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여는 힘 - 두드리면 열린다
로버트 슐러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미래를 여는 힘

 

슐러의 서적(미래를 여는 힘)은 슐러의 삶이다. 또한 지난 반세기 동안 걸어온 길이었다. 어둑한 골방에서 쥐어짜낸 보고서가 아니라 슐러가 꿈을 이룬 과정을 토로하는 진짜 인생이야기이다. 슐러에게는 꿈이 있었는데, 그 꿈은 치유의 힘으로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교회이다.

미래를 여는 힘을 접하기에 앞서서 문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문은 열고 다는 양면성이 있다. 문은 열기도하면서도 문은 닫기도 한다. 그럼 미래로 열고 닫는 문도 있을 것이다. 바로 미래에 대한 양면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 양면성을 말해서 긍정적 자화상과 부정적 자화상이다. 미래라는 문도 목적의식을 같고 노크하면 열릴 수 있으나 미래라는 문 앞에서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있으면 문은 열리지 않는다. 물론 문이 열려 있으면 방문만 해도 들어갈 수 있겠지만 말이다. 문도 방문할 사람을 위하여 열어 놓을 때도 있으나 귀품을 위하여 닫아 놓을 때가 있는 것이다.

문을 노크해도 열리지 않는 것은 그 안에 열쇠 집을 고정관념으로 잠겨 있거나 그 열쇠집이 자신에 외골수적인 세계관과 마음에 상처로 절망에 놓인 사람이라면 열고 싶어도 열려지지 않는다. 그의 외골수적인 세계관이 하나씩 풀어져야만 비로소 미래를 열어가는 지성에 힘을 얻을 것이고, 상처로 인한 절망에 잠겨 있으면 치유를 통해 미래를 향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힘을 공급받을 것이다. 이런 모습은 삶의 현장에서 보고도 또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것을 두 분류로 나눠보자면, 낙관과 비관이겠다.

낙관이냐 비관이냐? 선택은 마음에서 결정하는 것이다. 비관론은 긍정적인 사람을 멀리 쫓아낸다. 비관론은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이라는 잡초가 싹을 틔워져서 꿈이라는 성장을 가로막는 유독한 땅이다. 비관의 땅에서는 성장을 멈추게 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시들게 하고, 원대한 꿈을 땅속으로 흩어지게 만든다. 누구든지 낙관과 비관으로 미래를 볼 수 있는 문제는 믿음이다. 낙관과 함께 열정은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입만 벌리고 있으면 떨어지는 감이 아니다. 누구나 긍정을 선택하기만하면 자기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좋은 삶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생에게는 막대한 가치와 잠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가치를 믿는 믿음은 낙관론의 중요한 출발점 중 하나이다.

낙관론자는 내일도 해가 뜬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미래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희망으로 떠오를 내일의 태양을 언제나 두 팔 벌려 환영한다. 내일은 태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새로운 날이니 어찌 흥분되지 않겠는가 싶다. 내일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내 자신이 희망을 만들어갈 수 있음을 알기에 나는 낙관론자이다. 이것을 말해 하나의 힘이라고 부른다. 바로 미래를 여는 힘이라고 말이다. 아이디어 하나의 힘! 결정 하느냐의 힘! 한 사람의 힘! 자고로 역사는 비전을 품은 한 사람에서 시작된다. 역사를 보아도 꿈을 품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꿔놓았지 않던가? 마치 하늘도 하고자하는 사람들을 돕는다고 말하고 있다. 낙관론자에 자기고백을 들어보면, 모든 사람이 소중하다고 믿기에 나는 낙관론자다. 사랑이 미움을 이긴다고 믿기에 나는 낙관론자다. 내일도 해가 뜬다는 사실을 알기에 나는 낙관론자다. 희망으로 떠오를 내일의 태양을 언제나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라고 한다.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기에 나는 낙관론자다. 낙관론자는 최종 승자라는 사실을 세상도 알게 된다. 낙관론자에게 실패는 결코 끝이 아니다. 실패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돌아가는 길뿐으로 낙관론자의 사전에 그만이란 단어는 없다.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고난을 극복한 이야기가 참으로 많다. 낙관론을 선택함에 있어서는 어떤 비관론자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삶을 남긴다. 낙관론자의 삶은 기쁨이 넘치는 여행하는 반면에 비관론자의 삶은 한 번도 희망으로 새벽을 깨우치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니는 여행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관론을 선택해야 한다.

