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거 :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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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헝거>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심리적 허기가 골격을 이루면서, 자아개념과 어떤 형태의 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다. 여성에게는 더욱 절실한, 고통스러운 질문이다. 페미니스트는 이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그 반대의 삶을 추구하기 때문에, 늘 협상과 자기 검열의 긴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페미니스트에게 몸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이 책을 읽고 직면했다. 내가 가부장제 사회에서 수용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찬 여자라는 사실을. -추천사, 정희진-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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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김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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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애도는 상실로 인해 자신이 어쩌면 영원히 바뀔 수도 있음을 받아들일 때 일어난다" 라고 주디스 버틀러는 말한다. 가정이든 일터든 사회든 국가든,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소수자들은 애도받을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상투적인 ‘괴물’이미지에 고착된 채 트랜스젠더라는 하나의 범주로 살아야 하는, 그래서 시간성을 빼앗긴 사람들이다. 그래서 "몇 가지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존재인 트랜스젠더에게 죽음은 가능한가? 애도할 수 있는 개인 혹은 역사를 지닌 존재로서의 죽음이 트랜스젠더에게 가능한가?"라고 묻게 된다. 존재에게 시간성이 있다는 것은 "특정 이미지나 특정 순간의 모습으로 일평생이 판단되거나 박제되지 않고, 시간에 따라 변하면서 타자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주체로 인식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른 트랜스젠더의 죽음을 애도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어렵고, 또 더욱 절실한 모순 속에 빠져든다. 시간성이 탈각된 그 죽음의 장소를 피해 공동체 내부에 자리를 얻고 싶다는 욕망은 ‘패싱‘을 원하게 만들고, 그래서 수술 후 패싱이 수월해지면 트랜스젠더 공동체를 떠나게 된다. 트랜스젠더 노년을 만나기 어려운 건, 심한 우울증 등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끝까지 트랜스젠더로 자신을 정체화하면서 ‘늙어가는‘, 즉 "자신의 모든 역사를 책임"지는 트랜스젠더가 드문 까닭도 있다. - P215

주류가 트랜스젠더의 범주화를 위해 동원하는 젠더 담론을 파열하기 위해서는 성기 중심적인 신체 규범으로 환원하지 않는 정체성과 욕망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트랜스 이론가이며 활동가인 샌디 스톤은 이를 위해 패싱을 포기하자고 제안한다. 트랜스젠더의 몸에 기입된 새로운 조형성의 힘을 탈환하고, 그것의 차이를 재전유함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행동을 시작하자는 것이다. "패싱을 포기하는 것, 의식적으로 ‘읽히는‘ 것, 스스로를 큰 소리로 읽는 것, 그리고 이 문제적이고 생산적인 읽기를 통해 자신이 쓰인 담론들에 스스로를 쓰기 시작할 것, 그럼으로써 사실상 포스트 트랜스젠더가 되는 것은,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모든 역사를 책임질 때 가능하다. 그래서 트랜스젠더의 나이듦은 발명되어야 할 정치적 의제다. - P216

10대에겐 20년 뒤의 자기 모습이 또렷이 보이지 않았고, 30대에겐 또 30년 뒤의 자기 모습이 물음표였던 것이다. 오늘의 내 삶은 내일의 내 삶과 어떤 모습으로 만날까? 서로 몰라보는 건 아닐까? 지속적인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이동의 역사로 삶을 이해할 때, 방향과 좌표의 설정은 움직임의 핵심이다. 참조할 수 있고, 신뢰와 희망으로 기댈 수 있는 집단은 하늘의 별자리 같은 것이다. - P227

"한국 정치에서 진보 정당 활동을 통한 변혁은 내 생애에선 불가능하다, 내지는 내 생애를 훨씬 넘어서도 상당 기간 어렵다, 라고 생각할 땐데. 그러면 나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 소신껏 살 것인가 묻는 거지. 그건 당연히 빈곤 바닥이지! 당연히 여기가 제일 바닥이고, 여기에 쐐기가 있으니, 여기를 포함하지 않은 변혁은 변혁이 아닌 거다. 그렇다고 할 때, 나는 어디서뭘 할 거냐. 어쨌든 세상은 망해갈 거고, 그 중간에 나도 망할 거야. 죽을 거야. 그렇다면 죽기까지 여기서, 가능하면 최대한 즐겁게 함께하자." - P245

