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상상력 - 관계와 사회의 새로운 힘을 모색하는 사람들
김영옥.류은숙 지음 / 코난북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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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또 다른 진실은 구체적인 경험과 맞닿아 있다. 돌봄을 추상적인 윤리 강령으로, 정의로운 주의 주장으로 내세우는 건 돌봄 생태계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언제나 돌봄의 실질적인 요청을 급작스런 ‘닥침‘이나 당혹스런 ‘호출‘로만 만나게 된다면, 시민사회가 헛돌고 있다는 징표다.
시민의 시민 됨, 즉 시민적 덕성을 무엇보다 돌봄의 실천 경험, 돌봄의 역량, 돌봄 자산을 기준으로 이해하는 전환이 필요하다.
‘돌봐보니까 돌봄이 무섭지 않다.‘ ‘돌봐달라고 부탁할 용기도 생겼다.‘ ‘돌봄의 겹들이 이해된다.‘ 경험자들의 말이다.
물론 돌봄의 경험은 실패와 좌절,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보람, 사랑과 증오 등 감당하기 어려운 정동들로 요동친다. 그러나 그 소용돌이가 점차 돌봄의 동심원을 형성하는 것 또한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돌봄의 실천 속에서만 경험하고 해석할 수 있는 돌봄의 역설 내지는 다면성이다. 돌봄의 사회화나 공공화 또는 시민적 돌봄이나 시민의 자리에서 돌보기 등이 여전히 대부분 사람에게 명료하지 않은 건 돌봄의 물질적 구체성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뜻이다. - P10

아이를, 장애가 있는 아이를 온전히 다른 사람 손에 맡기기란 쉽지 않다. 믿음과 신뢰의 토대가 없으면 감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장애아 보호자들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알음알음으로 만나는 활동지원 선생님들이라 이들에겐 어느정도 ‘내 편‘이라는 믿음이 있다.
특히 중증 장애아의 경우, 보호자들이 서로 주고받는 위로와 격려, 그리고 무엇보다 재활시설이나 제도 등 구체적인 정보는 없어서는 안 될, 그야말로 필수 지지대였다. 성장하면서 어떤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찬빈이의 이웃 시민이 될지 모르겠지만, 장애아 보호자 커뮤니티가 매우 중요한 자조그룹인 건 확실했다. 필요한 참견과 성가신 오지랖 사이에서 무게 추가 왔다 갔다 하는 이 관계는 특히 돌보는 엄마들이 고립이나 무기력증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를 연결하는 작은 사회다. 이 커뮤니티 안에서 주고받는 구체적인 서로 돌봄은 시민사회가 갖춰야 할 돌봄 역량의 토대가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 P27

돌봄은 표준화되기 어려운 아주 개인적인 관계에서 벌어진다. 또 그 관계는 고정된 게 아니다. 평등하기보단 출렁거리며 비대칭적으로 기울어져 있다. 정연처럼 돌봄의 탈젠더화, 탈가족화를 부르짖는 사람이 남편처럼 가족을 우선 의존하는 사람과 배우자 관계에서 돌봄을 협상하듯, 협상의 자리에는 각양각색의 사람이 등장한다. 부모님 돌봄에는 일반적인 ‘효‘의 감각과는 다른, 평생 고만고만하고 간당간당하고 쓰라렸던 삶에 대한 두 사람의 연민이 있다. 그래서 양가 부모님 앞에서는 별 협상 없는 동맹이 가능했다.
또 돌봄은 자기 자신의 숱한 정체성 간의 협상이기도 하다. 정연과 남편 두 사람 다 심야나 새벽 배송을 질색한다. 싼값에 그 시간대의 배달노동을 당연시하는 세태에 맞선다는 점에서는 동맹이다. 하지만 전격적인 돌봄이 시작되면서 장보는 것 자체가 사치가 된 때가 있었다. 생필품이 아쉽고 정신이 없어 뭔가 빠뜨렸을 때마다 둘의 삶에는 새벽 배송이 끼어들었다.
동맹과 협상의 자리는 자주 변동됐고 전선은 다시 그어지곤 했다. 여성, 아내, 엄마, 딸, 임금 노동과 돌봄 노동을 모두 하는 이중의 노동자, 소비자, 시민의 정체성이 정연 같은 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며 노화, 질병 등으로 돌봄자였다가 돌봄 의존자였다가 자리를 갈아탄다. 남편도 마찬가지로 자기의 정체성들과 협상 중일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의 협상 테이블은 고정된 게 아니라 출렁거린다. - P51

상희는 동생들이 오면 주중에 엄마 상태가 어땠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시콜콜 이야기한다. 새겨듣건 흘려듣건 상관치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하는 게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돌봄으로써 함께 돌보고 책임지는 사람이길 원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수행된 돌봄에도 동생들이 동행과 공유의 감각을 가질 수 있어야 자신도 독박 돌봄의 덫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돌봄의 역량은 하면서 배우고, 또 배우면서 느는 거라서 동생들의 돌봄 태도나 기술도 느릿느릿 성숙의 길을 가고 있다. - P77

나한테 한 달에 90시간이 주어지는데 그 시간으로 경화가 우리 집에 와서 나랑 같이 저녁 지어 먹으면서 수다를 떨어. 나한테는 그게 사회적 대화야. 그리고 자기들처럼 나 고립될까 봐 신경 써주는 친구들이 있고. 이런 게 다 모여서 엄마를 직접 돌보고 싶다는 내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선택했다지만 그 선택은 나에게 있었던 게 아닌 거야. ‘충분히 했어, 이제 됐어‘라는 상태는 어떤 돌봄에서도 도달하기 어려워. 그런데 돌보는 사람을 돌봐주는 체계와 안정적인 자원, 손을 내미는 사람이 없으면 아예 품기조차 어려운 꿈이야. - P87

"저의 이야기가 ‘어쩔 수 없어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의 이야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저 개인의 경험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돌봄 지도 만들기에 디딤돌이 되길 희망합니다." - P89

2010년대 초반 Y요양병원에서 있었던 HIV 감염인 학대가 다시 떠올랐다. ‘감염인도 귀한 목숨이고 싶다.‘ 당시 HIV/AIDS 인권활동가가 외치는 말을 들으며 명치 끝에 느껴지던 통증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무지와 몰염치의 등에 올라탄 혐오는 그때 이후 멈춘 적이 없는데 어떻게 우리는, 나는 이렇게 서로 무관한 사람처럼 살아왔던 거지? 알 만한 사람들도 감염인을 두고 빈곤할 것 같다, 일을 못 하고 있을것 같다. 숨어 살 것 같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던가.
사실 나도 그러지 않았나... 나는 얼마나 다른가⋯⋯ 나도 그들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지 않은가... 희수는 이 어이없는 경계 짓기와 선량한 무지에 자신의 몫도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어떻게 하지, 뭐라도 해야 하는데. 희수는 이제라도 자기를 휘감는 무기력과 분노를 똑바로 직면하고 싶었다. - P115

