 그리고 나의 감정은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동일성의 원환이라는 현실 속에 갇혀 있다는 평가는 정당하지만 그 속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진폭은 결코 동일하게 묶이지 않는다. 이해불가능해보이지만 현상하는 타인의 존재와 감정에 대한 작가의 관찰과 묘사는 그래서 소중하다. 편혜영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유령이 조선의 소설판을 배회하고 있다. 그것은 소년주의이다. 일찍이 경부선철도가 놓일 무렵 파도를 차알싹 차알싹 맞아가며 나폴레옹, 진시황 엿먹이던 소년이 등장한 이래, 이렇게 소년들이 활개치는 세상이 또 있었던가. 갑자기 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성장소설이 판을 치고 있다. 물론 간혹 중간에 죽거나 정신줄 놓아버리는 소년들도 있지만. 어쨌든 수많은 소년들이 무언가 자신만의 아이템을 들고 소설판을 배회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청소년 독서층 수요의 폭발적 증가가 아마도 이러한 현상의 1차적 원인인 것 같다. 청소년 독서층 수요의 증가는 대입시험에서의 논술 반영 비중 확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된다. 대입시험에서의 논술 반영 비중 확대는 수능시험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조치였다. 수능시험은 객관식 문제이기 때문에 응시자의 논리적 사고 과정을 확인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특정 사안에 대한 응시자의 사고 과정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논술시험이 수능시험의 보완제로서 적절했던 것이다. 그러자 학부모들은 논술시험에 대한 준비를 위해 아이들을 논술학원에 보내거나 어릴 때부터 책 읽는 연습을 시키기 시작한다. 그 결과 청소년문학은 대박상품이 되었다. 그러나 현하 소년주의의 범람이 단지 청소년문학의 대박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한다. 지금부터 그 다른 이유를 생각해보자.

 

1.IMF: 경제가 파탄나면서 가정도 파괴되고 있다. 소년들은 방황한다.

2.2002년 월드컵: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3.노무현의 등장과 죽음: 드라마틱한 스토리와 비극적 결말은 기본

4.이명박의 역대급 삽질: 소설을 꾸밀 수 있는 다양한 세부 장식품 제공  

5.용산참사

6.신자유주의의 세계정복: 더 이상 외부는 없다. 없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7.SNS: 감성 완충된 한 줄이면 충분해.

