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돈키호테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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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돈키호테》는 150만 독자가 사랑한 《불편한 편의점》의 저자 김호연 작가의 신작이다. 그래서 너무 기대되는 작품이다. 어떤 이야기가 이 속에 담겨 있을까?


이 소설의 초반을 읽을 때는 주인공 ‘진솔’이 다니던 회사를 사직한 후 처한 백수 상황과 이를 헤쳐나가는 과정-유튜버로서 인생2막을 여는 것-이 주 골격을 이룰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요즘 청년고용률, 실업률을 놓고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난달 취업자 수 증가 폭이 기저효과와 기상악화 등의 영향으로 2021년 2월 이래 37개월 만에 최소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청년층 취업자는 8개월 만에 가장 큰 폭으로 감소했고, 청년층 고용률도 6개월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출처 : 한국경제(2024.4.12.) ‘사라진 코로나發 기저효과…3월 취업자 증가폭 37개월 만에 최소’


그래서 ‘젊은이와 청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데 더 읽다보니, 스토리가 좀 다르게 흘러가더라. 또 다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돈 아저씨’의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솔이가 개설한 유튜브 채널 ‘돈키호테 비디오’를 통해 돈 아저씨를 찾아 추적하면서 행방을 찾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나의 유튜브 채널 ‘돈키호테 비디오’는 돈 아저씨를 찾는 공개방송이 될 것이다.”(p50)

그럼 ‘추리소설’인가?



실제로 대학시절 돈 아저씨의 절친 권영훈을 만나 아저씨가 학원가로 갔음을 알게 되고, 이를 추리하다가 같은 학원에서 강사로 일했던 동료를 만나고, 지인의 도움으로 아저씨가 입사한 출판사에서 일어난 일을 출판사 동료로부터 듣게 되고, 이후 영화감독을 꿈꾸며 시나리오 작업을 하였다는 소식에 검색과 분석, 잠복 등을 거쳐 영화제작사 대표를 어렵사리 인터뷰하면서 돈 아저씨가 시나리오 계약을 했고 실제 시나리오 작업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분노의 법정〉이라는 시나리오를 함께 작업하였던 영화사 피디와 같이 잠적했다는 소식까지 알게 되었으나 그 후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는데, 뜻밖에 당시의 피디인 ‘민주영’으로부터 이메일 연락이 왔고 유튜브 생방 인터뷰에 참여하여 이후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돈 아저씨는 영화감독을 포기하고 창작한 여타의 시나리오들을 판매하여 2억 6천만 원의 수익을 냈고 그간에 장발에 수염을 기른 살찐 아저씨가 되었으며 이후의 행방을 알지 못한다고 전해주었다.



이렇게 추리하고 연관 있는 사람을 찾아 만나며 돈 아저씨의 행방을 찾는 과정에서, 돈 아저씨의 청년시절부터 최근(2019년)까지 겪어온 삶을 알게 된다. 그럼 ‘액자소설’인가?


소설 《나의 돈키호테》는 형식상 ‘액자소설’이기도 하고, ‘추리소설’의 얼개를 빌려 서술하기도 하였지만, 그 기저는 따로 있다.


바로 추억의 힐링 소설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돈 아저씨’와 ‘돈키호테 비디오’, 그리고 ‘라만차클럽’이 있다.


진솔이 중학생일 때인 2003년, 돈키호테 비디오에서의 진한 추억이 있다. 당시에 솔이는 ‘혼자’라는 고민을 하던 중2였다. 솔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솔이네 가족이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사 오게 되면서 대전살이가 시작되었는데, 치킨집을 운영하느라 부모님은 바빴고 언니는 유학을 떠나 없었으며, 오빠는 고3이었기에 솔이는 늘 외톨이라 여겼다. 하지만 돈키호테 비디오에서 돈 아저씨와 일명 ‘라만차클럽’ 회원들-돈키호테 비디오를 아지트 삼아 뭉쳤던 솔이, 한빈, 성민, 대준, 새롬-과 함께 하면서 그 시절을 유쾌하게 보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돈키호테 비디오에서 보낸 시간이 대전에서 지내며 가장 즐거운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p27)


그리고 솔이는 대학 졸업 후 ‘노마드 엔터웍스’라는 여행 관련 영상콘텐츠 제작사에서 일하다가 피디로 승진하고 〈도시탐험대〉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하였는데 예상외로 인기를 끌게 되었으나 그에 관한 스포트라이트는 메인 피디와 제작사 대표가 받는 꼴이고, 실제 기획자인 솔이는 까임을 당하였고 퇴사하였다. 2018년 직장을 사직하고 대전으로 내려온 뒤, 백수가 되어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할 때 추억 속의 돈키호테 비디오와 돈 아저씨는 솔이에게 유튜버로서 인생2막을 열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고 힐링이 되어주는 매개로 작용한다.


같은 라만차클럽 일원으로 항상 솔이와 티키타카하였던 한빈은 외적으로 밝고 명랑해보였으나, 사실은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돈 아저씨의 본명은 ‘장영수’이고 한빈은 ‘장한빈’. 즉 부자지간이다. 서강대 법대 출신이지만 학생운동으로 인해 취업이 마땅치 않았던 돈 아저씨는 결혼하고 한빈이 태어나 경제적인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학원 강사로 일하였지만 학원 내 부조리에 맞서다가 강사일을 그만두고, 출판사로 옮겨갔으나 대리번역 사건을 고발하며 맞서 싸우다가 퇴사하는 등 일련의 일들로 인해 한빈의 부모는 이혼하고 한빈은 성장과정 중에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아왔다고 한다.


대준이도 학창시절에 왕따를 당하였는데 돈 아저씨와 라만차클럽 덕을 많이 봤다고 한다. 이후 성인이 되어 부산에서 가정을 이루고 분식집을 경영하게 되었는데, 돈 아저씨가 자주 만들어주었던 일명 ‘돈볶이’ 레시피를 돈 아저씨에게서 받아 메인 메뉴로 내놓고 있다 했다.



그랬던 돈키호테 비디오 가게였는데, 그곳은 비었고 그 자리에 카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돈 아저씨도 없었다. 한빈의 말에 의하면, 돈 아저씨-한빈의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다. 건물 지하실에 비디오가게 간판과 집기들이 보관 중이었다. 그리고 라만차클럽 회원들도 ‘어떤 사건’을 계기로 모두들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그렇게 15년이 흘렀던 것.


