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합치 - 예술과 실존의 근원
프랑수아 줄리앙 지음, 이근세 옮김 / 교유서가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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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상적으로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 내게 클래식 음악은 몰입을 가속화시키는 일종의 촉매와 같다. 그러다가 종종 재즈 음악을 듣고 싶을 때가 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 재즈 음악을 들으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다. 나의 일상에서 클래식 음악은 집중을 위해, 재즈 음악은 이완을 위해 꼭 필요하다.

프랑스의 철학자 프랑수와 줄리앙의 '탈합치(De-coincidence)'를 읽으며, 들리지 않는 재즈 음악을 듣는 느낌이었다. 철학자가 쓴 철학책이기에 철학 전공자가 아닌 내가 그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철학자가 어떤 의미에서 '탈합치'란 말을 사용하는지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생소한 '탈합치'는 과연 어떤 뜻일까? 저자는 '탈합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탈합치의 개념은 안착된 합치를 해체할 때 새로운 가능성들이 출현할 수 있는 방식을 사유하는 사명을 지닙니다. 이는 단절, 창조, 나아가 혁명의 거대한 신화에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한 사상가는 이미 사유된 것으로부터, 그리고 자기 스스로 이미 사유한 것으로부터 탈합치할 때 비로소 사상가일 수 있습니다. 미래를 다시 여는 것은 사회에 부과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그 확정성에 매몰되는 적합성과 조정의 형태를 해체할 때 가능합니다." (9쪽)

나는 저자가 말한 합치와 탈합치의 관계를 클래식 음악과 재즈 음악의 관계로 비유하고 싶다. 합치는 자유보다는 질서, 즉흥보다는 계획, 위험보다는 안정을 지향한다. 클래식 음악은 기존에 주어진 틀을 반복할 뿐, 그 틀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재즈 음악은 다르다. 재즈 음악은 매번 새롭게 연주되는 즉흥성을 기반으로 한다. 어제의 재즈가 다르고, 오늘의 재즈가 다르고, 내일의 재즈가 다르다. 클래식 음악이 합치의 정점이라면, 재즈 음악은 탈합치의 정점이다. 탈합치는 질서보다는 자유를, 계획보다는 즉흥을, 안정보다는 위험을 선호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합치는 죽음을 향하고, 탈합치는 생명을 향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탈합치와 합치의 역동성이 잘 드러나는 성경이 바로 요한복음이라고 말한다. 요한복음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그리고 부활에 나타난 탈합치를 발견할 수 있다.

"신이 탈합치로서, 즉 인간적 죽음으로 죽기까지 하는 그의 아들이 도입한 탈합치로서 사유된다는 점에서 요한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든 가르침은 이 최초의 탈합치를 통해 요청된 성부와의 합치를 역방향으로 가동하는 데 있다. 합치하려면 탈합치해야 한다는 점이 요한복음의 논리적 핵심이며 이로부터 그 역설이 이해된다. 삶을 실질적으로 전개할 수 있으려면 삶에서 탈합치해야 하며, 바로 이것이 삶의 고유성을 이루기 때문이다." (59쪽)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예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탈합치의 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합치의 길이라 할 수 있다. 실상 탈합치와 합치는 분리된 개념이 아니다. 다만 탈합치가 시작되지 않고서는 합치가 따라올 수 없다. 탈합치는 비움이고, 합치는 채움이다. 탈합치는 날숨이고, 합치는 들숨이다. 탈합치는 썰물이고, 합치는 밀물이다. 우리는 탈합치만 하면서 인생을 살 순 없다. 역으로 합치만 하면서도 인생을 살 순 없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에 다 때가 있나니 탈합치 할 때가 있고 합치할 때가 있다. 지혜자는 탈합치 할 때와 합치할 때를 분별한다.

'탈합치'는 예술과 실존의 근원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저자는 탈합치한 예술가로부터 탈합치한 예술이 탄생한다고 말한다. 존재의 탈합치를 먼저 경험한 사람이 예술의 탈합치에 도달하는 법이다. 탈합치의 길이 비록 두렵고 불안하지만, 탈합치를 하지 않는다고 우리의 삶이 더 안정된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가 머무는 이곳은 사실 안정된 자리라기보다는 그저 익숙해진 자리이다. 지루한 익숙함에서 벗어나, 안락함에 중독된 일상에서 벗어나, 내가 가야 할 탈합치의 순례길을 걸어가고싶다. 아마도 나는 남은 생을 탈합치의 순례자로 살아갈 사명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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