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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친 오후의 헌책방
야기사와 사토시 지음, 서혜영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평점 :
“2009년 첫 출간으로부터 13년 만에 발견된 세계적 베스트셀러”라는 말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럴 수도 있구나?!
가요계에서는 이런 일이 간간히 생긴다. 이른바 ‘역주행’.
2017년에 공개된 브레이브걸스의 미니 4집 《Rollin’》 타이틀 곡 ‘롤린’이 활동 후 4년 만인 2021년 2월 즈음 유튜브를 비롯한 매체를 통해 음원 차트를 역주행한 바 있었다. 심지어 1968년 영국에서 결성된 그룹 ‘플리트우드 맥(Fleetwood Mac Rumours)’의 1977년 노래 ‘드림(Dreams)’이 2024년에 뜻밖의 역주행을 하여 빌보드 차트에 진입하기도 했다.
첫 출간 13년 만의 역주행뿐인가?
전 세계 30개국 판권 수출, 2024년 영국도서상 최종 후보(소설 데뷔작 부문)까지...
작가 야기사와 사토시(八木澤里志)의 작품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2009년 제3회 치요다 문학상 대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이 작품은 휴가 아사코(日向朝子)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2010년 10월에 개봉되었다. 이후 작가는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의 속편인 《모모코 외숙모의 귀환》을 2011년에 출간하였다.
국내에서는 2013년에 첫 번역본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블루엘리펀트)이 출간된 바 있다. 그리고 이번 《비 그친 오후의 헌책방》은 앞서 국내 출간된 바 있는 해당 소설을 새롭게 옮긴 책이다.
이 책 《비 그친 오후의 헌책방》에는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과 ‘모모코 외숙모의 귀환’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모모코 외숙모의 귀환’은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의 속편으로 그로부터 1년 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목차>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
-모모코 외숙모의 귀환
[제1장]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
‘나(다카코)는 여름이 시작된 때부터 다음 해 이른 봄까지 모리사키 서점 2층에 있는 빈방에서 책에 둘러싸여 지냈다. 해가 잘 들지 않고 비좁은 데다가 헌책들의 곰팡내까지 떠도는 방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곳에서 보낸 나날들을 잊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 서점은 내가 진정한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의 날들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무채색의 단조롭고 쓸쓸한 나날일 뿐이었을 것이다.’(p8)
주인공인 다카코는 25살 규슈태생으로 도쿄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3살 연상인 직장 선배 히데아키와 사귄 지 1년 되었는데 어느날 히데아키가 다른 사람과의 결혼을 선언하였다. 다카코는 그로 인하여 슬픔에 사로잡혔고 2주 후 결국 사표를 냈다.
‘나는 옛날부터 그 자리에서 즉각 감정을 표현하는 데 서툴렀다. 나중에 혼자가 되어 곰곰이 생각하지 않으면 본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도 모르는 스타일이었다.’(p12)
‘생각해보면 나의 25년 인생은 늘 적당히 적당히였다. 적당히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적당히 좋은 대학교를 나와, 적당히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그렇게 계속 무난한 인생을 보낼 거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제법 마음에 들기까지 했었다. 행복의 절정도 없지만 밑바닥도 없다. 그것이 내 인생의 비전이었다.’(p14)
그로부터 한 달 쯤 지나 도쿄 진보초 헌책방거리에서 모리사키 서점을 운영하는 사토루 삼촌(엄마의 남동생, 즉 외삼촌)에게서 연락이 왔다.
근대문학 전문 헌책방인 모리사키 서점은 증조할아버지가 다이쇼시대(1912-1926)에 연 서점으로, 대를 잇다가 10년 전 사토루 삼촌이 물려받은 것이다.
외삼촌의 이미지는 내가 모리사키 서점의 전 주인이었던 할아버지에게서 느꼈던 ‘고서점 주인’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달랐다. 할아버지는 실로 완고하기가 이를 데 없는 성격에 말수도 적었다. 그에 반해 외삼촌은 연체동물처럼 물러 터졌다.(p40) 그래도 주변에서는 사토루 삼촌에 대해 이렇게들 말한다. “숙맥일지는 몰라도 이 서점의 구세주니까.”(p43)
사토루 삼촌의 제안은 이랬다.
“일을 관뒀다면서? 그래서 말이야. 좀 생각해 봤는데, 당분간 어디 취직할 생각이 없다면 어때, 우리 서점에 와 있지 않을래?”(p18)
그로부터 2주 후 나는 모리사키 서점으로 거처를 옮겼다.(p21)
외삼촌은 짐을 반강제로 빼앗아 들고는 서점 안으로 나를 이끌고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곰팡내가 코를 자극했다. 곰팡내 나, 하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외삼촌이 웃으며 말했다.