시민사회가 포기한, 아니 처음부터 외부로 범주화한 홈리스들이 아랫마을에 합류해서 활동가들, 당사자 활동가들과 이룬 돌봄 공동체는 시민사회에 부여된 최선의 공동체라는 위상의 모순과 허구성을 비판적으로 드러내며, ’사회적인 것‘을 토대에서부터 새롭게 고민하게 만든다. 신뢰에 토대를 둔 협력과 연대의 관계가 아니라면 사회를 사회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사회적인 것의 재사유를 급진적으로 일궈내지 않으면 이 사회는 언제나 저 ‘자리‘를 필수적 외부로 전제할 것이다. 서울역 광장이나 쪽방 마을, 아랫마을 등 홈리스 현장에서 마주치는 돌봄은 물질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난잡한 돌봄‘을 구현한다. 전 지구적으로 불확실성과 불안, 위험은 끊임없이 경계를 만들고, 누군가를 ‘우리‘와는 다른 ‘그들‘로 지목해 이 경계 밖으로 밀쳐낸다. 이미 존재하는 무수한 경계들 외에도, 돌봄의 자격을 두고 가속화하는 편 가르기도 있다. ‘난잡한 돌봄‘이야말로 위기로 점철된 현재의 시대적 요청이고, 강도 높은 급진성으로 밀어붙여야 할 실천이다. 이것은 현재 기준에서 볼 때 실험적이고 확장적인 방식으로 수행되는 차별을 용납하지 않는 돌봄이다. 어떻게든 연고 없는 홈리스의 안전‘망‘이 형성되게 마음 쓰는 아랫마을에서 이런 확장적 돌봄을 감지할 수 있다. 사회에서 들리는 홈리스 관련 소문은 모두 삶의 막다른 골목과 최악의 불행, 그리고 폭력의 난무와 일탈로 지지직거리지만, 정작 홈리스 사이에는 서로의 경계를 지우며 ‘이웃 간의 돌봄‘이라 불러 마땅한 실천이 있다. - P248

당신이 어느 곳으로 가는가. 그 움직임과 이동이 주름의 형질을 정한다. 50이 넘어, 60이 넘어 매우 낯선 곳, 새로운 장소로 몸을 이동시키는건 쉽지 않다. 그곳이 늘 ‘예외‘로, ‘임시적인 것‘으로 여겨질 뿐 아니라 혐오의 정동으로 터질 듯 부풀어 있고, 실패의 모든 부정적 감각이 폭력적·악의적으로 투사되는 곳이라면 더욱 그렇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몇이 되었든, 내가 어디로 끌리는가. 최현숙의 말을 빌리자면 어디로 ‘꼴리는가‘,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호기심을 갖고 유희적으로 그러나 진지하게 묻는 건 포기해선 안 되는 자기 돌봄이다. 몸이 무거워지고 심리가 ‘취약해지는‘ 나이일수록 이 촉수가 중요하다. 이끌리는 곳이 어디인지 촉을 제대로 세울 수 있을 때 자기 삶이 ‘해명될‘ 기회도 늘어날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해명이 필요하다는 것조차 의식 못하고 산다. 끌려서 도착한 어떤 장소의 그 사람들이 내 삶에서 해명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지점들을 일깨워줄 수 있다.
자기 해석이라고도, 자신이 저자가 혹은 편집인이 되어쓰는 한 편의 생애 서사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해명‘이라는 단어에 특별히 힘을 싣고 싶다. 해명은 해명되기를 기다리는 질문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최현숙의 해명 이야기를 들으며, 내 안에서 시간을 두고 곰삭히며, 나는 나 자신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내가 해명해야 할, 나의 살아온 내력의 질문이 뭔가를 계속 묻는다. 이런 방식으로 늙는 과정은 해명의 쐐기를 거쳐 해방의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늙은이‘가 되면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것 아닐까. - P255

몸이건 정신이건 굼뜬 건 부정적인 것도 아니고, 더구나 노년에 해당되는 것도 아니다. ‘느릿느릿‘의 리듬을 용납하지 않는 속도-발전주의가 빼앗아 간 반성적 내면이나 자율, 정서, 특정한 일의 속성이 얼마나 많겠는가. 아픈 몸이나 늙은 몸, 장애가 있는 몸이 느리게 천천히, 자율과 의존의 감각을 적절하게 협상하면서 살 수 있는 문화적·물리적 환경이 우선해야 한다. 그래야 서로 다른 연령대가, 서로 다른 몸들이 공존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이 다른 몸들이 평등하게 서로 ‘몸‘ 정체성의 지각이 되어주는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다. 노년의 몸이 특히 속도에 있어 제멋대로 조종되지 않는 특징을 나타낸다면 그 몸은 다른 생애 단계에 있는 이들에게도 적용 가능한 반성의 토대다. - P264

