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거 :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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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렇게 거의 1년간 피닉스에서 살았다. 나는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있었고 제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살아야 된다는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냥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오랫동안 나인 척했던 그 착한 소녀는 절대로 꿈도 꾸지 못할 일들을 했다. 이제 전 과목 만점을 받는 학생인 척할 필요도, 성적에 신경 쓸 필요도, 좋은 딸인 척할 필요도, 좋은 무엇인 척할 필요도 없었다. 이전의 삶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와 온전한 백지 상태가 될 수 있었다. 나를 재창조할 수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각할 수조차 없었던 온갖 종류의 위험을 감수하며 막장인생으로 살 수 있었다. 나와 우리 가족,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알아온 모든 것 사이에 점점 깊게 벌어지고 있던 그 틈을 완성할 수도 있었다. - P117

이제 40대가 되어서야 나는 나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아직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의심이 날 괴롭히기도 한다.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혐오에 힘없이 굴복하며 살았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가 사는 방식과 생각하는 방식과 내가 세상을 보는 관점을 긍정하는 그 단순한 기쁨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나이가 들었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덜 신경 쓰게 되었다. 그 모든 발전 없는 자기혐오에 지쳐버렸고, 내가 나를 싫어했던 이유 중 일부는 다른 사람들이 내가 나 자신을 싫어하는 걸 당연한 일로 여길거라고 추측해왔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뚱뚱한 몸으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당연히 자기혐오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듯한 세상이 지긋지긋해졌다. 그보다는 모든 불쾌한 소음을 차단하려고 노력하는 편이, 고등학교 때와 대학교 때와 20대 내내 저질렀던 실수를 용서하기로 노력하는 편이, 그 실수를 저지른 나에게 동정심을 갖는 편이 훨씬, 훨씬 더 쉽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나 자신을 바꾸고 싶지 않다. 내 외모를 바꾸고는 싶다. 기운이 좀 있는 날에는, 투쟁심을 발휘하여 세상이 나의 외모에 반응하는 방식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진짜 문제는 내 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운이 없는 날에는, 내 인격, 즉 나라는 사람의 본질과 내 몸을 어떻게 분리해야 하는지 잊어버린다. 이 세상의 잔인함으로부터 나를 어떻게 지켜내야 하는지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 P173

이 몸으로도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갖길 바라지만 아직은 갖지 못했고 언젠가 그렇게 되리라 생각한다. 아니, 그것에 가까워지리라 생각한다. 용감한 기분이 드는 날에는 그렇다. 그런 날에는 마침내, 내가 축적해왔던 이 보호막을 조금은 덜어낼 수도 있고 앞으로 괜찮아질 것 같은 기분이 된다. 나는 젊지 않지만 아직 늙지도 않았다. 아직도 많은 삶이 남아 있고 아, 제발 지난 20여 년 동안 해왔던 것과 다른 무언가를 하고 싶다. 더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다. 자유로워지고 싶다. - P179

공간을 차지하는 방식에 지나치게 예민하지만 늘 이런 식이 되어야할 때는 화가 나고, 내 주변 사람들이 공간을 차지하는 방식에 무심할 때면 순수한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질투심 때문에 미칠 것 같다. 그들이 공간을 차지하는 방식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싫다. 그들은 원하는 속도대로 걸을 수 있다. 팔걸이에 팔을 아무렇게나 걸칠 수 있다. 어디에 있든 꾸물거릴 수 있고 팔다리를 펼 수 있고 어깨로 밀칠 수 있다. 매 순간 자신의 움직임을 예측하지 않아도 되고 잠시 멈춰 자신이 차지하는 공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울화가 치민다. 그들은 자신이 차지하는 공간에 대해 느긋하게 생각하는데, 내게는 그것이 악의적이고 이기적으로 느껴진다.
어쩌면 나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디에 있든 내가 어디에 서 있게 되고 어떻게 보이게 될지 질문해봐야 한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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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 :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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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내 몸을 괜찮게 여기고 잘 지내는 척하면 매우 쉬울 것이다. 내 몸을 내가 미안해하고 설명을 해야 하는 무언가로 보지 않는다면 좋을 것이다. 나는 페미니스트이고 여성을 비현실적인 이상에 구겨 넣으려 하는 천편일률적인 미의 기준이 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 다양한 체형을 포함하는 더 넓은 의미의 미의 정의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여성이 자신의 몸을 편안하게 여기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세세한 부분까지 바꾸려 들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가치는 내 옷의 사이즈나 외모에 있지 않다고 믿고 있다(믿고 싶다). 일반적으로 여성에게 악의적인 문화, 여성의 몸을 끊임없이 통제하려 하는 문화 안에서 여성으로 성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내 몸이나 내 몸이 어떻게 보여야 한다는 것에 대한 비합리적인 기준에 저항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내가 아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 이 두 가지는 매우 다르게 작동한다. - P36