“비가 그친 아침처럼 촉촉하다고 말해줬으면 좋겠구나.”(p25)
다카코는 서점에 온 후로 일주일 넘도록 늘 잠만 잤다.
“너는 어떻게 늘 잠만 자니? 꼭 수면괴물 같구나.”(p41)
사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자고 또 잤다. … 서점이 쉬는 날에는 그야말로 온종일 잤다. 자도 자도 또 자고 싶었다. 잠이 들어 꿈속에 빠지면 나쁜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다. 꿈은 엄청나게 달콤한 꿀이었다. 나는 꿀벌처럼 꿈을 찾아 날아다녔다.
깨어 있는 시간에는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자꾸만 히데아키가 떠올랐다. … 때때로 그가 결혼한다 했던 말이 사실 전부 거짓말이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 나는 자꾸만 밀려오는 이런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고집쟁이라는 소리를 듣건 말건 계속해서 잤다.(p43-44)
사토루 삼촌은 다카코와 함께 모리사키 서점 인근 뒷골목에 있는 스보루 카페에 들렀다. 50년도 더 된 안정된 분위기의 카페에는 40대 사장님과 여종업원 도모 짱, 남종업원 다카노 군이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렇게 외삼촌과 함께 걷는 건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 시절에는 둘이서 손을 잡고 탐험을 한다면서 할아버지 집 근처를 온종일 걸으며 돌아다녔다. 무엇이 그렇게 즐거웠을까. 나는 꺅꺅 소란을 떨며 난리를 떨곤 했다. 외동이고 내성적인 아이였던 나에게 외삼촌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자상한 오빠 같아서 좋았다.(p52-53)
“삼촌은 제 나이 때 뭐 하셨어요?”
“글쎄다, 그때는 책만 읽었나.”
“그것뿐이에요?”
“그리고, 여행.”
“여행?”
“그래,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서 여행을 떠났지. 배낭을 등에 메고 여러 나라를 돌았어. 태국, 라오스, 베트남, 인도, 네팔. 유럽도 한 번 횡단했지.”
외삼촌이 그렇게 활동적인 사람이었는지는 몰랐다.
“그랬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취직해서 일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
“글쎄……. 한마디로 말해 다양한 세계를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어. 그렇게 해서 나의 여러 가지 가능성을 알아보고 싶었고. 누군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나만의 인생을 알고 싶었지.”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고 싶어서 일본을 벗어났는데 결국은 서점의 주인이 되었다니, 조금 모순된 것 아닌가.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지금 한 얘기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알았던 외삼촌의 이미지는 상당히 달랐다. 어른이 된 지금 외삼촌의 기분을 조금 알 것 같았다. 나도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가치관과 기분에 솔직하게 살 수 있다면, 하고 대학생 시절 자주 몽상했었다. 물론 그걸 실제 행동으로 옮길 용기 같은 건 없었지만.
외삼촌이 이렇게나 자유분방하게 지낼 수 있는 비결은 젊은 시절을 그렇게 보냈기 때문일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니 외삼촌이 조금 부러웠다.(p54-55)
외삼촌은 웃으며 말했다.
“이것만큼 나랑 맞는 직업도 없어.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 거리만큼 멋진 곳은 또 없으니까. 여기서 서점을 할 수 있는 걸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 …”
“왠지 부럽네, 삼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것으로 살아가잖아요.”
“그렇지도 않아. 나 나름대로 처음에는 꽤 고민을 많이 했어. 글쎄, 내가 아버지의 뒤를 잇다니, 꿈도 꾸지 않았으니까. 지금도 헤매기만 하는걸. 하지만 누구든 자신이 정말로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금방 알 수는 없을 거야. 평생에 걸쳐서 조금씩 알아가는 걸지도 모르지.”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그저 시간만 허비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아. 인생은 가끔 멈춰서 보는 것도 중요해. 지금 네가 이러는 건 인생이라는 긴 여행 중에 갖는 짧은 휴식 같은 거지. 여기는 항구고 너라는 배는 잠시 여기 닻을 내리고 있는 것일 뿐이야. 그러니 잘 쉬고 나서 또 출항하면 돼.”
“그래서 삼촌은 여행하거나 책을 읽거나 하면서 많이 배우셨나요?”
