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돌아갑니다, 풍진동 LP가게
임진평.고희은 지음 / 다산책방 / 2024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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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초당 서평단에 당첨되어 작성한 리뷰입니다.


그때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묻는다면 주저 없이 말했을 거다. 당연히 추억은 힘이 된다고. 정원이 자살 직전에 마음을 바꾼 것도 LP에 깃들어 있었을 바로 그 추억 때문이었다.

<풍진동 LP 가게>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추억의 LP 음반에서 흘러나오는 곡을 통해 우연히 만나서 친구가 되고 서로를 치유해가는 이상한 LP 가게이다. 나는 이 책이 소설인 줄 모르고 풍진동에 있는 LP 가게를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작가의 말을 읽고서야 이 책이 소설인 것을 알았다. 어쩐지 네이버 지도를 검색해 봐도 풍진동이란 곳이 없더라니.

이 책의 주인공은 정원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다 잃고 죽기 전에 딱 한 곡만 듣고 죽으려던 것이 아버지가 남긴 6천여 장의 LP를 그냥 버릴 수가 없어서 주인을 찾아주겠다고 풍진동에 LP 가게를 연다. 풍진은 바람에 날리는 티끌이란 뜻이다. 나도 켄사스의 'Dust in the wind' 라는 노래를 좋아했었는데 이 노래에서 따온 것인지 아니면 희망가라는 노래 가사 중에 나오는 '이 풍진세상'에서 따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존 바에즈, 나나 무스꾸리, 스위트 피플, 니콜, 아바, 에어서플라이, 실비 바르탕, 존 덴버,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트윅스 등 내가 가지고 있던 내 기억 속의 LP판을 소환해 보았다. CD가 나오면서 LP는 자연스럽게 CD로 대체 되었지만 이상하게 LP판 자켓의 색깔과 디자인까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리고 클래식은 지루하고 어려워서 몇몇 유명한 곡 외에는 잘 안 들었다. 이 책을 통해서 난생처음 들어보는 클래식과 좋은 노래들을 접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모르는 곡과 알고는 있었어도 지나쳤던 곡들을 다시 찾아서 들어보았다. 추억과 낭만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김민기의 '친구'는 아는 노래인데도 그 곡의 배경이 진짜 죽은 친구를 그리워하며 부른 것이라는 사연을 알자 훨씬 더 슬프게 다가왔다. '친구에게'도 익숙한 노래였지만 비가 올 때 들으면 주인공 정원의 아픈 사연이 생각날 것 같다.

정원은 죽겠다고 다짐한 두 달이 다 지난 후에도 살아 있었다. 정원의 중고 LP 장사가 대박이 났기 때문이다. 결국 죽을 새가 없어 살아남은 것. 그리고 중고 LP 가게에서 만난 조금은 별난 손님들 덕분에 자신이 바뀜으로써 세상도 바뀌었다고 한다.

정원의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실패와 채무만 남은 세상을 자식의 미래와 보험금이 남은 세상으로 바꾸고 싶어 자연스러운 사고로 위장하고 죽음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원은 거액의 보험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죽어서도 자신의 결정이 해서는 안 되는 결정이었음을 깨달아야만 하고, 자식을 버리고 먼저 떠난 걸 후회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생 정안은 걸어서 출근하던 길에 폭주 차량에 받혀서 치료 중에 회복하지 못하고 떠났다. 미안하다는 한 마디를 남기고서. 정안은 정원보다 4살 어린 동생이다. 정원이 고장 난 로봇을 보고 슬퍼하자 정안은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으니 고장 난 로봇을 향해 얼마든지 슬퍼해도 된다고 한다. 고장 난 로봇도 안쓰러워하는 정원은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따라서 죽으려고 했을까. 왜 어떤 사람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불행한 일을 겪어야 할까.

정원은 아빠가 남겨두고 간 LP의 새 주인을 찾아줘야 해서 죽음을 잠시 보류했었다. 그런데 처음에는 중년 아저씨 원석, 그다음은 카론이라는 아이돌, 카론의 팬으로 왔다가 알바를 하게 된 미래, 고다림 변호사와 그녀의 아들 시아 등등 타인들이 정원의 인생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LP 판이 다 팔려 가자 이제 세상과 이별하려고 번 돈을 지역 유기 동물 보호소에 기부했는데 이 미담이 소문나면서 음반 기증자가 속출하는 바람에 죽지 못했다.

너무 바빠 미래라는 알바생까지 썼는데도 일이 많아서 죽을 틈도 없어졌지만 이렇게 바쁘면 조만간 과로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정원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손님으로 매일 출근해 가게 일을 돕는 원석과 야무지게 일하는 미래가 있어서 죽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죽으려는 사람 곁에는 사람이 있어야 하나보다.

멜라니 사프카의 'The saddest thing'은 나도 너무 좋아했던 노래다. 그런데, 슬픈 멜로디에 빠져서 가사를 음미한 적은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일이라니까 연인과 헤어지고 아픈 마음을 노래 했나보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힘든 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이 꼭 연인이 아니더라도 친구일 수도 부모님이 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전직 부페 경찰이었던 원석은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도,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한 채 황망히 떠나보내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애초에 나를 사랑하는 이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그리고 그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일이라고...

시한부 판정을 받은 원석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주인공 정원에게 연민은 느껴 도시락도 싸주고 매일 출근해서 일도 도와주고 친한 척한 것이었다. 원석의 사랑과 관심 때문에 정원은 살아남게 되었던 것이다. 나쁜 일에 앞장섰던 원석이 자기보다 더 슬프고 안쓰러운 정원을 만나 이렇게 선한 사람으로 변했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변한다. 다만 언제 어떻게 변하는지 알 수 없을 뿐.

에필로그에서 모든 주인공들의 관계가 밝혀진다. 이 모든 사람들의 인연은 우연이 아닌 필연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중 미래가 버스 기사가 정말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를 하는데 아저씨 잘못이 아니라고, 아저씨는 막고 싶었지 않냐고, 얼마나 힘드셨냐고 말할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꿈이든 현실이든 모두가 나를 비난할 때 한 사람만이라도 내 편이 있다면 행복해지는 것 같다.

시아의 엄마인 고다림 변호사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참지 말라고. 지는 게 이기는 게 아니라 지는 건 그냥 지는 거라고 한 말도 기억이 난다. 이말 덕분에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도와 진실을 밝혀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빨리 간다고 먼저 도착하는 게 인생이 아니라 주어지는 운명을 받아들이며 내가 행복하도록 노력하며 그 순간순간 돌아가는 LP판의 바늘처럼 아름다운 각자만의 곡들을 연주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돌고 돌아 다시 원점에서 또 시작하면 된다. 그래서 모든 LP판의 곡들은 설령 알려지지도 않고 내가 들어본 적도 없는 곡들일지라도 그 나름대로 다 소중하고 아름답다.

모든 사람이 함께 모여 서로 서로를 치유해 가는 과정도 감동이지만 마지막에 주인공 정원의 동생 정안을 죽이고도 잘 살고 있었던 모든 고위층 관계자들이 구속되는 장면은, 약하고 여리고 착해서 아프고 추락하는 모든 것들을 강하게 잡아주는 중력과 같은 힘이 사랑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약한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서 서로 서로를 도왔기에 강자를 굴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소설과 음악 덕분에, 올 연말은 차가운 눈이 따듯하고 포근하게 느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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