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여는 힘 - 두드리면 열린다
로버트 슐러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미래를 여는 힘

 

슐러의 서적(미래를 여는 힘)은 슐러의 삶이다. 또한 지난 반세기 동안 걸어온 길이었다. 어둑한 골방에서 쥐어짜낸 보고서가 아니라 슐러가 꿈을 이룬 과정을 토로하는 진짜 인생이야기이다. 슐러에게는 꿈이 있었는데, 그 꿈은 치유의 힘으로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교회이다.

미래를 여는 힘을 접하기에 앞서서 문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문은 열고 다는 양면성이 있다. 문은 열기도하면서도 문은 닫기도 한다. 그럼 미래로 열고 닫는 문도 있을 것이다. 바로 미래에 대한 양면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 양면성을 말해서 긍정적 자화상과 부정적 자화상이다. 미래라는 문도 목적의식을 같고 노크하면 열릴 수 있으나 미래라는 문 앞에서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있으면 문은 열리지 않는다. 물론 문이 열려 있으면 방문만 해도 들어갈 수 있겠지만 말이다. 문도 방문할 사람을 위하여 열어 놓을 때도 있으나 귀품을 위하여 닫아 놓을 때가 있는 것이다.

문을 노크해도 열리지 않는 것은 그 안에 열쇠 집을 고정관념으로 잠겨 있거나 그 열쇠집이 자신에 외골수적인 세계관과 마음에 상처로 절망에 놓인 사람이라면 열고 싶어도 열려지지 않는다. 그의 외골수적인 세계관이 하나씩 풀어져야만 비로소 미래를 열어가는 지성에 힘을 얻을 것이고, 상처로 인한 절망에 잠겨 있으면 치유를 통해 미래를 향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힘을 공급받을 것이다. 이런 모습은 삶의 현장에서 보고도 또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것을 두 분류로 나눠보자면, 낙관과 비관이겠다.

낙관이냐 비관이냐? 선택은 마음에서 결정하는 것이다. 비관론은 긍정적인 사람을 멀리 쫓아낸다. 비관론은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이라는 잡초가 싹을 틔워져서 꿈이라는 성장을 가로막는 유독한 땅이다. 비관의 땅에서는 성장을 멈추게 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시들게 하고, 원대한 꿈을 땅속으로 흩어지게 만든다. 누구든지 낙관과 비관으로 미래를 볼 수 있는 문제는 믿음이다. 낙관과 함께 열정은 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입만 벌리고 있으면 떨어지는 감이 아니다. 누구나 긍정을 선택하기만하면 자기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좋은 삶을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생에게는 막대한 가치와 잠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가치를 믿는 믿음은 낙관론의 중요한 출발점 중 하나이다.

낙관론자는 내일도 해가 뜬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미래가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희망으로 떠오를 내일의 태양을 언제나 두 팔 벌려 환영한다. 내일은 태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새로운 날이니 어찌 흥분되지 않겠는가 싶다. 내일 어떤 일이 벌어져도 내 자신이 희망을 만들어갈 수 있음을 알기에 나는 낙관론자이다. 이것을 말해 하나의 힘이라고 부른다. 바로 미래를 여는 힘이라고 말이다. 아이디어 하나의 힘! 결정 하느냐의 힘! 한 사람의 힘! 자고로 역사는 비전을 품은 한 사람에서 시작된다. 역사를 보아도 꿈을 품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꿔놓았지 않던가? 마치 하늘도 하고자하는 사람들을 돕는다고 말하고 있다. 낙관론자에 자기고백을 들어보면, 모든 사람이 소중하다고 믿기에 나는 낙관론자다. 사랑이 미움을 이긴다고 믿기에 나는 낙관론자다. 내일도 해가 뜬다는 사실을 알기에 나는 낙관론자다. 희망으로 떠오를 내일의 태양을 언제나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라고 한다.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기에 나는 낙관론자다. 낙관론자는 최종 승자라는 사실을 세상도 알게 된다. 낙관론자에게 실패는 결코 끝이 아니다. 실패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라 돌아가는 길뿐으로 낙관론자의 사전에 그만이란 단어는 없다.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고난을 극복한 이야기가 참으로 많다. 낙관론을 선택함에 있어서는 어떤 비관론자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삶을 남긴다. 낙관론자의 삶은 기쁨이 넘치는 여행하는 반면에 비관론자의 삶은 한 번도 희망으로 새벽을 깨우치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니는 여행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관론을 선택해야 한다.

