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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 마음 사전 아홉 살 사전
박성우 지음, 김효은 그림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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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일곱 살 터울의 오빠는 대학 입학 전 신문 배달로 번  돈으로 내게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을 선물했다. 당시 나는 사춘기 성장통을 겪으며 오빠와 툭 하면 싸우고 남남처럼 지내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오빠의 선물은 조금 뜬금없고 당화스러운 것이었다. 더욱이 오빠의 일기장을 훔쳐보며 엄마에게 오빠의 일거수일투족을 일러바치는 동생이었던지라 나는 선물을 받고도 마음에 찔려 고맙다는 표현도 제대로 전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에게 검사받는 일기가 아니라 내 마음의 일기를 쓰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열네 살 때부터 스물네 살까지 써온 일기는 단순히 일과를 마무리하는 일기가 아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요동치는 감정들을 붙잡고  글로 옮기다 보니, 장소 가리지 않고 펜만 있으면 미친 듯이 휘갈겼다.

<아홉 살 마음 사전>은 단박에 나의 시선을 잡은 책이었다. ​사전 안에 가나다순으로 나열된 마음 말들은 사춘기적 내 마음을 오롯이 담았던 일기장을 떠올리게 했다. 마음을 표현하는 80개의 말은 아이들이 일상에서 겪는 경험을 보기로 들어 소개하고 있다. 첫 번째로 등장한 '감격스러워'라는 말은 "뿌듯하거나 기뻐서 가슴이 뭉클해지다"라는 뜻을 달았다. 그리고 그 아래엔  아이가 새싹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림이 크게 차지하고 있다.  "씨앗을 심은 화분에서 싹이 돋았어."라고 그림에 덧붙은 글은 '감격스러워'의 속뜻에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림 속 아이의 표정은 귀엽고 앙증맞아 자꾸 눈길이 간다. <나는 지하철입니다>의 김효은 작가의 그림이란다. 여기에 보기글을 세 가지 더하니, 마음 말 구성이 꽤 알차졌다.  

똑똑히 봤지? 내 뒤에 두 명이나 있던 거!"

달리기 시합에서 꼴찌만 하다가 드디어 3등을 했을 때의 마음."

'역시 난 머리가 나쁘지 않아.'

2단도 못 외우다가 구구단을 다 외웠을 때 드는 마음


말썽꾸러기인 내가 선생님한테 칭찬받을 때의 마음.


 

 


 

마음 사전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마치 아이들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착각이 든다. 웃음이 새어나오기도 하고, 때론 아이의 속 깊은 마음에 가슴이 아려지기도 한다. 한편, 아이들이 느끼는 다채로운 감정들을 뭉뚱그리거나 외면하거나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된다. '아파'라는 말은 자신과 놀다 팔을 다친 동생을 졸졸 따라가는 오빠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랑 놀다가 동생이 팔을 다쳤어." 라는 상황글은 우리 모두 그림 속 오빠가 되어 함께 아픔을 느끼게 만든다. 물론 저마다 상황에 따라 느끼는 마음 상태도 다르겠지만, 아이와 함께 남이 느끼는 감정을 생각하고, 이야기하기에 이 책은 여러모로 안성맞춤이다.


<아홉 살 마음 사전>의 독자를 단순히 아이에게 한정짓지 말고. 어른도 <아홉 살 마음 사전>을 읽으며 우리 아이의 마음을 더 잘 들여다보는 데에 길잡이로 삼았으면 좋겠다. 지금은 사회적 감수성을 키우는 책이 전혀 아깝지 않은 세상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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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사랑해
아네스 안.프란체스카 안 글, 노석미 그림 / 시공주니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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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바를 뒤집어 입었다. 아뿔싸. 버스 손잡이를 잡으려고 잠바 주머니에 스마트폰을 쑤셔 넣다가 알았다. 민망함도 잠시. 살짝 주위를 돌아보니 다들  스마트폰 보느라 옷을 뒤집어 입은 여자에겐 관심도 없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잠바를 고쳐 입었다. 내 옷의 상표가 이렇게 긴 줄은 몰랐다. 요 얇은 바람막이 잠바가 뭐라고. 상표 안에 글자도 참 빼곡히도 채워넣었다. 정류장 앞 옷 가게  쇼윈도우 도시락 가방과 천 가방을 어깨에 멘 여자가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미용실에서 머리만 좀 잘랐다면, 조금 봐줄만 했는데.. 앞머리는 어느새 새치로 희끗희끗해지고 볼살은 빠져 아래 턱은 도드라졌다. 이런 내가 이젠 익숙해졌다.