“글쎄다. 어디를 돌아다녀도, 아무리 책을 읽어도, 나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그게 인생이라는 거겠지. 늘 방황하면서 살아가는 거야.”(p55-57)
다카코는 문득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우연히 손에 닿은 책을 읽게 되었다. 무로 사이세이의 〈어느 소녀의 죽음까지〉. 분명 지루해서 바로 잠들어 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걸까. 한 시간 후에 나는 그 책에 완전히 빠져들고 있었다. 어려운 말로 쓰인 문장도 있었지만, 보편적인 인간 심리를 주제로 삼고 있어 내 마음 속으로도 수월하게 스며들어 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p60-62)
생각지도 않은 일이 내 속에 숨어 있었던 문을 여는 경우도 있다. 그때의 내 기분이 정말로 그랬다. 그렇게 그 일을 계기로 나는 지치지 않고 책을 읽어 치우게 됐다. 지금까지 계속 마음속에서 잠들어 있던 독서 욕구가 팡! 하고 터져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나는 맛난 음식을 맛보듯이 천천히 한 권 한 권 읽어나갔다.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 작가든 이름조차 몰랐던 작가든 어쨌거나 재미있어 보이면 전부 손에 들고 탐욕스럽게 읽어나갔다.
책을 통해 이런 멋진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는 전혀 몰랐다. 왠지 지금까지 인생을 손해 보며 산 것 같은 기분조차 들었다. 더 이상 게으르게 자고 또 자는 짓은 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렇고 싶지 않았다. 잠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대신 외삼촌과 번갈아 가며 가게를 보면서 내 방에서든 카페에서든 책을 읽었다.
헌책 속에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많은 역사가 쌓여 있었다. 이건 결코 책의 내용에 관해서만 하는 얘기가 아니다. 한 권 한 권마다 오랜 세월을 거쳐 온 그 흔적들을 나는 여럿 발견했다.(p63-64)
예전에 그 작품을 읽고 감명받은 사람이 펜으로 밑줄을 그어놓았다. 나 역시 그 부분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모르는 누군가와 마음이 통한 것 같아 기뻤다.
어떤 때는 눌러서 말린 꽃으로 만든 책갈피가 끼워진 책을 발견하기도 했다. ……
세월을 뛰어넘는 만남은 헌책에서만 맛볼 수 있는 기쁨이다. 그런 식으로 헌책이 주는 소소한 기쁨을 느끼다보니 그 책들을 모아놓은 모리사키 서점이라는 헌책방에도 차차 애정이 생겼다. 시간이 조용하게 흐르는 작은 공간에 거처할 수 있다는 것이 이제는 내 인생에 주어진 무척 귀중한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p65)
진보초 헌책 축제 마지막 날 밤에 모리사키 서점 2층 방에서 다카코와 사토루 삼촌은 술을 마시며 단둘이 파티를 하였다.(p82-83)
“있잖아요, 왜 저한테 이렇게 친절하게 대해주시는 거예요? 조카라고 하지만 그렇게 자주 봐왔던 사이도 아닌데.”
“다카코를 좋아해서 그러지. …… 넌 삼촌을 그냥 잘 모르는 친척 아저씨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난 달라. 넌 내게 천사거든.”
“천사요?”
“그래, 천사. 그리고 넌 내 은인이야.”
“은인이라고요?”(p84-85)
“나는 1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내 존재 가치를 찾지 못해 우울하게 하루하루를 보냈었어.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그저 나 자신의 껍데기에 틀어박혀 있었지. 자의식 과잉에, 이상도 야심도 웬만큼 갖고 있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인간. 그게 나였단다. 이 세계 어디에도 내가 있을 장소가 없다는 느낌이 들었지.”
외삼촌이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니, 조금도 몰랐다. 그런데 그것과 내가 천사라는 것 사이에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다는 걸까.
“누나가 널 낳은 건 내가 바로 그런 상태에 있을 때였어. 누나가 부모님께 손녀딸을 보이겠다고 친정에 돌아왔을 때 나도 너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지. 담요에 싸여 쌕쌕 잠들어 있는 너를 본 순간 나는 정말 영문 모르게 눈물이 나려고 했어.
뭐랄까, 생명의 신비에 가슴속이 꽉 차올랐다고나 할까. 이 아이에게 세상은 온통 새로운 것뿐이겠구나. 그 속을 헤엄쳐 다니면서 그 모든 것들을 경험하고 배우며 커가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그게 마치 내 일인 것처럼 마음이 들떴어.
그랬더니 갑자기 나의 비뚤어진 마음속에 따뜻한 햇살이 하나 가득 비쳐 들어오는 거야. 희미하긴 했지만 내 안에서 무엇이든 해보자는 의지가 힘차게 싹트는 걸 느낄 수 있었어.
나는 그때 결심했단다. 이제 나 혼자만의 좁은 틀 안에 박혀 사는 생활은 그만두자. 여러 가지 것을 보러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우자. 그래서 내가 있을 장소를, 내가 그곳에 있어도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장소를 찾자. 여행을 떠난 것도 책을 마구 읽어댄 것도 그때부터였어. 그러니까 요컨대, 다카코와의 만남은 나에게 어떤 계시와도 같았다는 얘기야.”
