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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 - 불일암 사계
법정 지음, 맑고 향기롭게 엮음, 최순희 사진 / 책읽는섬 / 2017년 5월
평점 :
법정 스님의 글을 다시 한번 천천히 되새겨 보기만 해도
어느새 누군가 다정스레 곁으로 다가와 다독다독 나를 위로하고 있는듯하다.
무소유를 실천하시고 또 많은 이들에게 비움의 철학을 남겨주시고 입적하신 법정 스님.
법정 스님의 글을 읽으며 우리가 위안을 얻듯 최순희 작가도 법정 스님이 계신 불일암 그곳을 찾는 것만으로도 큰 평안을 얻으셨었나 보다.
책 속 어느 곳에서도 사진작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법정 스님의 글임을 알지만 사진 안에는 법정 스님의 모습도 보이질 않는다.
다만 두 분이 함께 걸었을 불일암의 이곳저곳과 오랜 시간 함께 바라보았을 불일암의 사계가 사진으로 담겨있을 뿐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인물은 아무도 없는데 그저 시간의 변화를 기록한 듯 불일암의 풍경을 들여다보고만 있어도
이 오랜 세월 한결같이 불일암을 찾아오며 조용히 사진을 찍은 작가가 누굴까 궁금해진다.
자신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뒷모습이나 그림자조차도 없이 이력을 드러낼만한 사진들은 단 한 장도 남겨놓질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행여나 사진을 찍는 자신의 행동이 방해가 될까 조심조심.
인적이 없는 고요와 한 적의 시간을 공들여가며 한 장 한 장 불일암의 사계를 오롯이 담아 놓았을 뿐이다.
그 정성과 반복의 발걸음을 짐작게 하는 공들인 사진들의 모습이 법정 스님의 글과 만나 더욱 따뜻한 여운을 만들어 주고 있다.
규모 있는 절 전체의 모습이 아닌 산새에 둘러싸인 자그마한 집 한 채.
그곳에서 단정히 앉아 수행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려보며
- 고독 -
<수행하는 사람은 홀로 있을수록 넉넉한 뜰을 지닐 수 있다.
마음에 꺼리는 사람과 함께 있기보다는 외롭더라도 홀로 있는 게 얼마나 홀가분한 일인가를 겪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수행자는 어차피 홀로 가는 사람.
고독은 보랏빛 노을이 아니라 당당한 있음이다.>
새기듯 .. 글을 읽는다..
살아있는 동안은 생기로 보답하는 자연에 머리 숙여 감사하고
삶을 마감한 다음에는 내가 버린 헌 옷.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는 곳이라면 아무 데서나 다비해도 무방하다는 법정 스님의 유서를 받든다.
세상을 살아가며 노력이라는 산물이 주는 선물은
손수 씨를 뿌려 가꾼 보람으로 피어난 해바라기와 함께 기쁨으로 맞이하며 함게 경험한다.
한 장 한 장 사진을 들여다보고 또다시 한번 글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자연의 신비에 감탄하고 그 자연을 알아보고 존중하는 법정 스님의 글에 또 고개를 끄덕여본다.
책을 읽는다는 느낌도 덜 하게끔 페이지의 숫자 표시도 눈에 덜 띠도록 가운데 안쪽으로 배치해 놓은점도
법정 스님의 글을 온전히 느끼도록 참 세심한 편집이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작가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그리고 편견 없이 보이는 그대로 느껴지는 그대로 사진과 글을 만나볼 수 있는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였다.
책을 덮을 때 즈음 조심스레
독자들의 궁금증을 안다는듯 사진작가 최순희에 대한 정지아 님의 글을 실어놓았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를 다니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 신여성.
그러나 김영랑 시인의 동생과 결혼하여 사회주의자였던 남편을 따라 북으로 건너가고 한국전쟁 때 지리산 남부 군으로 활동하다 국군에 의해 생포되면서
1952년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남부군의 자수를 권유하는 삐라와 방송의 주인공이 되고만 최순희 사진작가에 대한 언급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글을 읽다 보면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동료들에 대한 속죄의 마음.
북에 두고 온 아들과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든 아님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이었든 ..
오랜 세월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 스스로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음도 알 수가 있었다.
최순희 작가에 대한 간략하지만 아픈 생을 알고 나니
그녀의 불일암 산행이 15년 이상이나 이어진 이유를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평생의 그리움과 속죄를 담아. 또 자신의 상처를 담아
법정 스님이 계신 그 공간에 머물며 조금씩 조금씩 치유하고 위로받으며 한 장 한 장 사진에 담았겠구나 짐작하니..
다른 것은 하나도 하나도 없이 불일암의 사계만을 담은 그 사진이
어째 나는 더 안타깝고 외롭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