낙관론에 선택이 미래를 내던지는 것이 안이요. 우리의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꿈을 찾아 그 꿈을 성취하려고 떠나는 복음의 나그네일 뿐이다. 낙관적인 삶에 있어 준비물이 있다면, 꿈을 분명하게 목표로 바꿔줄 긍정적인 임무진술서이다. 그러니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목적과 소명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긍정적인 자아상으로서 성공으로 향하는 출발점이다. 대개 소명은 아주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긍정적인 압력들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억눌렸던 소명이 터지는 것같이 말이다.

돈, 자아, 섹스, 쾌락, 권력, 통치에 대한 욕구는 모두 인간 속에 있는 열정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원시적인 것이다. 열정은 인간 속에 내내하는 감정적 혹은 생물학적 갈망을 말하며, 인간의 행동을 좋거나 나쁜 쪽으로 형성하는 내적동인이 되어 준다. 열정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가치 있는 일에 쏟아야할 시간과 정력 같은 인간자원을 열정이 앗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가치는 인격을 형성하고 올바른 삶을 사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가치는 열정과 욕구를 잘 다스려 인격을 쌓게 만들어 준다. 열정은 이성의 반대편에 있는 타고난 감정이나 가치는 선택의 대상이다. 열정을 분출시키기도 억제하기도 하는 도덕적, 윤리적, 영적 원칙이다.

우리는 갈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의견이 다른 사람과 처음 관계를 맺을 때 비판, 꾸지람, 나무람, 반작 등으로 대화를 열어가서는 안 된다. 부정적인 대화는 방어, 난처함, 분노 등의 감정을 일으켜 진솔한 대화를 가로막는다. 보편적으로 좋은 관계로 향하는 문이 열린 문이요. 닫쳐진 문도 여는 열쇠이다. 먼저 마음을 열게 만드는 것이 대화에서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대화는 다음과(내용, 스타일, 전략, 마음) 같은 요소로 이루어진다. 대화원칙(부드럽게, 공정하게, 솔직하게, 단호하게)이 있으며, 이것이 미래를 여는 힘이 되어준다. 올바른 대화법을 터득한 사람에 공통점이 있다면, 희망과 아픔, 꿈과 좌절, 믿음과 두려움은 없는지를 살펴보면서도 지혜롭고도 섬세하게 찾는다는 점이다. 슐러에게 대화를 이끌어준 말씀이 있다면, 너를 일컬어 무너지는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사58:12)이다. 그리하여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야기꾼이요. 대화로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의사가 되었다.

지나치게 실패를 두려워하면 조그만 위험 때문에 큰 보상을 날려버릴 수 있는 반면에 지나치게 자신감이 충만하면 어마어마한 재난의 위험을 간관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위대한 일을 시도하던 중에 실패하는 것이 가만히 있다가 성공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이는 시도 속에 성공도 있는 한편 실패도 있기 때문이다. 고로 미래를 여는 힘은 시도하는 도전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미래에 문을 찾았으면, 이제는 두드리는 구함 속에서 현실이 미래를 향하여 실현하지 않던가? 물론 망대를 세우고자 할 무렵에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고 예수님의 질문에 자문자답하면서 도전해야 마땅하겠다는 말씀이 생각난다(눅14:28). 바로 규칙이 세워져야 비로소 미래도 내다보며 알 수 있는 법칙이다. 만일 규칙이 없으면 미래는 암울해지므로 규칙이 없는 것은 미래를 여는 것이 아니요. 미래를 내던지는 것이다. 미래를 여는 힘을 충전시키려면, 올바로 법칙을 세워가며 계획한대로 현실 속에서 실현해야가야만 마땅하겠다. 그리고 긍정적인 자화상 속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며 계획했던 목적을 성취할 수 있음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정복자만이 정복에 쾌감을 알기 때문에 멀고도 먼 정상을 향해 한걸음씩 걸어간다. 물론 타인들이 볼 때면 왜이리? 사서 고생하느냐는 충고를 듣는다. 또한 고행의 길을 사서 걸어가느냐고 잔소리를 듣기도하겠으나 정복자는 고행의 길을 알면서도 정상을 향해 한걸음씩을 걸어가는 것은 정복자만이 맛볼 수 있는 정복에 대한 쾌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복자만이 얻을 수 있는 축복이라고 말할까? 덧붙이면 무엇이든지 심은 사람이 무엇이든지 거둘 수 있으며, 무엇이든지 행할 수 있기 때문에 가치관에 도전정신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도전하게 되면 도전한 것에 성취할 수 있다는 흥분된 마음을 갖고 도전하게 된다.

