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우연들
김초엽 지음 / 열림원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책들이 우리를 생각지도 못했던 낯선 세계로 이끈다면, 책방은 그 우연한 마주침을 가능하게 하는 통로다. 좀 더 많은 책이 그렇게 우연히 우리에게 도달하면 좋겠다. 우리 각자가 지닌 닫힌 세계에 금이 간다거나 하는 거창한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조금 말랑하고 유연해질 것이다. 어쩌면 그냥, 그런 우연한 충돌을 일상에 더해가는 것만으로 충분할지도. - P234

이 소설들에서도 언제나 우주는 거대하고 자연법칙은 인간에게 무정하다. 하지만 인물들은 두려움에 맞서며 그 우주를 미약하게나마 흔든다. 실패하고 무너지고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지만 무력함을 넘어선다. 절망 속에서 어려운 낙관을 찾아낸다. 그것은 SF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가 SF에서 읽고 싶은 이야기였다. 내가 원하던 종류의 경이감이었다. 인물들은 영웅이 아니다. 법칙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그 법칙에 굴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우주 속의 창백한 푸른 먼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가 무력한 존재라는 당위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과학은 지금 우리가 있는 행성, 발 디딘 장소, 거대한 세계 속 미약한 우리의 존재를 말해준다. 하지만 미약함을 직시한 사람들이 무엇을 선택하는지는 과학이 말해주는 영역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세계 속에서 미약하면서 존엄하기를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은 미약하기에 더 경이로울 수 있다. - P246

나는 과학에 관해, 과학자에 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을 존경하지 말자. 개인에게 기대를 걸지도 말자. 한 사람은 언제나 틀릴 수 있고 무수한 오류와 실수를 저지른다. 어쩌다 충분히 신뢰할 만한 누군가가 존재할 수도 있지만 그가 스스로의 오류 가능성을 부정하고 자가 검증을 멈추는 순간 다시 문제가 시작된다. 합리성은 뛰어난 개인에게 깃드는 것이 아니라 비판과 검증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열린 시스템에서 생겨난다. 과학이 우리가 지닌 많은 질문에 꽤 괜찮은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내놓은 잠정적 결론이 다시 시험대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 과학의 결론은 언제나 잠정적이다. - P274

이처럼 인간이 작고 큰 존재들에게 생의 시간을 빚지며 살아가는 우주먼지라는 사실을 나는 자주 생각한다. 그리고 한사람의 호기심과 사랑이 어떻게 결심과 강인함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 - P28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과 우연들
김초엽 지음 / 열림원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기준을 잡느냐는 창작자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몇 년간 고민하며 이런 기준을 세웠다. ‘단점을 보완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을 일순위로 두지는 말자‘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문제가 있다면 새겨들을 만하다. 다음 작품을 쓸 때 그 점을 개선하는 것을 목표로 두는 것도 괜찮은 일 같다. 다만 그것이 최우선순위가 되면 안 된다.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작품은 단점이 없는 작품이 아니라 단점을 압도하는 장점을 지닌 작품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사랑한 이야기들도 그랬다. 결함 없는 완벽한 이야기여서가 아니라 단점 정도는그냥 눈감아 넘기고 싶은 매력 때문에 그 작품을 좋아했다. 누군가 그 작품에 이런저런 트집을 잡으며 혹평을 하면 "그렇죠, 그건 아쉬운데, 그래도 말이에요・・・・" 하고 괜히 대신 변명을 하고 싶어졌다. 나를 창작자로 계속 살아가게 해주는 것은 모든 독자의 미지근한 호평이 아닌 일부 독자의 강력한 지지에 가깝다. 단점을 보완하되 장점을 갈고닦는 것이 좀 더 중요하다. 나는 그것을 늘 염두에 두며 피드백을 받아들인다. - P2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과 우연들
김초엽 지음 / 열림원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가가 되고 ‘불순한‘ 독서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니, 어쩌면 소설 쓰기를 제대로 결심한 시점부터였을 것이다. 정확히 특정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부터 나의 책 읽는 방식은 조금씩 변화해왔다. 읽는 사람의 독서에서 쓰는 사람의 독서로, 순수한 감탄과 경이에서 벗어나 표면 아래 설계도를 더듬는 방식으로. - P1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과 우연들
김초엽 지음 / 열림원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존재라는 게 제자리에 있을 때는 있는지 없는지 눈치도 못 채던 거였는데, 사라지고 나서 그게 차지하고 있던 빈자리의 크기가 드러나니까 겨우 그게 뭐였는지 감이라도 잡을 수 있는 거잖아요. - P29

우주에서 바라본 작고 푸른 점, 행성 지구에 관해 칼 세이건이 했던 말을 나는 자주 떠올린다. "그 작은 점을 대하면 누구라도 인간이 이 우주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는 유일한 존재라는 환상이 헛됨을 깨닫게 된다."(『창백한 푸른 점』) 그리고 우리가 위대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단지 이 작은 행성의 일부에 불과하기에, 살아가는 동안 이 행성의 이웃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빚지고 있기에, 우리가 지닌 좁은 이해의 영역을 계속해서 넓히고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방법을, 상상하고 또 읽는다. - P38

그 무렵 나는 상상력과 지식이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는 것이 없어서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 P40

지금도 나는 내가 밑천 없는 작가라고 느끼지만 예전만큼 그것이 두렵지는 않다. 이제는 글쓰기가 작가 안에 있는 것을 소진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바깥의 재료를 가져와 배합하고 쌓아 올리는 요리나 건축에 가깝게 느껴진다. 배우고 탐험하는 일, 무언가를 넓게 또는 깊이 알아가는 일, 세계를 확장하는 일.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쓰기의 여정에 포함된다. - P42

나는 장벽 너머를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게 어떤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시키는 일을 따라가기에 급급하고 결과를 제대로 해석할 수도 없었지만 논문을 무작정 쌓아놓고 읽다보니 적어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안갯속에서 조금씩 드러났다. 모든 것이 마음만큼 잘되지 않아 괴로웠던 그때도 세계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는 감각이 주던 기쁨만큼은 지금도 생생하다. 어떻게든 머릿속에 집어넣다보면 밑천이 생기고,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그러면 언젠가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 P48

나뿐만 아니라 보통 당사자로서 어떤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 저자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당사자로서 겪은 경험만이 아니라 그 다음의 이야기일 것이다. 개인의 경험이 어떻게 사회와 연결되는지, 이 경험을 구조 속에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나와 타인의 경험은 얼마나 같고 또 다른지. 그런 이야기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만 개인의 경험은 사적인 서술에 그치지 않고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된다. - P10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과 우연들
김초엽 지음 / 열림원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결코 읽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눈길도 주지 않았던 책을 우연히 펼쳐드는 순간이 있다. 투덜거리며, 의심을 가득 품고, 순수하지 않은 목적으로 그런 우연한 순간들이 때로는 나를 가장 기이하고 반짝이는 세상으로 데려가고는 했다.
그 우연의 순간들을 여기에 조심스레 펼쳐놓는다. - P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