8.힉스입자 발견 임박: 우주는 넓은데,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그 다른 이유'를 생각하다보니 답은 하나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작가들의 다양한 조건과 그에 대한 반응이 이처럼 수많은 소년들을 낳은 것이겠지. 다양한 조건들이 작가들로 하여금 소년을 상상하게 만들었다는 것, 이것이 중요할 것이라 막연하게 짐작한다. 소년을 상상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것, 그것은 길들여지지 않음, 끊임없는 질문이다. 김연수를 읽을 때 가끔 소년이 그려지는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이번 김연수의 소년은 답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다. 어른들도 알지 못하는 답을 소년이 알고 있는 이 상황. 김연수의 이전 소설에 등장하는 어른들이 소년같았다면 원더보이의 소년은 오히려 어른같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이것이 좋은 현상인지 아닌지는 다음 소설을 통해서나 확인할 수 있겠지만 뭔가 느낌이 불길하다. 불길하다고 쓰고 나니 정말 불길하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빅 픽처. 제목처럼 영어를 쓰는 미국사람이 쓴 미국 소설이다. 더글라스 케네디라는 작가를 모르지만 그의 문장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을 준다. 이 느낌을 나는 '미국소설의 전통'이라고 뭉뚱그려 명명하는데, 이러한 표현을 쓸 때마다 한편으로는 내가 미국소설의 전통을 얼마나 알고 있다고 전통 운운하는지 가당찮다는 생각을 한다. 게다가 나는 영어에는 까막눈인 조선인 아닌가! 당연히 그의 영어로 된 문장을 보지 못했고, 따라서 그의 문장에 대해 뭐라고 끄적거리는 것은 매우 꼴값짓이다. 차라리 미국소설 번역가들의 문체와 그들의 번역 메뉴얼에 대해 공부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고 정확한 비판 방법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으니, 내 느낌을 정확하게 옮기는 것에 의의를 두자. 결국 이 글은 가당찮은 결론에 이를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떠올려 보자. 아니면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려 보든가. 그것도 아니면 뭐 존 그리샴이나 스티브 킹 같은 요즘 작가(?)의 문장을 떠올려보는 것도 괜찮겠다. 무엇이 떠오르는가?(지금 누구한테 묻고 있는 거야!) 짧지만 과장된 대화체, 욕설, 동부와 서부에 대한 풍자들, 여러가지 취향 및 소비문화에 대한 끝없는 나열, 대충 이 정도가 생각난다. 그리고 앞에서 나열한 것들을 그대로 <빅 픽처>라는 소설의 문장에 대입시켜보면 뭐 대충 값이 떨어진다. 똑같지! 이건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얘네들의 사고방식 문제인 것 같다. 범위를 확장해서 이 소설에도 자주 등장하는 잡지들의 문체를 생각해보는 것도 이 문제를 고려하는 데에 유익할 것이다. 게다가 그런 잡지들의 한국어판 문장들을 생각해보라! 이죽거리되 그 정도는 문제도 아니라는 듯 쿨~한 편집장의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지 않은가. 미국소설 번역투 문장 따라잡기는 이 정도로 해두자.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문제는 '인간은 과거와 단절할 수 있는가?' 혹은 '과거를 껴안고 현재를 잘 살아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다. 이 소설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과거와 단절할 수 없으며, (자살하거나 타살되지 않고)그것을 껴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우연과 몇몇 인물들의 개입이 필요하다.  

주인공은 사진 찍는 일을 사랑하지만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변호사가 된다. 두둑한 연봉에 예쁜 부인과 귀여운 아들, 사회에서 존경받는 전문직 종사자, 누구나 꿈에 그리는 그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누구나 이러한 삶을 꿈꾸는가? 아닌 사람들이 있다. 예술이니, 진리니 뭐 이런 거에 목 메다는 인간들이 어디든 꼭 있기 마련이며, 미국 역시 마찬가지일 거다. 참 아이러니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수없이 듣는다. 서울에서 잘 나가던 전문직 종사자가 아무도 없는 강원도 산골에 들어가 원시인처럼 사는 이야기. 사람들은 항상 이러한 두 마음을 품고 살아간다. 그래서 통속적인 구도의 이야기가 먹히는 것이다. 부인은 바람을 피고 남편은 부인의 정부가 누군지 염탐하거나 이혼소송이 어떻게 진행될 지 고민한다. 이 얼마나 통속적인 구도인가. 그러나 통속적이라는 것은 그만큼 지금/이곳의 인간심리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속성 아니겠는가. 여기까지에는 독자들의 시선을 붙들기 위한 다양한 수작들이 녹아들어 있다. 흔히 보거나 들을 수 없는 전문직 종사자들의 뒷이야기를 엿듣는 것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유명인들의 화려한 생활과 그들만의 언어는 낯선만큼 매혹적이다. 이제 웬만큼 독자의 눈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작가는 자신이 하려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아니, 인물들을 조종하기 시작한다. 일단 좀 지루할 수 있으니, 사건을 하나 큰 걸 만들자! 그래서 주인공은 부인의 정부를 죽인다. 그리고 그 뒷처리하는 과정을 아주 열심히 디테일하게 설명해준다.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봐! 내가 얼마나 공을 들여 시체를 쪼개고 폭탄을 만들고 법률 상식들을 나열하는지 보라구! 이게 소설이든 뭐든 내가 이 정도 했으면 할만큼 한 거라구!' 그러니까 이 소설이 1인칭 주인공 시점인 건 문제를 삼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부인의 정부를 죽이고, 그 정부로 변신하여 남은 인생을 살다가 우연한 기회로 유명 사진가가 되었지만 또 다시 몹쓸 운명의 장난으로 인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정부로는 죽고) 또 다른 누군가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어떻게 있을 수 있으며, 그 내면이 이럴 수 있는가, 뭐 이런 식의 질문은 사양하겠다는 것이다. 이건 미국소설이니까! 이건 일종의 게임이다. 현실에서 허용될 만한 비현실적인 이야기의 연쇄를 만들어내는 게임.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주 평온했다.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구도로 볼 때 절대 불쾌한 결말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것이다. 예상대로 주인공은 또 다른 상처를 가지고 있는 인물에 의해 구제된다. 평범한 수준의 윤리의식을 갖고 있는 독자들이 딱 허용할 수 있을 만큼의 삶을 주인공에게 남겨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설의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 할텐데... 사실 이 부분을 말하는 것은 좀 껄끄럽다. 가장 먼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 작가의 글쓰기 방식 혹은 미국소설의 전통과 관련된 것인데... 과연 내가 서두에서 밝혀둔 저런 고상한 문제를 작가가 과연 심각하게 고려했을까, 하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이건 미국소설가에 대한 편견 때문이 아니라, 내가 바보가 되기 싫어서일 것이다. 만약 이 작가가 미국소설의 전통(?)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고 그 흐름 속에서 그들의 룰에 따라 서사를 만들어낸 것인데, 거기에 동양의 촌스런 독자가 조선문학의 전통이 갖는 윤리의식으로 무장하여 비판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 의문이 드는 것이다. 촌데레가 되는 것을 무릅쓰고 생각해보면, 작가의 윤리의식은 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주인공을 죽일 순 없잖아?'  

