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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품은 세계 - 삶의 품격을 올리고 어휘력을 높이는 국어 수업
황선엽 지음 / 빛의서가 / 2024년 11월
평점 :
♥ 인디캣 책곳간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소하다 여겨지는 것들에 궁금증을 품을 줄 알면 더 많은 것들에 관심이 가고 알고 싶어집니다.
<단어가 품은 세계>에서 나오는 단어들은 우리나라의 순수한 한글은 물론이고 중국과 일본 그리고 다른 여러 나라들의 말을 품고 오랜 세월의 흔적도 간직하고 있었다. 마치 교수님께서 옆에서 이야기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책이다. 책은 말하는 사람의 인격도 품나 보다. 읽는 내내 나도 마음도 차분해지고 지성의 향기라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분은 이 책을 아이들에게 읽어준다고 하셨는데, 내용이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천천히 음미하며 읽다 보면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래서 읽어주셨나 보다. 게다가 품격있게 말하는 것이 이런 것이란 걸 충분히 느끼게 해준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읽는 사람 역시 교수님 말투와 학구열에 전염된다.
저자의 고향은 대전이라고 한다. 대전역은 가락국수가 전국적인 명물이었다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가락국수 대신 성심당이라는 빵집이 유명하다. 지금도 맞춤법 검사를 하면 우동의 순화어가 가락국수로 나온다. 하지만 엄연히 가락국수와 우동은 다른 국수 종류이므로 맞춤법 검사도 오류를 수정해야 한다.
돈가스의 순화어가 돼지고기 너비 튀김, 저육(猪肉) 카틀리트, 포크 스틱이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돈가스는 원래 돼지 돈(豚)에 영어 커틀릿(cutlet)을 일본식으로 읽은 카츠레츠의 앞부분 -가스(카츠)를 붙인 것이다. 이 건 아무리 순화하려고 해도 안 돼서 지금까지 돈가스라고 한다. 그래도 시보리는 물수건, 요지는 이쑤시개, 다마네기는 양파, 와리바시는 나무젓가락 또는 일회용 젓가락, 뎀뿌라는 튀김으로 바뀌어서 좋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얼룩 송아지는 젖소다. 말랑 카우 비닐 봉지에 있는 홀스타인 젖소다.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얼룩백이소 또는 얼룩소는 칡소를 말한다고 한다. 호랑이처럼 줄무늬를 가진 소이다. 사진을 보니 이런소도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칡소와 함께 우리나라에 검은 소와 하얀 소도 있었단다. 하지만 누런 소인 황소를 한우로 규정하면서 다른 색의 소들은 사라졌다. 그리고 황소도 누런 소가 아니고 원래 뜻은 큰 수소라는 뜻이다. 영어도 황소를 검색하면 bull이라고 나온다.
소고기 제비추리가 제비의 꼬리 모양을 닮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추리는 초리가 바뀐 말이고, 초리는 눈초리처럼 가늘고 뽀족한 끝부분을 말한다. 뒷목덜미의 제비추리, 제비추리 같은 수영, 제비추리 댕기 등도 있다.
돼지고기의 갈매기살도 고기에 갈매기 비슷한 무늬가 있어서 그렇게 부르나보다 했다. 그런데 갈매기는 '가로막'이라는 말이 변한 것. 가슴과 배 사이는 횡격막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횡격을 우리말로 가로막이라고 한다. 그래서 돼지의 가로막에 붙은 근육을 가로막이 살이라고 불렀다. 가로막이가 가로매기가 되었고, 가로매기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게 되자 잘 아는 단어인 갈매기로 바꾸어 쓰게 된 것이다.
삼겹살 하면 생각나는 상추를 옛날에는 와거 또는 부루라고 불렀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부근으로 추정되는 곳에 있던 '와"나라에서 들어온 '와채'에서 상추와(萵)와 상추 거(苣)라는 한자를 만들어 와거(萵苣)라고 했던 것. 지금도 지역에 따라 부루라는 말이 쓰이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부루가 문화어로 인정되어 상추와 같이 사용되고 있다.
부루라는 말을 들으니 부추가 생각난다. 대전에서는 부추를 정구지라고 한다. 시장에서 정구지라는 말을 보고 왜 부추를 정구지라고 하는지 궁금했던 기억이 있다. 부추는 정(력)을 오래 유지시켜 준다고 정구지(精久持)라고 부른다는 설이 있는데 이런 것을 민간어원설이라고 한다.
상추는 일상적으로 먹는 채소라 상추라고 추측하는 것 역시 민간어원설이다. 상추는 생채(生菜)라는 한자어가 변화해서 만들어진 단어다. 익히지 않고 날로 먹는 채소라는 뜻인데 그 발음이 상치, 상추로 바뀐 것이다. 현재 생채는 익히지 않은 나물이라는 뜻의 무생채 같은 식으로만 사용된다.
