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하우에서 온 편지
앤 부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책담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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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 그러나 세계는 그런 인간들의 세상은 이상적일 뿐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피라미드의 위계질서 속에 우리를 위치시킨다. 그 어디에 속하든 간에 우리는 자신이 위치한 곳보다 더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지시가 언제나 진실이며 그것이 마치 모든 것인냥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가게 만든다. 달리 세뇌교육이 있는 게 아니다. 그저 그렇게 배웠고 처음부터 그런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고 그 주류에 휩쓸려 살아가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할 뿐이다. 반대로 자유로운 행동을 하거나 자기 의지를 피력하는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부담스러운 존재로 비춰지기 마련이다. 다수의 의견 속에 소수의 의견이 묵살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예전 광고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모두가 예스라고 할 때 '노우'라고 말하는 용기!!

우리는 그런 용기를 갖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


올바른 역사의식은 인간의 가치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외부의 시선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이 소신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일본이 우리에게 행사한 무력을 통해 수많은 한국인들이 그들의 강제노동과 성적 착취에 희생되었다. 물론 오늘날에 와서 소수의 일본인들에 의해 그들의 잔악무도한 행동에 대한 사과를 하고는 있지만 아직도 다수의 일본인들은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 지, 왜 사과해야하는 지에 조차도 모르고 있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깊은 반성과 함께 권력자들이 참회하는 모습을 진심을 담아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걔중에는 아직 정신 못 차린 인간들도 많지만)


'다하우에서 온 편지'는 그런 역사에 대해 제대로 된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잔잔한 문체로 써내려간 소설이다. 아이들의 시선에서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는 지 보여주는 책인듯 싶어 오랜만에 기분 좋은 책을 읽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다른 나라 특히 큰 테두리로만 알지 독일의 전후사정을 자세히 모르는 이들도 자연스럽게 알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더 고마운 책이라는 생각이다.

이 이야기는 독일이라는 곳에서 벌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영국의 어느 마을에서 제시라는 소녀가 독일에서 날아온 엽서 한 장을 토대로 자신이 몰랐던 할머니의 과거를 알게되는 과정을 그려낸다. 또한 그녀와 함께 등장인물들이 겪게되는 혼란을 통해 어떻게 과거를 받아들이게 되며 또 앞으로 어떻게 과거를 인식하고 미래를 살아나가야하는 지에 대해 풀어놓은 이야기이다. 제시의 할머니 엘리자베스, 프랑스로 일하러 떠난 제시의 아빠, 하얀셰퍼드 견 스노이, JM이라는 알파벳, 단추, 제시의 사촌 프란체스카의 행동, 할머니의 하얀 장미, 독일어를 가르치는 독일인 본 회퍼 선생님, 다운증후군 닐 아저씨, 장애인이자 제시의 친구인 케이트, 친구 벤의 외할머니 미리암 레비 그리고 동화 쓰기 과제 등의 다양한 소재를 통해 이야기를 펼쳐나가고 있다.


독일은 자신들의 과거를 수치스럽게 생각함과 동시에 후대 사람들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기록과, 장소를 통해 많이 남겨놓고 있으며 아이들이 또 다시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다양한 장르에서 역사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저자 역시 그런 생각에 동참한 듯하다. 중간중간 저자가 힌트를 넣어두었듯이 곳곳에 알게 모르게 다양한 장치들이 숨어 있는데 읽고 나서야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며 다시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한 가지 더 관심있게 읽은 내용으로는 주인공 아이의 시선으로 옮겨낸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다른 민족에 대한 생각이다. 장애자에게, 다른 나라에서 온 노동자에게 가지는 아이의 시선이 꼭 우리 어른을 닮아 있다. 단일민족이라는 국가를 늘 자랑삼아 왔던 대한민국은 이제 다민족 국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섞여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그들을 이방인 취급하고 심지어 더럽다고 우리와 같은 부류가 아니라고 치부하기까지 한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조센징'이라 욕할 때는 너도나도 앞장서서 나쁜 놈들이라 하면서 우리나라에 들어와 사는 타민족 국가 사람들에겐 '너희나라로 돌아가라'며 매도한다. 히틀러가 그렇게도 순수혈통을 찾고자 했던 것과 지금 우리가 하는 행동들이 뭐가 다른건지.. 과연 순수 혈통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기는 한건가?