“계시라……. 뭔가 굉장하네요.”
“너는 어떤 의미에서 내 은인이야. 그래서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해주고 싶은 마음이란다.”
외삼촌의 진심 어린 말을 듣고 나니…… 어렸을 때 외삼촌이 왜 그리 나를 따뜻하게 대해줬는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자 가슴이 뜨거워졌다.(p85-88)
“큰 뜻을 품고 세계로 뛰쳐나갔는데 결국 도달한 곳이 내가 어린 시절부터 익히 알았던 장소(모리사키 서점)라니. 웃기지? 하지만 오랜 시간이 걸려서 이곳으로 돌아온 거야. 장소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었어.
그래, 그건 마음의 문제야.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자신의 마음에 진솔할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내가 있을 장소야. 그걸 깨닫는 동안 내 인생의 전반부가 지나갔다고 해야겠지. 그리고 나는 이제 가장 마음에 드는 항구로 돌아와 여기에 닻을 내리기로 결정한 거야. 나에게 이곳은 신성한 곳이고 가장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장소야.”(p88-89)
새해 1월 2일. 히데아키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가슴속에 불쾌한 기분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더니 사라지지 않고 끝끝내 남았다.(p93)
반년이나 지난 지금, 그의 목소리를 아주 잠깐 들은 것만으로 마음속이 이렇게 소란스러워지다니. 결국 응어리를 남겨놓고 있다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제야 겨우 깨달았다.
“다카코, 너 속에 뭘 끌어안고 있는 거니? 무슨 일인지 얘기해 봐.”
외삼촌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전부 다 털어놓았다.
막상 꺼내놓고 봐도 실제로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저 애인을 잃고 직장을 잃었다, 그것뿐이다.(p92-95)
외삼촌은 …… 결연하게 말했다.
“좋아, 지금부터 그 녀석에게 사과받으러 가자! ‘너에게 상처를 입혀서 미안하다, 내가 나쁜 놈이었다’라고 본인 입으로 말하게 하자고.”(p96)
밤 11시.
택시로 40분이나 걸려 히데아키가 사는 맨션 앞에 도착했다.
각오를 해. 나는 나 자신에게 힘주어 말했다.
“나는…….”
눈물이 흘러넘치려 했다. 동시에 가슴속에서 계속 뭉쳐 있던 감정이 끓어올랐다. 그러자 더 이상 생각할 여유도 없이 갑자기 말이 홍수처럼 내 입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당신한테 사과받고 싶어서 왔어! 당신한테는 내가 그냥 갖고 노는 상대였겠지만 나는 아니야! 난 정말로 당신을 좋아했어! 나도 사람이야. 감정이 있다고! 당신한테는 쉬운 여자로만 보였겠지만 나도 생각이란 걸 할 줄 알고 숨도 쉴 수 있고 울 수도 있는 사람이야! 당신이 한 짓 때문에 내가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는지 알아? 나는…… 나는…….”(p104-105)
“이제 됐어요. 정말로. 이제 기분이 풀렸어요. 굉장히, 굉장히,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기분이 상쾌해요. 이렇게 큰 소리로 내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솔직하게 말해본 건 태어나서 처음일지도 몰라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외삼촌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p106)
만약 외삼촌이 계기를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가슴속에 이 마음을 담고서 상처받은 채로 살았을 거야.
“고마워요…….”
나는 보호받고 있어. 그래, 이런 식으로 나를 걱정하고 내 편에 서서 화를 내주는 사람이 있잖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넓은 세상에 나 홀로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가까이에 나를 지켜주고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는 거야.(p108)
얼마 뒤 나는 모리사키 서점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새로운 방을 구해서 3월부터 그곳에서 살기로 했다. 일단은 옛 직장과 관련된 작은 디자인 사무소에서 시간제 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p109)
서점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밤. 외삼촌은 ‘약속’해 줄 것을 말하였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걸 두려워하지 마.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을 때 마음껏 좋아해야 해. 설령 그 때문에 슬픔이 생기더라도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사는 쓸쓸한 짓 따위는 하면 안 돼. 나는 네가 이번 일로 더 이상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을까봐 무척 걱정이 돼. 사랑하는 건 멋진 일이란다. 그걸 부디 잊지 말아라. 누군가를 사랑한 기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 언제까지나 기억 속에 남아서 마음을 따뜻하게 적셔준단다. 나처럼 나이를 먹고 나면 알게 될 거야. 어때, 약속할 수 있겠니?”(p113)
[제2장] 모모코 외숙모의 귀환
“그 사람이 돌아왔어.”
