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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씨의 맛
조경수 외 지음 / 상상공방(동양문고) / 2009년 2월
평점 :
품절
사과씨의 맛은 어떨까? 한 번도 사과씨를 직접 씹어먹어 본 적이 없기에 궁금한 마음에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헉. 대뜸 뜨는 검색 결과는 사과씨에는 극소량의 청산가리가 있다고 한다.(여담이지만 '청산가리'의 맞춤법이 갑자기 헛갈려 또 검색해보았더니, 젤 윗 화면에는 자살방지 도움의 전화들이 쭈루룩..;; 왠지 내가 나쁜 생각으로 검색한 것 같아서 괜히 기분이 묘하고 이유없이 찔리는 이 기분은; ) 청산가리 때문인지 왠지 쌉싸름한 맛이 날 듯한 사과씨의 맛. 상큼하고 달콤한 과육 속에 단단하게 자리한 치명적인(?) 사과씨 처럼 소설 속의 3대에 걸친 여성들의 삶 역시 달콤함 속에서도 피해갈 수 없는 날카로운 아픔을 지닌 과거와 그것을 잊고자 하는 망각. 잊고 싶어하지는 잊지 못하는 기억들이 사과 나무와 함께 뒤엉켜 있다.
사실 나는 사람 이름을 기억을 잘 하지 못한다. 영화를 보아도 끝까지 주인공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기 일쑤이고, 그래서 러시아 문학은 내게 쥐약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을 처음 집었을 때도 무려 이해를 돕기 위해 나온 '가계도'를 보고 조금 겁을 먹었었다. 가계도가 필요할 정도로 복잡한 이야기라니. 하긴 3대에 걸쳤다고 하니 말이 필요없겠지. 그것도 외할머니 외외할머니..까지 따져들어 가기까지... 하지만 막상 책장이 3분의 1쯤 넘어가자 이 소설의 묘한 매력에 점점 빠져가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소설은 대과거, 과거, 현재의 3가지 시점을 왔다갔다 한다. 그리고 그 과거의 이야기는 여러 사람의 기억을 통해 들려오는 옛날 이야기이다. 한 사람이 이야기가 시간이 흘러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합쳐져서 결국에는 남은 조각 하나하나가 맞춰져 가는 퍼즐과 같은 소설이다. 사랑에 관한 소설이고, 상실에 관한 소설이다. 3대에 이르는 엄마와 딸, 그리고 자매의 이야기. 그들은 서로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같은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고, 또 서로를 동정하고, 서로를 미워하면서 나이가 먹어 간다. 어린 시절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나이가 들면서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각자 같은 상실감을 껴안으면서 조금씩 각자만의 방식으로 과거의 사건에 영향을 받는다. 대부분의 인생은 달달한 과육의 맛이라기 보다는 씁쓸한 사과씨의 맛이 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또 각자의 인생을 덤덤히 받아들이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며,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다.
이 소설 속에서는 여러 등장인물이 등장하지만, 그 수많은 등장 인물 하나하나가 각자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또한 각자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이를 전혀 산만하지 않게 자연스러운 편물처럼 엮어가는 스토리에 작가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더구나 이 작품이 작가의 첫 소설이라고 한다.(그 전 작품은 무려 제임스 조이스 연구 서적이다.) 아마도 작가는 이 작품 속의 캐릭터 한 명 한 명을 진심으로 사랑하였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