나보다 약하다고, 나보다 못난 사람이라 치부하고, 나는 안하면서 다른 이에게 일자리를 빼았겼다고 생각하는 우리들!!! 그런 우리를 보고 자라나는 아이들은 자신의 어떤 행동이 약한 자를 괴롭히는 것인지 모르면서 무의식적으로 타인을 공격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 스스로 생각해본다. 나는 과연 다른 약한 자를, 다른 누군가를 쉽게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인간이 세대를 거쳐가며 꼭 배워야 할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역사의식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다하우에서 온 편지'는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어떻게 역사를 인식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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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인문학 - 세상에서 가장 쉬운 주역 공부 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인문학
김승호 지음 / 다산북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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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완전하고 혼동되는 카오스의 세계에서 질서정연한 코스모스의 세계로 발전하면서 우주의 섭리는 하나의 이치로 정립된다. 인류는 그 세계 속에 무한히 문명이라는 발전 앞에 나란히 같이 하며 세상의 이치를 찾기에 이른다. 그 이치를 파헤치는 학문이 바로 주역이라는 것이다.

 

주역의 첫 번째 범주로 오행이 있다. 이 오행은 특히 인간의 인체에 비유될 때가 많아 한의학에서는 주로 이것을 다뤄 환자를 구분한다고 한다. 밝혀진 바는 없으나 누군가에 의해 발견된 이 오행범주라는 것이 현재까지도 딱히 그 모순점이나 오류가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서양에서는 우리 인체의 각 장기들을 따로따로 구분해서 보는데 비해 동양 특히 한의학에서는 모든 장기가 서로 상호보완 관계 속에서 영양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을 주역 중 오행의 이치로 이해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주역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괘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8괘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그 이치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주역의 8괘 중 특히 6괘는 사람 사는 이치에 해당하며 음양의 조화를 넘어 세상의 모든 사건, 남과 여, 빛과 질서 등의 다양한 이치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이와 함께 나머지 2괘를 포함하여 저자는 8괘를 쉽고 간단히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해 놓고 있어 편하게 주역을 접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팔괘보다 오행이 자주 언급되고 사용되는 첫 번째 이유로는 팔괘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이며 두 번째 이유로는 옛날 사람들이 세상을 3차원이 아닌 2차원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면서 그 당시 그들이 바라보던 세계대로 보는 방식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당시의 사람들의 태도가 서양이나 동양이나 매 한가지였다고 생각되니 제 아무리 대륙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유행은 비슷비슷하게 생겨나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구나 싶다. 결국 오행은 4방에 원점을 합쳐 2차원의 세계로 본 것이고 주역은 8괘를 통해 3차원의 세계인 현실을 알고자 함이니 이만한 과학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 중 3의 의미를 풀어둔 것이 흥미롭다.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 중 하나인 3은 완결을 의미한다. 완결을 의미하는 3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의 세계인 현실이다. 저자의 글을 통해 3의 의미가 좀 더 심오하게 다가온다.

좀 더 나아가 대성괘라는 것도 다루는데 이것은 4차원의 세계이자 범우주적인 세계관을 통해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데 사용하는 것으로 대성괘에 대해 잘 알고자 하는 이들은 이 책을 통해 입문하기 좋을 듯하다.