솔이는 그때 그 시절 아저씨의 추천으로 읽어본 책과 보았던 영화를 소개하는 유튜브 방송을 시작하였고, 동시에 행방을 알지 못하는 돈 아저씨를 찾는 과정이 ‘돈키호테 비디오’ 채널을 통해 송출되면서 흩어졌던 라만차클럽 회원들과 연이 닿고, 그들의 보이지 않는 도움으로 유튜브 채널의 초기 구독자 수가 증가하기도 하였다. 돈 아저씨에 관해 시간을 내어 인터뷰에 응해준 선한 증언자들-출판사 동료 김승아, 영화 제작사 민주영 피디-의 용기있는 행동 덕분에 혹여 끊길 수도 있었던 추적의 끈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노력들이 가상했던지, 처음에 유튜버 활동을 반대했던 솔이 어머니도 넌지시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돈 아저씨를 찾고야 만다!


그런데 왜 장영수는 돈 아저씨(돈키호테 아저씨)가 된 것일까?


표면적으로는 ‘돈키호테 비디오’ 가게 주인이기 때문이겠지만, 그 이면에는 숨은 뜻이 있었다. 소설을 읽다보면 그 이유를 은연중에 발견할 수 있다.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아저씨는 왜 세상을 바꾸겠다고 애쓴 거예요?”(p313)


“난 그냥 약한 사람이 고통받는 게 싫었어.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엄마 때리는 것도 못 참았고, 돈 좀 있다고, 관에 빽 있다고 가난한 집 괄시하는 놈들도 못마땅했고. 그래서 대학 가서도 그런 데 나섰던 거 같아. ... 좋게 말하면 의협심 넘치는 투사고 나쁘게 말하면 현실감각 없는 몽상가였지. 그러다가 만난 책이 《돈키호테》였단다.”(p314)


이렇게 솔이와 돈 아저씨 간의 대화는 318페이지까지 이어진다. 이를 통해 돈 아저씨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고, ‘돈키호테’에 담긴 의미를 알 수 있게 된다.




각박한 현실 속에서 돈키호테가 되고자 했던 돈 아저씨는 결국 새롭게 변신을 하고 자유공화국(República Libre) 바라타리아(Barataria)’을 이룩한다!(p267)


“사람들에게 필요한 공간이 될 거다. 여기 바라타리아는 자유에 목마른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될 거라고.”(p285)



《나의 돈키호테》는 총 5부로 나뉘어 있다. 돈 아저씨를 찾기까지 벌어지는 이야기가 1~3부까지이고, 4부 〈태양의 나라〉에서는 돈 아저씨의 주선으로 ‘라만차클럽’ 2기를 결성하여 스페인으로 떠나는 낭만적인 여행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소설의 클라이막스이고, 이해와 화합의 내용이며, 왜 이 소설이 ‘힐링 소설’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리고 마지막 5부 〈채널 돈키호테 비디오〉는 4년 후 2023년의 상황을 그린 에필로그 성격의 마무리이다. 특히 돈 아저씨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잔잔하지만 가슴 뭉클하게 보여준다.





《나의 돈키호테》를 읽다가 기억에 남는 문구들이 있어서 인용해본다.


“이 좁은 공간에서 사지를 웅크리고 궁리한 끝에 도달한 결론은, 부주의가 부른 불운이 쌓이고 쌓여 불행이 되었다는 것이다. 쉼 없이 달려온 삶의 커리어가 한 방에 무너지고 나서야 내 것이 아닌 것에 최선을 다했다는 걸 깨달았다.”(p15-16)


“경주마처럼 달리기만 했지 내 몫을 챙기는 데 부주의했고, 영악하게, 때론 고약하게 굴면서라도 나를 지켰어야 했다.”(p16)


“마침표가 되기보단 쉼표가 되겠다고.”(p16)


“자기 콘텐츠를 갖는다는 건 자기를 믿는 것이다.”(p30)


“누가 알아준다고 모험을 떠나는 건 아니란다. 나만의 길을 가는 데 남의 시선 따윈 중요치 않아.”(p47)


“‘너희들이 억압받고 상처받더라도 그건 너희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진짜 삶을 굳세게 살아라’라고 응원해 준 거라는 걸 저는 이제 깨달았습니다.”(p62-63)


“고행의 기회. 여러분의 고행의 기회는 언제였나요? 아니면 언제 그 고행의 기회를 잡을 건가요?”(p89)


“솔아. 너는 꼭 모험을 떠나길 빈다.”(p102)


“지식인은 많이 배운 사람이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세상을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p180)


“솔아. 사람은 평생 자기를 알기 위해 애써야 해.”(p293)




《나의 돈키호테》를 읽어본 독자로서, 내가 만약 영화계 관계자라면 분명 《나의 돈키호테》를 영화화할 것 같다. 이 책 속에는 세대를 초월한 우정이 들어있고, 레트로풍의 소재와 설정들이 인상적이다. 수년전에 우리들의 감성을 자극시켜주었던, 영화 《써니》가 그랬고 영화 《건축학개론》이 그랬으며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가 그랬다.


그리고 《나의 돈키호테》 속에는 젊음이 있고, 성찰이 있으며, 믿음과 사랑이 있다. 특히 ‘꿈을 갖고 도전하는 스토리’가 있다.



저자 김호연 작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요즘 다들 좀 움츠려 있잖아요. 돈에 찌들어 있기도 하고…. 돈키호테가 상징하는 게 바로 모험입니다. 돈과 상관 없이 꿈을 갖고 도전하고, 또 모험을 해도 괜찮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 시대에 이런 돈키호테의 정신이 필요하기도 하고요.”


*출처 : 연합뉴스(2024.5.1.) "'불편한 편의점' 성공이요? 후속작 부담감 어마어마했지요"

소설의 주요 배경은 ‘대전’이다. 대전의 유명 제과점 성심당을 비롯하여 유성온천, 엑스포 공원, 보문산, 장태산, 양지공원, 선화동, 갑천, 대전천, 두부두루치기 식당인 진로집 등 대전 구석구석의 여러 배경이 등장하여 소설의 현실감을 높여준다.