나는 종종 내게 일어난 일을 일부러 빙빙 돌려서 모호하게 쓰곤 한다. 그것이 그날로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 모든 것의 서두가 된 그 일로 되돌아가는 것보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 쉽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직면하기보다는 확실히 더 쉽다.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에 내 책임도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더 쉽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 일에 내가 책임이 있다고 느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내가 대처한 방식도, 내 침묵도, 내 폭식과 내 몸에 내가 저지른 일도 나의 과오라고 느낀다. 과거를 일부러 모호하게 썼던 이유는 그런 식으로 나를 방어하고 정당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부 드러내버리는 건 너무나 두려워서 피했다. 내가 겁쟁이이고, 두려움 많고, 나약하고, 인간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 P57

‘그가 말했다/그녀가 말했다‘ 때문에 이 세상의 너무나 많은 피해자(혹은 생존자, 당신이 이 용어를 선호한다면)가 앞으로 나서지 못한다. 왜냐하면 너무나 자주 ‘그가 말했다‘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아는 진실을 삼켜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삼키고, 그렇게 하면서 진실은 변질된다. 변질된 진실은 감염처럼 몸에 퍼져나간다. 우울증이 되고 중독이 되고 집착이 되며, 그 밖에도 그녀가 말할 수도 있었고 말해야만 했으나 하지 못했던 그 말은 침묵이라는 독이 되어 다양한 육체적인 증상으로 확대된다. - P64

내 비밀을 삼키면서 내 몸은 부풀고 또 부풀었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숨을 수 있는 방법, 절대 채워지지 않는 허기에 밥을 주는 방법, 상처를 멈추고자 하는 이 갈급함을 채울 방법을 찾아냈다. 나 자신을 더 크게 만들었다. 나를 더 안전하게 만들었다. 나에게 감히 접근하려고 하는사람이 오지 못하게 확실한 선을 그었다. 나와 가족 사이에도 선을 그었다. 나는 가족의 일부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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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바디 - 모든 몸의 자유를 향한 투쟁과 실패의 연대기
올리비아 랭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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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위험에 처한 몸, 변화의 힘으로서의 몸에 대한 책이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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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 :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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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심리적 허기가 골격을 이루면서, 자아개념과 어떤 형태의 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다. 여성에게는 더욱 절실한, 고통스러운 질문이다. 페미니스트는 이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그 반대의 삶을 추구하기 때문에, 늘 협상과 자기 검열의 긴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페미니스트에게 몸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이 책을 읽고 직면했다. 내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수용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찬 여자라는 사실을. -추천사, 정희진-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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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김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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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애도는 상실로 인해 자신이 어쩌면 영원히 바뀔 수도 있음을 받아들일 때 일어난다" 라고 주디스 버틀러는 말한다. 가정이든 일터든 사회든 국가든,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소수자들은 애도받을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상투적인 ‘괴물’이미지에 고착된 채 트랜스젠더라는 하나의 범주로 살아야 하는, 그래서 시간성을 빼앗긴 사람들이다. 그래서 "몇 가지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존재인 트랜스젠더에게 죽음은 가능한가? 애도할 수 있는 개인 혹은 역사를 지닌 존재로서의 죽음이 트랜스젠더에게 가능한가?"라고 묻게 된다. 존재에게 시간성이 있다는 것은 "특정 이미지나 특정 순간의 모습으로 일평생이 판단되거나 박제되지 않고, 시간에 따라 변하면서 타자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주체로 인식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른 트랜스젠더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어렵고, 또 더욱 절실한 모순 속에 빠져든다. 시간성이 탈각된 그 죽음의 장소를 피해 공동체 내부에 자리를 얻고 싶다는 욕망은 ‘패싱‘을 원하게 만들고, 그래서 수술 후 패싱이 수월해지면 트랜스젠더 공동체를 떠나게 된다. 트랜스젠더 노년을 만나기 어려운 건, 심한 우울증 등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끝까지 트랜스젠더로 자신을 정체화하면서 ‘늙어가는‘, 즉 "자신의 모든 역사를 책임"지는 트랜스젠더가 드문 까닭도 있다. - P215

