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라는 게 제자리에 있을 때는 있는지 없는지 눈치도 못 채던 거였는데, 사라지고 나서 그게 차지하고 있던 빈자리의 크기가 드러나니까 겨우 그게 뭐였는지 감이라도 잡을 수 있는 거잖아요. - P29
우주에서 바라본 작고 푸른 점, 행성 지구에 관해 칼 세이건이 했던 말을 나는 자주 떠올린다. "그 작은 점을 대하면 누구라도 인간이 이 우주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는 유일한 존재라는 환상이 헛됨을 깨닫게 된다."(『창백한 푸른 점』) 그리고 우리가 위대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단지 이 작은 행성의 일부에 불과하기에, 살아가는 동안 이 행성의 이웃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빚지고 있기에, 우리가 지닌 좁은 이해의 영역을 계속해서 넓히고 존엄을 지키며 살아갈 방법을, 상상하고 또 읽는다. - P38
그 무렵 나는 상상력과 지식이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는 것이 없어서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 P40
지금도 나는 내가 밑천 없는 작가라고 느끼지만 예전만큼 그것이 두렵지는 않다. 이제는 글쓰기가 작가 안에 있는 것을 소진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바깥의 재료를 가져와 배합하고 쌓아 올리는 요리나 건축에 가깝게 느껴진다. 배우고 탐험하는 일, 무언가를 넓게 또는 깊이 알아가는 일, 세계를 확장하는 일.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쓰기의 여정에 포함된다. - P42
나는 장벽 너머를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게 어떤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시키는 일을 따라가기에 급급하고 결과를 제대로 해석할 수도 없었지만 논문을 무작정 쌓아놓고 읽다보니 적어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안갯속에서 조금씩 드러났다. 모든 것이 마음만큼 잘되지 않아 괴로웠던 그때도 세계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는 감각이 주던 기쁨만큼은 지금도 생생하다. 어떻게든 머릿속에 집어넣다보면 밑천이 생기고,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그러면 언젠가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도 있게 된다는 것을 그때 배웠다. - P48
나뿐만 아니라 보통 당사자로서 어떤 주제에 대해 글을 쓰는 저자들이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당사자로서 겪은 경험만이 아니라 그 다음의 이야기일 것이다. 개인의 경험이 어떻게 사회와 연결되는지, 이 경험을 구조 속에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나와 타인의 경험은 얼마나 같고 또 다른지. 그런 이야기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만 개인의 경험은 사적인 서술에 그치지 않고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된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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