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균형
유준재 글.그림 / 문학동네 / 2016년 10월
평점 :
사방이 어둑해진 시각, 터벅터벅 혼자 논길을 걷다가 길 한가운데 작은 나뭇가지를 밟고 놀랐다. 한여름 이 길로 퇴근하다가 뱀을 만난 적이 있었던 터라 연신 아래로 향하던 나의 눈은 나뭇가지 하나하나 예사로이 넘기지 못했다. 가로등 불빛이 전혀 없는 이 길을 걷기 싫어서 귀가 시간이 절로 빨랐고, 더욱이 날이 추워지면서 나는 도보가 아닌 버스를 타고 퇴근했다.
그런데 오늘은 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 혼자서 이 길을 걸어가리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사실 이 길에 들어선 이상 돌아가지도 못한다. 버스 정류장은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가 배차 간격이 길기 때문에 몇 대 없는 버스를 오매불망 기다리다가는 아이랑 저녁도 못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내게는 승객을 태우지 않고 가버리는 만원 버스를 기다릴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걸어서 퇴근하기로 결정한 이상. 별수없이 쭉 걸어가야만 했다.
이렇게 원치 않는 길을 걷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틀 동안 나는 불면의 밤을 보냈다. 가까스로 일을 마무리하고 하루 휴무를 얻어 퇴근했다. 또 불면의 밤을 보내는 게 무서워 더 피곤한 상태로 만들 작정으로 집까지 걷기로 했다. 괴한이 날 덮칠까 하는 두려움보다 머리를 압박하는 통증이 더 심해지고 또다시 뜬눈으로 밤을 지새는 것이 무서웠다. 더 피곤한 상태로 만들어서 집으로 가야 했다.
왜 이렇게 잠이 자지 못했을까. 마감을 일주일 앞두고 몸이 탈이 났다. 병원에선 염증 수치가 높으니 입원하라는 권고까지 받았으나, 마감을 앞둔 상황이라 입원을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수액을 맞으며 며칠만 버텨보자고 마음 먹었만. 정작 잠을 자지 못하니, 수액을 맞아도 소용이 없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감을 지키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나를 몹시 괴롭혔다. 도망치고 싶었다. 당장 그만둬야지. 이렇게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들을 무조건 해내라고 윽박지르는 회사에서 더이상 일할 수 없다 라는 마음이 서서히 확고해졌다. 그러나 그만두려고 해도 일단 일은 끝내야 했다. 이왕 잠을 못자니 일을 다 끝내버리자 라는 마음으로 컴퓨터를 켰다. 아이는 역시나 날 찾았다. 또 찾으면 아이 옆에서 자야지 하고 나 스스로 마음을 다지고 일을 했다. 다행히 아이는 날 더는 찾지 않았다. 일의 끝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너 뭐하고 있니?"
"나? 균형을 잡고 있어."
"힘들지 않니?"
"말시키지 말아 줘. 지금 집중해야 해."
"균형을 잡으려면 말이야, 많은 연습이 필요해."
일도, 육아도 쉽지 않다. 차라리 남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슬프게도 가사와 육아에 열외의 기분으로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퇴근 후에도 편히 쉴 수 없고, 아이가 아프면 덩달아 밤새 뒤척이는 아이 돌보느라 잠을 설치고. 주말엔 집안행사로 바쁘고. 오롯이 나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점심시간 말고는 없었다. 육아도 일도 완벽하게 해낼 마음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았다. 퇴근 후에는 업무를 가져와서라도 아이와의 시간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마감에 쫓겨 야근하는 동료들을 뒤로 하고 짐 챙겨 사무실을 나올 때는 정말이지.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그럼에도 불편함을 안고 꾸역꾸역 나의 생활을 지켜갔다. 그러던 어느 날 상사는 나를 불렀다. 그는 이 말 저 말 끝을 맺지 못하고 중언부언 해댔다. 하지만 그 말인즉슨, 야근하지 않고 정시 퇴근하는 나의 근무태도를 지적하는 말이었다. 그 시점이었다. 동료들의 불편한 시선을 느끼며 이렇게 일을 해야 하나. 갈팡질팡하던 나의 마음은 그때의 일로 하나의 결정으로 굳어졌다.
그림책 <균형>의 첫 장에는 "아홉 살 지수의 네발자전거에서 작은 두 발을 떼어 주었다. 새로운 무대를 경험하게 될 나의 딸에게"라는 헌사글이 적혀 있다. 지난 두 주를 돌이켜보면 나는 마치 작가의 딸이 되어 두발 자전거를 타고 작은 터널을 지나 온 느낌이다. 균형을 잡으려면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는 건. 다시 말해 많이 넘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눈물의 상처의 시간. 균형은 분명 개인의 눈물과 노력만으로도 이룰 수 없다. 그것은 네모, 세모, 타원 다양한 형태의 도형 들이 모여 만든 균형이라는 글자 위에 거꾸로 서 있는 아이를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아이는 이렇게 멋진 묘기를 보이기 이전에 자신과의 싸움을 한다. 무대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두려움 무서움. 잘 해내야한다는 부담감을 불러낸다. 스포트라이트는 높은 기둥 위에 올라가 공중 그네 앞에 서 있는 아이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모두가 그의 연기와 묘기를 주목하고 있다. 아이를 둘러싼 어둠은 극도의 긴장감을 내뿜고 있다. 아이가 공중 그네를 타고 날았다. 그때 여자 아이가 공중 그네를 타고 남자 아이 곁으로 간다.
"내가 함께해도 될까?"
둘은 함께 균형을 맞춰 나간다. 타인의 실수를 지적하기도 하고, 마음 상하는 말을 내 뱉기도 하고. 두 사람은 다시 마음을 합쳐 한 발 한 발 맞춰 나간다. 그 다음 장면은 새로운 전개다. 코끼리, 말, 호랑이, 배 삐에로 등 다양한 사람과 동물이 나와 두 아이의 앞과 뒤를 잇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겁낼 거 없어. 혼자가 아니니까."
"우린 잡은 손을 놓지 않을 거야."
"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을까."
"너에게 귀를 기울일게."
감동적인 순간이다. 혼자가 아니다. 라는 일깨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홀로 밤길을 무사히 걸어왔다. 따뜻한 집안의 온기, 그리고 저녁 냄새. 남편과 아이를 보면서 오늘 하루를 이렇게 이겨냈다는 뿌듯함. 대견함에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그래. 혼자가 아니야. 이 세상 모든 워킹맘 화이팅. 당신은 혼자가 아니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