주류가 트랜스젠더의 범주화를 위해 동원하는 젠더 담론을 파열하기 위해서는 성기 중심적인 신체 규범으로 환원하지 않는 정체성과 욕망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트랜스 이론가이며 활동가인 샌디 스톤은 이를 위해 패싱을 포기하자고 제안한다. 트랜스젠더의 몸에 기입된 새로운 조형성의 힘을 탈환하고, 그것의 차이를 재전유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행동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패싱을 포기하는 것, 의식적으로 ‘읽히는‘ 것, 스스로를 큰 소리로 읽는 것, 그리고 이 문제적이고 생산적인 읽기를 통해 자신이 쓰인 담론들에 스스로를 쓰기 시작할 것, 그럼으로써 사실상 포스트 트랜스젠더가 되는 것은,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모든 역사를 책임질 때 가능하다. 그래서 트랜스젠더의 나이듦은 발명되어야 할 정치적 의제다. - P216

10대에겐 20년 뒤의 자기 모습이 또렷이 보이지 않았고, 30대에겐 또 30년 뒤의 자기 모습이 물음표였던 것이다. 오늘의 내 삶은 내일의 내 삶과 어떤 모습으로 만날까? 서로 몰라보는 건 아닐까? 지속적인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이동의 역사로 삶을 이해할 때, 방향과 좌표의 설정은 움직임의 핵심이다. 참조할 수 있고, 신뢰와 희망으로 기댈 수 있는 집단은 하늘의 별자리 같은 것이다. - P227

"한국 정치에서 진보 정당 활동을 통한 변혁은 내 생애에선 불가능하다, 내지는 내 생애를 훨씬 넘어서도 상당 기간 어렵다, 라고 생각할 땐데. 그러면 나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 소신껏 살 것인가 묻는 거지. 그건 당연히 빈곤 바닥이지! 당연히 여기가 제일 바닥이고, 여기에 쐐기가 있으니, 여기를 포함하지 않은 변혁은 변혁이 아닌 거다. 그렇다고 할 때, 나는 어디서뭘 할 거냐. 어쨌든 세상은 망해갈 거고, 그 중간에 나도 망할 거야. 죽을 거야. 그렇다면 죽기까지 여기서, 가능하면 최대한 즐겁게 함께하자." - P245

시민사회가 포기한, 아니 처음부터 외부로 범주화한 홈리스들이 아랫마을에 합류해서 활동가들, 당사자 활동가들과 이룬 돌봄 공동체는 시민사회에 부여된 최선의 공동체라는 위상의 모순과 허구성을 비판적으로 드러내며, ’사회적인 것‘을 토대에서부터 새롭게 고민하게 만든다. 신뢰에 토대를 둔 협력과 연대의 관계가 아니라면 사회를 사회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사회적인 것의 재사유를 급진적으로 일궈내지 않으면 이 사회는 언제나 저 ‘자리‘를 필수적 외부로 전제할 것이다. 서울역 광장이나 쪽방 마을, 아랫마을 등 홈리스 현장에서 마주치는 돌봄은 물질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난잡한 돌봄‘을 구현한다. 전 지구적으로 불확실성과 불안, 위험은 끊임없이 경계를 만들고, 누군가를 ‘우리‘와는 다른 ‘그들‘로 지목해 이 경계 밖으로 밀쳐낸다. 이미 존재하는 무수한 경계들 외에도, 돌봄의 자격을 두고 가속화하는 편 가르기도 있다. ‘난잡한 돌봄‘이야말로 위기로 점철된 현재의 시대적 요청이고, 강도 높은 급진성으로 밀어붙여야 할 실천이다. 이것은 현재 기준에서 볼 때 실험적이고 확장적인 방식으로 수행되는 차별을 용납하지 않는 돌봄이다. 어떻게든 연고 없는 홈리스의 안전‘망‘이 형성되게 마음 쓰는 아랫마을에서 이런 확장적 돌봄을 감지할 수 있다. 사회에서 들리는 홈리스 관련 소문은 모두 삶의 막다른 골목과 최악의 불행, 그리고 폭력의 난무와 일탈로 지지직거리지만, 정작 홈리스 사이에는 서로의 경계를 지우며 ‘이웃 간의 돌봄‘이라 불러 마땅한 실천이 있다. - P248