낙관론에 선택이 미래를 내던지는 것이 안이요. 우리의 삶을 향하신 하나님의 꿈을 찾아 그 꿈을 성취하려고 떠나는 복음의 나그네일 뿐이다. 낙관적인 삶에 있어 준비물이 있다면, 꿈을 분명하게 목표로 바꿔줄 긍정적인 임무진술서이다. 그러니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목적과 소명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긍정적인 자아상으로서 성공으로 향하는 출발점이다. 대개 소명은 아주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긍정적인 압력들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억눌렸던 소명이 터지는 것같이 말이다.

돈, 자아, 섹스, 쾌락, 권력, 통치에 대한 욕구는 모두 인간 속에 있는 열정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원시적인 것이다. 열정은 인간 속에 내내하는 감정적 혹은 생물학적 갈망을 말하며, 인간의 행동을 좋거나 나쁜 쪽으로 형성하는 내적동인이 되어 준다. 열정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가치 있는 일에 쏟아야할 시간과 정력 같은 인간자원을 열정이 앗아갈 수 있다는 점이다. 가치는 인격을 형성하고 올바른 삶을 사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이다. 가치는 열정과 욕구를 잘 다스려 인격을 쌓게 만들어 준다. 열정은 이성의 반대편에 있는 타고난 감정이나 가치는 선택의 대상이다. 열정을 분출시키기도 억제하기도 하는 도덕적, 윤리적, 영적 원칙이다.

우리는 갈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의견이 다른 사람과 처음 관계를 맺을 때 비판, 꾸지람, 나무람, 반작 등으로 대화를 열어가서는 안 된다. 부정적인 대화는 방어, 난처함, 분노 등의 감정을 일으켜 진솔한 대화를 가로막는다. 보편적으로 좋은 관계로 향하는 문이 열린 문이요. 닫쳐진 문도 여는 열쇠이다. 먼저 마음을 열게 만드는 것이 대화에서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대화는 다음과(내용, 스타일, 전략, 마음) 같은 요소로 이루어진다. 대화원칙(부드럽게, 공정하게, 솔직하게, 단호하게)이 있으며, 이것이 미래를 여는 힘이 되어준다. 올바른 대화법을 터득한 사람에 공통점이 있다면, 희망과 아픔, 꿈과 좌절, 믿음과 두려움은 없는지를 살펴보면서도 지혜롭고도 섬세하게 찾는다는 점이다. 슐러에게 대화를 이끌어준 말씀이 있다면, 너를 일컬어 무너지는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사58:12)이다. 그리하여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야기꾼이요. 대화로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의사가 되었다.

지나치게 실패를 두려워하면 조그만 위험 때문에 큰 보상을 날려버릴 수 있는 반면에 지나치게 자신감이 충만하면 어마어마한 재난의 위험을 간관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위대한 일을 시도하던 중에 실패하는 것이 가만히 있다가 성공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이는 시도 속에 성공도 있는 한편 실패도 있기 때문이다. 고로 미래를 여는 힘은 시도하는 도전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미래에 문을 찾았으면, 이제는 두드리는 구함 속에서 현실이 미래를 향하여 실현하지 않던가? 물론 망대를 세우고자 할 무렵에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고 예수님의 질문에 자문자답하면서 도전해야 마땅하겠다는 말씀이 생각난다(눅14:28). 바로 규칙이 세워져야 비로소 미래도 내다보며 알 수 있는 법칙이다. 만일 규칙이 없으면 미래는 암울해지므로 규칙이 없는 것은 미래를 여는 것이 아니요. 미래를 내던지는 것이다. 미래를 여는 힘을 충전시키려면, 올바로 법칙을 세워가며 계획한대로 현실 속에서 실현해야가야만 마땅하겠다. 그리고 긍정적인 자화상 속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며 계획했던 목적을 성취할 수 있음과 함께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정복자만이 정복에 쾌감을 알기 때문에 멀고도 먼 정상을 향해 한걸음씩 걸어간다. 물론 타인들이 볼 때면 왜이리? 사서 고생하느냐는 충고를 듣는다. 또한 고행의 길을 사서 걸어가느냐고 잔소리를 듣기도하겠으나 정복자는 고행의 길을 알면서도 정상을 향해 한걸음씩을 걸어가는 것은 정복자만이 맛볼 수 있는 정복에 대한 쾌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복자만이 얻을 수 있는 축복이라고 말할까? 덧붙이면 무엇이든지 심은 사람이 무엇이든지 거둘 수 있으며, 무엇이든지 행할 수 있기 때문에 가치관에 도전정신이 세워져 있기 때문에 도전하게 되면 도전한 것에 성취할 수 있다는 흥분된 마음을 갖고 도전하게 된다.