갈매기살 설명에서 나는 ㅣ모음 역행동화라는 국어 상식도 다시 배웠다. 뒤의 음절에 ㅣ모음이 오면 앞 음절로 ㅣ모음이 똑같이 가는 동화현상이다. 아기에서 기에 ㅣ모음이 있으니까 앞에도 ㅣ모음이 붙어 '애기'가 된다거나 창피에서 뒤에 ㅣ음절이 와서 똑같이 앞에도 ㅣ모음이 붙어 '챙피'가 되는 식이다.
ㅣ모음 역행동화는 냄비나, 올챙이처럼 굳어진 단어 외에는 표준어로 인정하지 않는다. 학교와 핵교의 차이를 생각할 때마다 ㅣ모음 역행동화 생각이 날 것 같다. 학교는 다니는 것이고, 핵교는 댕기는 것이다!
아파트 현관문 고정하는 장치에도 이름이 있다는 사실! 노루발이라고 한다. 노루의 발처럼 생겨서 노루발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미싱에서 노루발같이 생긴 것 이름으로만 알았는데 문에 부착하는 것도 노루발 또는 말발굽 도어 스토퍼, 문 고정대 등으로 불린다. 노루 발굽을 검색해 보니 정말 비슷하게 생겼다.
나는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 그런데 실은 양잿물이 뭔지는 모른다. 잿물이니까 더러운 물인가 생각했다. 옛날에는 지푸라기나 나무를 태우고 남은 재 위에 물을 붓고 그 물을 받은 잿물을 사용해서 옷을 빨았다고 한다. 재 속에 있었던 알칼리 성분이 녹은 잿물은 강한 알칼리 용액이 되는데 이것이 때를 제거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는 수산화나트륨이 수입되어 이것으로 빨래를 하게 되었는데 '서양에서 들어온 잿물'이라는 의미에서 양잿물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양잿물이란 수산화나트륨이다. 하지만 피부에 닿으면 피부가 녹을 정도로 강한 염기성이라 위험해서 시장에서 퇴출되었다. 그러니까 공짜라도 양잿물은 마시면 안 되겠다. 알고 보니 더러운 물도 아닌 독이었던 것!
무거운 동이 말고 가벼운 양철이나 양은으로 만든 동이를 양동이, 서양(洋)에서 들어온 발에 신는 버선이라는 뜻의 버선 말(襪) 자를 써서 서양 버선이란 의미로 양말, 서양 물건을 거래하는(行) 곳이라는 뜻의 양행(洋行), 서양 석회인 양회(洋灰, 시멘트), 서양 정장은 양장(洋裝), 은행은 정말 은(銀)을 거래하는 곳이었다.
예전에 2호선 중에 신촌역과 신천역이 있었다. 엄청 헷갈렸는데 신천역이 잠실 新(새 신), 川(내 천)을 훈독하여 새내라는 이름을 되살려서 삼성역 다음에 있던 신천역이 잠실새내역으로 바뀐 것도 알았다. 그리고 같은 지역은 아니지만 3호선에 신사역이 있어서 신사(新寺)의 옛 이름인 새절을 취한 새절 역도 6호선에 있다. 애오개=아현, 노들=노량, 한티=대치라는 역이름에 대한 것도 알게 되었다.
얼굴이 열 일한다는 열 가지 일이니 많은 일을 한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열심히 일한다의 뜻으로 쓰인다고 한다. 일요일인 오늘도 열 일한다고 말한다. 열심히 공부하다가 열공이니 열심히 일한다는 열 일이 된 것인데 나는 아직도 많은 일을 한다는 뜻 같다. 그리고 정수기와 같은 가전제품은 렌탈이지 책이 아니므로 구독이라고 쓰면 안 된다.
고어가 나오는 부분은 좀 어렵게 느껴졌지만 천천히 읽다 보면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지 어려운 말은 없다. 이 책에는 다양한 자료와 사진이 실려있어 이해를 돕는다. 예쁜 사진을 보고 슬펐던 건 '며느리밥풀꽃'이었다. 너무도 예쁜 하얀 두 개의 밥알 모양 꽃 술을 가진 핑크색 꽃이다. 며느리가 밥이 잘 되었나 밥알 몇 개를 맛보다 시어머니에게 맞아 죽었다. 그 무덤에서 붉은 입술에 밥풀을 머금은 듯한 꽃이 피어 '며느리밥풀꽃'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생활 속에서 여기저기 만나는 단어들 뜻이 궁금해서 자꾸 사전을 찾아보게 된다. 단어를 소중히 여기고 관심을 갖는 일은 세상에 귀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나는 국어를 사랑하는 줄 몰랐는데, 나도 모르게 의미가 알고 싶어졌다. 사랑하면 자연스럽게 관심과 호기심이 생기는 법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