감염인이 감염인을 돌본다. 이거야말로 PL 커뮤니티 구성원들이 초창기부터 맺어온 관계의 핵심이었다. 이것이 비감염인 희수가 체감하는 S커뮤니티의 힘이고 미래였다. 크고 작은 PL 모임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의미 없는 단순 반복이나 실패의 역사가 아니라 서로의 돌봄역량을 키우는 역사였다.
이 역사는 감염인을 위해 진행된 지원사업 이야기가 아니다. 감염인 당사자들의 일상을 고립이나 무기력한 자포자기에서 지켜준 서로 돌봄의 이야기다. 소소해서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체계도 없이 산발적으로 이뤄지는 것처럼 보여도 이 돌봄들이 바로 역사의 현장이었다.
……
여기 S커뮤니티에서 감염인들은 비감염인 눈치 보는 일 없이 편하게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며 필요한 도움을 주고 받았다. 지원의 자리에 서로를 보듬는 지지와 상담이 놓였다. 의료나 생활, 관계 영역에서 할 수 있는 한 종합 돌봄을 제공하려 서로 애쓴다. 물리적으로든 심리적, 문화적으로든 ‘우리‘라는 연대 의식을 공유하고, 발휘하고, 재생산하는 허브다. 감염인들에게 ‘우리 캠프 가자‘, ‘우리 나들이 가자‘, ‘돌봄 필요하면 연락해라‘ 같은 초대 메기지를 계속 보내는 건 누구도 고립이나 소외의 희생자가 되지 않길 한마음으로 희망하기 때문이다. - P119

"죽음을 배운다는 건 죽음을 삶의 끝자락으로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삶의 시작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좋은 죽음은 좋은 삶과 뗄 수 없어요. 죽음을 돌보는 건 삶을 돌보는 것이죠. 우리가 어울려서 같이 사는 거, 같이 살다가 또 죽음을 곁에서 지키는 거, 그게 돌봄이에요. 따로따로 떼어서 생각하지 말고, 하나로 살아내야 합니다.
하나의 삶은 하루와도 같아요. 오늘 하루를 꽉 차게 살고 죽음을 맞이하듯 마무리하면, 내일이라는 다른 시간이 또 새로운 삶으로 시작됩니다. 죽음은 늘 보이는 곳에 함께 있어요.
수도회에서는 외출할 때 방을 깨끗이 정리하고 나갑니다.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거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에게도 나중에 해야 할 말이나 건네야 할 감정을 남겨두지 않습니다. 잔여를 남기지 않는 삶에 익숙해지면 죽음 앞에서그렇게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힐 일은 없을 거라고 수도회에서는 가르치죠." - P134

수현은 말 없이 작은 아이 뒤로 천천히 걷는다.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방패막이를 자처한다. 그냥 지켜보는 돌봄, 의도와 계획대로만 하는 게 아니라 지켜보다가 당사자의 필요에 응답하는 돌봄, 그게 좋은 돌봄이라 하지 않던가. - P154

"그래도 폐쇄적인 공간에 머물기만 하는 대신 삶을 살아야 하잖아요. 삶을 함께 사는 활동이 우리가 하는 돌봄이에요. 주로 엄마로 대표되는 가족이 유일한 ‘친구‘이고 또래 친구나 직장 동료를 만나기 어려운 상황인데 여기서마저 닫힌 생활을 강요하면 어디 가서 관계를 만들어요? 나들이도 가고 체육도 센터 안에서만이 아니라 동네 헬스클럽 가서 하고, 노래방 가서 놀고, 마트 가고, 키오스크도 찍어보고. 그러는 게 삶을 사는 거예요.
‘놀아준다‘가 아니라 같이 노는 거예요. 인솔하는 게 아니라 같이 나들이하는 거예요. 이런 활동에 사회적응 훈련, 치유, 체험, 힐링, 이런 단어들 더 이상 쓰지 맙시다. 아니 도대체 발달장애인은 십 몇 년이고 왜 늘 적응하는 훈련만 해야하나요? 그냥 사는 거지. 외식이 왜 늘 체험이에요? 그냥 나가서 먹으면 되는 거지. 장애인은 왜 맨날 캠프에 가나요? 그냥 여행 가는 거지." - P163

그때나 지금이나 기본적 필요 충족에 그치는 돌봄이 아니라 당사자가 욕망을 드러내고 요구할 수 있는 관계를 맺고싶다. 칸트와 여왕에게는 욕망이 있다. 잠, 배설, 식사, 옷입기. 씻기는 일상의 기본이지 그게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이것만 제공하면 하루 종일 같은 곳에 가둬놓고(보호하고) 개별화와 관계 없는 똑같은 프로그램으로 일상이 채워져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미리 마련된 서비스와 프로그램에 칸트가 따르지 않으면 ‘고집부리고 떼쓰는 것‘이 되고 ‘도전 행동‘이 된다. 고집부리는 것이 아닌 요구와 욕망을 드러내는 존재라는 걸 얘기하고 싶다.
칸트의 필요나 요구, 욕망은 무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칸트의 능력에서만 생기는 것도 아니다. 칸트와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수현은 그런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파트너다. 수현은 관계 속에서 칸트의 요구나 욕망이 손톱만큼 자라나는 걸 볼 때 두근거린다. 자기 손톱이 자라는 걸 내내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없다. 어느 날 ‘어, 손톱이 벌써 이만큼 길었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자른다. 서로를 계속 지켜보며 반응하는 돌봄 관계에서는 손톱이 자라는 그 느리고 미묘한 변화가 보인다.
이용자 중에서 직업 훈련이 가능한 사람은 하루에 두시간씩 외부 기관에 실습을 간다. 비닐봉지에 면봉 열 개를 넣는 작업 훈련이었다. 별다른 진전 없이 시간이 흘러가던 어느 날이었다. 면봉을 다 담고도 비닐이 남았던 모양이다. 늘 침묵하던 이용자가 더 담게 면봉을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두 시간은 고사하고 잠시도 집중하지 못하고 들썩이던 이용자도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에는 끝날 시간이 되자 갑자기 ‘더 하고 싶다‘는 요구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단순한 말 한마디, 동작 하나가 그야말로 거짓말같이 한순간 피어난다.
수현이 파악한 필요만이 아니라, 보호자, 부모가 요구한 욕구만이 아니라, 서로 접촉하고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칸트가 뭔가를 ‘좋다‘고 받아들일 때, ‘싫다‘를 표현할 때, 칸트의 반응이 다르다. 처음에는 ‘못해요, 못해요‘가 입버릇이었다가 같이 하면서 차츰 할 줄 아는 걸 찾는다. 당사자만이 아니라 직원도 그렇다. 같이 호흡을 맞추다 어느 순간에 번쩍 뭔가가 되어질 때, 표현의 의미를 알아차릴 때 서로의 성취가 된다 - P164

