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지음 / 자음과모음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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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 나는 세 가지 단어에 주목한다. '부디', '않은', '당신' 요렇게 세 가지. '부디'라는 부사는 남에게 청하거나 부탁할 때 간절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니까 김연수는 이 마지막 말을 간절하게 하고 있다. 혹시 '못 알아주면 어쩌지'라는 마음으로. 이 부사는 문장 전체를 꾸미기 때문에 김연수의 메시지 전체를 간절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않은'이라는 동사를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진다. 왜 쓰지 '않은'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할까. 쓰지 않아도 그것을 읽어낼 수 있는 명민한 독자는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대부분의 독자는 이 글을 쓰는 나처럼 소설에 인쇄되어 있는 문자를 통해 나머지 것들을 상상한다. 따라서 독해에 개인차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그 독해의 근거는 어디까지나 인쇄된 활자에 의해 완성된다. 따라서 쓰지 않은 것을 읽어내길 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작가가 이런 수준에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김연수는 김연수라서, 자신이 전달하려는 메시지에 한 번 더 주목해주길 바라는 진정성을 겸손한(확실하지 않다. '못한'이 아니라 '않은'이기 때문에) 태도로 나타내려는 의도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당신'이라는 대명사는 이 메시지의 가장 결정적인 힌트이다. '당신'은 '싸울 때 상대를 얕잡아 부르는 말', '부부 사이에서 상대편을 높여 이르는 말' 등 여러가지 뜻이 있겠지만 문맥 상 '듣는 이를 가리키는 이인칭 대명사'일 가능성이 높다. 화자인 김연수의 말을 듣는 이는 물론 나를 포함한 김연수의 소설을 끝까지 읽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김연수가 자신이 쓰지 '않은' 것을 이해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당신'은 '나'나 '너'처럼 소설에서 소설 이상을 읽어낼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닌, 그의 말 너머에서 그의 마음까지 읽어낼 수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한 독자는 절대자이거나 빠돌이, 둘 중 한 명이다. 그러니까 결국, 내가 하려는 말은 김연수에 대한 나의 빠심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뜻이네. 이 소설을 읽으며 김연수에 대한 나의 빠심이 약해진 가장 결정적 이유는 다음과 같다.

 

김연수의 옛날 장편들을 읽을 때, 뭔가 찝찝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감성이 있었다. 대체로 공감이 찝찝함을 이겼었다. 그런데 새로운 장편을 읽을 때마다, 비슷한 장면이 반복될 때마다 감성이라 부르던 어떤 찝찝함이 점점 구질구질하게 보인다. 옛날 장편을 읽을 때 공감이 찝찝함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충분한 문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충분히 사유된 한 문장은 스토리의 구질구질함을 한 방에 정리한다. 이번 김연수의 소설에서 그런 문장이 존재하는가? 나는 찾지 못했다. 나는 김연수가 다른 스타일의 소설가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렇다고 시인이 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스토리 전체를 한 단계 고양시키는 문장들을 그의 소설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왜 이런 글을 쓰는 것일까. 이 소설을 왜 읽은 것일까? 김연수의 마지막 문장에 이미 다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글을 읽고 쓰는 사람들은 다들 자신의 심연을 갖고 있으며, 한 번쯤 자신의 말이 발치에 떨어져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는 경험을 했을 것이고, 아주 가끔 그 말이 공중에서 요동치며 누군가에게 가닿은 순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신비니, 심연이니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더 좋은 소설을 '간절히' 쓰길 바란다. 이건 정말 얼마 안 남은 당신에 대한 나의 빠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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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문학 146호 - 2012.겨울
민음사 편집부 엮음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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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쳤다. 좋은 날씨다. 청년은 죽고 아저씨들은 살아 남았다. 아저씨들은 청년의 유서를 낭독한다. 아저씨들은 혁명의 노래를 부른다. 아이는 비석을 본다. 나는 열린 창문을 사이에 두고 그들을 구경한다. 1961년 1월 19일. 1984년 5월 21일. 2011년 5월 22일. 24년을 별 탈 없이 살다가도 사는 게 문득 부끄러워지면 죽기도 하는 건가 보다. 28년 동안 잘 살아남아 함께 노래를 부르고 웃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세계를 바꾸기 위해 자살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부끄러워 죽은 것이다. 그러나 세계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가능한 것은 불가해한 방식으로 세계에 파문을 만든다. 한 아저씨가 청년 시절의 유행가를 부른다. 어둠에 묻혀 노래 부르는 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다른 아저씨들이 박수를 치고 후렴을 함께 부른다. 술잔이 돈다.

