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페터 슬로터다이크 지음, 이덕임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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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이 책이 평범한 사회과학 책인 줄 알았다. 그러나 이 책은 심도 있는 철학책이었다. 그렇기에 철학적 배경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 책이 다소 어려울 수 있겠다. 그러나 조금 어렵더라도 이 책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어 내려가다보면, 세계사를 바라 보는 통찰을 얻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분노라는 관점으로 세계사적 사건을 해석한다. 서양사에서 기독교의 등장은 분노의 종말론화를 의미하고, 공산주의의 등장은 분노의 현세화를 의미한다. 기독교 교리에서는 재림 예수에 의한 최후의 심판이 최후의 분노를 의미한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개별적인 상황 가운데서 분노를 자제하는 이유는 예수의 최후 심판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분노가 종말론적 경향을 띠면서 역설적으로 이 땅에 극도의 불의와 불평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의 서양에서는 극심한 빈부격차가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 빈부격차는 결국 마르크스에 의한 공산주의의 등장을 초래했다. 공산주의는 분노의 현세화를 추구하며, 기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비판한다. 그렇게 공산주의는 최소 150년 정도 전 세계에서 득세하며 기독교의 대항마로서 우뚝 선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르네상스는 150년을 넘기지 못하고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냉전시대의 종식으로 인해, 국가적으로 공산주의경제를 추구하는 것은 시대적으로 뒤떨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불과 20년 사이에 공산주의는 전 세계에서 거의 사라지다시피 되었고, 기독교는 여전히 전 세계 각지에서 그 신자의 수가 꾸준히 늘고 있다. 공산주의가 지향하였던 분노의 현세화는 이렇게 실패하는 것일까?

냉전의 종식 이후, 세계에 참된 평화가 오나 기대하였던 사람들의 꿈이 무너지게 된 것은 이슬람 무장 세력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멀리는 미국의 9.11 테러와 가깝게는 영국의 맨체스터 테러는 이슬람 무장 세력에 대한 적개감과 분노를 고취시키는 만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테러가 더욱더 개인화되고, 게릴라화 된다는 것이다. 자살 폭탄 테러는 인류의 미래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실상 이슬람의 미래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이야말로 분노와 적개감을 넘어서는 평화의 복음이 만민에게 전파 되야 할 때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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