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오래전부터 성공을 가장 잘 보증해주는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양한 전술을 조합해가며 시도하는 자세임을 확인해준다. "더 잘 실패하자." 곧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패로부터 배우는 자세가 성공의 열쇠라는 점을우리는 새겨야 한다. - P12
"답은 간단해요. ‘포모‘가 그 비결이죠." ‘포모‘는 영어의 ‘fear of missing out‘의 머리글자를 따 만든 약어(FOMO)로, ‘뭔가 놓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을 뜻한다. "사람은 의무감이나 습관, 정치적 입장 표현으로 시위 현장을 찾지만, 그냥 친구와 함께 있고 싶어 참여하는 때도 많아요." 노이바우어의 설명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정말 결정적인 시점은 사람들이 시위 현장을 찾지 않으면 뭔가 놓치는 게 아닐까 하고 느낄 때 찾아옵니다. 무슨 구체적인 사건일 수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일 수도 있는 그 무엇을 말이죠. 역사를 쓰는 현장을 놓치고 싶지 않은 거예요." - P46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 가장 강력한 동기는 개인이 집단에 가지는 소속감이라고 대다수 연구는 확인해준다. 흥미롭게도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행동할 거라는 확신이다. 특히 주변의 가족, 친구, 이웃, 동료가 함께하는 것이 최선이다. 인간은 자신이 잘 아는 사람들 안에서 편안하면서도 고양된 기분을 맛본다. 홀로 저항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결실을 거두기 힘들 뿐 아니라, 고립되어 쉽사리 공격받을 수도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 뭔가 이뤄낼 때의 기분, 자신이 속한 집단이 변화를 일으킨다는 확인, 그리고 정당한 방법으로 올바른 일을 한다는 확신을 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인간은 자신이 아는 누군가가 함께할 때 흔쾌히 행동에 나선다. - P59
‘다원적 무지‘가 우리 인식을 왜곡한다는 점을 밝혀낸 다양한 연구가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행동, 특히 규범을 지키려는 올바른 행동(이 행동의 하위범주인 운동 참여도 마찬가지)을 항상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낫고, 더 솔직하며, 더 잘 헌신한다고 여긴다…. ‘다원적 무지‘는 우리를 곧장 ‘애빌린 역설‘에 빠뜨린다. 집단의 구성원이 각자 자신이 선호하는 방향과는 반대되는 결정을 내리는 데 동의하게 되는 이 역설로 인해, 구성원들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이 집단의 의견과 충돌한다고 잘못 판단하면서 집단의 의견에 거스리지 않기 위해 자기 뜻을 숙이고 집단의 결정을 따른다. 실제로 투명하게 서로 의견을 나누어보면 충돌은 전혀 일어나지 않음에도, 이 역설은 저항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확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저항할 의사가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는 나머지 이들은 선뜻 나서지 않고 수동적 태도를 보인다. - P70
지금까지 나는 왜 사람들이 저항에 거리를 두는지 그 몇 가지 원인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흔히 그냥 가만히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해줄 거라거나,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영웅이 나타나야 해‘ 하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는 책임을 회피하려 할 때 잘못된 길로 빠지곤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떤 체제에서 어느 위치에 있든 간에, 불공정과 불의가 빚어지는 책임을 최소한 간접적으로는 가지고 있다. 어떤 정권, 그 어떤 민주주의 체제도 이를 떠받드는 사회적 기둥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기둥 가운데 하나다. - P74
오늘날 운동가들이 즐겨 읽는 마크 엥글러와 폴 엥글러의 책은 20여년 전 헬비의 책에서 사회의 ‘기둥’이라는 비유를 가져왔다. 고대 로마의 신전처럼 권력자도 충성으로 자신을 받쳐주는 여러 ‘기둥‘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 기둥이 흔들리지 않도록 무력을 써서 안정시키도 한다. 이 기둥 가운데 하나 또는 두 기둥을 무너뜨린다고 해서 권력자가 바로 실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러 기둥이 흔들리며,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면, 잔혹하기 짝이 없는 독재자라 할지라도 빠르게 무너지는 변동이 생겨날 수 있다. 저항운동은 이른바 ‘티핑포인트‘, 작은 변화가 쌓이다가 결정적 변화를 부르는 임계점을 어떻게 불러올지 늘 유념하고 목표로 설정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사회의 변혁은 카오스와 카리스마로 이뤄지지 않는다. 자기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로 끈질기게 노력하는 자세가 변화의 원동력이다(물론 전략적으로 카오스와 카리스마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 P82