정신적 탄성은 고통스런 현실이 주는 슬픔이나 좌절, 분노에 면역이 되어서 가능한 게 아니다. 똑바로 직면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낙관과 비관 사이에서, 가능과 불가능 사이에서, 욕망과 포기 사이에서, 자립과 의존 사이에서, 자아와 타자 사이에서, 자존심과 수치심 사이에서 ‘흔들리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 모든 균형 잡기에서 그때그때마다 적절한 감각으로 이끄는 힘은 물론 일시에 이뤄진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살면서 그 끈을 놓지 않았던 삶과 죽음의 의미, 타자들과 시도했던 무수한 연결의 시도들이 바로 그 힘이다. 늙어서 갑자기 누리는 자기결정권 같은 건 없다. 늙는 일의 선행 학습은 ‘나 이제 정말이지 아주 늙어버렸네‘ 라고 절감하는 그 순간까지 평생 진행되어온 것이다.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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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김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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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복지제도는 부양의무자 기준도 있고 근로 능력 평가도 있고 여기에 가구를 단위로 하는 급여 신청 조건이 있어서, 65세가 지나야 급여 안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되는 사람, 그 정도로 상당한 시일이 지나서 가족관계가 자기 마음에서든 실제로든 정리가 되어야 복지제도로 진입할 수 있는 사람 등 다양한 유형이 존재해요.
한국의 복지제도는, 빈곤 상태만 겪어서 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들을 단념한 이후에야 제도에 진입할 수 있게 구성돼 있어요. 개인들이 겪고있는 문제랑은 상당히 맞지 않는 기준이죠. 특히 65세라는 기준이 저는 그렇다고 봐요. 사실 박근혜 정부 때도 이걸 70세로 올리자, 75세로 올리자…… 요즘 창피해서 환갑잔치 누가 하냐 그런 이야기들 많이 했잖아요. 근데 제가 만난 50대 분들 중에는 65세가 되기만 기다리면서 거리에서 시간을 보내는 분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이런 상태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많이 삭제되어버리는 거죠. 그럼 저는 그게 걱정이 되는 거예요. 이제 3년 더 기다리면 되나, 2년 더 기다리면 되나? 이런 분들이 갑자기 7년을 더 기다려야 되면 어떡하지? 이게 막 염려가 되는 거죠." (김윤영)

한 번 더 강조하자. 노년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노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나 사회적 기준의 마련은 각각의 노년들이 처한 사회문화적·경제적 상황을 고려한 것이어야 한다. 노년의 빈곤 상황에 대한 논의도 각각의 노년이 겪었던 일들을 통시적으로 살피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했던 이들이 최종적으로 가난에 빠지기 쉽다는, 한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 증명된 삶의 구조적 경로가 있다면 그것에 주목하면서 노인복지를 구성해야 한다. - P185

홈리스를 비롯해 극한 빈곤 상태에 처한 이들의 보다 안전하고 안정적인, 사람다운 일상을 위해 이웃의 선한 마음을 촉구하는 따위의 해결책을 찾아서는 안 된다. 선한 이웃의 도움은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키고 공공복지의 책무를 희석하기 때문이다. 부녀회 등 자원봉사자들이 마음과 돈과 시간을 쏟아 급식을 제공하는 일은 국가가 모든 국민이 마땅히 누려야 할 건강권을 선량한 이웃의 온정에 떠맡기게 하는 빌미가 된다.

"사회적 기업이니 하는 비영리단체들도 법률상 있는 제도들, 즉 ‘공’에 대립되는 ‘사‘인 것이죠. 공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자본주의가 철폐된 모습으로…… 그런 형태로 고민해야죠. 그것을 은폐하든 드러내든 ‘사’라는 것은 어쨌든 이윤을 위해 복무하는 질서에 의해 움직이니까. 공공 영역이 커져야 해요. 예를 들어서 민간 어린이집보다 공공 어린이집이 훨씬 더 좋잖아요, 코로나 되니까 공공 병원이 중요하다는 걸 다들 알게 됐고요. 그런데 공공 병원을 이만큼만 운영하니까 그걸 이용해야 하는 홈리스들은 다 쫓겨나는 문제가 생기는 거죠. 그리고 정부 입장에서는 공공 영역에 시민사회 영역을 참여시켜서 낮은 관리비로 유지하려 하고, (…) 재단 교부금은 제로고 노동자들의 처우는 엉망이죠. 갈등이 불거져서 문제 제기를 할 때면 이건 ‘민간에 위탁 준 거니까 거기 가서 말해라‘ 하고, 민간에 가면 지침대로 할 뿐이라고 하고. 결국 민영화 문제인 거죠. ‘이웃‘은 가능하지 않다, 가능하다고 말하지 말라는 거예요. 홈리스의 문제, 빈곤의 문제가 뿜어져 나오는 저변의 문제가 있는 것인데 극도의 고통을 조금 완화하는 것들, 현상을 가리고 파스 붙이는 효과만 내는 것들. 그런 것들은 홈리스들을 보이지 않게 만들 뿐이죠." (이동현)