 

버려진 책들을 주워 모았다. 아깝다는 생각에 한 권씩 주워 모으다 보니 어느새 수십권이 쌓였다. 쌓인 책을 보고 있으면 이 책들을 다 읽을 수 있을까, 왜 버려진 책들 중 이것들을 주워 모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쌓아놓은 책 중에 절반 이상은 읽지 않고 버리게 될 것이다. 어쩌면 전혀 읽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워 모은 책들을 기념하기 위해, 혹은 언젠가 버려질 순간을 미리 회상하기 위해 한 권을 읽기로 했다. 이장욱의 "천국보다 낯선"을 읽었다. 촘촘하게 썼다는 생각을 했다. 복잡하지만 서정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소설을 참 잘 쓴다는 생각, 이미 자신의 세계를 만들었고, 그 속에서 계속 뭔가를 일구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느낌이 좋다. 자기 세계를 만든 소설가들 중에는 간혹 그 세계가 허물어져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거나 세계의 균열을 메우기 위해 억지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이 만든 세계를 좋아했기에 그것이 허물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은 좋지 못하다.

 

왜 이 글을 쓰기 시작했더라. 왜 그 때 그 글을 썼던걸까. 묻고 답한다. 기억하고 싶은 것, 이대로 사라지는 것들을 붙들어두고 싶은 것, 느슨하고 오래 지속될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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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씨의 입문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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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의 소설 속 상황 혹은 상태는 황정은 소설만의 독특함을 형성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다. 삼 년 전부터 낙하하고 있는 상태나 늦은 밤 친척집을 찾아가는 상황, 원령으로 남은 상태, 파도를 기다리는 상황, 말하는 옹기를 숨기고 살아가는 상황, 대피명령이 떨어진 사막같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상황. 익숙한 듯하지만 조금씩 빗나가 있는 상황이나 상태.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황정은 소설의 개성은 인물의 무의미한 이름(혹은 소리)을 통해 강화되기도 한다. 여백이 많은 대화 또한 황정은 소설의 개성을 강화시킨다. 요컨대 황정은의 소설은 스토리가 아니라 상황을 도드라지게 하는 문장을 통해 구성된다. 황정은의 소설은 시적 상황를 지향한다. 따라서 황정은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문장이나 상황을 묵히고 묵혀 시적 보편성을 찾아내고야 마는 집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보편성은 현실에 대한 은유로 읽힐 가능성을 열어놓으면서 동시에 세부를 배제한 기하학적 플롯을 완성한다. 이 앙상한 플롯은 황정은이 만들어낸 세계의 물리학적 법칙이 된다. 소설에서 질서와 개성이 발현되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정은의 소설이 관념적으로 읽히지 않는 것은 황정은이 만들어낸 세계가 너무나 작기 때문이다. 황정은은 스타일리스트로서 확실한 위치를 잡은 듯하다. 여기까지가 황정은을 읽는 합리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독해는 재미가 없다. 