 

이러한 주역의 이치를 현대 과학자들이 알고 싶어 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다양한 학자들을 소개하고 있는 중에서도 특히 알버트 아인슈타인, 칼 융, 라이프니츠, 닐스보어 등 과학의 최전선에 있는 이들이 주역을 연구하고자 애쓰고 있고 지금도 그렇다고 한다. 특히 이진법을 발견한 라이프니츠는 주역의 음양을 제대로 파악해낸 과학자로 정평이 나있다고 한다. 그는 모든 자연의 사물과 이치는 반드시 그 반대가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갖지 못한 것이 있다면 반드시 남이 가지게 되거나 또는 그 반대일 수도 있다고 했다. 물도 빈 그릇이 있어야 채워지듯이 하나가 부족하면 다른 하나가 채워진다. 이것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처럼 어떤 것이 먼저 시작되었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저절로 그러했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고 우리는 그런 세계 안에서 자연스레 그 이치를 깨달을 뿐이다. 이것이 음양의 조화이다.

 

주역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 의미, 그 뜻을 찾고 올바른 방향으로 우리의 미래를 제시하고 안내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우리가 이러한 주역의 오행, 괘상, 대성괘를 제대로 파악하고 읽어내기만 해도 세상에 대한 이치를 자연스레 터득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놀라웠다. 주역에서 사용하는 문자를 통해 다양한 해석으로 변하는 주역의 의미를 보면서 정말 여러 형태로 응용되는 주역이 신기하기만 했다. 몇 가지는 쉽게 해석이 용이하게 해두어 나 역시 문자를 쉽게 해석할 수 있어 좋았다.

 

사람 사는 방식이 비슷비슷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각자 다른 인생을 살아나간다. 바로 이 오행, 8, 대성괘 등을 통한 주역은 우리의 삶이 범우주적 세계관에 맞춰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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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자를 위한 논문 쓰기 교실
도다야마 가즈히사 지음, 홍병선.김장용 옮김 / 어문학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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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어휴!!!!
글자만 봐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누구나 이 논문 소리만 나와도 벌써 한숨 짓고 있는 게 상상이 된다. 글을 잘쓰는 사람들도 이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 지 당췌 해결점이 떠오르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논문은 소설이나 에세이와도 그 형식이 다르다. 보통의 글쓰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리 잘난 사람들도 일단 논문을 쓸라치면 머리부터 싸매고 본다.

초보자를 위한 '논문쓰기 교실'은 그런 우리들을 위해 아주 세세히 알기 쉽게 정리를 해둔 책이다. 플라톤의 '대화론'처럼 누군가와 대화하듯이 글을 써두어서 그런지 이해하기 쉬운 문체을 사용하여 대화하듯이 풀어나간다. 한석봉이라는 가상의 제자와 함께 논문의 글쓰기 방식을 헤쳐나가는 형식이라 논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학생 또는 어른들이라 해도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요즘은 대학 입학을 하는 수험생, 그보다 어린 친구들도 소논문쓰기 방법을 공부한다. 이들이 이처럼 어릴 때부터 논문쓰기에 공을 들이는 것은 대학에서 요구하는 것도 한 이유겠지만 그들이 쉽게 자신의 논증을 펴나갈 수 있는 학문적 소양을 갖추기 바라는 시대의 요구일 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논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글쓰기의 형태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 주제로 삼은 문제의 물음, 주장, 반박, 논증을 세부적으로 다뤄야 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세세한 자료조사와 근거들을 찾아내야 한다. 뭐 이 정도는 일반적인 상식들이라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 다음이 문제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고 뼈대는 어떻게 만들고 결론은 어떻게 내야 하는걸까? 저자의 말대로 논문은 전체적인 아우트라인이 그 논문의 퀄러티를 결정한다.

세상이 변한다 해도 논문의 형식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논문의 형식은 구닥다리처럼 틀에 박힌 형식이겠구나 할 수 있지만 자신의 주장을 이처럼 객관적으로 풀어날 수 있는 글쓰기는 논문만한 게 없다. 일반적으로 논문은 논증형의 글을 쓸 건지 아니면 보고형의 글을 쓸 건지부터 시작해서 내 주장을 뒷받침할 물음과 근거를 예시로 들고 전체 아우트라인을 만들고 그것을 토대로 초록을 쓰고 원고의 완성도를 위해 단어선택과 참고문헌까지 첨부하면 대개 논문은 완성된다.