이틀 전,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사토루 삼촌의 전화를 받았다. 내가 모리사키 서점을 나온 지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내가 서점을 나온 후, 작은 디자인 사무소에서 일하다가 3개월 전에 정규직 사원이 되었다. 그 탓에 조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터라 서점에도 두 달 동안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엔 그냥 놀러오라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몹시 흥분한 외삼촌의 목소리를 듣고 곧바로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p121-122)
“다카코. 오래간만이구나. 왠지 나, 우라시마 타로가 된 기분이야.”
(우라시마 타로 : 거북을 구해주었다가 용궁에 초대받아 3일 동안 머물다 귀향했는데 바깥은 300년의 시간이 지나 있었다는 내용의 일번 전래동화 속 주인공)
모모코 외숙모는 나를 보자마자 그렇게 말하며 깔깔깔 웃었다.
정말 돌아오셨구나.
그리고 굉장히 명랑했다. 이 밝은 기운은. 이게 5년 동안이나 행방불명이었다가 갑자기 돌아온 사람이 보일 태도란 말인가.(p118-119)
사토루 외삼촌이 외숙모의 속마음을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왜 지금 돌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 5년 전에 ‘건강하게 잘 살아갈 거예요. 찾지 마세요’라는 단 두 줄의 글만 남겨놓고 집을 나간 외숙모다. 짐도 거의 가져가지 않았다. 집을 나가기 전 어떤 전조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p127-128)
모모코 외숙모는 갑자기 내 두 손을 꼭 쥐더니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카코를 만나서 기뻐. 가끔 네 생각을 했어. 귀여운 우리 조카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하고. 고등학생 때의 다카코는 조용하고 침착하면서 청순가련한 아가씨라는 느낌이었는데. 게다가 두 갈래로 땋아 내린 머리가 무척 귀여웠고.”
“어,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할 말을 잃었다. 당시 나는 한창 사춘기여서 늘 마음이 불안했다. 하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혼자서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해 전전긍긍했다. 그 모습이 그렇게 보였다니. 친척 모임에서 얌전히 있었던 이유는 단지 그 자리에서 나에게 시선이 모이는 일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사람의 인상이란 별로 믿을 만한 게 못 되는구나. 번쩍 번쩍 눈읠 빛내며 이쪽을 바라보는 외숙모를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하긴 나 역시 사토루 삼촌에 대해서 잘 모르지 않았던가.
결국 사람이란, 서로 진심으로 마주하지 않는 한 피가 섞여 있어도, 같은 반이나 직장에서 몇 년을 같이 지냈어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른다.(p132)
진보초 헌책방 거리를 거닐다 오랜만에 스보루 카페에 들었다. 밤 9시쯤 들른 카페에서 우연히 모리사키 서점의 옛 고객을 만나게 되었다.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낯익은 사람. 20대 후반 정도 되는 마른 체격의 남자.
“제대로 인사한 적이 없었죠.”
“와다입니다. 와다 아키라라고 해요.”(p145)
“거기서(모리사키 서점) 일하긴 했지만 책에 대해서는 거의 몰라요. 겨우 입구에 선 느낌이랄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음?” 하고 와다 씨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 특별히 잘 알거나 모르는 것과는 관계없지 않을까요. 나도 뭘 대단하게 많이 알고 있진 않거든요. 그보다 한 권의 책과 만나 얼마만큼 마음이 움직였느냐가 중요한 게 아닐까요?”
“그런 걸까요. 하긴 삼촌도 늘 비슷한 말씀을 하곤 했어요.”(p149)
“다카코 씨는 그 서점의 풍경에 무척 잘 녹아들어 있어서,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대로 가만히 놔두고 움직이게 하고 싶지 않은,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번데기가 나비가 되는 순간을 숨을 죽인 채 꼼짝 않고 바라보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 모습이 강하게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아까도 다카코 씨가 책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바로 누군지 기억났던 거예요. 아, 그 서점 분이구나, 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보였다는 사실이 굉장히 멋쩍었다. 하지만 그 시절 나는 분명, 나비가 되기를 기다리는 번데기 같은 존재이긴 했다. 나는 책장을 넘기면서 계속 날아갈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와다 씨가 나를 보고 그렇게 느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았다.