물론 정상을 향해 걸어가는 길목에서 좋은 타협을 가질 수 있겠다. 그 타협 중에 오만한 사람은 참아주며, 상처 입은 사람을 싸매주며 정상을 향해 걸어가는 것 말이다. 그리고 자기를 낮추고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의 말에 귀를 열어야 할 배움에 타협해야 한다. 어떤 분야든 우리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배우는 자세를 품어야 한다. 이는 미래를 열어가는 열쇠이요. 정상을 정복하는 길목 중에서 지름길로 가는 지혜이다. 바로 이것이 미래에 있을 일을 상황파악하며, 이 일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이다.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면 끝이면서 이제는 끝났다고들 한다. 그러나 죽음은 끝임과 동시에 시작이며, 모든 끝에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태도만 잃어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모든 끝은 아름다운 시작으로 바뀌게 된다. 또한 인생에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는 역전된 삶으로 추구하게 된다. 우리는 마음이 생동하게끔 마음에 생기를 공급해야 할 것이다. 마치 예수님이 틈틈이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을 묵상하므로 재충전하셨던 것같이 말이다. 또 하나 묵상할 말씀이 있다면,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며 생명이라고 하셨다. 예수님 자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죽어도 살겠으며,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요11:25). 바로 우리는 생명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에게 생명을 공급받아가며 마음에 생기가 약동하게끔 관리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 힘은 이토록 대단하다. 그런 우리는 긍정과 부정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부정은 전혀 근거도 없이 긍정적인 소명을 무너뜨리고 가로막기 때문에 긍정적인 소명이 성취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야만 한다. 건강을 유지하려면 근육에 에너지를 공급해야 하듯 건강한 영성과 감성을 유지하려면 믿음의 근육에 힘을 길러야 한다. 믿음의 근육에 단련법은 믿기 어려운 상황에서 끊임없이 씨름하는 것이다. 우리는 긍정적인 자화상을 갖고 부정과 맞서서 씨름하면서도 긍정적인 자화상을 구축해 나가야만 한다. 이는 꿈을 갉아먹는 것이 부정이기 때문이다. 긍정적 가능성을 찾아가면서 소명을 이루며 자기 세상을 바꿔보는 것도 유익하겠다. 긍정적인 열정에는 전염성이 있다. 열정은 머뭇거리던 방관자를 끌어들이는 놀라운 힘이 있다. 멈추지 말고 끝까지 파야 한다.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더더욱 정신을 차려야 한다.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 한다.

끝으로 집중을 살펴본다. 집중은 분명한 소명을 결연한 목표이며 운명으로 바꾼다는 뜻이다. 창조적인 열정을 표적의 중앙으로 쏘아 보낸다는 의미이다. 한없이 자기 고집만 내세워서는 고란하나 소명에는 집중할 줄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에도 문제점과 개선할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배움을 통해 조정하고, 개선하며 교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좋은 아이디어라도 소명에 쏟아야 할 시간과 정력 그리고 자원에 무조건 집중해야 한다. 무조건 목표에 집중하고 자기 생각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미래를 여는 힘!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믿음이다. 믿음은 좇는 행로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간에 믿음은 공상이 아니라 사실이요. 또한 현실이며, 앞을 내다보는 만안경과 같은 것이요. 믿음은 현실세계에서 미래로 이루어져 가는 미래지향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정보와 새로운 답에 마음을 열어두는 것이 미래를 열어가는 열쇠이며 에너지이겠다. 더욱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나에게 능력을 공급해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에 확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택
스펜서 존슨 지음, 형선호 옮김 / 청림출판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삶은 오늘을 사는 내가 선택하는 것에 달려있다.
 순간순간 내린 결정이 존재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좋은 선택이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고로 좋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 선택의 원칙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선택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선택하려면 먼저 생각하며 분별하며 올바른 뜻에 결정한 끝에 행동하게 된다.
 이것이 선택의 다리를 건너가는 과정이며 사람이라면 나타나는 심리적인 상태이다.
 무엇보다 당연한 것은 선택도 경험을 통해 경륜이 차츰차츰 쌓여지는 것이다.