지리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미국의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세르비아의 오트포르는 저항운동의 이런 작동 원리를 똑같이 보여준다. 두 운동 모두 조바심을 내지 않고 몇 년에 걸쳐 꾸준히 작업을 벌였다. 매력적인 대안을 제시했으며, 이들의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동안 사회가 치러야 하는 비용은 계속 늘어났다. 전략적으로 사회의 기둥을 차례로 설득하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확신하는 ‘우리‘가 충분히 커질 때까지 계속해 나갔다. 그렇게 되자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했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현상 유지에 급급해온 많은 이들에게도 변화를 선택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 P86
사회를 지탱해주는 기둥을 흔들려 하는 이들은 그야말로 돌덩이에 부딪혀야만 한다. 기존 제도 안에서 작은 성과를 거두는 데 만족하지 않고, 기존 제도를 싹 뒤엎는 거대한 변혁을 이루려는 사람은 처음에는 겉보기로는) 실패해야만 한다. 제한적인 힘으로 되도록 많은 기둥을 가능한 한 꾸준하게 흔들려고 하는 사람은 저항운동의 초기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드문 성공에 조바심이 나고 속이 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제대로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막스 베버는정치란 두꺼운 널빤지에 구멍을 뚫는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말에 빗대 말하자면 저항운동이 뚫어야 하는 두꺼운 널빤지는기둥들이다. 기둥을 흔드는 지난한 작업에서 겪는 패배, 정치적이든 사법적이든 문화적이든 실패와 좌절은 저항이 애초부터 희망이 없다는 경고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패배는 일종의 시험 결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결과로 우리는 어떤 기둥(그리고 사안에 따라 어떤 운동가)이 어느 정도 불안정한지, 어디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지, 상황이 달라지면 누가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보일지, 혹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변하지 않을지 등의 소중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 P91
부당한 법을 어겨도 좋은가 하는 물음은 핵심적인 사안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만 마땅하다. "저는 자신의 양심에 비추었을 때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법을 어기고, 그렇게 해서 이웃 시민의 양심을 일깨워 이 법의 부당성을 보여주는 사람이야말로 법을 가장 존중하는 인물이라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킹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한 모든 일은 ‘합법적‘이었으며, 헝가리의 해방투사가 한 모든 행동은 ‘불법‘이었습니다." 어겨야 할 법과 지켜야 할 법은 어떻게 구분할까? 킹은 이 구분을 위해 고대 로마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글을 인용하며 ("부당한 법은 법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리를 빌려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인간의 인격을 타락시키는 모든 법은 부당합니다. 인종차별은 인간의 영혼을 뒤틀고 인격에 해를 끼칩니다." 이로써 킹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해진다. 인종을 차별하고 분리하는 모든 법은 부당하다. 이런 죄악에 우리는 반드시 맞서 싸워야만 한다. 부당한 법에 맞서는 저항의 모범을 킹은 초기 기독교인에게서 찾는다. "로마제국의 부당한 법에 굴복하느니 이들은 굶주린 사자와 고문의 고통을 택했습니다." 킹의 눈에는 철학자 소크라테스 역시 이런 모범을 보여준 인물이다. 오늘날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시민 불복종" 덕분에 "학문의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킹이 보기에 "자유로 나아갈 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흥미롭게도 "큐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KKK"과 같은 백인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온건한 백인, 정의보다는 ‘질서‘를 더 중시하는 백인"이다. "이들은 정의가 살아 있는 적극적인 평화보다 긴장 관계가 없는 소극적인 평화를 더 선호하며, 줄곧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목적에 동의하지만 방법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 아닌가? 기후 운동가들과 그 저항의 방법을 두고 쏟아진 바로 그 비난이다. - P120