“만약 그 서점에 가지 않았다면 지금도 계속 멍청히 살고 있었을 거예요. 책 자체도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지만 거기서 만난 사람들에게서도 많은 것을 배웠거든요. 덕분에 나 자신에게도 소중한 것이 있다는 것을 겨우 알게 된 것 같아요. 지금도 난 그 서점에서 지낸 날들을 잊을 수 없어요.”(p149-150)
와다 씨와 헤어진 뒤, 왠지 발걸음이 붕붕 떴다. 몸이 묘하게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이상하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p152)
와다 씨는 멋진 사람이다. 싹싹하고 예의 바르고 유머도 있다. 책에 대해서도 잘 안다. 자기 자랑을 줄줄 늘어놓지도 않고, 천박한 웃음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분명 그의 인간성에 끌리는 여성도 많이 있겠지.(p163)
외숙모에 대해서 알게 된 점이 몇 가지는 있었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니가타의 고모 부부에게 신세를 졌다는 것,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작은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 후 스물한 살에 혼자 도쿄로 나와 전도유망한 젊은 카메라맨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 등등.
모모코 외숙모가 한때 파리에 머물렀던 건, 도쿄에서 만난 그 카메라맨 애인이 업무차 그리로 갔을 때 쫓아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더구나 상대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멋대로 쫓아갔다고 하니. 그 대담함이 외숙모다웠다.
“나도 그때는 젊었거든!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여자애였어…… 머릿속에 그 사람에 대한 생각 말고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어. 하지만 나중에 그에게는 부인과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 뭐야. 그래서 끝난 거야. 아니, 내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왔던 가족이 다른 가족을 깨지 않고는 손에 넣을 수 없다니. 그건 너무하잖아…….”
모모코 외숙모는 시선을 먼 곳에 두고서 말했다.
결국 미래를 약속할 수 없던 사랑을 잃고 상심에 잠겨 있던 때에 사토루 삼촌과 우연히 마주쳤다고 했다. 처음에는 왠지 내버려둘 수 없어서 이것저것 보살펴주었는데, 어느새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p156-157)
“둘이 같이 여행 가자.”
외숙모가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낸 건 그로부터(서점에서 재회하고부터) 2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오쿠다마에 무척 좋은 곳이 있어. 큰 산이 있는데, 그 산 정상에 유서 깊은 신사가 있어. 경치는 물론이고 공기도 상쾌하고 최고야 최고. 분위기 있는 산장에 머물면서 여유롭게 지내다 오자고. 여자끼리 어때, 괜찮지?”(p153)
모모코 외숙모와는 신주쿠역에서 10시에 만나기로 했다.(p175)
신주쿠에서 주오선을 타고 다치카와역에서 오우메선으로 갈아탔다.(p177)
우리는 미타케역이라는 작은 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산 중턱에 있는 케이블카 승차장을 향해 국도를 달려갔다.(p178-179)
케이블카는 맑은 계곡의 흐름을 따라가듯이 산 위로 올라가 산 정상 바로 아래에 우리를 내려줬다. 그곳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타박타박 걸어갔다. 우리는 이미 해발 1000미터 가까이 올라와 있었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옆을 따라 40분을 더 가서 목적지인 숙소에 도착했다.(p181-182)
“사토루 곁을 떠나와서 한동안 여기 살면서 일했거든.”(p184)
모모코 외숙모는 이곳 산장에서 3년 정도 있었다고 한다.(p186) 지금 산장에서 일하고 있는 하루 짱의 말에 의하면, 모모코 외숙모가 산장에 있었을 때 별로 말도 하지 않고 좀 더 어두웠다고 한다.(p196)
다음날 아침 산 정상을 향해 둘은 함께 올라갔다.
“외숙모는 정말 건강하시네요.”
“너는 젊은 애가 체력이 형편없구나.”
“외숙모도 어제 만난 할머니만큼 건강하게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그게 말이야. 꼭 그렇게 될 것 같지도 않아. 병이 있거든. 겉은 말짱하지만 여기저기 이상이 있는걸.”
병? 병이라니, 모모코 외숙모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p201)
마침내 하늘이 펼쳐지며 정상이 드러났다. 산곡대기에서 보는 경치는 장관이었다.
“있잖아요. 외숙모.”
“응?”
“왜 사토루 외삼촌을 놔두고 나간 거예요?”
“옛날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했지?
“네.”(p202-203)
“그 시절, 그 사람의 아기가 생겼었어. 난 가족이란 것에 무척 큰 동경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임신한 사실이 굉장히 기뻤지만 그 사람은 기뻐해 주지 않았어. 그 사람한테는 일본에 부인과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나는 그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고.”
“그때 내가 좀 더 강했더라면 그 아이를 지켜줄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어. 누군가를 엉망으로 상처 입히면서 행복해질 자신도 없었고, 미혼모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갈 용기도 나한테는 없었어. 나중에 죽을 만큼 후회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지…….”
