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수자의 등장은 가족각본에 혼란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혼란의 틈에서, 아니 그 혼란 덕분에, 가족각본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우리는 왜 ‘당연히‘ 결혼과 출산을 하나로 여기며 결혼 밖에서 태어난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차별하는가. 우리의 인생은 왜 ‘당연히‘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되며, 양육자가 부와 모가 아닌 가족은 왜 ‘어쩔 수 없이‘ 불행한가. 왜 성별이 같은 사람은 가족을 이룰 수 없으며, 도대체 왜 며느리는여자여야 하는가. 국회 앞에서 본 피켓처럼 성소수자가 가정을파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생길 때 그 걱정을 비틀어, 그리하여 지키고자 하는 가족은 무엇인지 질문해보면 어떨까. 그렇게당연하던 것들을 의심하다보면, 우리가 바라는 가족이 무엇인지도 알수 있게 되지 않을까. - P11
전통적인 의미의 며느리는 단순히 아들의 아내로서의 지위가 아니라 집안 전체에서 특수한 임무를 부여받은 직책을 뜻하는 말이다. 집안 내 며느리의 서열을 잠시 잊고 그 기대되는 역할만 본다면, 며느리를 맞는다는 건 전문경영인을 모셔오는 일과 같은 수준의 대사인 것이다. - P27
가족을 의미하는 영어 패밀리 family 의 어원인 라틴어 파밀리아 familia 는 ‘가장에게 속한 소유물‘을 뜻했다. 중세시대 파밀리아에는 아내, 자식, 노예가 포함되었다. 가장paterfamilias은 스스로 소유물이 될 수 없으므로 파밀리아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니 ‘가족‘이란 오늘날의 의미와 같은 공동체 단위가 아니었다. 당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가난한 사람이나 노예의 경우는, 그들이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족이라 일컫지 않았다. 기원적으로 가족은 엘리트 계층이 지배하는 소유물을 지칭하는 의미였다. - P28
성별에 따라 정해지는 이 모든 가족질서는 ‘자연스러움‘과 거리가 멀다. 인위적으로 정교하게 기획해놓은 틀에 사람을 끼워맞춘 것이지, 사람의 본성에 충실하게 만들어진 질서라고 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왜 가족제도가 남성을 중심으로 발달해야 했을까? 전세계적으로 나타난 이 현상에 대해 유발 하라리 Yuval NoahHarari는 사피엔스 Sapiens에서 "현재로서는 명확한 답이 없다"고 말한다. 남성이 힘이 더 세다거나 공격적이라는 것은, 실제로 사회적 능력이 신체적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험적 증거라기보단 신화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왜 여성이 복종하는 지위에 있어야 했는지에 대해서도 합당한 설명이 없다. 유교에서 남존여비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교리였다.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말로,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했다. 그러니 여자는 남자를 따라야 한다며,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라야 한다"는 삼종지도의 도덕규범이 나왔다. 이제 모든 사람이 평등함을 원칙으로 하는 시대에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서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규범이다. 그렇다면 며느리가 반드시 여성이어야 할 이유도 모르겠다. 현대사회에서 추구하는 평등은, 성별을 이유로 결정되는 지위를 거부한다. 가족 내 지위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가족은 일반적인 사회제도와 다른 ‘자연‘의 영역이라고 말하기엔, 전통으로 내려오는 가족제도가 너무나 작위적이다. 익숙해서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자연의 이치‘라거나 ‘순리‘라고 말하기엔 근거가 취약하다. ‘며느리가 남자라니‘라고 개탄하기보다, 왜 며느리가 여성이어야 하는지 물어야 하지 않을까? - P33
처는 한명이지만 첩은 여럿 둘 수 있었으니 서얼의 수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권내현은 조선 후기 경상도 한 지역에서 촌락을 형성한 안동 권씨의 족보와 호적을 통해 자손들의 신분을 확인했다. 연구 결과, 안동권씨 18~29세손 중 결혼한 남성 구성원 총450 명 가운데 서자가 28퍼센트였다. 얼자의 경우 족보나 호적으로 파악하기 어렵고, 서자도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실제 서얼의 수는 더 많았을 것으로 본다. 서얼의 자손은 대대로 서얼의 신분을 가지니 시간이 지날수록 그 규모는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8~19세기 서얼의 수가 적자를 넘어섰을 것이라 추정되기도 한다. - P50
혼외출생자의 설움은 근현대사에도 계속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사생아‘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당시 조선호적령은 ‘법적으로‘ 결혼한 부부의 아이만을 공식적으로 자식으로 인정해 ‘적출자‘라고 했다. 결혼은 당연히 법적으로 등록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원래부터 그랬다고 말할 수 없다. 종전에는 부부로 생활한다는 사실로 충분했는데(사실혼주의), 일제강점기부터 법적인 절차를 따라야 결혼이 인정되었다(법률혼주의). 이제 법률혼주의가 채택되면서, 혼인신고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난 자식은 (공적인 인정 없이) 사적으로 태어난 아이, 즉 ‘사생아’가 되었다. - P51
결혼이란 제도가 사람을 적법과 불법으로 갈라놓은 것인데, 어느 순간 사람들은 태어난 사람을 불법적인 존재라 믿기 시작한 듯하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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