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각본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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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의 등장은 가족각본에 혼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혼란의 틈에서, 아니 그 혼란 덕분에, 가족각본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우리는 왜 ‘당연히‘ 결혼과 출산을 하나로 여기며 결혼 밖에서 태어난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차별하는가. 우리의 인생은 왜 ‘당연히‘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되며, 양육자가 부와 모가 아닌 가족은 왜 ‘어쩔 수 없이‘ 불행한가. 왜 성별이 같은 사람은 가족을 이룰 수 없으며, 도대체 왜 며느리는여자여야 하는가. 국회 앞에서 본 피켓처럼 성소수자가 가정을파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길 때 그 걱정을 비틀어, 그리하여 지키고자 하는 가족은 무엇인지 질문해보면 어떨까. 그렇게당연하던 것들을 의심하다보면, 우리가 바라는 가족이 무엇인지도 알수 있게 되지 않을까. - P11

전통적인 의미의 며느리는 단순히 아들의 아내로서의 지위가 아니라 집안 전체에서 특수한 임무를 부여받은 직책을 뜻하는 말이다. 집안 내 며느리의 서열을 잠시 잊고 그 기대되는 역할만 본다면, 며느리를 맞는다는 건 전문경영인을 모셔오는 일과 같은 수준의 대사인 것이다. - P27

가족을 의미하는 영어 패밀리 family 의 어원인 라틴어 파밀리아 familia 는 ‘가장에게 속한 소유물‘을 뜻했다. 중세시대 파밀리아에는 아내, 자식, 노예가 포함되었다. 가장paterfamilias은 스스로 소유물이 될 수 없으므로 파밀리아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니 ‘가족‘이란 오늘날의 의미와 같은 공동체 단위가 아니었다. 당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가난한 사람이나 노예의 경우는, 그들이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족이라 일컫지 않았다. 기원적으로 가족은 엘리트 계층이 지배하는 소유물을 지칭하는 의미였다. - P28

성별에 따라 정해지는 이 모든 가족질서는 ‘자연스러움‘과 거리가 멀다. 인위적으로 정교하게 기획해놓은 틀에 사람을 끼워맞춘 것이지, 사람의 본성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질서라고 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왜 가족제도가 남성을 중심으로 발달해야 했을까? 전세계적으로 나타난 이 현상에 대해 유발 하라리 Yuval NoahHarari는 사피엔스 Sapiens에서 "현재로서는 명확한 답이 없다"고 말한다. 남성이 힘이 더 세다거나 공격적이라는 것은, 실제로 사회적 능력이 신체적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험적 증거라기보단 신화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왜 여성이 복종하는 지위에 있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도 합당한 설명이 없다. 유교에서 남존여비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교리였다.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말로,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했다. 그러니 여자는 남자를 따라야 한다며,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라야 한다"는 삼종지도의 도덕규범이 나왔다. 이제 모든 사람이 평등함을 원칙으로 하는 시대에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서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규범이다.
그렇다면 며느리가 반드시 여성이어야 할 이유도 모르겠다.
현대사회에서 추구하는 평등은, 성별을 이유로 결정되는 지위를 거부한다. 가족 내 지위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가족은 일반적인 사회제도와 다른 ‘자연‘의 영역이라고 말하기엔, 전통으로 내려오는 가족제도가 너무나 작위적이다. 익숙해서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자연의 이치‘라거나 ‘순리‘라고 말하기엔 근거가 취약하다. ‘며느리가 남자라니‘라고 개탄하기보다, 왜 며느리가 여성이어야 하는지 물어야 하지 않을까? - P33

처는 한명이지만 첩은 여럿 둘 수 있었으니 서얼의 수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권내현은 조선 후기 경상도 한 지역에서 촌락을 형성한 안동 권씨의 족보와 호적을 통해 자손들의 신분을 확인했다. 연구 결과, 안동권씨 18~29세손 중 결혼한 남성 구성원 총450 명 가운데 서자가 28퍼센트였다. 얼자의 경우 족보나 호적으로 파악하기 어렵고, 서자도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실제 서얼의 수는 더 많았을 것으로 본다. 서얼의 자손은 대대로 서얼의 신분을 가지니 시간이 지날수록 그 규모는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8~19세기 서얼의 수가 적자를 넘어섰을 것이라 추정되기도 한다. - P50