정말 이 소설이 영화화되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우리도 깨닫지 못했던 부분을 건드려 주면 좋겠다. 솔이가 유튜브 방송을 하면서 멘트로 날린 말처럼 말이다.


“아미고(Amigo 친구) 여러분, 누구나 마음속에 돈키호테 하나씩은 있잖아요!”(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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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푸 1~2 초판본 The World of Pooh 스페셜 박스 세트 - 전2권 classic edition
앨런 알렉산더 밀른 지음, 어니스트 하워드 쉐퍼드 그림, 박성혜 옮김 / FIKA(피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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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푸와 친구들의 순진무구함, 어린아이다운 천진난만함, 너무도 자연스럽고 너무도 당연한 생각과 행동이 비쳐 보여서 기분이 무척 포근해져왔다. 어른들에게 잔잔한 경종을 울리는 것 같은 아름다바고 순수하며 맑고 재미진 이야기 퍼레이드. 소장하고 싶은 곰돌이 푸 초판본 스페셜 박스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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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푸 1~2 초판본 The World of Pooh 스페셜 박스 세트 - 전2권 classic edition
앨런 알렉산더 밀른 지음, 어니스트 하워드 쉐퍼드 그림, 박성혜 옮김 / FIKA(피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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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곰돌이 푸’를 처음 알게 된 때는 1987년이었던 거 같다. 어릴 때 어머니께서 사주신 《계몽사 판 디즈니 그림명작 시리즈 60권 세트》였다. 그림이 예쁘고 귀여웠다. 스토리도 재미있었다. 그래서 책이 닳을 정도로 자주 보았고 책 속의 캐릭터를 갖고 싶은 마음에 그림으로 그려 보기도 했다. 그 중에 〈아기곰 푸와 호랑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제36권 책에 곰돌이 푸가 있고, 그때 푸를 알게 되었다. 지금도 이 책들을 소장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곰돌이 푸’는 디즈니 창작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원작이 있다니!


‘곰돌이 푸’는 영국의 작가 A. A. 밀른(Alan Alexander Milne)이 집필한 동화 《WINNIE-THE-POOH》가 원작이고 무려 1926년 작이다. 그리고 ‘곰돌이 푸2’에 해당하는 속편 《THE HOUSE AT POOH CORNER》가 1928년에 출간되었다. 이번에 《곰돌이 푸 1-2 오리지널 초판본 스페셜 박스 세트》를 통해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곰돌이 푸가 이토록 오랜 기간 사랑받아왔음을 처음 알게 되었다.


작가 밀른과 아들 크리스토퍼는 런던동물원을 자주 찾았는데, 아들이 유독 위니(Winnie, 캐나다 흑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밀른은 위니를 모델로 아들이 가진 테디 베어 인형에 이름을 붙였고, 아들에게 읽어줄 잠자리 동화를 지었다. 이후 친구인 일러스트 작가 E. H. 쉐퍼드(Ernest Howard Shepard)에게 삽화 그림을 부탁하여 1926년에 책으로 펴내면서 곰돌이 푸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고 한다. 그렇게 곰돌이 푸 동화가 유럽에서 크게 성공하자, 디즈니 사의 월트 디즈니는 이 동화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싶어 하였다. 그래서 디즈니는 1961년에 원작 판권을 획득하고는 단편 애니메이션 〈곰돌이 푸와 꿀나무〉(1966년)를 발표하였는데 크게 흥행하여 미국 어린이들이 곰돌이 푸에 열광하게 되었고, 두 번째 단편 〈곰돌이 푸와 폭풍우 치던 날〉(1968년), 세 번째 단편 〈곰돌이 푸와 티거〉(1974년)까지 흥행하게 되었다. 이후 디즈니 사는 세 개의 단편을 엮고 몇 몇 장면들을 추가하여 1977년에 장편 애니메이션 〈곰돌이 푸의 모험(The Many Adventures Of Winnie The Pooh)〉을 개봉하였다.




이렇게 A. A. 밀른의 ‘곰돌이 푸’는 동화로도, 미디어 믹스로도 성공을 거둔 세계적인 캐릭터로 발돋움하였고, 지금껏 오래도록 사랑받는 최고의 인기 콘텐츠가 되었다.




이번에 새로 발간된 《곰돌이 푸 1-2 오리지널 초판본 스페셜 박스 세트》는 곰돌이 푸 시리즈 책 2권과 그림 포스터 2종, 삽화 스티커 2종이 함께 들어 있는 구성이다. 책은 1, 2권 모두 하드커버에 크라프트지(kraft紙) 소재의 겉표지가 인상적이다.


이제껏 나는 ‘곰돌이 푸’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동화 원작의 원제는 《WINNIE-THE-POOH》였다. 크리스토퍼 로빈의 테디 베어 인형에 ‘위니(Winnie)’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경위는 알게 되었으나, ‘푸(Pooh)’는 어떻게 해서 이름에 넣은 걸까?


제1권 《WINNIE-THE-POOH》를 펼치고 읽다보니, 첫 번째 이야기에 그 이유가 나왔더라.


꿀을 좋아하는 푸는 커다란 떡갈나무 꼭대기에서 시끄럽게 윙윙거리는 소리에 꿀벌이 내는 소리라고 생각하여, 꿀을 먹으려고 나무에 오르다가 나뭇가지가 부러져서 떨어지고 만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로빈’의 도움으로 풍선을 붙잡고 나무 꼭대기 근처 6미터 높이까지 올라갔다.


-푸 “나 어떻게 보여?”

-크리스토퍼 로빈 “풍선에 매달린 곰처럼 보여.”

-푸 “아… 파란 하늘에 뜬 조그만 먹구름처럼 보이지 않고?”

