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문제는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가톨릭 교리는 성직자의 대처 허용하지 않는다. 꼭 신앙생활을 완전하게 하를도록 하기 위해서만 그렇게 정한 것이 아니라, 교회 재산의 분산을 막겠다는 이유도 있었는데, 어쨌거나 성직자에게는 이른바
‘성스러운 결합‘마저도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체사레는 로드리고 보르자에게는 실질적으로 적자지만,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서의 로드리고 보르자에게는 악마의 소행의 결과가 되는 것이다. 선량한 기독교인을 정신적으로 다스리는 ‘신의 지상에서의 대리인‘이 교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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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 후, 로마에 도착한 스페인 특사 디에고 로페츠 데 하로를맞이하기 위해, 동생 간디아공 후안과 새로 매제가 된 페사로백작을 양쪽에 거느리고, 말을 몰아 로마 성밖으로 나가서 특사의 로마 입성을 배행한다.

이렇게 하여 체사레는 종교 행사, 정치, 외교 등의 무대를 옮겨갔다. 

늘 부친인 교황 옆에서, 노련하고 능숙한 부친의 방식을 자세히 견문하게 되었다. 

62살의 교황은 곁에 대령하는 17살의 아들을 돌아보고는 "대주교!" 하고 부르면서, 각국의 요인에게 소개하기도 하고 그들이 가지고 온 정치 문서를 보여주곤 하는 것이었다.

교황이 아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누구나 체사레의 존재에주목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3

3월에 이미 만토바 대사 브로뇨로는 이사벨라 데스테에게 보낸 통신문에서 "발렌시아 대주교는아무래도 주홍색 옷을 입게 될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는 소문이자자합니다"라고 쓰고 있다. 

그 몇 달 후 페라라 대사 보카치오도 같은 뜻의 보고를 페라라 공에게 보내고 있다.
‘주홍색 옷!‘
이것은 추기경을 의미한다. 

주홍색 법의와 빨간 모자는, 로마가톨릭 교회에서 교황 다음가는 지위를 자랑하는 ‘교회의 군주들‘이라 일컬어지는 추기경들의 대명사다. 

‘3중관‘(三重冠)이 교황을 그리고 ‘자주색 옷‘이 황제를 의미하듯이.

모두가 설마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 교황이 체사레를 추기경에 임명할 수야 있을라고. 

추기경단 가운데서는 그런 소문을 액면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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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공포의 일주일 동안 이사벨라는 단 한 통의 편지만을우리에게 남겼다. 

만토바의 아들에게 쓴 편지였다. 

이 편지는 남에게 전해들은 로마 시내와 바티칸에서의 사건 콜론나 궁전의 바리케이드 궁전 밖에서 들려오는 총성과 아녀자들의 비명소리에 관하여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편지 말미에 "오늘도 마늘 바른 땅이 식사의 전부인 모양이다"라는 해학적인 구설이 한 줄 덧붙어 있다. 

이 말에서는 두려움도 감상도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오직철저한 현실주의에 입각한 합리적 정신과 대담한 웃음만이 있을 뿐이다. 

이사벨라의 이 해학적인 한마디 앞에서는 저 도저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다음과 같은 인사도 너무나 허약하게 들린다.

"로마는 단지 기독교도만을 위한 도시는 아닙니다. 

고귀한 정신과뮤즈가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 같은 존재입니다. 

이번의 슬픈 소식을 나는 깊이 애도하는 마음으로 전해들었습니다."(사돌레토에게 보낸 편지)

50세가 넘은 이사벨라 데스테는 그 무렵 생애의 마지막 승부수를던지기 시작했다. 

"만토바 후작은 가치가 적다" (구이차르디니)는 말을 들은 페데리코는 너무나 유명한 어머니 밑에서 세상을 등지고 애인인 라 보스케타의 품 안에서 위안을 찾을 뿐이었기 때문에 전혀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승부 상대는 ‘로마 약탈‘ 이후 이탈리아역사를 뒤덮고 있는 에스파냐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이기도 한카를 5세였다. 

지금은 모든 것이 그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이사벨라는 이 강력한 인물을 적으로 삼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카를 5세의 힘을 냉정하게 계산하고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경우에만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그의 힘을 이용했다.

‘로마 약탈‘로 말미암아 가톨릭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는 세간의비난을 한몸에 뒤집어썼다. 