그는 시민 불복종은 그만큼 민주주의를 신뢰한다는 표현으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른 의견을 민주적으로 받아들여 줄 것이라는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어야만 저항이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시민 불복종을 존중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불편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참고서 그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바로 불편을 주기 때문에, 그리고 불편을 주는 방식 때문에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시민 불복종은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공개적이며, 비폭력적이고, 의도적으로 법을 위반하되 사법적 결과는 감당하겠다는 성숙한 자세를 보이는 행위이다. 법치국가는 스스로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국민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실험"으로 "국가를 의심"할 수 있게 허용해주어야 한다. 처음에는 성가시고 불편할지라도 그래야 잘못을 바로잡고 고쳐나갈 기회를 얻는다. - P125
우리는 무엇보다도 모든 정치적 의사 표현과 행동을 어찌 됐건 동등하게 다뤄주어야만 한다는 잘못된 보편주의를 버려야 한다. 7장에서 정리한 규칙에 비추어 민주적이고 투명하며 정당한 저항으로 볼 수 없는 운동을 시민사회는 이해해서도 용납해서도 안 된다. 자유민주주의는 그 자신을 반대하고 심지어 폐지하려고 하는 저항도 용인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해 있지만, 그 딜레마는 어디까지나 자유민주주의의 규칙을 지키는 상대에게만 유효하다. 규칙을 의도적으로 깨는 세력에게까지 그러한 태도를 유지해서는 안 된다. 시민 불복종과 사회를 시끄럽게 만드는 시위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주권을 인정하고 이 정부를 메시지 수신자로 삼을 때만 정당하다.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나 ‘페기다‘처럼 아예 조직적으로 민주주의의 근본 규칙을 위배하거나 심지어 민주주의를 폐지하려는 세력, 예를 들어 인종차별 또는 반유대주의를 거침없이 주장하는 세력은 위르겐 하버마스를 비롯한 여러 사상가가 정당한 저항 시위라면 마땅히 지켜야만 한다고 설명한 제약을 깨버린다. - P197
자기 효능감이 있는 운동은 희망에 부푼 집단의식, ‘우리‘를 만들어낸다. 훼손당한 가치와 규범을 보며 분노하는 감정, 다시말해서 불의와 부정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공통의 정서가 ‘우리‘를 결집해준다. ‘우리‘라는 집단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저항은 불의와 부정이 무엇인지를 대중에 호소하는 간명하고 호소력 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갈등을 우리 대 저들, 올바름 대 그릇됨, 건설적 대 파괴적이라는 구도로 담아내어 누가 적인지 분명히 보여주면, 지켜야 할 도덕이 무엇인지 명확해지고 다른 이들과의 소통도 원활해진다. 그렇게 되면 사회 전반에 걸쳐 치유력이 발휘된다. 감동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형성된 집단은 사회의 모든 기둥에서 끈질기게 동맹을 찾아야 하며, 상대를 딜레마 상황으로 몰아넣어야 한다. 상대의 억압과 반격이 격렬하다는 것은 운동이 어느 정도 목표에 근접했음을 알려주는 반증으로 보아야 한다. 저항은 윤리를 바로 세우자는 선언이며, 윤리는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통해 전파되는 것이기에, 저항은 상징적 갈등 상황을 계속 만들어내 우리 앞에 계속 윤리적 선택을 제시해야 한다. 저항은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고 귀찮게 만들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 거부와 회피는 까다로운 윤리적 결정 앞에 인간이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물론 두 가지 나쁜 선택지를 놓고 어느 하나를 골라야만 하는 상황은 딜레마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좋은 해결책이 없기에 차선의 선택지를 고르는 딜레마는 피할 수 없다. 저항 본연의 과제는 문제를 문제라고 제기하는 것이며, 타협을 고민할 이유는 없지만, 저항이 혁명적 자세만 고집하지 않으려면 대안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른바 ‘해결책‘의 제시가 저항의 과제는 아니지만,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저항은 비생산적인 현재에 머무르며 경직될 수 있다. 그렇지만 본디 저항운동은 내일을 바라보며 대안을 찾기보다는 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과격해진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원래 의미대로 충실하게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급진화‘가 필요하다. 즉 저항은 오늘날 우리가 겪는 문제의 뿌리를 과감히 드러내, 온 세상이 똑바로 볼 수 있게 해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폭력은 언제나 잘못된 방법이다. 폭력은 저항의 윤리적 토대를 무너뜨리며, 상대가 직면한 딜레마에서 쉽게 빠져나갈 구실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단히 단결해야 한다. 정말로 정당한 일을 위해 저항해야만 한다. 그리고 싸움을 멈춰서는 안 된다.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권력이 골고루 나뉘는 때는 반드시 찾아온다. - P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