-크리스토퍼 로빈 “그다지.”(p29)



나무 꼭대기에서 벌을 맞닥뜨린 푸는 꿀벌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고는 크리스토퍼 로빈에게 총을 쏘아 풍선을 맞춰달라고 요청하였고, 방아쇠를 당겨 맞춘 풍선에서 바람이 피식 새어나가 푸는 둥실둥실 땅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오랫동안 풍선 줄을 잡고 있었더니 푸의 두 앞발이 굳어버려 일주일도 넘게 두 앞발을 번쩍 든 채로 지내야 했고, 파리가 푸의 콧잔등에 앉으면 입으로 바람을 푸푸 불어서 쫓아내야 했다.(p18-36)


“아마도 말이지, 그게 푸가 푸라고 불리게 된 이유가 아닐까 싶어.”(p36)


두 번째 이야기는 땅에 작은 구멍 출입구를 낸 집에서 살고 있는 ‘래빗’의 집에 푸가 방문하여 꿀과 연유를 대접받아 맛있게 먹고는 집에 돌아가려고 들어왔던 구멍으로 나가려고 몸을 집어넣었는데, 너무 많이 먹었는지 그만 구멍에 끼어버렸다는 에피소드이다.(p41-50)


이럴 때 보통의 어른이라면 아마도 여럿이 모여 온힘을 다해 강제로 푸를 뽑아내든가 아니면 장비를 이용해 구멍을 좀 더 파내는 등의 인위적인 방법을 모색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크리스토퍼 로빈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어. 푸가 홀쭉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해.”(p51)


홀쭉해질 때까지 밥도 못 먹고 구멍에 낀 채로 약 일주일 동안 있게 되어 우울해진 푸를 위해, 크리스토퍼 로빈은 책을 읽어 주었다. 일주일 뒤에 크리스토퍼 로빈이 푸의 두 앞발을 꽉 잡고 그 뒤로 래빗, 래빗의 친구들과 친척들이 줄줄이 붙들고 서서 힘껏 잡아당겨 푸를 자유의 몸이 되게 해주었다.



세 번째 이야기는 푸가 우연히 발견한 동물 발자국을 따라잡을 때까지 뒤쫓는 데 ‘피글렛’이 합류하였고 점차 발자국의 주인이 두 마리로, 세 마리로, 네 마리로 늘어나기까지 하자 두근거리고 초조해져 불안이 엄습하게 된다는 〈푸와 피글렛의 우즐 잡기〉이고, 뒤이어 나이든 회색 당나귀 ‘이요르’의 잃어버린 꼬리를 푸가 함께 찾아주기 위해 뭐든 잘 아는 친구 ‘아울’에게 도움을 청하는 네 번째 이야기, 미지의 생물 히파럼프를 잡기 위한 소동 이야기, 생일을 맞은 이요르를 위해 푸가 준비한 꿀단지와 피글렛이 준비한 풍선에 얽힌 이야기, ‘캥거’와 아기 ‘루’가 등장하는 〈캥거의 집에서 피글렛이 목욕을 하게 된 이유〉 이야기, 크리스토퍼 로빈과 친구들이 펼치는 북극 탐험에 얽힌 이야기 등이 연이어 펼쳐진다.



몇 몇 에피소드에서 크리스토퍼 로빈이 푸를 지칭하여 하는 말이 있다.


“암튼 바보 곰이라니까.”(1권 p31/50/69/180/224)


이 말은 푸가 ‘정말 바보 곰’이라고 놀리는 게 아니다. 크리스토퍼 로빈이 많이 좋아하는 푸에게 장난스럽게 혹은 다정하게 하는 말이다. 어쩌면 ‘정말 순수한 곰’을 뜻할 수도 있고, 크리스토퍼 로빈만이 푸를 지칭하는 애칭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만큼 크리스토퍼 로빈이 푸를 많이 좋아하고 위한다는 걸 책 곳곳에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푸와 피글렛의 우즐 잡기〉에서 푸가 자책한다.

-푸 “나 멍청하게 착각하고 있었어. 나 정말 머리가 나쁜 곰이야.”

-크리스토퍼 로빈 “넌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곰이야, 푸.”

-푸 “정말?”(p69)


다섯 번째 이야기에서 히파럼프를 잡기 위해 구덩이 속에 미끼로 놓은 꿀단지의 꿀을 푸가 핥아 먹으려다가 단지에 머리가 끼어버린 푸를 보고 크리스토퍼 로빈이 깔깔 웃었지만, 그래도 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몰라!”(p114)


특히 아홉 번째 이야기 〈홍수에 갇혀버린 피글렛 구출작전〉에서, 고립된 피글렛을 구하기 위해 푸가 ‘꿀단지가 물에 뜬다’는 아이디어를 내어 ‘둥실 곰 호’를 만들었고, 여럿이 타야하는 상황에서 푸는 또다시 ‘우산을 타고 가면 된다’는 똑똑한 생각을 해내자… 크리스토퍼 로빈은 “푸가 정말 용감하고 똑똑한 곰이구나.”(p223-224) 싶었고 우산 배의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난 이 배를 ‘푸의 천재적인 지능 호’라고 부르겠어.”(p225)




제2권 《THE HOUSE AT POOH CORNER》에도 다양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첫 번째 〈추운 이요르를 위해 푸 모퉁이에 지은 집〉은 눈 내리는 겨울에 집이 없어 머무를 곳이 없는 이요르를 위해 푸와 피글렛이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소나무숲의 ‘푸 모퉁이’라는 곳에서 나뭇가지로 된 이요르의 집을 지어주는 이야기로, 푸와 피글렛의 착한 마음씨에 내 마음이 따뜻해졌고 다소 엉뚱하게 전개되는 이야기에 웃음보가 터졌다. ‘티거’가 첫 등장하는 두 번째 이야기에서 친구들은 티거의 먹을거리를 찾아 함께 도와준다. 이어서 래빗의 친구들과 친척들 중 하나인 ‘꼬마’가 안보여 수색대를 편성하여 찾는 과정에 일어난 에피소드, 나무 위에 고립된 티거와 루를 구출하기 위해 크리스토퍼 로빈의 외투를 친구들이 팽팽하게 잡아 당겨 외투 위로 뛰어내리게 하여 구하는 이야기, 아침마다 크리스토퍼 로빈이 집 문 앞에 안내문을 붙이고 집밖으로 나가서 뭘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 푸가 만든 ‘푸 나뭇가지’ 게임으로 다 함께 놀기, 일곱 번째 〈티거가 콩콩 뛰지 않으려면〉 이야기, 가을날 아침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에 푸와 피글렛이 아울 집을 방문했는데 강한 바람에 집이 쓰러져서 빠져나오지 못할 때 피글렛이 ‘아주 대단한 일’을 해낸 이야기와 새로운 집이 필요한 아울을 위해 친구들이 나서서 돕는 이야기, 그리고 〈크리스토퍼 로빈과 푸, 마법의 공간으로 향하다〉라는 최종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특히 〈티거가 콩콩 뛰지 않으려면〉 이야기에서 래빗이 이렇게 말을 했다.