 

음산하고 쓸쓸하며 불쌍한 존재의 이름들. 그 이름들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행위로서의 소설쓰기. 진부하다. 황정은 소설에 대한 평가로서 적절하고도 부적절하다. 황정은 소설 속에 순간적으로 발현되는 분노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분노에 대해 과장된 평가를 내리는 순간 황정은 소설의 질서와 개성은 무너져내릴 것이다. 황정은의 소설은 하나의 완결체로 존재할 뿐 적절한 분석 대상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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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의 제왕
이장욱 지음 / 창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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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역설, 관측을 통해서만 현상은 실재하게 된다는 관념은 양자역학의 결어긋남 상태라는 개념에 의해 붕괴되었다. 즉 이론적으로 죽은 고양이와 산고양이는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나는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나와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나는 결어긋남 상태에 있기 때문에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지금과는 다른 차원 속에서 수 많은 나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갈라지고 있을 것이다.

완전히 고립되지 않는다면 세계는 영향을 받게 마련이며 그 영향으로 인해 결코 존재의 결맞음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완전한 고립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물론 가능한 곳이 있다. 그것은 완벽한 진공상태(어떠한 입자도 존재하지 않는)의 실험실(이것은 불가능하다)이 아니라 바로 활자 위에서이다.

또 다른 해결책이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비트에서 비롯된 존재'라는 주장이다. 우주는 정보로 구성되어 있으며 누군가에게 관측되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다. 우리가 우주에 적응하듯이 우주도 우리에게 적응하고 있으며, 우리가 있기 때문에 우주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보는 빛보다 빠르게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전달하는 것은 빛보다 절대로 빠를 수 없다. 즉 매일 한쪽에는 검은 양말을, 다른 한쪽에는 초록 양말을 신다보면 어느날 자신의 오른발에 검은 양말이 신겨져 있는 것을 보는 즉시 왼발에 초록 양말을 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관측이 불가능한 이유) 즉 하나의 변인은 즉각적으로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친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의 파동으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관측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역설은 해결되었는가? 관측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면 가능해진다. 우리의 인식체계에서 벗어난 것들도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우리는 하나의 주파수를 결정할 수 있고, 그 주파수를 통해 결정되지 않은 주파수들을 생각할 수 있다. 아르마딜로의 공간에서 우리는 이별했지만 만나고 있다. 이것은 비존재가 아니다. 이것은 분명히 존재해야 한다. 망상이나 병이라고 따끔하게 충고할 수도 있겠지만, 그 행위를 허망한 넋두리로 받아들이고 애도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세계를 포맷하지 않고, 리인스톨하지 않고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주체의 확장이나 갱신이 필요하다. 그것 외에 도대체 무엇이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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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궤도 세트 - 전2권 신의 궤도
배명훈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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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곡선으로 이루어진 단 하나의 직선을 생각해 본다. 닮은 것, 익숙한 것, 이미 존재했던 궤도 안에 새겨진 단 하나의 직선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다. 

 

*곡진하고 긴 기도. 그 과정은 마치 약물에 취한 상태와 유사하다. 그 순간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의 단절은 의식되지 않는다. 시간의 물리적 법칙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말은 자유롭고 시간은 방향을 잃는다.

 

*가끔 의식하지 못한 채로 휘파람을 불 때가 있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멜로디가 반복되다가도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멜로디는 새로운 방향으로 자유롭게 변화된다. 그것은 익숙하지만 처음으로 만들어진 파동이다. 이 파동의 변화는 의식의 속도를 초월하여 확장된다.

 

익숙한 이야기들의 복잡한 중첩으로 구성된 것 같은 이 소설은 장르의 장력에 속박되거나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장력을 활용해 명랑한 스토리의 궤적(혹은 세계에 대한 질문 다발)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도망치지도 싸우지도 않는다. 마음 속에 하나의 직선이 존재하는 이상 세상의 법칙은 그 직선의 진행을 정지시킬 수 없다. 남은 문제는 얼마나 오랫동안 자유롭게 날 수 있을 지를 가늠해보는 것 뿐이다. 비행이 멈추는 순간 세상은 너무나 보잘 것 없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기를 걸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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