혼외출생자의 설움은 근현대사에도 계속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사생아‘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당시 조선호적령은 ‘법적으로‘ 결혼한 부부의 아이만을 공식적으로 자식으로 인정해 ‘적출자‘라고 했다. 결혼은 당연히 법적으로 등록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원래부터 그랬다고 말할 수 없다. 종전에는 부부로 생활한다는 사실로 충분했는데(사실혼주의), 일제강점기부터 법적인 절차를 따라야 결혼이 인정되었다(법률혼주의). 이제 법률혼주의가 채택되면서, 혼인신고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난 자식은 (공적인 인정 없이) 사적으로 태어난 아이, 즉 ‘사생아’가 되었다. - P51

결혼이란 제도가 사람을 적법과 불법으로 갈라놓은 것인데, 어느 순간 사람들은 태어난 사람을 불법적인 존재라 믿기 시작한 듯하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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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가뭄
애너벨 크랩 지음, 황금진 옮김, 정희진 해제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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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다 가진다.‘ 여성에게는 일종의 경구처럼 사용되어 왔다. 얼마나 많은 의미를 품고 있는 말이던가? ‘모든 것을 다 가진다‘는 말은 탐욕적으로 들린다. 비이성적이고 불가능한 말처럼도 들린다. 그런데 이 말은 남성에게는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 남자들, 특히 정계에 입문한 남자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과 아이까지 가지고 있는 경우가 아주 흔한데도 말이다. 남자들은 모든것을 다 가지는 게 완벽하게 가능한데, 그 이유는 모든 일을 도맡아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진다‘는 말이 ‘모든 것을 도맡는다‘는 의미라면, 실현 가능성은 제로가 될 것이다. 타냐 플리버섹에게는 아내가 없다. 하지만 타냐에게는 꽤 쓸 만한 복합적 대안이 있다. 바로 남편이다. 그녀의 남편은 여러 가지 일을 곡예하듯 해내고 그녀가 필요로 하는 부분을 도와준다.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게 흔해지지 않는 한, 운이 좋은 편이라는 생각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P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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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가뭄
애너벨 크랩 지음, 황금진 옮김, 정희진 해제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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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 수 없는 게임입니다. 줄리아 길라드를 향한 비난의 대부분이 그녀가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다는 사실에서 시작한 거니까요. 하지만 길라드가 결혼도 했고 일하는 엄마였다고 해도 비난은 똑같았을 겁니다. 아이들한테 소홀하다고 하면서요.
아마 그 비난도 비혼에 자식도 없다며 비난한 사람들이 하겠죠.
개인사로 국민의 비위를 맞추려고 해선 안 됩니다. 자신이 만족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문제를 결정해야죠. 자신과 가족이 행복해야 합니다. 그거면 되는 거예요. - P330

정치인 아버지에 대한 기대는 분명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평범한 사람이 되고(그러지 않으면 유별난 사람으로 간주된다) 오버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정치인 아버지는 자신의 가족을 허용 범위 내에 머물게 해야 한다. 도움을 줄 때는 눈에 띄어도 되지만 거슬리는 존재가 되면 안 된다. 가족 얘기는 전혀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정치인 엄마들은 아이들 얘기를 늘 입에 올려야 한다. 남자들처럼 자녀가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치하는 엄마라면 엄마라는 신분 때문에 모유 수유나 육아, 빌 헨슨의 사진 등 온갖 문제에 대한 입장도 밝혀야 한다. 게다가 애들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계속 받아야 한다. 제아무리 열정적으로 깔끔하게일을 해내도 마찬가지다. 여자가 두 마리 토끼를 잡는 것이 가능한지를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지표를 찾느라 혈안이 된 자들의깐깐한 시선을 받아야만 한다. 그러다가 정치를 그만두기라도면 (젠장, 심지어 다른 직종으로 바꿔도) 일과 가정을 병행하려니 잘될 리가 없다는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되어버린다.
니컬라 록슨이 15년을 의회에서 보낸 후 정계에서 물러났을 때(5년은 멜버른에 사는 파트너 마이클 케리스크와 함께 어린아이 한 명을기르면서 장관을 역임했다), 다들 그녀의 사임을 두고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했다. 격분한 록슨은 <더먼슬리>에 기고한 글에서 자신은 할 일을 다했고, 자신이 생각할 때 그동안 일도 잘했다고 생각하며, 이제 뭔가 다른 일을하기로 결정했을 뿐 자신의 사임이 일하는 여성들에게 다른 의미를 시사한다고 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했다. - P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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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가뭄
애너벨 크랩 지음, 황금진 옮김, 정희진 해제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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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남녀 역할에서 일어난 변화의 속도는 인류 역사상 가장 빨랐지.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결국 남녀 사이의 개인적인 문제로 바뀌어버리는 거야. 그러니 아직도 갈 길이 아주 멀지. - P183