“티거가 요즘 콩콩 뒤는 게 심해졌잖아. 우리가 티거에게 교훈을 줄 때가 됐어.”(p169)라면서 “티거를 데리고 긴 탐험을 떠나. 티거가 가본 적이 없는 곳으로. 거기서 일단 티거를 길 잃어 버리게 하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티거를 찾아내. 그러면… 티거는 완전히 달라져 있을 거야. … 겸손한 티거가 될 테니까.”(p173)


그렇게 해서 래빗, 푸, 피글렛, 티거가 안개 낀 추운 날 탐험을 떠나게 되었는데, 래빗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상황이 전개돼 뜻밖의 반전과 뭉클함으로 인해 매우 흥미로웠다.(p179-193)


그리고 아홉 번째 〈새로운 집이 필요한 아울을 위해!〉 이야기에서 어려움에 처한 아울을 돕기 위해 친구들이 나서고 뒤늦게 “내가 그 애를 위한 집을 찾아냈어.”(p237)라며 이요르가 나타난 이후 웃어야 할지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지만, 오히려 눈물겨운 우정(?)이 빛을 발하는 훈훈한 결말(p240-241)을 맺는다.


열 번째 이야기에서 왜 떠나는지 어디로 떠나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크리스토퍼 로빈이 떠나게 되면서 모든 친구들과 인사하고, 마지막으로 숲의 맨 꼭대기 마법의 공간에서 푸와 이야기를 나눈다. “나… 나 이제는… 푸! 더는 아무것도 안 하는 일을 하지 않을 거야. … 내가 아무것도 안 하는 일을 하지 않는 동안에 네가 가끔 여기로 와줄 수 있어?”(p264-265)

그렇게 크리스토퍼 로빈과 푸는 약속을 하고, 함께 걸었다.


‘둘이서 어디로 가든,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었어. 이 숲 꼭대기 마법의 공간에서 꼬마 남자아이와 친구 곰은 언제까지나 함께 놀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p266)


이렇게 《곰돌이 푸 1-2 오리지널 초판본 스페셜 박스 세트》의 모든 이야기가 마무리 된다.


책을 덮고 나니, 내 마음이 너무도 따스해져 왔다. 이 책을 읽은 동안 마치 어린아이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았고, 옛 기억들이 간간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내 아이가 어렸을 적에 장난감과 인형들을 가지고 놀던 모습들이 알알이 생각나기도 하여 감회가 새로웠다.


푸, 피글렛, 이요르, 래빗, 아울, 캥거, 루, 티거, 크리스토퍼 로빈… 외모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며 생각도 다르고 행동도 다른 이들 캐릭터들이 만들어가는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읽다보니, 그들만의 순진무구함, 어린아이다운 천진난만함, 너무도 자연스럽고 너무도 당연한 생각과 행동이 비쳐 보여서 기분이 무척 포근해져왔다. 그리고 주변 환경과 상황, 인간관계 등에 얽매여 손익을 따지고 실질적인 것을 위해 신경 쓰고 몸부림치는 어른들에게 잔잔한 경종을 울리는 것 같다.


《곰돌이 푸 1-2 오리지널 초판본 스페셜 박스 세트》 속에는 피식~ 웃음 짓게 하는 유머 코드가 꽤 많이 눈에 띈다. 또한 읽다보면 뭔가 생각하게 만드는 내용들도 많다. 기억에 남는 내용들을 인용하면서, 책 소감 및 서평을 마치도록 한다.


이요르가 말했어.

“노래하는 거야. 쿵작쿵작 쿵쿵작. 다 같이 나무 열매와 산사나무 꽃을 따러 간다네. 그렇게 즐기면 돼.”(1권 p122)


푸는 캥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혼자 생각했어.

‘나도 캥거처럼 점프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누군가는 할 수 있어도 누군가는 할 수 없는 일도 있는 거지. 세상일이 다 그렇지.’(1권 p164)


이요르가 고개를 들더니 입안의 풀을 우물거리며 말했어.

“…앞으로 다들 기억해줬으면 좋겠어.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서 남을 배려하는 태도가 세상을 더 좋게 만든다고.”(1권 p193)


푸와 피글렛은 각자 깊은 생각에 잠긴 채 집으로 가는 길을 같이 걸었지.

-피글렛 “푸, 너는 아침에 눈 뜨면 무슨 생각을 제일 먼저 해?”

-푸 “‘아침 뭐 먹지?’하는 생각, 피글렛 너는?”

-피글렛 “‘오늘은 또 무슨 신나는 일이 일어날까?’하는 생각.”

-푸 “둘이 똑같은 거다, 그치?”(1권 p248)


“이렇게 약간의 수고만 들인다면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거야. 첫째로 머리를 써야 하고 그 다음부터는 열심히 노력해야 해.”(2권 p36)


-피글렛 “나 또토리 심는 중이야. 참나무만큼 키우려고, 그러면 집 바로 앞에서 또토리를 잔뜩 얻을 수 있잖아. 또토리 구하러 멀리까지 돌아다닐 필요도 없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푸?”

-푸 “음, 그럼 우리 집 앞에 벌집을 심으면 벌통으로 자라겠네.”(2권 p96)


숲에서 흘러나가는 시내는 숲의 바깥쪽에 다다를 때면 많이 불어나 있었어. 거의 강처럼 보였지. 그렇게 불어난 물은 작은 시내일 때처럼 힘차게 흐르며 물결치거나 물방울이 막 튀지는 않았어. 그 대신 물살이 전보다 천천히 움직였어. 이제는 어디로 갈지 알기 때문에 이렇게 혼잣말을 하지. “서두를 것 없어. 우린 언젠가는 그곳에 도착할 테니까.”(2권 p143)


“(친구들을) 모두 다 만나러 가자. … 목요일이니까 우리 모두에게 아주 행복한 목요일이 되길 빌어주러 가자.”(2권 p198)


-크리스토퍼 로빈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이 뭐야, 푸?”