“그 후 사토루 씨를 만나 결혼한 거야. 그이도 아이를 간절히 원했지만 좀처럼 생기질 않았어. 그러다가 10년이 지나서야 겨우 아기가 들어섰어. 그이는 기뻐했고 나도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지. 하지만 그 아이는 태어나기도 전에 내 배 속에서 죽었어……. 벌받은 거라고 생각했어. 옛날에 아기를 죽게 한 벌을 지금 받은 거라고. 나한테는 아이를 낳을 자격이 없다고……. 그이는 성심껏 날 위로했어. 자기도 괴로웠을 텐데 말이지. 그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사람이 좋잖아. 다카코 너도 알지?”
“그래서 나도 어떻게든 마음을 추스르고 함께 모리사키 서점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노력했어. 그이도 나를 생각해서인지 더 이상 아기 얘기를 꺼내지 않고 오직 서점 경영에만 매달렸지.
나도 모리사키 서점이 정말 좋았고, 그이 못지않게 서점에 애정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어. 몇 년이 지나도 슬픔이 사라지지 않았어. 배에 뻥 하고 구멍이 뚫린 것 같은 기분이 계속 들었어. 그 구멍은 사라지기는커녕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가는 거야……. 그런 기분으로 그이와 함께 있는 게 그이를 배신하는 행위처럼 느껴졌어. 결국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런 데까지 와 있었던 거야.”
모모코 외숙모는 얘기가 끝나자마자 휴우, 하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p204-205)
모모코 외숙모는 병에 걸려 얼마 전까지는 입원하고 자궁 적출이니 뭐니 이것저것 했지만 지금은 통원하면서 예후를 보고 있는 상태로, 앞으로 몇 년 동안은 방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p213)
모모코 외숙모가 사토루에게 돌아오게 된 것은 ‘꿈’을 꾸었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나는 어느 항구에서 마침 출항하려는 배를 탔어. 으음, 그게 아니라, 나 자신이 배였을지도 몰라. 어쨌든 나는 계속 저 멀리 보이는 지평선을 향해 나아가려던 참이었지. 이제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 그런데 돌아보니, 항구에 한 남자가 서서 이쪽을 향해 크게 손을 흔드는 거야. 한눈에 아, 사토루구나, 하고 알아차렸지. 이젠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예감이 들어서 나도 있는 힘껏 손을 흔들려고 했지. 하지만 내 배는 너무 빨라서 사토루가 자꾸만 작아졌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제 사토루는 보이지 않았고 나는 바다에 혼자 떠 있었어. 그런 꿈.”
“부끄럽게도 병실에서 그 꿈을 꾸고 깨어난 다음 나 스스로가 깜짝 놀랄 정도로 울었어. 그게 꿈이란 걸 알면서도 말이지. …… 그래서 아무래도 사토루를 한번 더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거야.”(p213-214)
“집을 나간 이유에 대해서도, 병에 걸린 사실에 대해서도, 누군가에게는 다 털어놓고 싶었어. 그리고 너는 내가 사토루한테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면 절대로 말하지 않을 아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건 너무해요.” 나는 눈물 섞인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모모코 외숙모는 미안해, 하고 몇 번이나 말했다. 그래도 나는 너무해, 하고 몇 십 번이나 되뇌었다. 그리고 그대로 울다 지쳐 잠들어버렸다.
여행이 끝나고 우리는 저녁에 신주쿠역에서 헤어졌다.(p218)
그로부터 이틀 뒤, 모모코 외숙모는 ‘고마워요. 부디 건강하게 지내요.’라고 쓰인 편지만을 남기고 말없이 사라졌다.(p220)
모모코 외숙모의 마음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5년이나 행방불명이었다가 갑자기 돌아와서 병에 걸렸어요, 하고 말하는 건 역시 못할 짓이다. 사토루 외삼촌을 아직 사랑하고 있다면 더더욱. 하지만 남겨진 외삼촌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나는 외삼촌 편이다. 외삼촌이 지금까지 계속 내 편이 되어주었듯이. 이대로 사라진다면 모모코 외숙모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p220)
“진짜 너무해. 비겁해. 외숙모. 이런 식으로 자신의 좋은 부분만 보여주고 나서는 사라져 버리다니. 이건 도망친 거야.”
나는 그 자리에서 등을 쫙 펴고는 외삼촌의 말을 가로막고 누구에게랄 것 없이 선언했다.
“저는 약속을 깨겠어요. 아니, 애초에 약속 같은 거 하지 않았어요. 상대방이 멋대로 말하지 말라고 했을 뿐인걸.”
“어?”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외삼촌에게 나는 그날 밤에 들었던 얘기를 간단하게 들려줬다.(p221)
“외숙모를 말릴 수 있는 건 삼촌뿐이에요.”