아이에게 역할 모델은 대단한 성공을 이룬 인물이나 특별한 전문직일 필요는 없다. 신뢰가 가는 어른이면 충분하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해내는,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는 어른 말이다. 경아가 보기에 마을 주민들은 아이에게 가장 좋은 역할 모델이다. 헬스클럽 관장을 비롯해 곳곳에 포진한 주민들이 있다. 소방공무원이 되고 싶다는 아이에게 그와 관련된 훈련을 알려주는 분도 있고, 장학금을 만들고 센터를 위해 이런저런 특별행사를 기획하는 상인회 같은 곳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연결하는 일을 하는 경아는 돌아다니는 앱과 같다. 지원하고 연계할 수 있는 정보와 사람이 경아에 탑재된다. 경아가 연결을 시도하면 요청을 받은 쪽이 성가셔하거나 내빼는 일은 드물다. 대체로 우호적이다. 공무원은 연결할 수 있는 공적 서비스를 알려주고, 이 동네에 없는것은 다른 쪽을 수소문하여 알아봐준다.
완벽하게 세팅하고 시작한 일이 아니다. 움직이면서 만들어간다. 아이의 상황도 천차만별이다. 미리 다 규정한 매뉴얼대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 아이의 상황에 따라 시행착오를 거쳐 지도를 고쳐 그리는 식이다.
그러려면 마을 주민들의 모세혈관, 실핏줄 같은 연결망 그리고 참여가 필요하다. 관심 끄고 살면 편한데 자기 에너지를 써야 하는 성가신 일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 P184

방문진료를 좋아하고,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이 일이 쉽다는 뜻 또한 아니다. 이동 거리에 따라 하루 방문 건수는 달라지지만 영구임대아파트처럼 방문할 환자가 근거리에 모여 있는 경우에는 오전 오후 꼬박 매달려 여덟 집 정도를 방문한다. 기운이 쏙 빠진다. 우울과의 대화 속에서 치켜올리려고 온갖 오버를 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거절에 부딪힐 때도 많다. 힘을 쥐어짜 다가가고 아무리 공을 들여도 도움을 거절하는 환자도 많다. 마음을 줬다가 상처받은 경험이 많으니 스스로를 지키려는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라 짐작한다. 화를 내고 문을 닫아걸면 어쩔 수없이 다가가기를 멈춘다. 무언가 해달라고 하는 경우보다 거부하는 경우가 훨씬 어렵다.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기대하는 바가 없게 되기까지, 그가 얼마나 많이 거절당해왔을지 헤아리려 할 뿐이다.
찾아가 물어본다. 방문의 뜻이다. 찾고 묻기가 충분히 잦아질 때, 닫힌 방문이 빼꼼히 열리기를 고대해본다. 돌봄은 일방이 아닌 관계다. 문 열어주는 당사자의 참여가 필수다.
주민이자 당사자가 스스로 돌보는 힘, 서로 돌보는 힘에 기대어 사라와 동료들이 곁에 다가갈 때 스르르 열리는 문. 의료, 돌봄, 복지의 경계를 허무는 힘은 선언으로 되는 게 아니라 그런 만남과 부딪힘이다. 찾고 묻고 의심하고 회의를 품고 또 주변인의 지지와 덕담으로 기운 차리는 사라의 삶 또한 누군가의 지속적인 ‘방문‘을 받고 있는지 모른다.

돌봄 의존자는 또 어떤가. 사람의 역량은 수면 위 빙산의 일각에서 사고팔 수 있는 노동력만이 아니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 그 사람이 맺을 수 있는 관계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활동 전체다. 고령자와 어린 세대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것으로 보편화할 수 있는 활동이 돌봄이다. 돌봄 의존자는 일방적 수혜자나 대상자도 아니다. 관계적 역량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관계에서 건강이 비롯한다는 의료사협의 철학에서 이분들의 존재는 필수다. 이 관계는 일방적인 게 아니라 상호적이다. 의존하는 사람이 있어 돌봄 체계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돌봄 체계가 지역 공동체의 이익이자 자산이다.
이를 통해 사회라는 것을 재생산하고 미래를 만들어낸다. 나이 든 이를 돌보고 어린 사람을 양육하며, 빈곤, 질병, 장애, 이주 배경 등으로 차별과 배제를 겪는 구성원들의 운명을 잔여적이고 한시적인 정부의 지원 체계에만 맡기는 대신, 서로 돌봄의 체계로 같이 떠맡겠다는 것이 의료사협의 공유자산이다. 이런 자산이 시장화된 돌봄과 공동체 돌봄의 차이를 만든다. - P226

사람들이 SNS에 예쁘고 사랑스러운 반려동물 사진을 올릴 때마다 ‘나만 고양이 없어!‘라고 한탄하는 댓글들이 달리곤 한다. 연수에게 그런 고양이 사진 같은 존재가 일본의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민의련)이다. 일본은 한국에 비해 공공병원 비율도 높을뿐더러 질적으로도 뛰어나다. 공익적 역할을 하는 민간 병원 역할도 그에 못지않다. 민의련에는 1800여 개 의료기관이 가입해 있다. 모두 공공성을 띤 민간병원이다.
농협이 설립한 병원, 생협이 운영하는 병원, 공익재단법인이 운영하는 병원 등이다. 법인에 소속된 1차 의원과 돌봄시설이 함께 활동한다. 이럴 때 1차 의원은 의사 개인의 자영업이 아니라 공익법인이기 때문에 수익성을 늘리겠다고 편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간혹 운영이 어려워지면 튼튼한 시민참여 구조 속에서 지원을 받는다. 공익적 민간 병원에는 서포터즈 역할을 하는 시민 조직이 있어서 이들 병원을 우선 이용하고 재정 후원자 역할도 맡는다.
그중 한 곳의 기관지를 봤더니 인근 업소 이름 3백여 개가 실려 있다. 동네 빵집, 동네 꽃집, 동네 술집, 동네 채소가게, 동네 잦화상, 그런 이름들이 후원자로 들어차 있으이 지역 1차 의원과 각종 돌범시설은 주민의 것이라 할 만했다. - P239

"무겐 프로젝트라고 들어보셨어요? 저 이번에 탐방 갔다가 이 말을 들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무겐이 뭐예요?"
"조합원과 무한 대화한다는 뜻이래요. 조합원의 꿈을 무한 실현한다는 뜻도 있대요. 그래서 구성원들이 자신이 뭘 원하는지 깨달을 때까지 토론한대요."
"맞아요. 맞아. 사실 처음부터 자기가 정말 뭘 원하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요. 얘기하고 경험하다 보면 깨닫는 것 아니겠어요?"
"조합원 되면 더 안전하고 질 좋은 진료를 받는다니까 협동조합에 들어오잖아요? 또 최근에는 초고령 시대를 맞으면서 안전한 노후를 위해 보험 들어놓는다는 생각? 그런데 무한 토론을 하면서 각자의 사연부터 자신이 생각하는 지역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생각하는 관계란 무엇인가를 막 얘기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 과정을 통해 자기 꿈이 뭔지 알게 되고요."
"저, 이 얘기 들을 때, 이 지점에서 전율이 일었어요. 이때 깨닫는 꿈이라는 건 개인적인 꿈이기도 하지만 협동조합 구성원으로서 갖는 꿈이기도 해요. 그래서 ‘그 꿈을 실현하려면 우리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되지?‘로 논의가 진척된다고 해요."
"참여를 독려한다는 말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해요. ‘독려‘는 누군가가 여전히 리더인 거예요. 아예 언어를 바꿔서 지역 주민, 조합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를 깨닫도록 하는 방식이래요."
‘무겐!‘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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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을 잘 활용하라.
-새로운 것을 유입시키는 데에만 집중하다 보면 새로 들어온 것들이 이미 있는 것들을 덮어버릴 수 있다. 자신이 올해 몇 권을 읽었다고 자랑하지 말고(서가에 몇 권 있다고 자랑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 지식을 얼마나 어떻게 활용하는지 반성하라.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을 하이퍼링크로 서로 촘촘히 연결하라. 노드 간 이동속도가 빨라질 수 있도록 고속도로를 놔라. 즉, 이미 습득한 지식, 기술, 경험 등을 서로 연결 지어서 시너지 효과가 나게 하고 하나의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왔다갔다하는 것을 자주 해서 다른 영역 간을 넘나들기가 수월해지도록 하라.
-새로운 것이 들어오면 이미 갖고 있는 것들과 충돌을 시도하라.
-현재 내가 하는 일이 차후에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하라.