미국의 웹사이트인 샐러리닷컴에서는 깜찍한 온라인 계산기를 제공하고 있는데, 이 계산기는 2013년 미국 가정주부의 주당 94시간이 연봉 11만 3,568달러의 가치를 지닌다고 계산하고 있다. 이는 매우 타당해보인다(어디까지나 가상이라는 점만 빼면). 이 웹사이트의 계산에는 3시간의 ‘CEO‘ 역할과 7시간의 ‘심리학자‘ 역할이 포함되어 월급이 급등했다. 그런데 스티브 잡스나 지크문트 프로이트를 집에 떨어뜨려 놓는 것이 과연 설득력 있는 비교일까, 아니면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불쾌감만 주는 처사일까?
이처럼 경제학적으로 까다로운 영역을 평가할 때 대부분 그렇듯이, 1967년 체이스맨해튼은행이나 2013년 샐러리닷컴은 대담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완전무결한 결과를 내기 위해 대체주부가 제공해야 할 편의 서비스를 모조리 포함시키지 못한 것이다. 톡 까놓고 얘기해서 ‘성매매‘가 목록에 없다. -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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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가뭄
애너벨 크랩 지음, 황금진 옮김, 정희진 해제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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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여자들은 결혼하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적당한 신랑감을 찾기 원한다는 이유로 공직에서 열외 취급을 받았고,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신사가 짠 하고 마법처럼 나타나면) 소지품을 챙겨서 가정이라는 새로운 인생을 찾아 집으로 떠나야 했다. 이 법은 ‘기혼자 퇴직법‘으로 불렸지만 여자에게만 적용됐기 때문에 ‘유부녀 퇴직법‘이 더 정확한 명칭일 것이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가령 타이피스트는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식 때문에 여성이 결혼을 해도 계속 남아서 일을 할 수있었다. 대신 임시직에다가 재정지원 혜택이나 연금은 없었다.
교사도 약간 다른 적용을 받았다. 교사는 주정부에 고용된 형태였지만, 대체로 연방정부법도 주정부법과 비슷했다. 하지만 교육은 이상할 정도로 여성 의존성이 강한 분야였고, 휘날리는 색종이 조각 속에서 여성이 대거 이탈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한 국가의 교육 시스템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서 많은 주에서 결혼한 여교사들은 정교사 자리를 내놓는 대신 ‘임시‘ 교사로 재임용되었다. - P154

여자 둘이 서로 경쟁 상대인 경우, 즉 한 여자는 아이가 있고 다른 여자는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이력서로 쉽게 추론해낼 수 있을 때 아이가 있는 여자를 능력 면에서 살짝 떨어지는 것으로 간주했다.
또한 일에 대한 헌신도에서도 상대 여자보다 낮게 평가했다. 아이가 있는 여자를 채용에 적합한 인물로 꼽은 비율은 47퍼센트였지만, 아이가 없는 여자는 84퍼센트가 채용을 적극 권장했다. 아이가 있는 여자의 권장 초봉은 평균 13만 7,000달러였고 아이가 없는 여자는 14만 8,000달러였다. 아이가 있는 여자를 응답자의 69퍼센트가 잠재적인 관리잣감으로 여겼지만, 아이가 없는 여자의 장기적 가능성에는 84퍼센트가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아이가 있는 남자와 아이가 없는 남자의 경우에는 실험 참가자들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이가 있는 남자를 아이가 없는 남자보다 능력 면에서 조금 더 뛰어나다고 여겼다. 아이가 있는 남자는 일에 대한 헌신도도 더욱 높을 것으로 기대했다. 권장 초봉은 평균 15만 달러였는데,
두 명의 여자 지원자보다도 높은 액수였고 초봉을 14만 4,000달러로 결정한 아이가 없는 남자보다도 높았다. 아이가 없는 남자는 아이를 빼고는 자격 조건이 모두 동일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93.6퍼센트라는 압도적인 비율로 아이가 있는 남자를 미래의 관리잣감으로 여겼다. 반면 아이가 없는 남자는 응답자의 85퍼센트만이 승진을 시켜도 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아이의 존재는 여성이 직업을 가질 확률을 떨어뜨렸고,
신뢰도나 승진 가능성에서도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전반적으로 적합성이 하락했다. 하지만 아이가 있는 남성은 가정을 이룬 사실이 경쟁 우위로 작용했다. 묘하게도 여성에게는 조심스럽게 밝힌 아이의 존재가 헌신성 부족이나 승진 자격 미달 등의 의혹을 가져온 반면, 남성에게는 아이의 존재가 그런 의혹을 한번에 해결해주었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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