-푸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은 피글렛이랑 같이 널 보러 갔더니 네가 ‘뭐라도 조금 먹을래?’하고 물어보고, 나는 ‘음, 조금이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너는 어때, 피글렛?’하고 말하는 거야. 바깥을 보면 노래를 흥얼거리고 싶은 날씨이고 새들도 지저귀지.”

-크리스토퍼 로빈 “나도 그거 좋아해. 근데 내가 정말로 가장 좋아하는 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일이야.”

-푸 “아무것도 안 하는 일은 어떻게 하는데?”

-크리스토퍼 로빈 “우리가 지금 하려는 게 아무것도 안 하는 일과 비슷해. 그냥 길을 걸으면서, 잘 들리지 않는 온갖 소리에 귀를 기울여. 굳이 애쓰지는 말고.”(2권 p256-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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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문천의 한국어 비사 - 천 년간 풀지 못한 한국어의 수수께끼
향문천 지음 / 김영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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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생소한 ‘역사언어학’ 분야를 일반 대중에게 흥미롭게 전해지도록 돕는 데 있어 손색이 없다고 생각된다.
구성면에 있어서도 상당히 잘 짜여진 직물과도 같은 책이라 생각된다.
한마디로 “생소한 역사언어학의 대중화 실현에 초석과 같은 책”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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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문천의 한국어 비사 - 천 년간 풀지 못한 한국어의 수수께끼
향문천 지음 / 김영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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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이 책을 접했을 때, 호기심을 증폭시키는 단어에 눈길이 갔다. 바로 비사(祕史)이다.

 

왜 비사라는 단어를 썼을까?

천 년간 풀지 못한 한국어의 수수께끼라는 게 과연 무엇일까?

혹시 우리 한국어의 탄생과 관련하여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있는 것일까?

훈민정음에 관한 속이야기라든가, 일설에 전해지는 녹도 문자, 신지 문자, 가림토 문자 등과 관련된 내용이 쓰여 있는 책일까?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 조선에 걸쳐 변화된 한국어에 관한 알려지지 않은 내용일까?

 

여러 의구심을 품은 채로 향문천의 한국어 비사를 읽었다.

 

아래는 [들어가며]에서 저자가 한 말이다.

언어는 진화합니다. ... 역사언어학을 공부하다 보면, 이것이 진화생물학과 참 닮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p15) ... 종의 진화와 마찬가지로, 언어의 변화는 필연적이며 합리적인 동기를 늘 가지고 있습니다. ... 이 책에서는 언어 변화의 수많은 동기 중에서도 언어 교류에 초점을 두고자 합니다.(p17)”

 

역사언어학’? 내게 매우 생소한 학문 이름이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본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통일신라 751년 발간),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 문서인 직지심체요절’(고려 1377년 발간)의 나라이다. 특히 조선은 역대 최강의 기록 강국으로, 훈민정음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조선왕조 의궤 등 다양한 기록물이 존재하며, 이들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2023년 기준 세계기록유산 18건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아시아 1, 세계 5위에 해당된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기록에 진심인 나라이기에, 중국 25사와 같은 역사서 체계나 일본 사서들처럼, 분명 각 시대별 사서나 주요 서적들이 기록되고 간행되어 풍부했을 것으로 여겨짐에도 불구하고 고조선~고려시대 사이의 기록물이 오랜 역사에 비해 너무도 빈약하다. 수많은 전란, 조선 태종 시기 분서(焚書) 사건, 세조예종성종에 이은 고대역사서를 비롯한 각종 서적들의 수집(분서를 했는지 불확실하지만, 당시 긁어모았다는 상고사의 역사서적은 현전하지 않음), 일제강점기의 수탈 등으로 인한 영향이 클 것이다.

각 시대별 국가의 역사는 문헌 비교, 발굴 사료 등을 바탕으로 고증비정하여 해석해볼 수 있겠지만, ‘언어는 어떤가.

언어는 사람의 음성으로 내뱉는 말소리이기에, 과거에 그 시대 사람들이 어떤 단어나 문장을 사용하였고 어떻게 발음하였는지 알 길이 없다. 만약 문자로 기록되어 있더라도 발음방법을 알아내기가 어렵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말의 경우 고대에 고유 문자체계가 미비하여 한자를 차용하여 기록했는데, 발음방법은 고사하고 원래의 표기조차도 파악이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언어의 유래, 표기, 발음 등을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

 

이를 알아내고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역사언어학이다. 이 학문은 언어학, 고고학, 역사학, 인문지리학 등이 총동원된 독특한 학문이라 하겠다.

 

우리나라는 고래(古來)로 우리만의 언어체계가 있었고 이는 현대의 한국어로 이어졌다. 다만 고대의 기록물이 현저히 적어서 한국어의 유래, 표기, 발음 등에 관한 역사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향문천의 한국어 비사는 한국어의 이와 같은 불가사의한 역사로 이끄는 책이다. 그래서 비사(祕史)’라는 단어를 선택했던가보다.

 

이 책에서는 한국어의 시대구분을 아래와 같이 하고 있다.



직관적으로 볼 때, ‘현대 한국어와 중세 한국어는 직선적인 관계’(p26)에 있고 수많은 문헌을 통해 점진적인 변화를 관찰’(p26)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현대 한국어와 중세 한국어가 곧바로 연결되어 있다면, 비록 삼국시대에도 한자를 빌려 자국어를 표기하는 수단이 활발히 사용되었지만 고대의 표기 전통이 단절되었더라도 중세 한국어와 고대 한국어도 연결되어 있어야 할 것(p26)이라고 저자 향문천은 말한다.

 

고대 한국어 자료와 이해가 결여된 현 상황에서 그나마 신라 향가(鄕歌)로 대표되는 문헌 자료가 남아있어, 그간 잘 연구된 중세 한국어를 향가에 투영시키는 방법으로 고대 한국어 신라어를 연구하였다는데, 향가를 중세 한국어의 시각에서 보려는 불가피한 시도는 신라어와 중세 한국어의 관계에 대해 착시 효과를 낳게 되었다(p27)고 지적한다.