황제는 교황을 언제까지나 굴욕적인 상태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카를 쪽에서 교황과 화해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야욕을 꺾고 나폴리와 롬바르디아까지 손에 넣은 카를 황제의 승리는 완벽했다. 

1529년 8월 12일, 그는 제노바에도착했다. 

그가 이탈리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그의 오랜 소망은 로마에서 교황이 직접 씌워주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쓰는 것이었다. 

그가 이탈리아에 온 것은 바로 이 숙원을이루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로마 사람들은 2년 전의 그 끔찍한 사건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 점을 고려하여, 로마와 제노바의 중간 지점인 볼로냐가 교황과 황제의 회견 장소로 선정되었다. 

이탈리아 각지에서 귀족들이 속속 볼로냐로 모여들었다. 

이사벨라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녀도 11월에 여느 때처럼 아름다운 시녀들을 데리고 볼로냐로 갔다.

이사벨라의 의도는 다음 몇 가지였다. 우선 만토바 후작의 지위를공작으로 승격시키는 것. 그리고 일이 잘되는 경우, 지금 조카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다스리고 있는 밀라노공국을 그가 병약하다는이유로 만토바에 합병시키는 것. 

그밖에 동생인 알폰소 데스테가 다스리는 페라리공국과 역대 교황들 사이의 불화를 카를 5세의 힘으로해소시키는 것도 그녀의 목적이었다. 

이 때문에 알폰소와 이사벨라는 자주 편지를 교환하면서 방법을 꾸미고 있었다.

간디아 공이 참살되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온 로마에 이어온 이탈리아에 퍼져 나갔다. 

유럽 여러 나라의 대사들도 각기 군주들에게 상세한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하기에 바빴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교황은 마치 고문이라도 당하고 있는듯이 괴로워했다.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자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난 지 닷새 후에 열린 추기경 회의에 그는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가장 견디기 힘든 타격이오."

스페인풍으로 나직이 울리는 교황의 목소리가 잘 이어지지않았다.

"나는 공을 진심으로 사랑했소. 만일 모든 것을 되돌릴 수만있다면…………. 아무리 자기 죄의 업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도처참하게 죽음을 당하다니..……."
그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 추기경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교회 내부를 재편성하고 싶소. 

친족주의를 폐지할 참이오. 

앞으로 교회의 직책은 그에 적합한 사람에게 주어질 것이오."

이렇게 말하는 교황의 어조는 이제 확실했다. 

그 자리에서 추기경 코스타가 개혁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 동안에도 교회 경찰에 의한 수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먼저그날 밤 후안과 함께 행동한 가면의 사나이가 추적되었다. 

그러나 그는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용의자의 이름이 잇달아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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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 문 앞으로 다가왔다. 

그때 이사벨라의 시녀이자 친척이기도 한카밀라 곤차가가 자기 오빠인 알레산드로라고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당장 밧줄이 내려지고, 그는 창문으로 끌어올려졌다.

이 친척의 출현으로 이사벨라는 안심했다. 

알레산드로는 이사라에게 보고했다. 

부르봉 공작은 성벽을 넘다가 죽었다는 것. 

그의시신은 지금 시스티나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는 것. 

교황과 추기경들은 산탄젤로 성으로 달아났다는 것. 

그가 이야기를 마치기도 전에에스파냐 기사인 돈 알폰소 디 코르도나가 도착했다. 

그는 어제 부르봉 공작한테서 이사벨라가 머물고 있는 궁전을 지켜주라는 명령을받았지만,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 지금까지 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사벨라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걱정을 덜었다. 

밤 10시에 마침내페란테가 도착했다. 

이제야 많은 임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사벨라는 3년 전에 에스파냐로 떠난 이후 격조했던 아들을 진심으로 반갑게 맞이했다. 

아들은 그 사이에 늠름한 사나이로 성장해있었다.

그로부터 7일 동안 점령군은 마음껏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추기경들의 저택은 물론이고, 카를 5세의 조카인 로마 주재 포르투갈 대사의 저택도 약탈과 파괴를 면치 못했다. 

페란테는 궁전에 새로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이 ‘로마 약탈‘ (사코 디 로마로 말미암아 전성기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던 로마는 폐허로 변해버렸다. 

해마다 열리는 사육제 때는 화려한 가장행렬로 흥청거리고, 평소에도 사람의 왕래가 끊이지 않던코르소 거리도 이제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으며, 이따금 술에 취해 떼강도로 변한 독일 용병들의 고함과 간간이 이어진다

총성이 다 무너져내린 벽 안에 숨어 있는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래도 해가 떠 있는 동안은 나았다. 