•외부 물질을 체화하라.
-계속 내부 순환만 하다가는 일정 수준에 수렴할 위험이 있다. 주기적인 외부자극을 받으면 좋다. 단, 외부 자극을 받으면 그걸 재빨리 자기화해야 한다. 마치 인체가 음식을 먹어 자기 몸의 일부로 만들듯이, 외부 물질을 받아들이면 소화해서 자신의 일부로 체화해야 한다.

-외부 물질 유입 이후 생긴 내부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데에 노력을 기울여야한다. 무시하고 덮어두지 말라. 내가 가진 것들의 상생적 관계를 끌어내도록 하라.

•자신을 개선하는 프로세스에 대해 생각해 보라.
-예컨대 나의 A 작업을 되돌아보는 회고/반성 활동을 주기적으로 하는 프로세스를 만들어라(C 작업).
-나를 개선하는 과정(B 작업)을 어떻게 하면 개선할 수 있을지 고민하라.

• 피드백을 자주 받아라.
-사이클 타임을 줄여라.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면 1년 후에 크고 완벽한 실험을하려고 준비하기보다는 1달, 혹은 1주 후에 작게라도 실험해 보는 것이 좋다. 순환율을 높여라.
-일찍, 그리고 자주 실패하라. 실패에서 학습하라.

•자신의 능력을 높여주는 도구와 환경을 점진적으로 만들어라.
-일례로, 전설적 프로그래머 워드 커닝햄(Ward Cunningham)은 자기의 수족을 마음대로 놀릴 수 없는 불편한 언어에서 프로그래밍을 하는 경우 점차적으로 자신을 도와주는 환경을 만들어 나간다. 나의 속도를 늦추는 것들을 중력에 비유한다면, 워드는 중력을 점점 줄여나간다고 할 수 있다. 중력을 요만큼 줄였기 때문에 그 덕으로 몸이 더 가벼워지고, 또 그 때문에 중력을 줄이는 작업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되먹임을 해서 결국은 거의 무중력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결국 그는 어셈블리 언어에서도 우아한 춤을 출 수 있다.
-완벽한 도구와 환경을 갖추는 데에 집착해선 안 된다. 그런 식으로는 무엇도 영원히 얻을 수 없다. "방이 조용해지고 배도 안 고프고 온도도 적절해지기만 하면 공부 시작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1등은 없다. 또한 실제로 그런 환경이 되어도 몸에 배어든 습관 때문에 결국은 공부하지 못할 것이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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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싸움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 멈춰버린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법
프리데만 카릭 지음, 김희상 옮김 / 원더박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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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래전부터 성공을 가장 잘 보증해주는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양한 전술을 조합해가며 시도하는 자세임을 확인해준다. "더 잘 실패하자." 곧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패로부터 배우는 자세가 성공의 열쇠라는 점을우리는 새겨야 한다. - P12

"답은 간단해요. ‘포모‘가 그 비결이죠." ‘포모‘는 영어의 ‘fear of missing out‘의 머리글자를 따 만든 약어(FOMO)로, ‘뭔가 놓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을 뜻한다. "사람은 의무감이나 습관, 정치적 입장 표현으로 시위 현장을 찾지만, 그냥 친구와 함께 있고 싶어 참여하는 때도 많아요." 노이바우어의 설명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정말 결정적인 시점은 사람들이 시위 현장을 찾지 않으면 뭔가 놓치는 게 아닐까 하고 느낄 때 찾아옵니다. 무슨 구체적인 사건일 수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일 수도 있는 그 무엇을 말이죠. 역사를 쓰는 현장을 놓치고 싶지 않은 거예요." - P46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 가장 강력한 동기는 개인이 집단에 가지는 소속감이라고 대다수 연구는 확인해준다. 흥미롭게도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행동할 거라는 확신이다. 특히 주변의 가족, 친구, 이웃, 동료가 함께하는 것이 최선이다. 인간은 자신이 잘 아는 사람들 안에서 편안하면서도 고양된 기분을 맛본다. 홀로 저항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결실을 거두기 힘들 뿐 아니라, 고립되어 쉽사리 공격받을 수도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 뭔가 이뤄낼 때의 기분,
자신이 속한 집단이 변화를 일으킨다는 확인, 그리고 정당한 방법으로 올바른 일을 한다는 확신을 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인간은 자신이 아는 누군가가 함께할 때 흔쾌히 행동에 나선다. - P59

‘다원적 무지‘가 우리 인식을 왜곡한다는 점을 밝혀낸 다양한 연구가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행동, 특히 규범을 지키려는 올바른 행동(이 행동의 하위범주인 운동 참여도 마찬가지)을 항상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낫고, 더 솔직하며, 더 잘 헌신한다고 여긴다…. ‘다원적 무지‘는 우리를 곧장 ‘애빌린 역설‘에 빠뜨린다. 집단의 구성원이 각자 자신이 선호하는 방향과는 반대되는 결정을 내리는 데 동의하게 되는 이 역설로 인해, 구성원들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이 집단의 의견과 충돌한다고 잘못 판단하면서 집단의 의견에 거스리지 않기 위해 자기 뜻을 숙이고 집단의 결정을 따른다. 실제로 투명하게 서로 의견을 나누어보면 충돌은 전혀 일어나지 않음에도, 이 역설은 저항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확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저항할 의사가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는 나머지 이들은 선뜻 나서지 않고 수동적 태도를 보인다. - P70

지금까지 나는 왜 사람들이 저항에 거리를 두는지 그 몇 가지 원인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흔히 그냥 가만히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해줄 거라거나,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영웅이 나타나야 해‘ 하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는 책임을 회피하려 할 때 잘못된 길로 빠지곤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떤 체제에서 어느 위치에 있든 간에, 불공정과 불의가 빚어지는 책임을 최소한 간접적으로는 가지고 있다.
어떤 정권, 그 어떤 민주주의 체제도 이를 떠받드는 사회적 기둥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기둥 가운데 하나다. - P74

오늘날 운동가들이 즐겨 읽는 마크 엥글러와 폴 엥글러의 책은 20여년 전 헬비의 책에서 사회의 ‘기둥’이라는 비유를 가져왔다. 고대 로마의 신전처럼 권력자도 충성으로 자신을 받쳐주는 여러 ‘기둥‘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 기둥이 흔들리지 않도록 무력을 써서 안정시키도 한다. 이 기둥 가운데 하나 또는 두 기둥을 무너뜨린다고 해서 권력자가 바로 실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러 기둥이 흔들리며,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면, 잔혹하기 짝이 없는 독재자라 할지라도 빠르게 무너지는 변동이 생겨날 수 있다. 저항운동은 이른바 ‘티핑포인트‘, 작은 변화가 쌓이다가 결정적 변화를 부르는 임계점을 어떻게 불러올지 늘 유념하고 목표로 설정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사회의 변혁은 카오스와 카리스마로 이뤄지지 않는다. 자기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로 끈질기게 노력하는 자세가 변화의 원동력이다(물론 전략적으로 카오스와 카리스마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 P82