논문쓰기의 핵심은 ​대개 초록에서 드러난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 어떤 문제점들이 있는지, 그것을 풀기 위해 내가 어떤 것을 찾아봤는지, 또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의 관점은 무엇인지, 결론은 어떻게 할 것인지가 간단하게 서술되어 있어 참고하기 위해 다른 이의 논문을 찾아볼 때도 가장 많이 보게 되는 것이 바로 초록이다. 이 초록만 잘 써도 논문쓰기가 편해진다.

뼈대는 말할 것도 없다. 모든 글쓰기가 본문에 중점을 두게 마련인데, 특히 논문은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한 다양한 논증들을 제시하게 된다. 이때 가설을 뒷받침 할 수 있는 수많은 논증들 중 무엇이 내 가설을 확실히 받춰줄 수 있는지 알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논증의 핵심 기술이다.

또한 패러그래프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문장이 너무 길어지면 을 읽는 사람이 도대체 이 논문을 쓴 사람의 주장이 무언지 헷갈리게 하는 경우도 생긴다. 최대한 자신이 주장하는게 무엇인지 간단명료하게 적을 수 있어야 한다.

결론은 전체 논문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한 번 더 강조 함으로써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간략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논문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각주와 인용문, 참고문헌의 적절한 사용도이다. 이것들이 내 자신의 주장을 제대로 뒷받침 해주는 핵심이라 해도 무방하다. 내가 이 연구를 왜 했는지 명백해지려면 객관적인 사료들이 충분히 뒷받침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인용되는 사항들이 결코 묵과되서는 안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중요한 것들이라 강조하고 있다시피 논문은 어느 부분 하나도 놓치면 안된다. 수많은 논문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나오고 있다. 어떤 것은 다 베낀 것들일테고 어떤 것은 진짜 두고두고 읽을 만한 자료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내 주장이 내가 살고 있는 현재에 가치가 있는 글로 남을 수 있도록 충분히 문제를 검토하고 연구해봐야할 것이라면 객관적이고 확실한 논증을 하나쯤 생각해볼 만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초보자를 위한 '논문쓰기 교실'은 논문을 쓰는 이들에게 꼭 읽어야할 책이라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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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 희망과 회복력을 되찾기 위한 어느 불안증 환자의 지적 여정
스콧 스토셀 지음, 홍한별 옮김 / 반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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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유난히 겁이 많던 나는 사이렌 소리를 극도로 싫어했다. 그 소리가 꼭 나를 잡아 삼키는 것처럼 내 고막을 두드려댔다. 그럴 때면 엄마는 이불로 나를 뒤집어 씌워주고 사이렌이 끝나기를 같이 기다려 주셨다. 잠시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를 읽으면서 그때의 나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어느샌가 나는 훌쩍 나이를 들었고 그 시절의 어린 아이는 이제 없지만 순간순간 그 기억이 떠오를 때쯤이면 왱왱 울어대던 사이렌 소리가 마치 바로 옆에서 나는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린다. 저자의 강박증 같은 불안감은 아니지만 쉽사리 떨치지 못하는 그의 말과 행동이 나에겐 익숙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공감이 가 측은하기까지 했다. 평생을 따라다니는 불안감 때문에 아무것도 즐기지 못하는 그를 보면서(조절을 한다고 하니 좀 낫지만) 나는 어떻게 하다 이렇게 잊고 살게 되었지 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솔직히 지금도 그때의 나처럼 심하지는 않으나 고소공포증 아니면 비행기이착륙 공포라든지 아니면 순간순간 깜짝깜짝 놀란다든지 하는 그런 불안감 때문에 종종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때도 있긴 하다. 매번 똑같은 과정을 겪으면서도 극복하지 못하는 내 상태가 가끔은 못나 보일 때도 있다.