“응…….”
“그렇다면 빨리 일어나요!”
“외삼촌. 저한테 도망치지 말라고 하셨어요. 삼촌도 모모코 외숙모도 둘 다 도망치면 안 돼요. 서점은 제가 볼 테니까 모모코 외숙모한테로 가세요!”
“하지만, 어디 가서 찾으면 좋을지…….”
“어디 짚이는 데는 없어요? 모모코 외숙모가 맨 처음 갈 것 같은 장소라든가.”
“아니, 없어…….”
“외숙모한테 소중한 장소 같은 걸 생각해 보세요.”
외삼촌은 나를 오랫동안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아” 하고 외쳤다.
“딱 한 군데 있어. 아마도, 아니 분명 거기야…….”
외삼촌은 내게 걷어차이듯 등을 떠밀리고 나서야 겨우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는 서점 입구에 서서 외삼촌이 사쿠라도리를 맹렬히 달려가는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p222-224)
외삼촌이 모모코 외숙모를 찾으러 서점을 뛰쳐나간 그날, 외숙모는 결국 서점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외삼촌은 외숙모를 만날 수는 있었다. 태어나지 못한 두 사람의 아기가 공양된 절에서였다. 그녀는 절 뒤에 있는 샘에 오랫동안 혼자 서 있었다고 한다.
두 사람이 그곳에서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자세히 묻지 않았다. …… 가장 중요한 건 그곳에서 서로 마음을 열고 얘기했다는 것 아닐까.(p231)
그 후. 모모코 외숙모는 1년 뒤에 다시 돌아왔다.
“아무래도 마음의 정리를 해두지 않으면 당신에게 그냥 기대게 될 것 같아.” 헤어질 때 외삼촌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참으로 씩씩한 외숙모답다.(p233)
그리고 다카코는 스보루 카페에서 와다 씨를 다시 만났다.
와다 씨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다가 내가 웃고 있을 뿐이라는 걸 알아차리자 함께 따라 웃었다. 기분이 점점 더 편해졌다. 스스로도 그와 만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 나는 역시 와다 씨를 만나 굉장히 기쁘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와는 상관없는, 명확한 진실이었다.
“만나서 기뻐요.”
“나도 만나서 기뻐요. …… 다시 다카코 씨를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와다 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아하하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부끄러워서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힐끗 창 쪽을 바라보자 유리창에 우리 둘이 마주앉아 있는 모습이 비쳤다.(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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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 그친 오후의 헌책방》을 한 번 읽었을 때,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였을까?
나는 이 책을 결국 3번이나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평양냉면’을 처음 먹었을 때의 느낌과 닮아 밍밍했다고나 할까? 책에 대한 어떤 ‘평’을 쓰기에는 어떤 감성이나 소재, 느낌 등이 딱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 더 읽었다. 그때서야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관계와 그들 간의 상호작용 등등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조용하게 갖다놓은 ‘5년 전에 집 나간 모모코 외숙모 이야기’, ‘히데아키와의 찜찜했던 관계 결말’, ‘스보루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와다 씨’ 등에 관한 ‘떡밥’을 제대로 회수하였다.
3번째로 더 읽었다. 등장인물들의 민감하거나 섬세한 심리묘사들이 눈에 들어왔고. 전에는 파악하지 못했던 ‘복선’들이 보였다. 이는 작가가 외부 투영물에 비추어 인물의 심리묘사를 자연스럽게 하는 묘사능력이 탁월하고, 전반적으로 잔잔하게 흐르는 서사임에도 그 이야기 이야기 간극 사이에 떡밥, 복선들이 연결고리로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더 읽으면 읽을수록, 《비 그친 오후의 헌책방》만의 매력이 발산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마치 처음에는 슴슴하게만 느껴졌던 ‘평양냉면’의 맛과 매력에 서서히 빠져버리는 것과 같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오랜 읽기와 곱씹음, 고민 후에 이 책의 서평 방식을 결정하였다.
그 어떤 현학적인 평도 필요 없다. 수사도 필요 없다. 객관적인 첨언도 필요 없다.
이 책의 서평은...
스토리 전개를 중심으로 《비 그친 오후의 헌책방》의 내용과 느낌을 가감없이 잔잔하게 정리해보는 것.
그저 “책 그대로를 몇 번이고 읽어보는 것.”
실제로 이 책에 대한 평은 이미 세계적으로 차고 넘친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하면서 마치고자 한다.
“주인공이 헌책방에서 보내는 시간은 매우 소소하지만 그만큼 유익하다. 독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을 읽는 경험은 훨씬 더 빡빡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을 독자들에게 도피적인 평화를 불어넣는다.” - 〈스트레이츠 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