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둘러싼 이 ’양극화‘가 생애 말기 돌봄을 곤경에 빠뜨렸다. 환자 곁에서 집안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사회적 보상이나 인정을 받지 못한다. 가뜩이나 옹색하고 시혜적으로 보이는 공적 돌봄을 받기 위해서 환자는 자신의 몸과 집의 비참함을 증명해야 한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환자는 집에 고립되거나, 군말 없이 요양원 또는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 환자의 일상은 열악한 돌봄 노동조건에 따라 출렁인다. 이런 맥락을 제쳐두고 생애 말기 돌봄과 죽음을 다시 집으로 끌고 오자는 주장은 허망하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커뮤니티 케어‘가 특정한 기준으로 선정한 환자 집에 비대면 의료 기기를 설치하고, 문턱을 제거하고, 가끔 사회복지사나 의료인이 방문하는 사업은 아닌지 우려된다. 집에서 죽으면 ‘좋은 죽음(혹은 자연사)‘이고, 시설에서 죽으면 ‘나쁜 죽음(혹은 객사)‘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야 한다. 존엄한 죽음은 집 그 자체가 아니라 공적 세계에 울려 퍼지는 ‘집 안의 목소리들‘에 달려 있다. -집- - P26
질병이 빈곤으로 연결되고 빈곤이 질병으로 이어지기 쉬운 사회에서 보호자의 돌봄은 환자가 죽음(생물학적이든 사회적이든)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개인의 돌봄이 사회안전망 역할을 하고 있는 아찔한 현실에서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강조는 자칫 ‘환자에게서 손을 떼라‘는 의미로 이해될수 있다. 오히려 환자의 자기결정권은 타인의 돌봄을 딛고 섰을 때 비로소 행사되는 것이다. 환자의 자기결정권과 돌봄의 문제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환자의 목소리가 공적으로 울려퍼지려면 ‘환자의 자율성‘만 강조할 게 아니라 그의 일상을 떠받치는 ‘돌봄‘을 정의롭고 평등한 방식으로 재배치해야 한다. 말기 의료결정은 선언적 가치, 의료 윤리, 소통 기술 등으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병원의 운영체계, 한국의 의료 다양성, 의료진의 태도, 보호자의 돌봄, 가족 삶의 조건, 환자의 몸 상태 및 인식 등이 뒤얽혀 협상을 벌이는 ‘정치적 행위‘에 가까웠다. 요컨대 말기 의료결정은 환자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응답이 아니라 환자가 ‘언제까지’ 살 수 있는지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일이었다. 환자, 보호자, 의료진은 저마다의 이유로 ‘죽음의 타이밍’을 고민했다. 죽음은 타이밍의 문제였다. -말기 의료결정- - P115
정부의 방역 저편에 또 다른 형태의 생명과 죽음이 존재한다. 코로나19 사태에 가려진 죽음의 단위를 ‘복수(複數)로서의 죽음‘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이 단위는 죽음을 개별화하고 서사적인 방식으로 나타낸다. 사람들은 죽음도 삶과 마찬가지로 각자의 입장, 상황, 고인과의 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인식한다. 노환으로 임종하신 부모님,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자녀, 투병 생활 끝에 사망한 친구, 생활고로 자살한 이웃은 모두 다른 죽음이다. 이 단위를 통해서 주목할 점은 불평등한 삶의 조건과 죽음의 관계다. 언론보도로 접하는 빈곤사, 하청노동자 사망 사고, 아동학대 사망 사건, 군대 내 성폭력 피해자 사망 사건 등을 떠올려볼 수 있다. 여기서 죽음은 지역, 학력, 연고, 시간, 나이, 성별, 직업, 노동조건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열악한 삶의 조건이 생명을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과정을 주시하게 된다. ‘복수로서의 죽음‘이란 단위로 나타낸 세계에서 만인에게 평등한 신성한 생명은 온데간데없다. 그 대신 불평등한 삶과 죽음이 어수선하게 엉켜 있는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독박 돌봄을 하던 보호자가 ‘간병 살인‘을 하게 될 때, 성폭력을 당한 여성이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어린이가 어른의 학대로 사망할 때 정부는 부랴부랴 미봉책을 내놓는다. 수많은 노동자의 목숨을 앗아가는 허술한 안전 관리, 위험의 외주화, 비정규직 체제, 초과 근무, ‘갑질 문화‘에 대해서 정부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코로나19- - P198
정부의 방역은 ‘평등한‘ 생명과 죽음을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있지만, 오히려 현존하는 ‘불평등‘한 생명과 죽음을 가리고 더 악화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죽음에 호들갑을 떨고, 다른 쪽에서는 죽음에 침묵하는 이 양극적 현실이 불평등한 삶의 조건과 사회의 생산방식, 그 해법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죽음의 두 가지 단위, 즉 ‘단수로서의 죽음‘과 ‘복수로서의 죽음‘은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범주로 봐야 한다. 신성한 생명은 불평등한 삶의 조건을 엄밀하게 논의하고 개선할 때 비로소 지켜질수 있다. 국민의 생명을 지킨다는 말은 무엇이며, 생명이 신성하다는 말은 또 무엇인가? 오늘날 통용되는 생명과 죽음이란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혹은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 질문해야한다. -코로나19- - P203
웰다잉이 강조될수록 ‘잘 죽기‘는 요원하다. 앞서 살펴봤듯이 웰다잉이 전제하는 ‘죽음‘은 연명의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연명의료를 둘러싼 환자·보호자·의료진 간의 갈등 및 쟁점은 웰다잉이란 광의적 표현으로 풀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한국의 기이한 의료체계, 빈약한 사회보장, 정의롭지 못한 돌봄의 배치에 대한 깊은 관심과 논의가 필요하다. 호스피스 확대, 왕진, 간병 급여화 같은 제도도 절실하다. 각 사안을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검토해야 한다. 또 건강한 몸을 정상으로 여기고 아프고 취약한 몸에 낙인을 찍는 인식을 갱신해야 한다. 돌봄을 집에서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활동이나 시혜성 사업이 아니라 모든 시민의 문제, 즉 정치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 좋은 죽음은 좋은 사회에 대한 고민과 분리될 수 없다. -웰다잉-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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