 

내 나이 서른 일곱. 결혼한지도 6년이 됐다. 그중 여자로 엄마로 정신없이 오간 3년이라는 시간을 거치며 내 삶은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 일주일 전 1박 2일로 속초로 여행갔다왔다. 마침 결혼기념일이었으나 특별히 서로를 위해 준비한 것은 없었다. 신문지를 깔고 삼겹살과 집에서 가져온 상추와 백김치를 놓았다. 속초에 왔다면 회 한 접시라도 먹어야 할 텐데, 둘 다 회 맛을 모르니, 메뉴는 자연스레 고기로 됐다. 아이는 집에 없는 큰 텔레비전과 침대에 신이 나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남편과 나는 뉴스를 보며 여유있게 저녁을 먹었다. 찬은 없지만, 식사는 꽤 성찬처럼 느껴졌다. 심리적 포만감은 한동안 이어졌다. 이젠 곱게 살기 글러먹었다고 생각한 인생이지만, 이만큼 삶을 꾸려온 내가 내심 기특하고, 대견스러웠다. 물론 함께 이만큼 걸어온 남편에게도 고마움이 컸다. 서로 흔들리지 않고 여기까지 함께 걸어왔다는 것이 감동스러워 혼자 울컥해지도 했다.

 

 

아빠가 엄마를 만났을 때

엄마는 달나라 공주님 같았어.

환한 모습이 눈부시게 아름다웠지.

 

 

엄마가 아빠를 만났을 때

아빠는 해나라 왕자님 같았어.

환한 모습이 눈부시게 멋졌지.

 

<고마워 사랑해> 라는 그림책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문장도 그림도 예쁘다. 첫눈에 반했다 라는 감정을 이토록 그림으로 절묘하게 잘 묘사할 수 있을까. <고마워 사랑해>는 새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그림책이다. 보통 이런 주제의 그림책은 정보 전달에 치중해 어렵고 복잡한 그림이나 설명이 끼어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그림책에서는 새 새명이 태어나는 데 제일 중요한 동력인 사랑이라는 감정을 온전히 전달하는 데 힘을 쓴다. 여기에 노석미의 그림은 그림책의 메시지를 더욱 강렬하고 단순하게 그리고 힘 있게 전달한다.

 

사실, ​고도의 훈련과정이나 다름없는 결혼 생활은 우리의 첫 마음을 잊게 만든다. 남편에게 품었던 강렬한 감정도 사그라들고, 출산하고 처음으로 아이를 안았을 때. 그 벅찬 감정도 희미해진다. 시간이 더 흐르면, 우린 더 서로에게 무덤덤해질 것이다. 이대로 휩쓸렸다간 얼마 안 되는 사랑의 기억들이 다 공기중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불안하다. 오늘도 자꾸만 시간에 저항하는 방법들을 찾게 된다. 그래서일까? 노석미의 그림은. 심장충격기처럼. 잊고 있던 사랑의 리듬을 다시금 찾는 데에 아주 최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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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씨 사계절 그림책
조혜란 지음 / 사계절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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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인데 봄 같지 않다. 미세먼지에 두 발 꽁꽁 묶인 채로 아이와 집안에서 투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돈을 쓰지 않고 아이와 놀 수 있는 방법을 궁리해 보지만 예전만큼 의욕이 나서지 않는다. 아마도 아이보다 내가 더 밖에서 놀고 싶은가 보다. 그렇다고 돈 써가며 키즈카페에 가는 건 내가 싫고. 도서관에 가는 건 아이가 그닥 좋아하지 않으니. 그저 뿌연 하늘이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지난 주말, 월화수목금 내리 우중충한 하늘만 보다가 토요일, 일요일 하늘이 모처럼 파랬다. 공기도 맑았다. 남들처럼 요란스럽게 외출을 못하지만 이대로 집에 있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일요일 오전, 아이와 함께 집앞 동산을 산책했다. 소꿉놀이 장바구니를 들고 산으로 갔다. 흙도 만지고, 쑥 끄트머리도 뜯어보기도 하고,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로 흙 위에 끼적이기도 했다. 삼십 분 정도 봄나들이 하고 산에서 내려오는 나무 계단에 서서 아이와 함께 장바구니에 담은 도토리를 던졌다. 별 거 아닌데도, 아이도 나도 신이 났다.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오지만)

​멀리 나가지 않아도, 돈을 쓰지 않아도 아이를 건강하게 키울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요즘 들어 많이 드는 생각이다. 아이에게 좋은 풍경 보여준답시고 차 끌고 나가면 솔직히 풍경에 대한 감흥보다 음식과 기념품 따위에 마음이 뺏길 뿐이다. 그럼에도 움직이지 않으면 아이에게 아무것도 안해주는 것 같아 미안해진다. 2년마다 떠돌아야 하는 신세라 왕래하는 이웃도 친구도 없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환경도 아니니, 부모 노릇은 더 어렵게만 느껴진다.