지리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미국의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세르비아의 오트포르는 저항운동의 이런 작동 원리를 똑같이 보여준다. 두 운동 모두 조바심을 내지 않고 몇 년에 걸쳐 꾸준히 작업을 벌였다. 매력적인 대안을 제시했으며, 이들의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동안 사회가 치러야 하는 비용은 계속 늘어났다. 전략적으로 사회의 기둥을 차례로 설득하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확신하는 ‘우리‘가 충분히 커질 때까지 계속해 나갔다. 그렇게 되자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했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현상 유지에 급급해온 많은 이들에게도 변화를 선택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 P86

사회를 지탱해주는 기둥을 흔들려 하는 이들은 그야말로 돌덩이에 부딪혀야만 한다. 기존 제도 안에서 작은 성과를 거두는 데 만족하지 않고, 기존 제도를 싹 뒤엎는 거대한 변혁을 이루려는 사람은 처음에는 겉보기로는) 실패해야만 한다. 제한적인 힘으로 되도록 많은 기둥을 가능한 한 꾸준하게 흔들려고 하는 사람은 저항운동의 초기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드문 성공에 조바심이 나고 속이 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제대로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막스 베버는정치란 두꺼운 널빤지에 구멍을 뚫는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말에 빗대 말하자면 저항운동이 뚫어야 하는 두꺼운 널빤지는기둥들이다. 기둥을 흔드는 지난한 작업에서 겪는 패배, 정치적이든 사법적이든 문화적이든 실패와 좌절은 저항이 애초부터 희망이 없다는 경고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패배는 일종의 시험 결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결과로 우리는 어떤 기둥(그리고 사안에 따라 어떤 운동가)이 어느 정도 불안정한지, 어디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지, 상황이 달라지면 누가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보일지, 혹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변하지 않을지 등의 소중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 P91

부당한 법을 어겨도 좋은가 하는 물음은 핵심적인 사안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만 마땅하다. "저는 자신의 양심에 비추었을 때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법을 어기고, 그렇게 해서 이웃 시민의 양심을 일깨워 이 법의 부당성을 보여주는 사람이야말로 법을 가장 존중하는 인물이라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킹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한 모든 일은 ‘합법적‘이었으며, 헝가리의 해방투사가 한 모든 행동은 ‘불법‘이었습니다." 어겨야 할 법과 지켜야 할 법은 어떻게 구분할까? 킹은 이 구분을 위해 고대 로마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글을 인용하며 ("부당한 법은 법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리를 빌려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인간의 인격을 타락시키는 모든 법은 부당합니다. 인종차별은 인간의 영혼을 뒤틀고 인격에 해를 끼칩니다." 이로써 킹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해진다. 인종을 차별하고 분리하는 모든 법은 부당하다. 이런 죄악에 우리는 반드시 맞서 싸워야만 한다. 부당한 법에 맞서는 저항의 모범을 킹은 초기 기독교인에게서 찾는다. "로마제국의 부당한 법에 굴복하느니 이들은 굶주린 사자와 고문의 고통을 택했습니다." 킹의 눈에는 철학자 소크라테스 역시 이런 모범을 보여준 인물이다. 오늘날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시민 불복종" 덕분에 "학문의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킹이 보기에 "자유로 나아갈 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흥미롭게도 "큐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KKK"과 같은 백인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온건한 백인, 정의보다는 ‘질서‘를 더 중시하는 백인"이다. "이들은 정의가 살아 있는 적극적인 평화보다 긴장 관계가 없는 소극적인 평화를 더 선호하며, 줄곧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목적에 동의하지만 방법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 아닌가? 기후 운동가들과 그 저항의 방법을 두고 쏟아진 바로 그 비난이다. - P120

그는 시민 불복종은 그만큼 민주주의를 신뢰한다는 표현으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른 의견을 민주적으로 받아들여 줄 것이라는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어야만 저항이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시민 불복종을 존중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불편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참고서 그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바로 불편을 주기 때문에, 그리고 불편을 주는 방식 때문에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시민 불복종은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공개적이며, 비폭력적이고, 의도적으로 법을 위반하되 사법적 결과는 감당하겠다는 성숙한 자세를 보이는 행위이다. 법치국가는 스스로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국민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실험"으로 "국가를 의심"할 수 있게 허용해주어야 한다. 처음에는 성가시고 불편할지라도 그래야 잘못을 바로잡고 고쳐나갈 기회를 얻는다. - P125

우리는 무엇보다도 모든 정치적 의사 표현과 행동을 어찌 됐건 동등하게 다뤄주어야만 한다는 잘못된 보편주의를 버려야 한다. 7장에서 정리한 규칙에 비추어 민주적이고 투명하며 정당한 저항으로 볼 수 없는 운동을 시민사회는 이해해서도 용납해서도 안 된다. 자유민주주의는 그 자신을 반대하고 심지어 폐지하려고 하는 저항도 용인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해 있지만, 그 딜레마는 어디까지나 자유민주주의의 규칙을 지키는 상대에게만 유효하다. 규칙을 의도적으로 깨는 세력에게까지 그러한 태도를 유지해서는 안 된다. 시민 불복종과 사회를 시끄럽게 만드는 시위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주권을 인정하고 이 정부를 메시지 수신자로 삼을 때만 정당하다.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나 ‘페기다‘처럼 아예 조직적으로 민주주의의 근본 규칙을 위배하거나 심지어 민주주의를 폐지하려는 세력, 예를 들어 인종차별 또는 반유대주의를 거침없이 주장하는 세력은 위르겐 하버마스를 비롯한 여러 사상가가 정당한 저항 시위라면 마땅히 지켜야만 한다고 설명한 제약을 깨버린다. - P197