그러나 밤의 어둠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면 사람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아무도 ‘밤‘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려 하지 않았다. ‘밤‘라 노테)이 아니라 ‘죽음‘ 라 모르데)이라고 말한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코르소 거리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있는 콜론나 궁전으로 피난한사람들에게도 ‘밤‘과 ‘죽음‘은 같은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굶주림의고통이 거기에 더해졌다. 

3천 명을 먹이다 보니, 이사벨라가 비축해둔 식료품도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누더기를 걸친 거지들이 얼마안되는 음식을 향해 비쩍 마른 팔을 뻗는 광경은 비참했다. 

그러나포동포동 살찐 하얀 육체를 드러내고,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보석으로 치장하고, 머리를 야단스럽게 땋아올린 귀부인들, 평소에는 대단한 은혜라도 베푸는 듯한 얼굴로 신자들에게 반지 낀 손을 내밀어반지에만 살짝 입을 맞추게 하는 데 익숙한 고위 성직자들, 거만한태도의 궁정 사람들이 빵 한 조각을 향해 앞다투어 달려가는 광경은비참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지옥이었다.

이 비참한 지옥에서 오직 이사벨라 혼자만 초연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도 공포를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다. 

황제인 콜론나 공작이자기 궁전을 숙소로 내주었고, 전사했다고는 하지만 황제군 사령관인 부르봉 공작은 그녀의 조카사위이고, 아들 페란테는 황제군 부대장이다. 

이것으로 그녀의 안전은 충분히 보장되어 있을 터였다. 

그러나 궁전 밖의 정세는 낙관을 허용치 않았다. 

질서를 잃은 독일용병들에게 ‘로마‘라는 말은 부와 재물의 창고를 의미할 뿐이다. 

하물며 일개 부대장에 불과한 곤자가의 이름이 그들에게얼마나 위협을 주겠는가. 

기대하는 쪽이 어리석다. 

이사벨라는 이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우아하고 근사하게만 지어진 로마 시내의궁전들이 약탈에 미친 그들에게 습격당하면 잠시도 버텨내지 못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도 역시 어느 정도는 두려움을 느꼈을것이다.

또한 북방의 야만스러운 루터파 교도들이 어떻게 로마 시내와 로마 예술품을 파괴하고 있는지도 아들 페란테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로마. 이 말만큼 풍요롭고 관능적인 울림을 느끼게 하는 낱말도그리 많지 않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릴 때 어떤 부류의사람들이 갖는 느낌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로마도 지난 2천 년 동안계속 사람들에게 주어왔다.

하물며 이사벨라에게 로마는 반평생 동경하던 도시였다. 

무언가를 타개하기로 결심할 때면 그녀의 발길은 언제나 로마로 향했다.

로마야말로 이름만 들어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나는 유일한 도시였다. 

그 로마가 지금 아름다움의 가치라고는 전혀 모르는독일 용병들의 진흙발에 짓밟히고 있었다. 

교황조차도 로마에서 달아나 오르비에토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종말을 상징하는 이 사코 디 로마‘라는 사건의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있었던 이사벨라가 이 비극을 애도하는 감상적인 말을 남겼다 해도,
누구나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교양과 지성을 갖춘 예술의 이해자이자 후원자로서 그녀의 명성은 더욱 확고해지고,
부르크하르트도 그녀의 말을 그 명저 속에 소개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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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로 에르콜레의 추기경 임명에 반대했지만, 교황은 듣지 않았다.

교황에게는 물론 4만 두카토가 중요했지만, 최악의 사태가 벌어졌을경우에 대비한 포석도 그의 마음 속에는 깔려 있었다. 

만약의 경우에는 에르콜레 추기경이 방패막이가 되어줄 거라는 계산이었다.

5월 5일, 부르봉 공작이 이끄는 독일-에스파냐 연합군이 로마 성벽 밑에 도착했을 무렵, 추기경의 빨간 모자가 콜론나 궁전에 있는이사벨라에게 전해졌다. 

이사벨라는 마침내 소원을 이룬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로마를 떠난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부르봉과 페란테의 진영에 사람을 몰래 보내. 

설령 로마가 점령되더라도 자기가 머물고 있는 궁전의 안전은 보장해달라고 요청했다. 

부르봉 공작은 그녀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장 이사벨라의 명령으로 궁전에 바리케이드를 쌓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사벨라가 있는 곳이 안전하다는 것을눈치챈 사람들이 그녀에게 보호를 요청해왔다. 