 

 

 

 

잠자기 전, 아이와 <상추씨> 그림책을 보았다. 매일 자동차만 찾아대는 아이가 뜨거운 햇빛을 받은 상추들이 픽픽 쓰러져 있는 그림에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빨간 장화를 신은 아이가 상추를 심고 가꾸는 과정을 바느질로 한땀 한땀 표현한 그림책이다. 상추 위에 올려진 고기와 회가 올려져 있는 표지 그림은 무척 익살스럽다. 그런데 정작 네 살배기 아이는 표지 그림에 시큰둥하다. 봄이고 하니 푸릇푸릇한 색감이 돋보이는 그림책을 읽고 싶어 고른 책인데, 의외로 네 살배기 아이의 마음에도 와닿는 모양이다. 요 며칠, 잠자리에서 아이와 <상추씨>를  몇 번이고 읽었다.

 


 

비바람 맞고, 햇빛을 듬뿍 받은 상추가 푸른 잎사귀를 뽐낸다. 물을 뿌려주니 상추가 환하게 웃는다. 덩달아 내 기분도 좋아진다. 어렸을 때 집 마당에 심어놓은 상추밭이 떠올랐다. 여린 잎이 무성하게 돋은 밭은 보기만 해도 기분 좋게 했지만, 그것도 잠시. 순식간에 장대같이 자란 상추가 꽃을 피웠을 때는  단단하고 억세 보이는 상추 줄기가 괜스레 볼썽사납게 느껴졌다.  엄마는 상추고 뭐고 마당을 싹 정리했다. 나에게 상추밭의 기억은 그 즈음에서 멈춰 있다. 상추꽃에서 씨를 받는 장면은 내가 늘 놓쳤던 일상의 한 장면이다. 난 왜 매번 지저분하다고 느겼을까. 상추꽃 안에 숨어 있는 씨앗들을 발견했다면. 좀 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어째 생각의 흐름을 바꿀 지점을 놓친 느낌이다.

 

 

맨 뒷장에 붙어 있는 작은 편지 봉투 안에는 상추씨가 들어 있다. 조만간 주말에 아이와 상추씨를 화분에 심을 생각이다. 대단한 부모가 아니어서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다 해 줄 수 없지만. 앞으로 상추씨를 심는 것처럼 아이와 별 거 아닌 것들로 일상을 채워나갈 것이다. 아이의 인생에서 나와 상추씨 심은 기억은 차츰 뒷전으로 밀려나갈 테지. 그러나 왠지 그 기억들이 아이의 인생의 밑거름이 될 것 같은 밑도 끝도 없는 믿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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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유준재 글.그림 / 문학동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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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이 어둑해진 시각, 터벅터벅 혼자 논길을 걷다가 길 한가운데 작은 나뭇가지를 밟고 놀랐다. 한여름 이 길로 퇴근하다가 뱀을 만난 적이 있었던 터라 연신 아래로 향하던 나의 눈은 나뭇가지 하나하나 예사로이 넘기지 못했다. 가로등 불빛이 전혀 없는 이 길을 걷기 싫어서 귀가 시간이 절로 빨랐고, 더욱이 날이 추워지면서 나는 도보가 아닌 버스를 타고 퇴근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 혼자서 이 길을 걸어가리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사실 이 길에 들어선 이상 돌아가지도 못한다. 버스 정류장은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가 배차 간격이 길기 때문에 몇 대 없는 버스를 오매불망 기다리다가는 아이랑 저녁도 못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내게는 승객을 태우지 않고 가버리는 만원 버스를 기다릴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걸어서 퇴근하기로 결정한 이상. 별수없이 쭉 걸어가야만 했다.


이렇게 원치 않는 길을 걷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틀 동안 나는 불면의 밤을 보냈다. 가까스로 일을 마무리하고 하루 휴무를 얻어 퇴근했다. 또 불면의 밤을 보내는 게 무서워 더 피곤한 상태로 만들 작정으로 집까지 걷기로 했다. 괴한이 날 덮칠까 하는 두려움보다 머리를 압박하는 통증이 더 심해지고 또다시 뜬눈으로 밤을 지새는 것이 무서웠다. 더 피곤한 상태로 만들어서 집으로 가야 했다.