자기 효능감이 있는 운동은 희망에 부푼 집단의식, ‘우리‘를 만들어낸다. 훼손당한 가치와 규범을 보며 분노하는 감정, 다시말해서 불의와 부정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공통의 정서가 ‘우리‘를 결집해준다. ‘우리‘라는 집단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저항은 불의와 부정이 무엇인지를 대중에 호소하는 간명하고 호소력 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갈등을 우리 대 저들, 올바름 대 그릇됨, 건설적 대 파괴적이라는 구도로 담아내어 누가 적인지 분명히 보여주면, 지켜야 할 도덕이 무엇인지 명확해지고 다른 이들과의 소통도 원활해진다. 그렇게 되면 사회 전반에 걸쳐 치유력이 발휘된다. 감동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형성된 집단은 사회의 모든 기둥에서 끈질기게 동맹을 찾아야 하며, 상대를 딜레마 상황으로 몰아넣어야 한다. 상대의 억압과 반격이 격렬하다는 것은 운동이 어느 정도 목표에 근접했음을 알려주는 반증으로 보아야 한다.
저항은 윤리를 바로 세우자는 선언이며, 윤리는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통해 전파되는 것이기에, 저항은 상징적 갈등 상황을 계속 만들어내 우리 앞에 계속 윤리적 선택을 제시해야 한다. 저항은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고 귀찮게 만들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 거부와 회피는 까다로운 윤리적 결정 앞에 인간이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물론 두 가지 나쁜 선택지를 놓고 어느 하나를 골라야만 하는 상황은 딜레마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좋은 해결책이 없기에 차선의 선택지를 고르는 딜레마는 피할 수 없다. 저항 본연의 과제는 문제를 문제라고 제기하는 것이며, 타협을 고민할 이유는 없지만, 저항이 혁명적 자세만 고집하지 않으려면 대안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른바 ‘해결책‘의 제시가 저항의 과제는 아니지만,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저항은 비생산적인 현재에 머무르며 경직될 수 있다. 그렇지만 본디 저항운동은 내일을 바라보며 대안을 찾기보다는 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과격해진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원래 의미대로 충실하게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급진화‘가 필요하다. 즉 저항은 오늘날 우리가 겪는 문제의 뿌리를 과감히 드러내, 온 세상이 똑바로 볼 수 있게 해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폭력은 언제나 잘못된 방법이다. 폭력은 저항의 윤리적 토대를 무너뜨리며, 상대가 직면한 딜레마에서 쉽게 빠져나갈 구실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단히 단결해야 한다. 정말로 정당한 일을 위해 저항해야만 한다. 그리고 싸움을 멈춰서는 안 된다.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권력이 골고루 나뉘는 때는 반드시 찾아온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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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소설집 音樂小說集
김애란 외 지음 / 프란츠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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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노래가 끝나자 헌수는 "왠지 ‘가지 말라‘는 청보다, ‘보고 싶다‘는 말보다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배웠어‘라는 가사가 더 슬프게 다가온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왠지 알 것 같다며. "삶은 대체로 진부하지만 그 진부함의 어쩔 수 없음, 그 빤함, 그 통속, 그 속수무책까지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고. "인생의 어두운 시기에 생각나는 건 결국 그 어떤 세련도 첨단도 아닌 그런 말들인 듯하다"고 했다. "쉽고 오래된 말, 다 안다 여긴 말, 그래서 자주 무시하고 싫증 냈던 말들이 몸에 붙는 것 같다"고. - P41

인생도 그런 게 아닐까? 나는 행복하고 슬프지 않다. 나는 행복하지 않고 슬프다. 나는 행복하고 슬프다. 나는 행복하지도, 슬프지도 않다. 이 모두를 말해야지 인생에 대해 제대로 말하는 게 아닐까? - P90

엄마가 남겨놓은 스웨터가 여러 사람의 흔적과 손길로 조금씩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다보면 어떤 관계든, 지금 곁에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삶의 부피감을 늘려주었다는 걸 경주가 알게 되리라 생각했어요. 물론 스웨터를 볼 때마다 지금은 멀어진 사람들이 떠올라 아프고 쓸쓸해지겠지만,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관계의 흔적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질 테니 서로 만나지 못한 시간을 짐작하고 이해하는 품이 넓어지기도 할 것 같습니다. - P269

혼자 힘만으로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없겠죠. 나를 바꾼다는 건 내 앞의 세계를 바꾼다는 뜻이니까. 자연스레 타인과의 관계 역시 바뀌게 될 테고, 그럼 그 사람의 인생도 바뀌게 되겠죠. 이게 평소 제 생각은 맞지만, 거기까지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쓴 것은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었던 건 어릴 때 기진은 엄마에게서 새로운 인생을 찾는 방법을 배웠는데, 그건 보통 때라면 말을 걸지 않을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일이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인생이 궁지에 몰렸을 때는 도와줄 귀인이 필요해요. 혹시 그런 상황이라면 먼저 말을 걸어보세요. - P224

어려운 상황에 놓이면 그 상황을 감내하는 것 이외에 다른 빠져나올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게 실망스럽고 힘들겠지만, 미세한 변화의 조짐이라도 발견할 수 있는 세심함과 인내심이 있다면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실제 상황보다 우리를 더 어렵게 하는 건 그 상황에 대한 우리의 생각입니다. 앞에서 누누이 말했지만, 현실에 대한 각자의 주석이나 자막이 바로 그런 것이지요.
어려운 상황에서 안 좋은 생각을 하지 않고 좋은 생각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때는 어떤 생각도 하지 않든가, 아니면 모든 생각을 다 해서 생각을 무력화시키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게 제게는 소설에 썼듯이 나무 바라보기와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노트에 적는 일입니다. 명상, 걷기, 운동 등 다른 방법도 많으리라고 봅니다. 어쨌든 힘든 상황에서는 어떤 생각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생각 자체를 무력화시켜야만 한다는 게 핵심입니다.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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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것을 보았어 - 박혜진의 엔딩노트
박혜진 지음 / 난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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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에 대해 우리가 알고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말하는 데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것이다. 거짓말을 통해 숨겨지는 진실의 대부분은 불편한 진실이다. 지불해야할 대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누구도 그 선택을 비난할 수 없고 누구도 타인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불행이라면, 인간 몸의 모든 근육이 그렇듯 진실을 말하기 위해 대가를 감내하는 용기 또한 쓰지 않으면 퇴화한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퇴화한 것이다. 진실하지 않은 인간의 최후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것은 별로 진실하지 못한 나 자신의 최후에 대한 궁금증이기도 하다. - P41

이 소설의 엔딩은 거짓말을 못하는 자가 죽음을 선고받는 데에 있지 읺다. 죽음을 선고받고도 사라지지 않은 그의 행복에 있다. 마지막 대목에서는 ‘행복‘이 두 번이나 강조된다. 이때 행복이란 말의 의미는 자기 삶에서 이방인이 되지 않은 자가 삶의 중심에서 느끼는 삶과의 일체감일 것이다. ‘다정한 무관심의 세계‘는 상식이라는 이름의 표준화로 서로 다른 사람을 억지스럽게 맞추는, 폭력적인 관심의 세계와 반대된다. "나를 보면 맨주먹뿐인 것 같겠지. 그러나 내겐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어."
진심은 적은 비용이 아니다. 그 적은 비용을 외면하는 인간에게는 결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주어지지 않는다. 행복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다. 외부와 단절되었지만 자신과는 단절되지 않았던 뫼르소는 맨주먹 안에 확신을 쥐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죽음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어느 이방인의 죽음으로 기록될 것이나, 우리는 이 결말을 한 인간을 장악하려 했던 거짓의 죽음으로 기억할 것이다. - P42

내 바닥과 마주하기 위해 싯다르타』를 읽었던 걸까. 스물다섯 살에 『싯다르타』를 읽으며 엉엉 울었던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취업 시장에서 ‘내가 이 일에 더 적합한 이유‘ 따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늘어놓으며(내가 하게 될 일의 본질이 뭔지도 모르면서 내가 더 잘할수 있다고 설득하는 것 자체가 이미 거대한 모순이다) 타인을 속이고 자신마저 속일 때 싯다르타』의 문장을 읽으며 내 진짜 얼굴을 잊지 않고 마주할 수 있었던 건 내 생을 통틀어 가장 행운 가득한 경험이다. "나는 바로 자아로부터 빠져나오려 하였던 것이며, 바로 그 자아를 나는 극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극복할 수 없었고, 그것을 단지 기만할 수 있었을 뿐이고, 그것으로부터 단지 도망칠 수있었을 뿐이며, 그것에 맞서지 못하고 단지 몸을 숨길 수 있을 따름이었다." 다들 그렇게 사는데 너만 유난 떨지 말라고, 어차피 면접관들도 네가 하는 말이 진실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헤세만은 스스로를 기만하는 자신을 관찰하라고 조언해주는 어른이었다. - P59