 

나는 통일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면서 신라어가 그대로 고려시대 중세 한국어로 연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는데, 이것 자체가 착시라는 뜻이다. 전혀 뜻밖의 주장이었다!

 

후기 신라어에 나타나는 2가지 개신(改新 : 언어 요소의 변화)이 중세 한국어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p29)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본문에 이어진다.

 

그리고 일본어는 백제어의 후예라는 말을 수도 없이 접했기에 그냥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p36-42)

 

또한 반도 왜어라는 생소한 단어가 등장하고, 고대에 한반도에 왜어가 존재했다고 한다!

책에서는 한반도에 한때 존재했던 일본류큐어족 언어의 흔적이라고 언급하는데, 언어학자 존 휘트먼(John Whitman)이 고고학적 연구를 토대로 논증했듯이 일본류큐어족 집단인 야요이인이 산둥반도로부터 한반도를 통해 일본 열도로 이주했으므로, 반도 왜어의 존재는 흔들림 없는 사실(p50-51)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페이지 107-119[대륙에서 온 일본어족] 꼭지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최근에 성남시 복정동 일대에서 발견된 유물(한성 백제시대 서울 지역에 고대 일본인 거주 가능성을 시사, 한겨레 2024.03.07.), 전라도 영산강 일대에서 발굴된 왜계 장고형 무덤 등이 일본류큐어족 집단의 한반도를 통한 일본 열도로의 이주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개인적인 추측을 해본다.

 

그렇다면, 도대체 고대 한국어라는 것이 무엇인가.

 

국어학계의 한국어 계통론의 전통적인 통설에서는 부여(夫餘)계 언어와 한()계 언어로 구분하고,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 등을 그 갈래로 나누고 있다. 고조선 이래 삼국시대가 존재했으므로, 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저자 향문천은 다른 주장을 펼친다.

부여계와 한계를 구분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를 구분하는 주된 근거였던 삼국사기》〈지리지의 지명 자료를 세심하게 바라보면, ‘고구려어’ ‘백제어’ ‘신라어를 굳이 서로 다른 분류 체계로 나누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게 됩니다.”(p46)

이에 저자는 고대 한국어라고 통칭하면서, 한국어의 계통수를 간략화 하여 소개한다.(p57)

 


 

[2. 고대 한국어의 중심성]에서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국가 간, 민족 간에 일어난 단어의 차용, 차용어를 다루고 언어 간 친연 관계 등을 살핀다.

 

한반도 주변에는 다양한 세력이 존재해왔습니다. 한민족의 조상은 그들과 화친을 맺기도 했고, 교역을 하기도 했으며,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원하건 말건 주변 세력과의 접촉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고대 한반도를 중심으로 발생한 언어 접촉은 한국어사에서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베일에 싸인 고대 한국어의 난제를 해결할 중요 실마리를 만들었습니다.”(p60)

 

우리의 메주와 일본의 미소가 같은 단어에서 나왔고, 이들이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역사는 적어도 1,300년 정도 된다(p67)고 한다. 게다가 여진만주어에도 미수가 존재한다.(p69)

저자는 백제를 경유해 미소라는 식품과 단어를 차용했을 일본어와 고구려를 통해 미수를 차용했을 여진어를 통해, 백제와 고구려 언어가 동질적이었거나 아주 가까웠다고 짐작할 수 있다’(p71)고 말한다. 기타 수십 페이지에 걸쳐 멧돼지, 오이, 염통, 부처, , 구두, 보리, 송골매, 업진살, 선지, 순대, 수라상, 냄비, 담배, 고구마 등의 차용어를 상술(詳述)하면서 저자는 말한다.

 

이처럼 차용어의 존재는 집단 간 문화 교류의 살아 있는 증표입니다.”(p77)

 

특히 [윷놀이로 보는 동물 어휘] 꼭지(p120-127)를 통해 도, , , , 모의 어휘 유래를 살펴볼 수 있었고, [심마니들의 은어] 꼭지(p130-132)에서 은어들이 중세 한국어에서 직선적으로 이어지거나 여진만주어로부터 차용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또한 김치의 명칭이 외국에 전래된 사례도 소개한다.



김치가 옛날 쓰시마 방언에 유입되어 사용되었던 사실을 문헌 왜어유해(1782년경 조선 숙종 때 발간, 사역원 일본어 어휘집)으로부터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김치의 명칭이 외국어로 전래된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습니다.”(p136)

 

[3. 고유명의 세계]에서는, 언어의 고유성을 나타내는 인명지명관직명 등의 고유명을 통해 고유어의 가치를 선보인다.

 

고대 한반도 국가들은 ... 구어에서는 고대 한국어를 구사했다고 하더라도, 문헌상에 나타나는 언어는 한문이기 때문에 고대 한국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고대 한국어에서 고유하게 사용되었던 사람의 이름땅의 이름관직의 칭호 등은 한문으로 번역될 수 없었고, 이들은 주로 차자 표기, 즉 한자의 발음을 빌려서 적는 형태로 문헌 기록에 남았습니다. 때문에 고대 한국어의 비밀을 밝히는 데 고유명이 갖는 가치는 대단합니다.”(p158)

 

경주 금관총에서 2013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네 글자 명문이 새겨진 환두대도가 발견되었다. 그가 누구인가에 대해 연구자에 따라 눌지 마립간, 소지 마립간, 자비 마립간 등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아직까지 역사학고고학 관점에서는 의견만 분분할 뿐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그러나 저자 향문천은 이렇게 단언한다!

 

하지만 역사언어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사지왕은 자비 마립간이어야 합니다.”(p163)

 

이사지왕의 비정(比定) 과정에서, 역사언어학의 본색이 그대로 드러난다. 역사학, 고고학을 통해 드러난 이사지왕 명문, 역사서 삼국사기문헌과 인문지리서 지리지등을 통한 근거 발굴, 실제 지명(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의 옛이름 노사화현’, 대전광역시 유성구의 옛이름 노사지현) 확인, 언어학의 음운변화 확인 등 다양한 학문 분야가 총 동원된 것이다.

