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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순간들 - 박금산 소설집
박금산 지음 / 비채 / 2020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머리말>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더 줄이지 못해 죄송합니다.” 플래시 픽션을 처음 접했기에 ‘이보다 더 짧은 분량이면, 소설의 모든 구성이 들어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컸다. 놀랍게도 이 책의 단편들은 저마다 집중하는 순간이 다르다. 발단, 전개, 절정, 결말. 작가는 네 가지 구성에 맞추어 차례를 나누고, 자신의 소설을 분류해 둔다. 각 항목에 대한 설명도 어렵지 않게 적혀 있다.
발단
“발단은 시작이 아니다 ... 9회 말 투 아웃 만루 상황에서 던지는 첫 공, 소설의 발단이다.”
<어떤 개의 쓸모>에서, 강아지 때문에 잦은 이불빨래를 한다던 주인공 남자는 사실 야뇨증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그래서 남자는 야뇨증이 해결될까? 이웃에게 들키진 않을까? 한 페이지 분량의 소설을 읽은 후, 머릿속이 물음표로 가득 찼다. 긴장감 있는 시작을 통해, 독자들에게 소설의 흥미를 던져주는 것. 그것이 소설의 발단이었다.
전개
“좋은 전개는 그것을 따로 떼어놓았을 때 독자가 앞뒤를 상상하면서 흥미를 느끼게 한다.”
<소설을 잘 쓰려면>
이 단편은, 픽션이지만 작가가 소설쓰기를 희망하는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에세이같기도 했다. 첫 소설을 교수에게 비판받은 주인공이 이후 등단에 성공하며 소설은 마무리된다.
“너는 단편소설을 쓰고 싶었던 거잖아. 짧아져야 감동적인 거야.”
“한 마디로 줄여 말할 수 있어야 진정한 소설이다.”
줄기만 남겼을 때 디테일을 독자가 궁금해 하도록 소설을 써야 한다면, 그 줄기를 구상하기 위해 작가들은 얼마나 많은 고민을 거듭했을까. 교수의 진심어린 조언을 들은 주인공은, 등단 이후 어떤 소설을 써내려갈까. 소설의 뒷이야기에 여러 궁금증이 들었다.
절정
“좋은 절정은 그 자체로 너무 좋고 완벽해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든다.”
<눈사람>
세 쪽의 스릴러. 폭설이 그친 후, 아빠는 아이와 눈사람을 만들러 나간다. 얼핏 보면 평화로운 부자지간으로 보인다. 하지만 배가 고프다는 아이의 말을 무시한 채, 아빠는 아이를 굴려 눈사람을 만든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이는 이미 죽어 있었다.
“손을 호호 불어 녹이며 눈을 움켜쥐었다. 그것으로 아이의 발자국을 덮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태연하게 살인 현장을 수습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충격과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결말
“절정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결말이 가장 좋은 결말이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다>
두 아이와, 거실의 아내가 잠든 모습을 지켜보는 화자. 처음에, 독자는 당연히 그가 남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화자는 ‘남편이 없었다’ 며, 집안 곳곳을 찾는다. 그리고 아내가 숨을 쉬는 걸 확인하며 안도한다. “그는 알게 되었다. 남편은 아내 곁에 있어야 남편이다.”
사라진 남편을 찾는 예상 밖의 화자의 행위에, 독자는 긴장하게 된다. 그리고 결말을 확인한 후, 긴장이 풀린 채 안도한다.
나는 25편의 플래시 픽션들을 통해 <소설의 모든 순간>을 생생히 느껴보았다. 짧은 소설인 만큼 강렬하게 잡아내는 순간에 더욱 몰입할 수 있었고, 좋은 소설들이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이유는 소설의 원칙을 성실하게 지키기 때문이란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진정한 기본이란 흔들리지 않는 그 무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