물론 정상을 향해 걸어가는 길목에서 좋은 타협을 가질 수 있겠다. 그 타협 중에 오만한 사람은 참아주며, 상처 입은 사람을 싸매주며 정상을 향해 걸어가는 것 말이다. 그리고 자기를 낮추고 자기보다 똑똑한 사람의 말에 귀를 열어야 할 배움에 타협해야 한다. 어떤 분야든 우리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배우는 자세를 품어야 한다. 이는 미래를 열어가는 열쇠이요. 정상을 정복하는 길목 중에서 지름길로 가는 지혜이다. 바로 이것이 미래에 있을 일을 상황파악하며, 이 일에 대해 대처할 수 있는 순발력이다.

우리는 죽음을 생각하면 끝이면서 이제는 끝났다고들 한다. 그러나 죽음은 끝임과 동시에 시작이며, 모든 끝에 새로운 시작이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태도만 잃어버리지 않으면 반드시 모든 끝은 아름다운 시작으로 바뀌게 된다. 또한 인생에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는 역전된 삶으로 추구하게 된다. 우리는 마음이 생동하게끔 마음에 생기를 공급해야 할 것이다. 마치 예수님이 틈틈이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며 아버지의 뜻을 묵상하므로 재충전하셨던 것같이 말이다. 또 하나 묵상할 말씀이 있다면,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며 생명이라고 하셨다. 예수님 자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죽어도 살겠으며,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요11:25). 바로 우리는 생명의 근원되시는 예수님에게 생명을 공급받아가며 마음에 생기가 약동하게끔 관리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 힘은 이토록 대단하다. 그런 우리는 긍정과 부정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부정은 전혀 근거도 없이 긍정적인 소명을 무너뜨리고 가로막기 때문에 긍정적인 소명이 성취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어야만 한다. 건강을 유지하려면 근육에 에너지를 공급해야 하듯 건강한 영성과 감성을 유지하려면 믿음의 근육에 힘을 길러야 한다. 믿음의 근육에 단련법은 믿기 어려운 상황에서 끊임없이 씨름하는 것이다. 우리는 긍정적인 자화상을 갖고 부정과 맞서서 씨름하면서도 긍정적인 자화상을 구축해 나가야만 한다. 이는 꿈을 갉아먹는 것이 부정이기 때문이다. 긍정적 가능성을 찾아가면서 소명을 이루며 자기 세상을 바꿔보는 것도 유익하겠다. 긍정적인 열정에는 전염성이 있다. 열정은 머뭇거리던 방관자를 끌어들이는 놀라운 힘이 있다. 멈추지 말고 끝까지 파야 한다.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더더욱 정신을 차려야 한다.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 한다.

끝으로 집중을 살펴본다. 집중은 분명한 소명을 결연한 목표이며 운명으로 바꾼다는 뜻이다. 창조적인 열정을 표적의 중앙으로 쏘아 보낸다는 의미이다. 한없이 자기 고집만 내세워서는 고란하나 소명에는 집중할 줄도 알아야 한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에도 문제점과 개선할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배움을 통해 조정하고, 개선하며 교정하는 일이 중요하다. 좋은 아이디어라도 소명에 쏟아야 할 시간과 정력 그리고 자원에 무조건 집중해야 한다. 무조건 목표에 집중하고 자기 생각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미래를 여는 힘!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믿음이다. 믿음은 좇는 행로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간에 믿음은 공상이 아니라 사실이요. 또한 현실이며, 앞을 내다보는 만안경과 같은 것이요. 믿음은 현실세계에서 미래로 이루어져 가는 미래지향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정보와 새로운 답에 마음을 열어두는 것이 미래를 열어가는 열쇠이며 에너지이겠다. 더욱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나에게 능력을 공급해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에 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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