누구에게나 경전처럼 받드는 소설이 있다. 위기에 차할 때마다 돌아오게 되는 소설 말이다. 내게는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가 그런 작품이다. 1년에 한 번쯤읃 <등대로>를 읽는다. 대체로 이렇게 한 해가 시작될 무렵, 어디에 닻을 내려야 할지 알 수 없는 몸이 기우뚱거리고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것처럼 부박하게 흔들릴 때, 마음이 좌표를 잃은 듯 캄캄하기만 할 때, 울프의 삶에 중요한 반환점이었던 이 작품을 읽으면 장막 하나쯤 벗길 수 있다. 쏟아지는 생각 사이를 떠다니다보면 중요한 것은 내가 문제 삼은 바깥의 상황이 아니라 문제삼고 있는 나 자신의 혼돈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등대로』에 한해서라면 나 자신을 만나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뒤엉킨 실타래가 풀리는 기분이냐하면, 그런 말끔한 기분이 주어지는 건 아니다. 작품의 끝에서 자꾸만 마주하게 되는 죽음의 반복이 문제가 아니라 거듭되는 죽음 앞에서 실은 죽음을 외면하고 싶어하는 나 자신이 문제였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 죽음과 나의 간극이 거리가 조금 조정되는 정도다. - P46

패잔 일본의 공기를 반영하듯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삶 구석구석 베어든 죽음의 냄새로 시작한다. "죽는 얘기라면 질색"이라고 말하는 가즈코는 죽음 충동과 싸우는 인물들에게 둘러싸여 자주 휘청거린다. 아프고 불안정한 엄마에 대해 생각하던 가즈코는 "사랑이라 썼다가, 그 다음은 쓰지 못했다". 엄마를 향한 ‘사랑‘은 차마 서술할 수 없는 단어다. 서술한다는 건 안다는 것이다. 안다는 건 연루된다는것이며, 연루된다는 건 그의 상처와 고통을 모른 척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가즈코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의 내용을 서술하는 순간 그 사랑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패배한 시대의 몰락한 귀족 계급에게 책임이란 가당치 않은 소리다. ‘사양‘하는 정신들과 함께 죽음만이 아름다워 보이던 시대. 때는 바야흐로 모든 것이 가라앉고 있던 1948년이었다. - P70

인간은 의지한 채 살아간다. 의지하는 건 기대는 것이고 기댄다는건 서로가 서로의 무게를 견딘다는 것이다. 서로의 무게를 견디다보면 자세는 계속해서 바뀌고 바뀐 자세에 끊임없이 적응해나가야 한다. 적응하는 과정은 불편하지만, 그러한 불편이 삶이라는 데에 토를 달긴 힘들다. 요컨대 기대는 것은 함께 살아가는 인간이 주저앉지 않고 서 있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자세다. 가즈코는 이 또한 알았던 것 같다. 사라져가는 엄마를 향해서는 차마 서술할 수 없었던 사랑. 가즈코는 이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다. 낡은 도덕과 ‘싸우고‘ 태양처럼 ‘살아갈‘ 작정이라고 말하는 가즈코가 말한 사랑의 모험은 서로에게 기대어 어둠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 P72

인민군 장교였던 남자와 그의 아내 록혜가, 탈북하는 과정에서 힘들고 지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다. 의식은 흐려지고 의지는 흩어지고 낙관은 바닥났을 때, 힘겨워하는 여자에게 남자가 말한다. "못 하나를 박아요. 마음속에 못 하나만 박아." 그럼 하나둘 떨어진 것들을, 흩어진 것들도, 나중엔 흐려진 것까지 다시 붙잡아 걸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도 나도 마음속에 못 하나를 박자. 그럼 앎의 고통 속에서도앎이라는 희망을 믿을 수 있다. 밤은 깊고 잠은 오지 않지만 내일이면 날이 밝아온다고 믿어버릴 수 있다. 안다는 건 그런 거 아닐까. 그냥 믿어버릴 수 있는 거. 어둠 속에서도 빛을 믿을 수 있는 것처럼.
no. 17 가장 나쁜 일, 김보현 - P115

마음은 언제나 기댈 것을 찾는다. - P137

흘러가게 둔 인생이 야성적이라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기다리라고 장려하는 문장이 아니다. 망가지기 위해 강물을 거스르며 애쓰는 것보다 슬픔이 자신을 지나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야말로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 더 많은 감정을 품는 성숙한 인간으로, 고통을 아는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니 흘러가게 둔 인생이란 모든 슬픔을 다 맛보겠다는 용기와 인내로 완성된 단단하고 성숙한 인생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상처가 능력이 되려면 슬픔으로부터 도피하지 않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수천 킬로미터를 걸으며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마음같은. 슬픔을 막으려고 애쓰는 힘보다 슬픔을 다 경험하자고 마음먹고 슬픔에 온몸을 내어주는 것이 더 강한 힘이다. 그 힘이 우리를 진짜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인생이 흘러가도록 내버려두는 사람이 야성적이라는 말의 뜻은 그런 것이리라. 나도 슬픔을 아는 야성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 No. 24 영화 와일드 - P154

동물과 함께 살아가며 경험하게 될 마지막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은 그 고통을 지켜보는 것이 사랑의 행위라고 말한다. 고통을 끝까지 지켜보는 시간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그 시간을 견디어내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사랑에 끝이 있는 것처럼 끝에도 사랑이 있다. 그러나 끝을 사랑하는 데에는 담대한 마음이 필요하다. 오래 갈고닦은 노력도 필요하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이자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쓴 세계적인심리학자 빅터 프랭클은 ‘로고테라피‘라는 개념을 통해 끝으로 상징되는 ‘절망‘을 사랑할 방법을 설파했다. 그는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어떤 극악한 비극에서도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로고테라피의 방식을 따르면 인간은 의미를 발견하고 창조해냄으로써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 의미를 다른 말로 바꾸면 담대한 마음이라고 불러볼 수도 있을 것이다. "믿음은 당신이 보는것으로부터가 아니라 당신 자신으로부터 와야 한다."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애도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애도가 사랑이 지닌 최후의 능력인 것처럼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힘든 시간을 견디어낼 수 있도록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의미를 읽어낼 수 있으니 힘들 줄 알면서도 기꺼이 그 힘듦을 선택하기도 한다.
인간의 장점을 한 가지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고통을 선택하는 어리석음이라고 말하겠다. 고통스러운 끝이 기다리고 있다는것을 알면서도, 그 길로 가겠다고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은 얼마나 하찮고도 위대한 존재인지. 우리는 오직 사랑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우리 자신일 수 있다는 말의 불길이 좀처럼 사위지 않는다. - P160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드는 건 내 손으로 오늘 하루를 끝내는 일이다. 오늘의 엔딩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엔딩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불안과 강박을 안고 잠들지 않는다. 불빛이 없는 곳에서도 장마르크와 함께할 수 있다면 밤을 밝히는 불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은 인공의 빛이 없으면 자신도 타인도 확인할 수 없는 희미한 인간들의 가난한 채도를 반영한다. 나는 무엇으로 인해 나일 수 있을까.
"우리 종교는 생의 찬미야." 그러나 현실을 장악하는 건 권태로움이다. "권태에는 세 가지 범주가 있다. 수동적 권태. 춤을 추고 하품하는 소녀. 적극적 권태. 연 애호가. 반항적 권태. 자동차에 불 지르고 창유리를 깨는 젊은이들." 불을 켜는 것은 시선을 떼지 않는 최초의 방법일 수 있으나 시선을 유지하는 궁극의 방법일 수는 없다. 상대방을 발견하는 건 조도를 결정하는 조명의 일이 아니라 마음의 일이기 때문이다. 소설의 엔딩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것 같다. "당신이 삶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요?"
(no.31, 정체성, 밀란 쿤데라) - P195