선택도 등산하여 정상을 정복해 나가는 과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정복한 고지에서 내려오기 위해 하산하는 과정도 그러하겠다.
 마찬가지로 인생도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걷는 과정에서 분별하며 결정해야 하는 선택이라는 지혜를 얻는다.

닮은꼴은 시간과 정비례하듯 나의 선택이 결과와 정례비한지를 알아보며 선택하는 것이 지혜이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시멜로 이야기 마시멜로 이야기 1
호아킴 데 포사다 외 지음, 정지영 외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0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는 성공과 실패에 박자를 맞추며 인생에서 행복의 소리를 또는 실패에 아픔의 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말 하고 있으면서도 예전에 자신도 부유한 집안에서 행복의 소리를 내었던 중 아버지에 사업 실패와 함께 죽음에 이른 아픔에 소리를 차마 내지 못하여 하나의 서적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마치 시청한 것보다 오감한 것이 더하듯 싶다.  마시멜로야말로 한마디로 말하면 현실주의라고 일컫는 것이 낳겠다.  더나가서는 인간의 욕망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하겠다.
  본 서적은 목적을 잃은 선박이 파도에 이리저리 휩싸여 결국 암초에 부딪쳐 침몰하는 것을 마침 향해하던 선박이 가까이에 와서 이끌어 주는 현상과 같다고 하겠다.  오늘날은 실패하여 노숙자 신세지며 구걸하는 사람에게 다시 일어나 성공을 향해할 수 있도록 가르침 속에서 용기와 지혜와 격려로 다독거려 주고 따뜻함과 위로를 느끼게 된다.  즉, 마시멜로란 것으로 인한 현실주의에서 빠져나와 미래로 지향할 수 있도록 말해준다.
  그리고 마시멜로를 먹지 않는 인내와 끊기를 갖고 목적하는 정상을 정복할 수 있도록 교훈하고 있다.  이는 조나단 회장님이 찰리라는 운전기사와 대화하는 모습을 통해 알게 된다.  마침 찰리는 자신의 실수한 것을 회장님에게 말하면서 회장님은 위로해 주며 경험 삼도록 하신다.  찰리는 회장님을 대기운전하며 대화를 통해 친근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나날이 갈수록 회장님의 가르침을 사모하게 되었는데, 이는 성공의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회장님의 가르침에 자신의 잘못된 생활습관을 메모하며 결단하였으며 새로운 생활습관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런 찰리는 새로운 삶을 추구하게 되었으며, 찰리가 목적했던 정상을 정복하게 되었다.
  찰리는 회장님께 찾아가 기쁜 소식을 나누며 비로소 인생의 행복함이 무엇인줄을 깨닫게 됨과 함께 회장님은 찰리에게 권면을 하시기를 예전에 자네가 실수하며 잘못 생활하던 중 이젠 올바로 생활하지 않는가?  이젠 실수로 낙심하며 실패로 절망하는 사람에게 자네의 사연을 전해주었으면 어떻겠냐고 권면하신다.  이때 찰리는 어땠을까?
  찰리는 회장님의 말에 순종하여 예전에 있던 사연을 전하기로 약속하였다.  오늘날도 마시멜로 이야기로 들을 수 있어 참으로 즐거움면도 있으면서 동시에 설득력 있게 상대를 움직이는 힘이 강력하다.  그리고 하나의 단어에 깊은 의미가 담아 있는 것으로 바늘로 찌르듯 자각을 깨우는 강력한 힘을 담아 있다.