"공간적으로도 사실 대부분 2년짜리 세입자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 이전과 같은 공동체 성격을 띨 수 있느냐, 사람들이 정주성을 가질 수 있느냐 물어보기 되게 어렵다고 생각해요. 그만한 마을들도 거의 다 없어지고 아파트 등으로 다 대체되는데, 이런 공간은 다양성이 없어요. 비슷한 소득과 비슷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을 우물처럼 모아놓는 그런 공간이다 보니까 사실 ‘서로 기댐’의 조건들이 나오기 어려운 거죠. (…) 마을 공동체가 이런저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게 항상 ‘공공의 빈틈을 메워라‘라는 재생산의 요구 방식으로 오는 게 이상해요. 기본도 서 있지 않은데 마치 틈새를 더 잘 찾아내면 된다는 듯이, 주변의 이웃들이 따뜻하면 된다는 듯이 말하는 건 본질을 호도하는 바가 있어요. 그런 반발감이 커서 일부러라도 그렇게 말하기 싫어지죠. 절대 빈곤율이 7, 8퍼센트인데 수급률은 4퍼센트…… 최소한 이걸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마을 공동체도 유효성이 있지, 그렇지도 않은 상태에서 ‘마을에 복지반장 찾는다‘ 하면서 마을에 있는 몇 개 단체들에 위임장 하나씩 주고…… 이 사람들한테 긴급복지 신청하러 가면 기준이 안 돼서 안 된다,
그냥 보내기 힘드니까 쌀 한 포대 주는 식이에요. 이게 뭐냐는 거죠. 일단은 공공의 제도가 바로 서야 해요. 그게 먼저죠." (김윤영)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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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감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김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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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정신의 ‘기능성’에서 소위 정상성 규범이 제시한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노년과 장애인은 안전과 보호의 이름으로 실생활에서 전반적인 감시와 제약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는 안전을 내세워 이들에게 가해지는 특정 규율을 정당화한다. 생산성과 독립성, 젊음, 속도, (미래라고 일컬어지는 한 방향으로의 불가역적 진행으로 이해되는)진보, 자본주의 노동 윤리 등은 서로 맞물리면서 노골적으로 노년과 장애인을 피보호자의 자리에 눌러앉힌다.
그러나 조미경의 예처럼 생애사의 관점에서 포착된 장애인의 정체성은 이런 주장의 허구성과 편파성을 통쾌하게 부순다. ‘자기 이해‘의 서사란 사회적 관계들의 교차적 만남 속에서 형성되는 ‘자기‘를 계속 재해석한 결과다. 어떤 신체적·정신적 상태에 있든 각자의 삶에는 소망도 있고 갈등과 불안도 있다. 권리나 의무뿐만 아니라, 자발성에 기원을 둔 윤리적 책임도 있다. 피할 수 없는 모멸과 수치심, 억울함의 만남도 있다. 장애인이나 노년들 각각이 갖는 ‘자아 정체감‘이 반드시 신체적·정신적 기능성이라는 조건과 일치하지 않는 이유다. 최중증 장애인인 조미경의 이야기는 이것에 관한 놀랍도록 명료한 증언이다. 그의 몸은, 그의 몸이 살아내는 그의 삶은 매우 의존적이며 동시에 대단히 자율적이다. 그는 휠체어를 비롯해 보청기나 틀니·인공호흡기·돋보기 등 의료기기에, 그리고 활동지원사와 파트너·동료에 ‘기대어서/매달려서 dependent‘ 산다. 잘 기대고 매달려 왔다. 그의 기대고 매달리는 기술력은 기대면서 삶을 조율해 온 긴 역사의 소산이다. 19세까지 ’집 안‘에 갇혀 있던 시간과 이후 ’집 밖‘의 여러 장소와 공간에서 동료와 친구, 애인을 만나며 엮어온 시간은 그의 ’자기‘가 단순히 신체 상태로 환원될 수 없는 것임을 여실히 증명한다. 그가 명랑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48년간의 삶은 ’의존할 수 있는 대상이 늘어날수록, 그래서 선택의 가능성이 커질수록 더욱 자립할 수 있다‘는 명제의 투명한 구현이다. - P139