당신이 어느 곳으로 가는가. 그 움직임과 이동이 주름의 형질을 정한다. 50이 넘어, 60이 넘어 매우 낯선 곳, 새로운 장소로 몸을 이동시키는건 쉽지 않다. 그곳이 늘 ‘예외‘로, ‘임시적인 것‘으로 여겨질 뿐 아니라 혐오의 정동으로 터질 듯 부풀어 있고, 실패의 모든 부정적 감각이 폭력적·악의적으로 투사되는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몇이 되었든, 내가 어디로 끌리는가. 최현숙의 말을 빌리자면 어디로 ‘꼴리는가‘,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호기심을 갖고 유희적으로 그러나 진지하게 묻는 건 포기해선 안 되는 자기 돌봄이다. 몸이 무거워지고 심리가 ‘취약해지는‘ 나이일수록 이 촉수가 중요하다. 이끌리는 곳이 어디인지 촉을 제대로 세울 수 있을 때 자기 삶이 ‘해명될‘ 기회도 늘어날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해명이 필요하다는 것조차 의식 못하고 산다. 끌려서 도착한 어떤 장소의 그 사람들이 내 삶에서 해명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지점들을 일깨워줄 수 있다.
자기 해석이라고도, 자신이 저자가 혹은 편집인이 되어쓰는 한 편의 생애 서사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해명‘이라는 단어에 특별히 힘을 싣고 싶다. 해명은 해명되기를 기다리는 질문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최현숙의 해명 이야기를 들으며, 내 안에서 시간을 두고 곰삭히며, 나는 나 자신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내가 해명해야 할, 나의 살아온 내력의 질문이 뭔가를 계속 묻는다. 이런 방식으로 늙는 과정은 해명의 쐐기를 거쳐 해방의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늙은이‘가 되면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것 아닐까. - P255

몸이건 정신이건 굼뜬 건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더구나 노년에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느릿느릿‘의 리듬을 용납하지 않는 속도-발전주의가 빼앗아 간 반성적 내면이나 자율, 정서, 특정한 일의 속성이 얼마나 많겠는가. 아픈 몸이나 늙은 몸, 장애가 있는 몸이 느리게 천천히, 자율과 의존의 감각을 적절하게 협상하면서 살 수 있는 문화적·물리적 환경이 우선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 다른 연령대가, 서로 다른 몸들이 공존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이 다른 몸들이 평등하게 서로 ‘몸‘ 정체성의 지각이 되어주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다. 노년의 몸이 특히 속도에 있어 제멋대로 조종되지 않는 특징을 나타낸다면 그 몸은 다른 생애 단계에 있는 이들에게도 적용 가능한 반성의 토대다. - P264

정신적 탄성은 고통스런 현실이 주는 슬픔이나 좌절, 분노에 면역이 되어서 가능한 게 아니다. 똑바로 직면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낙관과 비관 사이에서, 가능과 불가능 사이에서, 욕망과 포기 사이에서, 자립과 의존 사이에서, 자아와 타자 사이에서, 자존심과 수치심 사이에서 ‘흔들리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모든 균형 잡기에서 그때그때마다 적절한 감각으로 이끄는 힘은 물론 일시에 이뤄진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살면서 그 끈을 놓지 않았던 삶과 죽음의 의미, 타자들과 시도했던 무수한 연결의 시도들이 바로 그 힘이다. 늙어서 갑자기 누리는 자기결정권 같은 건 없다. 늙는 일의 선행 학습은 ‘나 이제 정말이지 아주 늙어버렸네‘ 라고 절감하는 그 순간까지 평생 진행되어온 것이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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