준비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사각지대에서 변화구를 던지는 것이 삶이다. 추위에 언 손과 발을 녹일 수 있는 아랫목보다 윗목이 인생의 온도에 더 가깝다. 인생의 상온은 윗목이다. 따뜻함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열기는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사랑이 필요한 건 삶의 온도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말하자면 우리의 일상은 윗목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no.33 엄마 걱정, 기형도) - P208

전체, 그것은 파악할수 없는 무엇이다. 전체는 추상적인 영역에서만 존재하는 허상일 뿐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부분과 부분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계뿐이다. <부분적인 연결들>의 저자 메릴린 스트래선은 부분을 전체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부분의 가치와 연결의 실존을 강조한다. 어느 학자의 주장만은 아니다. 부분의 독립성, 부분의 완결성, 연결의 실재성은 오늘날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진 세계를 바라보는 가장 일반적인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no.40 스토너, 존 윌리엄스 - P249

인류는 오래 사는 병에 걸렸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백세 시대라는 공포가 우리의 현재를 이토록 저당잡는다. <나이 없는 시간>에서 오제는 나이에 따라 육체가 퇴락해가는 걸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 부정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에게 시간은 불려나오는 것이지 순차적으로 쌓이는 것이 아니다. 죽기 전까지 인간이 붙들고 있는 것이 최근의 기억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기도 하고, 치매에 걸린 사람이 주로 어린 시절만을 기억하는 증상에 주목하기도 한다. 이는 나이와 시간이 맺고 있는 관계의 본질을 보여준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어제가 아니라 어릴 적을 기억한다. 시간은 기억을 통해 구성된다. 육체적 나이와 별개로 정신의 나이는 무엇을 얼마만큼 어떻게 기억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내가 몇 살인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나 자신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이책의 마지막 문장이자 결론이 도출된다. 우리는 모두 젊은 채로 죽는다. 노년은 얼마쯤 허구적 개념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오제는 노년을 거부하지 않는다. 누구도 육체의 늙음을 거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간으로 표상되는 인간의 정신은 육체가 변해가는 흐름에 따라 그렇게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결말은 우리에게 ‘노년‘에 대한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도록 부추긴다. 돈이 없는 노년을 생각하면 불안하지만 기억이 없는 노년을 생각하면 불행하다. 나이들어간다는 것은 늙어가는 것이아니라 발췌할 기억이 많아진다는 것이며, 발생할 기억보다 추억할기억이 더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불러낼 기억을 잘 돌보는것. 순간의 의미를 잘 축적하는 것이 ETF ‘코인‘만큼이나 중요한노후 대비가 아닐 수 없다. - P256

두 사람은 동네 사람들과 각자의 자식들이 보내는 불신과 비난의 눈초리에도 굴하지 않고 ‘좋은 시간‘을 보낸다. 이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 당장 다음 만남이 가능하기나 할지, 약속할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므로 완벽한 행복을 느낀다. 루이스는 거듭해서 말한다. 자신에게 아직 무엇인가 남아 있다는 걸 알게 해줘서 고맙다고. 아직 다 말라비틀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줘서 고맙다고. 그러니까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돼서 다행이라고.
……
외로움의 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외롭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노력은 한 가지밖에 없다. 내가 외롭지 않기 위해 상대방을 외롭지않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의 온기를 유지하려면 상대방이 있어야하고, 상대방이 외롭지 않아야 나와 우정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 - P290

언제 어디에서나 등장하는 "작은 지옥"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지옥이 없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건 불가항력이다) 점점 더 적은 힘으로도 지옥을 건널 수 있게 되는 것, 즉 변화하는 것이다. 변하기 위해서는 경험이, 바꿔 말해 엔딩들이 필요하다. 끝은 경험이고, 끝은 변화다.
끝에 이르면 많은 작가가 ‘현자‘가 된다. 모든 날이 다 좋았고 모든 것이 다 의미 있었다고 말하는 식이다. 돌아보는 행위가 무슨 마법의 제스처라도 되는 걸까? 한때는 그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 결말들을 언제나 조금씩 의심하는 편이었다. 이 책의 마지막도 모든 것이 다 중요하다는 얘기로 끝난다. 모든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경험이라 불리는 거대한 것으로 변해 결국에는 삶 자체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김없이 ‘현자‘ 타임. 그런데 이번엔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 들었다. 돌아보는 행위가 마법의 제스처였던 것이 아니라 변화가 곧 마법이었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 변하면 과거는 달라 보일 수밖에 없다. 끝은 변화의 증거다. 변형과 변화가 삶이 행진하는 방식이며, 불행을 불행으로만 보지 않게 되는 것이야말로 삶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방식이다. - P319

견딜 수 없는 일을 견딜만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건 끝에서 변화를 읽고 의미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변화엔 좋고 나쁨이 없다. 그러니 누구도 대신 의미를 만들어줄 리 없다. 의미는 오직 변화의 당사자만이 만들 수 있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의미 찾기를 연습한다. 변화에서 좋은 의미를 찾아낼 수 있게 된다. 모든 엔딩은 변화에 대한 변론이자 변화를 향한 의지다. - P320

마지막 문장은 끝까지 읽은 사람만 그 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광활한 세계다. 작품을 정직하게 완주한 사람만이 마지막 한마디의 무게를 정확히 가늠할 수 있다. 그 점이 인생을 닮았다. 회피하지 않고 끝까지 가본 사람만이 마지막이라는 순간의 주인이 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끝은 ‘와버린‘ 게 아니다. 그들은 끝을 맞이한다. 이 책에서 내가 그러모은 마지막 문장들은 맞이한 끝, 환대받은 끝, 끝나지않는 끝, 부활하는 끝이다. 끝은 변화의 일부이고 변화는 끝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끝의 미학을 찾아 헤맸지만 끝이라는 미학에 도달했을 뿐이다. 출발할 땐 상상하지 못했던 이 도착지가 마음에 든다. 끝이라는 순간에 매료된 나는 때로 끝을 기다리기도 한다. 그러다 가끔 두려워지면 주문처럼 되뇌는 한 문장. 이제 그것을 보았어.
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빛나는 마지막이자 마지막이라는 빛이다. -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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