왜 이렇게 잠이 자지 못했을까. 마감을 일주일 앞두고 몸이 탈이 났다. 병원에선 염증 수치가 높으니 입원하라는 권고까지 받았으나, 마감을 앞둔 상황이라 입원을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수액을 맞으며 며칠만 버텨보자고 마음 먹었만. 정작 잠을 자지 못하니, 수액을 맞아도 소용이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감을 지키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나를 몹시 괴롭혔다. 도망치고 싶었다. 당장 그만둬야지. 이렇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들을 무조건 해내라고 윽박지르는 회사에서 더이상 일할 수 없다 라는 마음이 서서히 확고해졌다. 그러나 그만두려고 해도 일단 일은 끝내야 했다. 이왕 잠을 못자니 일을 다 끝내버리자 라는 마음으로 컴퓨터를 켰다. 아이는 역시나 날 찾았다. 또 찾으면 아이 옆에서 자야지 하고 나 스스로 마음을 다지고 일을 했다. 다행히 아이는 날 더는 찾지 않았다. 일의 끝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너 뭐하고 있니?"

"나? 균형을 잡고 있어."

"힘들지 않니?"

"말시키지 말아 줘. 지금 집중해야 해."


"균형을 잡으려면 말이야, 많은 연습이 필요해."


일도, 육아도 쉽지 않다. 차라리 남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슬프게도 가사와 육아에 열외의 기분으로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퇴근 후에도 편히 쉴 수 없고, 아이가 아프면 덩달아 밤새 뒤척이는 아이 돌보느라 잠을 설치고. 주말엔 집안행사로 바쁘고. 오롯이 나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점심시간 말고는 없었다. 육아도 일도 완벽하게 해낼 마음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았다. 퇴근 후에는 업무를 가져와서라도 아이와의 시간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마감에 쫓겨 야근하는 동료들을 뒤로 하고 짐 챙겨 사무실을 나올 때는 정말이지.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그럼에도 불편함을 안고 꾸역꾸역 나의 생활을 지켜갔다. 그러던 어느 날 상사는 나를 불렀다. 그는 이 말 저 말 끝을 맺지 못하고 중언부언 해댔다. 하지만 그 말인즉슨, 야근하지 않고 정시 퇴근하는 나의 근무태도를 지적하는 말이었다. 그 시점이었다. 동료들의 불편한 시선을 느끼며 이렇게 일을 해야 하나. 갈팡질팡하던 나의 마음은 그때의 일로 하나의 결정으로 굳어졌다.


그림책 <균형>의 첫 장에는 "아홉 살 지수의 네발자전거에서 작은 두 발을 떼어 주었다. 새로운 무대를 경험하게 될 나의 딸에게"라는 헌사글이 적혀 있다. 지난 두 주를 돌이켜보면 나는 마치 작가의 딸이 되어 두발 자전거를 타고 작은 터널을 지나 온 느낌이다. 균형을 잡으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는 건. 다시 말해 많이 넘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눈물의 상처의 시간. 균형은 분명 개인의 눈물과 노력만으로도 이룰 수 없다. 그것은 네모, 세모, 타원 다양한 형태의 도형 들이 모여 만든 균형이라는 글자 위에 거꾸로 서 있는 아이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아이는 이렇게 멋진 묘기를 보이기 이전에 자신과의 싸움을 한다. 무대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두려움 무서움. 잘 해내야한다는 부담감을 불러낸다. 스포트라이트는 높은 기둥 위에 올라가 공중 그네 앞에 서 있는 아이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모두가 그의 연기와 묘기를 주목하고 있다. 아이를 둘러싼 어둠은 극도의 긴장감을 내뿜고 있다. 아이가 공중 그네를 타고 날았다. 그때 여자 아이가 공중 그네를 타고 남자 아이 곁으로 간다.


"내가 함께해도 될까?"

둘은 함께 균형을 맞춰 나간다. 타인의 실수를 지적하기도 하고, 마음 상하는 말을 내 뱉기도 하고. 두 사람은 다시 마음을 합쳐 한 발 한 발 맞춰 나간다. 그 다음 장면은 새로운 전개다. 코끼리, 말, 호랑이, 배 삐에로 등 다양한 사람과 동물이 나와 두 아이의 앞과 뒤를 잇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겁낼 거 없어. 혼자가 아니니까."

"우린 잡은 손을 놓지 않을 거야."


"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까."

"너에게 귀를 기울일게."