  인내는 쓰지만 성공은 달은 고로 성공은 인내하는 사람의 몫인 것과 함께 비로소 성공에 명작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인내는 정상에 이르는 첩경이다.  그러므로 절대 포기하지 말고 오직 인내해야만 실패의 아픔에서 자기비하하며 원망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에서 누리는 쾌감을 맛보는 것이다.  정상을 정복한 사람의 쾌감을 누가 알류만은
  마라톤에 경주하는 선수를 생각한다.  그는 경주하며 오르막내리막 길에서 또는 오랜 달려간 위치에서 지치겠으나 경주에 완주하는 것을 메달 때문이다.  즉, 목적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자기와 싸우며 약점을 극복하는 아픔을 참아 먹으며 비로소 정복하는 쾌감을 누리기 위해 달려가겠으나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은 자신과 약속한 목적의식을 잊어버려 중간에 포기하고 말 것이다.  이것이 성공과 실패의 차이면서 자신과 싸움에 이기느냐 지느냐에 대조하는 것이겠다.
  때론 인간인지라 내면에 감추어진 욕망에 자극을 받아 미혹 받을 수 있으나 다시 일어나서 도전해 나가야 하겠다.  약점을 인내 하는 것은 아프겠으나 극복하면 성숙에 강점 속에서 자유를 누리겠다.  이것이야말로 남들이 가지 않는 외길을 걷는 것이다.  외로움과 쓸쓸함과 고독함을 참으며 성공에 영광을 누리게 위해서 오늘도 달려가노라 한다.

  조나단은 성공실패이유를 자신이 알고 있는 일화로 가르치며 찰리에게 성공에 동기부여로 실패에 낙심한 것에 의식전환을 시켜준다.  저자도 이 서적에 사건들을 주제로 조나단에 위치에서 실업자들에게 꿈과 소망을 심어주며 열매 맺는 과정에 다음을 먹어도 결실에 단맛을 자극시켜주며 다시금 시작하도록 교훈한다.
  나침반은 방향을 제시하듯. 성공에 방향을 제시한다.  반면에 마시멜로를 선택할 경우는 실패의 방향을 제시할 것을 말한다.  즉, 도전 성공에 도전을 제시하며 성공에 이르는 소감을 제시한다.  다만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입 벌리고 기다리고 있는 게으른 사람들에게 다시금 맺은 열매를 따먹듯이. 목적된 성공을 향해 도전하기를 밀어주고 있다.
  저자는 반복하는 의미에서 지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내일의 성공을 위해 오늘을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스스로를 성찰하기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지금 나는 마시멜로를 먹으면서도 저 성공을 바라고 있지 않는가를 돌아보도록 강조하고 있다.  참으로 실패한 것을 핑계할 것이 아니라 실패하게 된 나의 위치에서부터 생각하며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교훈을 받는다.


  찰리의 새로운 삶에 박수를 보낸다.  그는 그릇된 삶에서 조나단으로 지혜를 얻어 성공의 방향으로 주행하였다.  첫째로 내적관리였다.  자신을 관리하며 점검하는 것이다.  둘째는 외적관리였다.  성장과 성숙에 발맞추는 것이다.  셋째는 내외적 관리였다.  재능과 은사를 개발하는 것이다.  성공을 향해 전쟁하도록 무장하는 군사가 되어 자신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멋진 사람이다.  배우며 닮아 볼만한 샘플이다.  그리고 금전절약에 힘썼다.
  조나단을 통해 배우는 것과 찰리를 통해 얻는 것이 있다면 이렇다.  격언에 한 마리에 물고기를 주면 하루를 살 수 있으나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주면 평생을 살 수 있다.  바로 조나단은 찰리에게 마시멜로를 먹도록 하는 하루의 쾌락보다 평생을 즐겁게 생애 할 수 있는 마시멜로 이야기로 교훈해 주면서 마시멜로에 다스림 받는 것이 아니라 마시멜로를 지배하며 마시멜로를 시와 때를 분별하여 샴페인을 터트리듯이 행동하도록 교훈하신다.
  기둥이 깊이 들어가야만 빌딩을 높이 세우듯 기초에 충실한 사람이 성공하리라.  이 기초는 성실함인데, 바로 인내와 부지런함이다.  이는 마시멜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고로 인생의 성패는 지금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 그리고 마시멜로의 유혹을 어떻게 이겨내느냐에 달려 있다.  누구도 탓할 수 없는 것이 자기 인생이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 자기 인생이다.  인생도 성공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있어도 성공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것이 마시멜로로 배우는 교훈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곁에 있어 고마워요
김경숙 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곁에 있어 고마워요.


