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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구애 - 2011년 제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평점 :
편혜영은 변하고 있는 걸까? 작년인가 편혜영의 변화, 혹은 변화의 징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아오이 가든', '사육장쪽으로', '저녁의 구애'를 한 줄로 세워놓으면 변화의 흔적이 분명 보인다. 몇몇 인터뷰에서도 확인되는 것처럼 작가는 '아오이 가든'의 그로테스크한 세계(일종의 알레고리라 해도 좋을)에서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교외나 중소도시 같은 현실의 세계로 이동하는 듯하다. 그녀의 출발점이 아오이 가든이라는 환상적 공간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편혜영의 소설은 현실로 이동하는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환상적 공간에서 현실적 공간으로의 이동이라는 관점에서 그녀의 소설을 설명하는 것은 반쪽 독해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편혜영이 등단과 함께 주목받았던 것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신선함 혹은 새로움 때문이었다. 어떤 이(사실 대부분)는 그러한 이미지를 현실에 대한 은유로 읽기도 했다. 그런데 편혜영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것를 현실에 대한 은유로 이해할 경우 편혜영의 '변화'는 이중으로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첫째,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편혜영의 소설에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점차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편혜영의 변화는 작가의 개성 상실로 이해될 공산이 커진다. 둘째, 편혜영이 지금까지 보여준 소설가로서의 역량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저녁의 구애'가 보여준 성취 때문이다. '저녁의 구애'라는 작품집에 수록된 단편들의 완성도는 긍정적인 의미로 근래 한국소설에서 보기 힘들 정도의 수준이었다. 서사의 흐름을 손에 쥔 듯한 플롯의 완성도, 그것을 균형잡힌 분위기로 만들어낸 어조와 호흡 모두 고수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그와 함께 초기부터 유지되어 온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정체 역시 분명해지는 느낌이다. 여전히 편혜영의 소설들은 그로테스크하다. 초기 소설의 그것이 피가 난무하고 괴물들이 튀어 나오는 과잉된 그로테스크함이었다면 지금 편혜영의 소설은 조용하게 그로테스크하다. 그러나 초기의 소설에서 과잉된 이미지를 걷어내면 본질은 동일하다. 편혜영의 소설에 나타나는 그로테스크함은 예전에도 지금도 현실을 은유하는 공간과 이미지의 특이성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 속에 존재하는 괴물같은 측면의 미묘한 드러남과 감춤 때문에 발생한다. 인간의 감정은 현실 속에서 만들어지고 학습되는 것이라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나에게 타인의 감정은 그리고 나의 감정은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동일성의 원환이라는 현실 속에 갇혀 있다는 평가는 정당하지만 그 속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진폭은 결코 동일하게 묶이지 않는다. 이해불가능해보이지만 현상하는 타인의 존재와 감정에 대한 작가의 관찰과 묘사는 그래서 소중하다. 편혜영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