'누구냐 넌?'  

'니가 만들어낸 더글라스 케네디다;'

'오~그럴싸해' 

'뭐가 문제야?' 

'글쎄, 내가 보기엔 주인공이 너무 냉정해. 저런 상황에서 어쩌면 저렇게 침착할 수 있지?' 

'이봐, 저 친구는 뉴욕에서도 잘 나가는 변호사라구. 나는 플롯의 논리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았어.'  

'내 말이 그 말이야. 저건 뉴욕의 잘 나가는 변호사에게만 가능한 일이야. 게다가 굉장히 많은 우연이 필요하지.' 

'세상에 유별난 직업은 없어. 변호사는 좋은 직업이잖아. 그리고 세상은 어차피 우연투성이야.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그 우연에서 필연을 찾아내고 있지.' 

'좋은 말이군. 우연에서 필연을 찾아낸다라... 물론 그 '필연'이라는 말은 사후적인 인식이겠지?' 

'네가 무슨 말을 할 지 알고 있어. 자기합리화라고 말하고 싶겠지. 하지만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언제까지나 지금/이곳에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것 아닐까?' 

'물론 그렇지. 그리고 너는 지금/이곳에서 가장 윤리적인 생존 방식을 주인공에게 부여한 것이고. 죄와 벌은 19세기적인 방식이니까. 안 그래?' 

'알았어. 빌어먹을 죄와 벌도 좋고 자기합리화도 좋아. 그럼 너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으면 좋겠니?' 

'글쎄... 나에게도 뭔가 뚜렷한 대안이 있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정말 저런 인물이 존재한다면, 자신의 죄의식을 떨치려는 노력만큼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인식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단지 밤에 잠을 못 자거나, 약물을 복용한다거나 그런 방식이 아니라 그 죄에 대한 치열한 탐색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어. 저 상태라면 주인공은 기계가 되고 말거야. 과거를 껴안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기억하지만 현재를 위해 과거는 망각하고 치유해야 할 무언가로 규정되는 것 같아. 그 둘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고 봐.' 

 

재미없네. 그만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