이사벨라는 거절하지않았다. 

그것은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공주로 태어난 사람은 평생을 공주로서 살아간다"는 생각, 다시 말하면 윗사람은 언제나 아랫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나온 행위였다. 

콜론나 궁전에속속 피난해온 로마의 상류층과 귀족들은 전부터 이곳에 머물고 있던 사람들을 포함하면 무려 3천 명에 이르렀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사벨라는 조용히 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다렸다.

1527년 5월 5일 밤, 황제군은 몬테마리오를 지나 로마 성벽 바로밑에 진을 쳤다. 

한밤중에 나팔이 울려퍼지고 공격이 시작되었다.

공격 지점은 바티칸 언덕위, 톨리오네 문과 산토스피리토 사이였다. 

성벽이 가장 낮은 지점을 노린 것이다. 

이 소식이 들어왔을 때, 교황은 바티칸 안에 있는 성 베드로 동상앞에 엎드려 있었다. 

그는 바티칸 근위대인 스위스 병사들이 침략군과 맞서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에스파냐제국! 에스파냐제국!"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로마 시가지 위에 울려퍼지는 것을 들었다. 

시종들이 교황을 산탄젤로성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로 인도했다. 

13명의추기경이 교황을 뒤따랐다. 

파올로 조비오는 자신의 진홍빛 망토를교황에게 입히고, 자신은 하얀 저고리로 적군의 눈길을 끌면서 산탄젤로 성의 널다리를 들어올렸다. 

늦게 도착한 늙은 추기경 아르멜리나는 성분이 밖에서 열리지 않도록 문지방 구멍에 고정시키는 격자문이 내려온 뒤, 바구니로 끌어올려졌다. 

또 다른 늙은 추기경 푸치는 공포와 피로로 반쯤 죽은 상태가 되어 창문으로 끌어올려졌다.
 

영국과 프랑스 대사는 그렇게 피신하기를 거부했다가, 나중에 렌초에게 구조되었다.

그러나 바티칸 경비를 맡고 있는 스위스 용병들은 이날의 전투에서 모두 전사했다. 

지금도 로마에 가면 화려한 제복 차림으로 바티칸을 경비하고 있는 스위스 용병들을 볼 수 있다. 

이들에게는 1년에한 번 그들만의 명절이 있는데, 그것은 500년 전 절대적으로 우세한독일-에스파냐 연합군에 맞서서 바티칸을 지키려다 전멸한 선배들의 죽음을 기리는 날이다.

새벽 5시 반에는 싸움이 고비를 넘겼다. 

독일 군대는 피오리 광장에 집결했고, 에스파냐 군대는 나보나 광장에 진을 쳤다. 

페란테 곤차가는 산탄젤로 성으로 통하는 다리를 감시했다. 

이제 폭도로 변한독일 용병과 에스파냐 병사들은 무방비 상태의 시민들을 습격했다.

아녀자도 무차별로 공격했다. 약탈과 폭행과 파괴가 계속되었다. 교회도 제단도 약탈당했다.

오랑주 공작은 바티칸에 숙소를 정했다. 

그 덕에 적어도 교황의도서관과 진귀한 수집품들은 약탈을 모면했다. 

그러나 플랑드르산태피스트리나 라파엘로의 밑그림은 도난당했다. 

그리고 독일 용병들은 라파엘로의 프레스코 벽화가 있는 방들을 마구간으로 사용했다.

황금으로 제작된 콘스탄티누스의 십자가는 산 피에트로(성 베드로)성당의 출입문을 통해 어딘가로 반출되었고, 율리우스 2세의 무덤은도굴당했다. 

무질서하기 짝이 없는 독일 용병들의 만행에는 에스파나 쪽도 놀랐다. 

카를 5세의 판무관인 가티날레는 황제에게 이런 보고서를 보냈다.

"로마는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산 피에트로 성당도, 교황의 궁전도 이제 마구간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오랑주 공작은 병사들의 질서를 되찾으려고 애썼지만, 이제는 폭도로 변해버린 용병들을 어찌할도리가 없습니다. 

독일용병들은 교회에 대해 아무런 존경심도 갖지 않은 루터파 교도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여겨지도록, 그야말로야만인처럼 행동하고 있습니다. 

모든 귀중품과 예술품은 파손되거나도난당했습니다."

콜론나 궁전에서 이사벨라는 이 상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어가는 사람들의 신음소리와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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