감동적인 순간이다. 혼자가 아니다. 라는 일깨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홀로 밤길을 무사히 걸어왔다. 따뜻한 집안의 온기, 그리고 저녁 냄새. 남편과 아이를 보면서 오늘 하루를 이렇게 이겨냈다는 뿌듯함. 대견함에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그래. 혼자가 아니야. 이 세상 모든 워킹맘 화이팅. 당신은 혼자가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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쫌 이상한 사람들
미겔 탕코 지음, 정혜경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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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 혼자 생선구이 집에 앉아 밥을 먹고 있는데, 여자 세 명이 들어와 내 뒤로 쪼르르 앉았다. "우리 때는 말이야." 여자가 힘주어 말문을 떼었다. 옆에 앉은 사람의 말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내 청력은 어쩐지 그 여자의 그다음 말 한마디에 온 신경을 모으고 있었다. 마치 굶주린 개처럼 여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물고 늘어지고 싶었다. 살면서 많이 봐 왔다. '우리 때'라는 표현을 즐겨 쓰며 연대하는 사람들. 나는 매번 그때의 정서와 지식을 번번이 공유하지 못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물만 연거푸 마시는 경우가 많았다. 

회사 동료들과 업무 외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야말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나의 생각, 소소한 경험들은 어쩐지 말하기가 꺼려진다. 웃음을 살까, 어린애로 보일까봐 자꾸만 입을 닫고, 나를 더욱 감춘다. 왜 이렇게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것일까. 그들은 자기의 경험을 일반화하고, 말도 안되는 논리를 내세우며 타인의 삶을 이리저리 재단하고 있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왜 나를 드러내지 못하는 것인지..

​내 삶의 결정들은 한결같이 내가 경제적 인간이 아님을 보여준다. 내게도 분명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욕구는 명확히 있다. 그러나 나의 경우엔 그 욕구가 늘 선택의 중심이 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의 선택들은 늘 의외의 선택이었고, 덕분에 내 삶은 색깔이 분명해졌다. 번들거리고  때깔 좋은 삶은 아니지만, 결핍이 조금 많은, 그러나 남들과 전혀 다른 삶의 풍경을 만들어 가고 있다.

 삶은 예측할 수 없다. 그 어느 선택도 불확실하고 결함이 있다. 누군가는 예측할 수 있고 안전한 길을 택하겠지만, 누군가는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다. 나는 아마도 이쪽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를 종종 이상하다고 바라보는 사람들을 만난다. 아마도 지금부터 소개할 책은 나의 삶에 공감하고 지지해주는 책이 아닐까 싶다. 제목이 <쫌 이상한 사람들>이다. 분명 나의 삶은 이상한 게 아닌데, 아무튼 나와 다른 쪽에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엔 이상한가보다. 제목이 조금 거슬리지만 잠시 접어두고. 그림은 봄바람만큼이나 가볍다. 노랑 계열과 파랑 계열의 가는 펜으로 그린 그림들은 앞으로 소개할 사람들의 내면을 섬세하고 부드럽게 잘 드러낸다.


세상에는 쫌 이상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에도 마음을 씁니다.


 

 

 

  

 

한 남자가 개미를 밟지 않으려고 발끝을 들고 걸어가고 있다. 엄마 손 잡고 따라가는 아이는 남자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보고 웃고 있다. 어렸을 때 한 번쯤은 이렇게 행동한 적이 있지 않은가. 아이는 그가 왜 그런 동작으로 걸어가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책에는 작은 생명체도 소중히 하는 마음, 타인의 고통을 바로 알아차리는 감수성을 지닌 어른들이 차례차례 등장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저 즐겁기 위해 곡을 연주하고, 춤을 추고 싶을 땐 아무 때고 춤을 춘다, 게다가 아이 앞에서는 곧장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웃길 줄도 안다. 이토록 매력적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랑이라는 감정을 아낌없이 표현한다. 이제껏 사랑을 아끼는 법만 배워온 우리로서는 이들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이는 건 당연하다.


 

 

이 다정한 사람들은 항상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이 그림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계 부속품처럼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다른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물질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사람들은 언제나 합리적 선택을 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마음속에 다양한 가치가 꿈틀거리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선택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유롭고 도전을 즐긴다. 저기 그림 속 향극한 찻집으로 들어가는 아빠와 아이처럼. 원래 '이상하다'라는 말은 꽤 폭력적인 말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마치 훈장처럼 그들을 돋보이게 한다. 만약 향긋한 찻집으로 들어가는 아이와 아빠를 노란색으로 그리고, 나머지 그림은 파란색으로 칠했다면. 어떤 느낌을 주었을까. 봄바람처럼 경쾌하고 산뜻한 느낌은 아닐 것이다.  정반대의 느낌. 그래, 그것이 우리가 현재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이다. 씁쓸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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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빨개지는 아이 2020-10-22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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