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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평점 :
이 책을 읽고 나니 더욱 확고해진 생각인데, 나는 내안에서 아무리 쓰고 싶은 이야기가 흘러넘친다 해도 절대 ‘소설가’는 될 수 없는 경향의 사람이다. 한마디로 ‘정리하기 좋아하고’, ‘판단하기 좋아하고’, ‘지루한 범생이 스타일’에 ‘관찰력’이나 ‘상상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
그렇지만(‘그래서’일지도) ‘장편소설을 쓸 정도로 반쯤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의 머릿속은 항상 궁금하다. 소설가가 되지 못한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이 대면하기 무서워서 혹은 내려가는 방법을 모르거나 어쩌면 헤매기 귀찮아서 찾지 않는 ‘어두운 동굴-자신의 의식 밑바닥’에 기꺼이 내려가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챙겨 올라와 그것으로 문장을 만들고 자신의 손에서 떠나보내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뜯어고치는 장인들. 말할 필요도 없이 육체와 정신이 동시에 고생스럽고 고독하지만, 글을 쓰는 그 순간만큼은 ‘이런 직업, 소설가 말고 또 있나요?’라고 할 만큼 충만한 행복감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선택받은 사람들.
하루키는 소설가라는 직업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의 덩어리를 자디잘게 부수어 자신이 소설가로서 직접 체험했던 열정, 환희, 열망, 확신 같은 감정들을 손에 잡힐 듯한 감각으로 전달해준다. 이런 식의 간접 경험은 소설처럼 낯선 세계를 통째로 경험하는 것 못지않게 몸을 통과하는 힘이 강렬해서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내가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소설가로서의 자질이랄까, 그런 것들이 제로에 가까울 나 같은 사람조차도 순간 소설가가 되어볼까, 하루키 씨 말대로 한편 정도는 어찌어찌 쓸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라는 유혹에 빠질 정도이니 말이다.
읽는 내내 소박한 청중을 상대로 마이크를 쓰지 않은 하루키 씨가 자신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는 식의 문체란 느낌을 받았는데, 후기를 읽어보니 역시 그런 의도로 쓰인 글이다. 작가 하루키를 가장 게으르게 소화하는 일부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소설가로서의 그의 머릿속 혹은 그의 ‘깊숙한 안쪽’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다. 소설가 하루키에게 독자로서 한번쯤 궁금증을 품어봤을 만한 질문들에 대해 그야말로 성실하고 솔직하게 그의 입장에선 조금 아깝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남김없이 답변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맨 앞장에서 다룬 까칠한 소설가 이미지에는 조금 부합하지 않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 평범해서 평범하지 않은 소설가 하루키 씨라고 해야할까.ㅎㅎ
몇 해 전 출판된 <작가란 무엇인가?>의 하루키 씨 인터뷰 내용에 대해 ‘너무 밋밋하잖아, 이 정도 밖에 나올 게 없는 건가, 작가에 대해 좀 더 깊이 내려가 볼 순 없었을까?’ 라는 느낌을 받았었다면 이 책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설가로서의 하루키를 이해하는 징검다리가 되는 동시에 인간 하루키가 동시대의 독자들에게 건네는 진솔한 속내이기도 해서일까. 이 책을 읽고 나는 하루키가 살짝 더 좋아졌다. 작가로서도 인간으로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