돌이켜보면 장애 심화와 일상의 선택이나 삶의 만족도가 꼭 일치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이전에 없던 장애가 생기고, 또 장애가 심화하면 솔직히 삶이 좀 고달파지는 건 있어요. 삶이 고달파지니까 그것 때문에 우울감이 들 때가 있지만 이전에 미처 느끼지 못했거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되고, 새로운 감각이 생겨나 새로운 경험이 열리기도 해요. 새로운 앎이 생기고 관점이 넓어지고・・・・・・. 그런 맥락에서 장애 심화가 퇴행만은 아닌 나의 삶이 또 다르게 변화하는, 진화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나이듦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이듦으로 해서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되는 게 있잖아요, 분명히. 삶이 진화되는 거, 같은 맥락에서……… 너무 긍정적인가요?" - P143

"슬픔이 너무 깊어요.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어요. 매일 계속 뭐든 읽어요, 뭐든 해요. 이제 내가 ‘공감‘에서 장애운동을 계속하려면 다른 식의 시간 감각을 갖고 이것을 현실화하는 게 중요해졌어요. ‘공감‘ 활동가들과 같이 도전해서 새로운 감각을 찾고, 중복 장애가 매우 심한 장애여성의 삶을 같이 나누는 게 중요해요. 이렇게나 피곤하고 힘든데, 내가 뇌출혈에서 다시 깨어난 건 또 새로운 운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그는 워낙에도 기존의 나이듦 이해나 관행과는 매우 다른 몸의 역사를 살아왔다. 이제 그에겐 ‘지금 여기‘의 삶을, 이 현존을 충일한 시간성과 장소성의 의미로 살아내는 것이 더욱더 중요하다. 그가 자기/이해를 갱신하며 살아내는 치열한 하루하루를 목격하면서 나는 나이와 시간의 관계를 낯설게 재조명한다. 노년의 나이는 막연한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계속 밀려나는 내일‘들‘의 집합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꽉 찬 역사성으로 살아내는 시간이다. 뇌출혈을 딛고 또다시 새로운 몸으로, 첫 경험인 양 장애를 알아가면서 펼치는 조미경의 운동은 그런 시간으로서의 나이듦을 구현할 것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누구와 무엇을 향해 나이들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야말로 나이듦 이해의 핵심임을 알게 될 것이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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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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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이 연대가 될 수 있을까. 연대가 될 수 있게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 P105

씨앗의 자유와 다양성은 은유가 아닌 유물론의 실재 차원에서 지구를 살리고 지구인들의 자유로운 공존을 지원한다.
이성애자와 트랜스젠더와 침례교인과 히피와, 노란 과육을 검은색 껍질이 감싸고 있는 감자와 가뭄에 적응한 보라색 옥수수 등등 모든 실재하는 것들 사이를 가르는 경계는 없다. 씨앗 지킴이들에게 유전적 다양성은 ‘인류와 세계적 기근 사이의 울타리‘다. - P115

인공지능이 아닌 땅과 몸의 지능으로 한 해 한 해 살아온 할머니들의 시간 감각은 후배 여성들에게 이런 조언으로 도착한다. "마음을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느긋하게 생각하고, 거짓 없이 진실하게 살아라. 자신을 믿고 느긋하게 사는 것 그 이상은 없는 것 같아." "먼 데 걱정 땡겨 하지 말고. 안 되는 것은 잊고 살아." - P125

특히 삶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 어떤 힘으로 버텨낼 것인가를 할머니들을 통해서 직접 보고 배운 것 같아요. ‘지나가겠지‘ 또는 ‘버텨내지겠지‘ 그런 힘들을 배웠죠. 포기하지 말고, 버텨보자. 태풍도 버텨보고, 가뭄도 버텨보고, 장마도 버텨보자. 그러면 결국은 또 씨앗을 맺더라. 한 알일지라도 결국에는 씨앗을 맺는다.
밭을 일구는 할머니들을 보면 다리도 고장 나고 허리도 고장 나서 너무도 고단하지만 생명의 기운이 느껴졌어요. 아마 항상 무언가를 살리는 사람들이라 그런가 봐요. 저는 그런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다양한 삶의 풍파를 살아낸 단단하면서도 생명력 넘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가 생명력이 넘친다는 게 어딘가 모순적이긴 하지만, 또 다른 의미의 생명이 아닐까 싶어요.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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