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의 제왕
이장욱 지음 / 창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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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역설, 관측을 통해서만 현상은 실재하게 된다는 관념은 양자역학의 결어긋남 상태라는 개념에 의해 붕괴되었다. 즉 이론적으로 죽은 고양이와 산고양이는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나는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글을 쓰고 있는 나와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나는 결어긋남 상태에 있기 때문에 만나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지금과는 다른 차원 속에서 수 많은 나는 서로 다른 모습으로 갈라지고 있을 것이다.

완전히 고립되지 않는다면 세계는 영향을 받게 마련이며 그 영향으로 인해 결코 존재의 결맞음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완전한 고립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물론 가능한 곳이 있다. 그것은 완벽한 진공상태(어떠한 입자도 존재하지 않는)의 실험실(이것은 불가능하다)이 아니라 바로 활자 위에서이다.

또 다른 해결책이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비트에서 비롯된 존재'라는 주장이다. 우주는 정보로 구성되어 있으며 누군가에게 관측되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된다. 우리가 우주에 적응하듯이 우주도 우리에게 적응하고 있으며, 우리가 있기 때문에 우주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보는 빛보다 빠르게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전달하는 것은 빛보다 절대로 빠를 수 없다. 즉 매일 한쪽에는 검은 양말을, 다른 한쪽에는 초록 양말을 신다보면 어느날 자신의 오른발에 검은 양말이 신겨져 있는 것을 보는 즉시 왼발에 초록 양말을 신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관측이 불가능한 이유) 즉 하나의 변인은 즉각적으로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친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의 파동으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관측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역설은 해결되었는가? 관측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면 가능해진다. 우리의 인식체계에서 벗어난 것들도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우리는 하나의 주파수를 결정할 수 있고, 그 주파수를 통해 결정되지 않은 주파수들을 생각할 수 있다. 아르마딜로의 공간에서 우리는 이별했지만 만나고 있다. 이것은 비존재가 아니다. 이것은 분명히 존재해야 한다. 망상이나 병이라고 따끔하게 충고할 수도 있겠지만, 그 행위를 허망한 넋두리로 받아들이고 애도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세계를 포맷하지 않고, 리인스톨하지 않고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주체의 확장이나 갱신이 필요하다. 그것 외에 도대체 무엇이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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