 

그런 나에 비해 저자나 다른 환자들은 현재까지도 스스로 조절하기 위해 무단히도 애쓰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들은 자신이 이런 불안감을 느끼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오히려 대외적으로 자연스런 행동을 하며 실제 자신의 상태를 숨기며 살려고 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역시 정신과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마치 미치거나 정신이 이상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다는 점이다. 그런 사회적 시선 때문에 쉽게 드러내놓고 병원에 다니는 사람은 없다. 미국도 그런 점에선 비슷한 가보다. 불안감과 스트레스, 공황장애 등 현대병이라 불리는 이 병들이 그렇게 많은 의학이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답보상태라는 게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심지어 저자도 고치지 못하고 있다. 그가 이 책을 쓰는 이유도 자신의 상태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었기 때문이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잘 극복할 수 있는지 책을 쓰면서 알아보고 싶었다는데 있다.

 

불안은 태생적으로 인간과 함께 태어날 수밖에 없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인격적으로 덜 완성된 존재로 태어난다고 한다. 어머니에게서 분리되는 그 순간부터 어쩌면 인간은 불안이라는 공포를 체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우리가 태어남과 동시에 가족, 사회 등 구성원으로의 삶을 살아가게 되면서 인간은 결코 혼자 살 수 없다는 전제를 인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완전한 구성원으로서의 삶을 충족시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 나라는 사람이 완성되기 위해선 늘 누군가의 지속적인 관계망 속에 살아가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성되는 삶을 추구하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싶어 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더 사회에서 분리되는 현상을 맞이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충족하지 못한 심리상태를 맞게 되며 결국 다시 불안감에 빠지게 된다.

 

 

행복한 구성원으로써의 삶을 추구하는데 왜 우리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선천적일 수도 후천적일 수도 있다. 불안은 유전적 요소도 무시하지 못하며 후천적인 사회, 문화 등의 환경적 요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모든 요소들을 수많은 연구 자료들을 예시로 들며 자세하게 자신의 병증을 담담하게 밝히고 있다. 결국 모든 병의 원인은 밝혀낼 수 없지만 그의 마지막 글들에선 이 병에 대해 다른 이의 말을 서두에 쓰며 이렇게 서술한다.

 

 

불안을 피할 수는 없지만 줄일 수는 있다. 불안 조절은 불안을 정상적인 수준으로 줄이고 이 정상적 불안을 자각, 조심성, 삶에 대한 열정을 높이는 자극으로 쓰는 것이다. - 롤로 메이 불안의 의미

 

결국 불안이라는 병증은 완전히 도려낼 수 없고 자기 스스로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동반자로 생각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자신의 병을 예시로 들며 꺼내기 힘든 문제를 글로 풀어낸 저자가 참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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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산다는 것
강영계 지음 / 해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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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우리는 시대가 요구하는 인문학의 근저에서 너도나도 발담구고 혹여 나만 아무것도 몰라 뒤처지진 않을까 불안해하며 그 주위를 맴돈다. 그러면서도 정작 인문학이, 철학이 무언지 정의 내려 볼라치면 나조차도 별로 아는 게 없다. 그저 다른 이들이 써놓았다는 글을 통하거나 그것과 관련된 책을 본다든지 또는 유명한 강의라도 들어본다거나 아니면 주위 사람들과의 대화라도 한다든지 해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통해 내 나름대로 대충 어떤 것이려니 어림짐작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는지 알고 싶고, 현실은 어떤 것인지, 죽음은 또 어떤 것인지, 삶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이 아름답고 추한 것인지, 왜 진정한 행복을 얻으려고 하는지 끊임없이 되묻곤 한다.