 

( )(이 사) nɛsɛ[네세] : 자비롭다 ɛ[]>o[] 음운변화 nosɛ[노세] 자비

 

“‘자비롭다, 너그럽다라는 의미의 고대 한국어 nɛsɛ[네세]nosɛ[노세]는 같은 단어의 통시적 변종이며, 이사지왕의 의미는 자비 마립간과 일치하므로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에 새겨진 명문 尒斯智王(이사지왕)은 자비 마립간을 가리킵니다.”(p166)

 

이외에 신라의 국호가 해상경로를 통해 서역으로, 육상경로를 통해 북방으로 전해진 경위를 밝히고 있다. 특히 나는 서울이라는 단어가 신라 서라벌에서 유래되었고 한민족()’의 어원이 크다는 의미를 갖는 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저자 향문천은 페이지 188-200에 걸쳐서 그에 대해 나의 상식을 완전히 깨뜨려버리는 주장을 펼쳐서 너무도 흥미로웠다!

 

[4. 격변하는 근대]언어 교류가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근대 일본이 서양에 공식적으로 문호를 개방한 것은 1854년에 미국과 체결한 ·미 화친 조약(神奈川 條約, 가나가와 조약)’이다. 그러나 일본은 그 전부터 서유럽 일부 국가들과 종교적, 문화적, 상업적 교류를 하고 있었다. 1540년 이전에 포르투갈인이 일본을 방문하여 처음으로 유럽식 화기를 전파하였고(p216), 1549년에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세 일본에서 기독교 선교를 진행하며 일본의 언어사인쇄사종교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뒤이어 스페인, 네덜란드도 일본을 방문한 바 있는데, 나가사키 데지마(出島) 항구를 통해 일본과 상업 교류의 문을 열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포르투갈일본어 사전 일포사서(日葡辭書), 네덜란드일본어 사전 하루마와게(ハルマ和解, 波留麻和解)등이 그 시기에 편찬되기도 하였고, 일본 내에서 네덜란드의 학문이란 뜻의 난학(蘭學)이 융성하였다. 특히 서양 학문에 대한 관심은 서양의 학술용어에 대응되는 번역어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 시기 산소질소탄소금속용해시약 등 새로이 고안해낸 신어(新語)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p215-219)

 

현대 일본어는 화장실을 토이레(トイレ), ‘여권을 파스포토(パスポート)라고 하는 등 수많은 외래어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데, 왜 근대기 일본은 번역주의를 취했을까?(p219)

 

그 당시 일본어에는 추상어가 없으므로 일본어를 계속 사용하면 도저히 서양 문명을 일본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며 영어를 일본의 국어로 삼아야 한다.”는 초대 문무대신 모리 아리노리(森有礼)가 주장하였는데, 이에 자유민권운동투사인 바바 다쓰이(馬場辰猪)영어를 국어로 받아들일 경우 인도-영국 식민지-의 상황처럼 계층 간 이원화된 언어 습관이 생겨나 서로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기에 국민 모두가 같은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바바의 의견대로 서양의 추상적 개념에 대응되는 수많은 번역어를 만들어내게 되었다고 한다.(p221)

 

이런 이유로 자유개인사회권리주의 등의 추상 어휘들이 한자로 이루어진 수많은 근대 번역어로 고안되었고, 이렇게 탄생한 신조어는 현대 일본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상 어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와 중국어에도 대거 유입되어 동아시아 공통 어휘로서 자리잡게 되었다.(p224)


 

실제로 한국어에서 한자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데, 표준국어대사전의 표제어를 기준으로 보면 한국어 어휘 가운데 한자어가 무려 전체의 53%를 차지한다(p236)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가 한자문화권이다보니 한자어가 많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여기서 놀라운 점을 저자 향문천은 알려준다!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그 한자어의 상당수가 근현대 일본에서 창조된 번역어라는 사실입니다.”(p236)

 

물론 근대 중국을 통해 들어온 화학, 전기, 염증 등과 같은 한자번역어들도 다수 있으며, 뜻 번역이 아닌 소리나는 대로 음역한 단어들이나 중화요리 명칭 등에 대해서도 후술한다.

 

그리고 일본제 속어가 우리 생활 중에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다고 한다!

 

현대 한국어에 대한 일본어의 영향은 어휘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각종 숙어와 관용 표현에까지 이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한국어 화자는 이쪽 방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극히 드뭅니다.”(p293)

 

우리가 문학 작품에서 접하는 관용구,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날마다 접하는 굳은 표현들 속에 일본제 속어가 있다는 것.

 

 

한국어 문어체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예로부터 일본의 문장가들이 사용하던 숙어적 표현을 직역해 한국어에 번역차용해온 것입니다. (또한) 에 대한, 에 의한, 에 관한 등의 불완전 동사 표현도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을 그대로 번역차용한 결과입니다.”(p294)


이를 통해 일제 치하의 35년 간 한국어가 굉장히 다대한 변화를 겪었고, 일본어로부터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책 뒷부분 [부록]은 꽤 두껍다. 거란 소자, 한자의 약자 제정사 등이 실려 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출판된 계기가 재밌다.

“2020821, 김영사로부터 한 편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한중일 언어 인문학이라는 키워드로 책을 써보지 않겠냐는 출간 제의였습니다.”(p303)



 

저자 향문천은 현재 역사언어학을 중심으로 하는 콘텐츠로 176천여 명 구독자를 보유한 지식 유튜버이지만, 2020년 당시엔 구독자 7만여 명의 작은 유튜브 채널이었다고 한다. 하필이면 군입대와 맞물렸고, 질적으로 양적으로 높은 수준의 정보를 체화하기 위한 폭넓고 깊은 자료 조사를 거듭하면서 셀 수 없을 만큼 원고를 갈아엎어 가며 약 3년 동안 저술에 집중하여 20242월에 드디어 향문천의 한국어 비사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 향문천의 한국어 비사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생소한 역사언어학분야를 일반 대중에게 흥미롭게 전해지도록 돕는 데 있어 손색이 없다고 생각된다. 또한 구성면에 있어서도 이 책은 상당히 잘 짜여진 직물(織物)과도 같은 책이라 생각된다.

 

한 마디로 향문천의 한국어 비사생소한 역사언어학의 대중화 실현에 초석과도 같은 책이라 할 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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