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사랑해
아네스 안.프란체스카 안 글, 노석미 그림 / 시공주니어 / 2015년 12월
평점 :
품절


잠바를 뒤집어 입었다. 아뿔싸. 버스 손잡이를 잡으려고 잠바 주머니에 스마트폰을 쑤셔 넣다가 알았다. 민망함도 잠시. 살짝 주위를 돌아보니 다들  스마트폰 보느라 옷을 뒤집어 입은 여자에겐 관심도 없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잠바를 고쳐 입었다. 내 옷의 상표가 이렇게 긴 줄은 몰랐다. 요 얇은 바람막이 잠바가 뭐라고. 상표 안에 글자도 참 빼곡히도 채워넣었다. 정류장 앞 옷 가게  쇼윈도우 도시락 가방과 천 가방을 어깨에 멘 여자가 구부정하게 서 있었다. 미용실에서 머리만 좀 잘랐다면, 조금 봐줄만 했는데.. 앞머리는 어느새 새치로 희끗희끗해지고 볼살은 빠져 아래 턱은 도드라졌다. 이런 내가 이젠 익숙해졌다.

 

내 나이 서른 일곱. 결혼한지도 6년이 됐다. 그중 여자로 엄마로 정신없이 오간 3년이라는 시간을 거치며 내 삶은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다. 일주일 전 1박 2일로 속초로 여행갔다왔다. 마침 결혼기념일이었으나 특별히 서로를 위해 준비한 것은 없었다. 신문지를 깔고 삼겹살과 집에서 가져온 상추와 백김치를 놓았다. 속초에 왔다면 회 한 접시라도 먹어야 할 텐데, 둘 다 회 맛을 모르니, 메뉴는 자연스레 고기로 됐다. 아이는 집에 없는 큰 텔레비전과 침대에 신이 나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남편과 나는 뉴스를 보며 여유있게 저녁을 먹었다. 찬은 없지만, 식사는 꽤 성찬처럼 느껴졌다. 심리적 포만감은 한동안 이어졌다. 이젠 곱게 살기 글러먹었다고 생각한 인생이지만, 이만큼 삶을 꾸려온 내가 내심 기특하고, 대견스러웠다. 물론 함께 이만큼 걸어온 남편에게도 고마움이 컸다. 서로 흔들리지 않고 여기까지 함께 걸어왔다는 것이 감동스러워 혼자 울컥해지도 했다.

 

 

아빠가 엄마를 만났을 때

엄마는 달나라 공주님 같았어.

환한 모습이 눈부시게 아름다웠지.

 

 

엄마가 아빠를 만났을 때

아빠는 해나라 왕자님 같았어.

환한 모습이 눈부시게 멋졌지.

 

<고마워 사랑해> 라는 그림책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문장도 그림도 예쁘다. 첫눈에 반했다 라는 감정을 이토록 그림으로 절묘하게 잘 묘사할 수 있을까. <고마워 사랑해>는 새 생명이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그림책이다. 보통 이런 주제의 그림책은 정보 전달에 치중해 어렵고 복잡한 그림이나 설명이 끼어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그림책에서는 새 새명이 태어나는 데 제일 중요한 동력인 사랑이라는 감정을 온전히 전달하는 데 힘을 쓴다. 여기에 노석미의 그림은 그림책의 메시지를 더욱 강렬하고 단순하게 그리고 힘 있게 전달한다.

 

사실, ​고도의 훈련과정이나 다름없는 결혼 생활은 우리의 첫 마음을 잊게 만든다. 남편에게 품었던 강렬한 감정도 사그라들고, 출산하고 처음으로 아이를 안았을 때. 그 벅찬 감정도 희미해진다. 시간이 더 흐르면, 우린 더 서로에게 무덤덤해질 것이다. 이대로 휩쓸렸다간 얼마 안 되는 사랑의 기억들이 다 공기중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불안하다. 오늘도 자꾸만 시간에 저항하는 방법들을 찾게 된다. 그래서일까? 노석미의 그림은. 심장충격기처럼. 잊고 있던 사랑의 리듬을 다시금 찾는 데에 아주 최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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