 

이 모두가 어쩌면 나 자신의 욕망에서 출발한 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욕망하며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하고 학습할 줄 아는 이성적 동물로 태어났음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인간은 문명과 역사의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그 역할을 수행하려는 이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현대사회를 살면서 자꾸만 불안에 떨고 우울감에 빠지고 권태로운 삶에 절망을 느낀다. 그런 삶 속에서 어떻게 해야 우리가 차분하고 여유롭게 인생을 즐길 수 있는지 이 책 '철학으로 산다는 것'은 스스럼없이 이야기해준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에 주인공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실상은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매일 같은 삶을 살아가고 돈의 욕망을 좇아가며 또 다른 갑질을 위해 위로 올라가려고 발버둥치는 삶을 추구하면서 그런 희망에 미끄러져 곤두박질이라도 치게 되면 모든 것에 좌절과 우울감에 빠져 세상에 분노하고 있다. 이런 반복되는 삶에서 도대체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기독교든 불교든 모두 완전하고 절대적인 나와 지식의 자아를 소망한다. 그 소망의 밑바탕에는 자아가 불변하고 견고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에는 자아를 굳게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나 충동이 깔려있다.’ - 본문 중에서

 

모든 것을 집어삼키면서, 가장 큰 죄악을 범하면서 고통스러운 현상의 형태에서 생기는 것은 욕망이요 분노다. 그 분노가 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가바드기타 III, 37) 본문 중에서

 

욕망은 끝없이 채워도 채워지지 않은 빈 그릇이고 깨진 항아리이다. 우리는 이 그릇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욕망을 불러들인다. 그렇게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선 먼저 다른 이의 욕망이 제거되어야 한다. 그것이 기도를 하고 희망을 기원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결국 종교적인 문제에서까지도 우리는 평등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고의로 누군가를 짓밟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나만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남을 짓밟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이런 우리의 욕망을 잠시 내려놓을 때, 그 욕망을 없앨 때야 비로소 삶의 여유를 즐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참된 자아는 무엇인가?

원래의 신앙의 본질인 참된 자아, 자기 성찰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데아는 불변하며 필연적인 진리를 일컫는다. 그러나 니체의 표현대로 그들의 이데아는 영원불멸을 지향하였기에 허구적일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는 그러한 진리의 근원을 욕망과 충동, 노력을 통해 마주할 수 있으며 프로이트에 의하면 이드와 자아를 극복하여 초자아를 이룰 때 완성된다고 보았다. 결국 인간의 자아는 여러 가지 본능과 문화가 오랜 시간 순환을 거듭하며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고 내려놓을 수 있을 때 완성될 수 있다.

 

그러나 삶이라는 게 결코 이분법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대부분의 우리의 삶은 모든 것이 참과 거짓, 희망과 좌절, 가진 자와 못가진 자로 나뉘어 세상을 살아간다. 그렇기에 아무리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눠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세상의 논리에 휩쓸려 나도 모르게 편승한다.

 

 

저자의 느림과 여유의 삶이란 인간이 과연 이성적인 존재인지, 정말 불변하는 영혼이나 정신을 가진 존재인지, 과연 인간에게 완전하고 절대적인 삶이 가능한지를 다원적인 각도에서 철저하게 물어보며 고뇌하는 삶이다.

 

중간 쯤 책에서 가장 내 마음을 탁 쳤던 말이 있다. 그것은 왜 배우는가이다.

저자는 '왜 배우는가? 답은 간단하다. 배운 것을 잊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다.'하고 했다.

삶의 도처에 우리는 배울 것이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지식으로 온몸에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내 안의 무언가는 비어있어야 또 다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교육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니까..

 

그러나 무조건 외부의 지식만이 참된 것은 아니다. 내 마음과 지식을 하나로 조화롭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참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책에서 드는 철학자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키르케고르를 필두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바움가르텐, 헤겔, 니체,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베르그송, 스피노자, 푸코, 공자, 장자 등등... 그들의 생각들과 이념들이 곳곳에... 비단 철학뿐만이 아니다. 미술, 산업, 전쟁, 역사, 그리고 불교, 기독교, 힌두교 이외에도 여러 종교적 해석과 함께 저자가 추구하는 고독과 번민을 벗어나기 위한 삶을 향해 우리가 가야하는 길을 적어놓고 있다.

 

삶의 다양성에 대한 모든 관점에서 이렇게 해박한 지식으로 읽기 쉽게 만들어 놓아서 그럴까? 두고두고 읽을 만한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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