  서적은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마음은 모르는 격언에 실감된다.  왜냐면 사람은 똑같이 보여도 생활만큼은 다르다는 것을 설득되기 때문이다.  또한 남모를 사연으로 가슴앓이하며 삶의 색깔도 색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의 깊은 사연을 알아보며 이해가 더한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붕우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사람은 힘들고 어려울 무렵에 사람의 정체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때 도움을 받는다면 얼마나 감동이 더 하겠는가?  외로울 때 위로해주고, 낙심할 때 격려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더할 나이 없이 복 받은 사람이다.  참으로 붕우가 있는 사람이다.

  서적은 삭막한 광야 같은 세상에 갈증을 해소해 주는 수도와 같다.  또는 작은 옹달샘에서 졸졸졸 샘물이 흘러나오듯이. 사람마다 깊은 사정 속에서 흘러나오는 사연이 삭막한 심령에 샘물로 적셔주는 것만 같다.

  분주한 경쟁시대에 잠시나마 쉼을 얻는 것도 유익하지 않겠는가 싶다.  각자의 흘러나오는 사연을 의미하는 것으로 감성의 샘물을 마시며, 삭막한 심령에 촉촉한 새벽이슬이 적시듯 내면관리를 해야 하지 않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자들만 위하여 - 남자들의 내면세계를 알고싶은
션티 펠드한 지음, 윤혜란 옮김 / 미션월드라이브러리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여자들만 위하여


사람을 만나기 위해 상대의 체질과 기질과 전문성을 알아본다.
 다른 것보다 상대에게 실수를 보이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그리고 상대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므로 상대의 호기심을 터치하고 싶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상대의 관계가 오랜 끝에 친밀함을 나누기 위함일 것이다.
 만남을 위해선 한번쯤 생각해 보았으리라 집작된다.

격언에도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아야 승승전부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여자들이라면 남자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과 함께 그의 울타리 안에서 쉼을 얻기를 소원할 것이다.
 저자는 각자의 여자들이 보고 있는 남자에 대한 편견을 벗어버리고 남자의 내면세계 구조형식을 가르쳐주고 있다.

여자들은 차분한 가운데 깊은 교제 속에서 서로의 친밀함을 요구하는 반면에 남자들은 성적 충동이며 감정적이다.
 그녀는 뿌리 깊은 만남 속에서 새로운 삶을 스케치하지만, 그대가 지성적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달랜다.
 그렇지만 남자들이 성적요구는 육체적인 것을 넘어서 정서적으로 안심과 활력과 사랑을 느끼기 때문이다.

저자는 옷 입는 것에 말하는데, 그것은 남자의 시선을 빼앗지 않는 한도 내에서 옷을 입으라고 말이다.
 청소년기의 딸이 몸에 꼭 붙는 탑을 입는 것은 지금 같은 반 남학생득에게 자신의 벗을 몸을 상상해 보라고 부추기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남자들이 받는 유혹을 인식하는 것은 여자들 책임이다.
 그에 못지않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는 것 역시도 여자들 몫이다.(p177)

여자라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집안에는 두 어린아이가 있다는 말이 생각에 떠올라 말한다.
 첫째 어린아이는 자녀이며, 둘째 어린아이는 남편이다.
 이 남편은 함께 생활에는 속마음만큼 어린아이 같다.
 늘 아내가 이해하며 인정하며 존중받으며 따르기를 원하는 측면에서 말이다.
 말인 고집 센 아내라면 다툼이 일어나겠으나 현숙한 아내라면 얼마든지 두 명의 어린아이를 성숙시키며 따르겠다는 것이다.
 남자는 외형적으로 강한 반면에 내적으로 빈곤하므로 이 속사람에게 감성을 풍부하게 부어준다면 남편의 그늘 아래서 황홀할 것이다.
 마치 저녁노을에 뱃사공이 노를 젓고 가는 것처럼 같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