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 공포의 일주일 동안 이사벨라는 단 한 통의 편지만을우리에게 남겼다. 

만토바의 아들에게 쓴 편지였다. 

이 편지는 남에게 전해들은 로마 시내와 바티칸에서의 사건 콜론나 궁전의 바리케이드 궁전 밖에서 들려오는 총성과 아녀자들의 비명소리에 관하여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편지 말미에 "오늘도 마늘 바른 땅이 식사의 전부인 모양이다"라는 해학적인 구설이 한 줄 덧붙어 있다. 

이 말에서는 두려움도 감상도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오직철저한 현실주의에 입각한 합리적 정신과 대담한 웃음만이 있을 뿐이다. 

이사벨라의 이 해학적인 한마디 앞에서는 저 도저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의 다음과 같은 인사도 너무나 허약하게 들린다.

"로마는 단지 기독교도만을 위한 도시는 아닙니다. 

고귀한 정신과뮤즈가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 같은 존재입니다. 

이번의 슬픈 소식을 나는 깊이 애도하는 마음으로 전해들었습니다."(사돌레토에게 보낸 편지)

50세가 넘은 이사벨라 데스테는 그 무렵 생애의 마지막 승부수를던지기 시작했다. 

"만토바 후작은 가치가 적다" (구이차르디니)는 말을 들은 페데리코는 너무나 유명한 어머니 밑에서 세상을 등지고 애인인 라 보스케타의 품 안에서 위안을 찾을 뿐이었기 때문에 전혀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의 승부 상대는 ‘로마 약탈‘ 이후 이탈리아역사를 뒤덮고 있는 에스파냐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이기도 한카를 5세였다. 

지금은 모든 것이 그의 의지에 달려 있었다. 

이사벨라는 이 강력한 인물을 적으로 삼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카를 5세의 힘을 냉정하게 계산하고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경우에만 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그의 힘을 이용했다.

‘로마 약탈‘로 말미암아 가톨릭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는 세간의비난을 한몸에 뒤집어썼다. 

황제는 교황을 언제까지나 굴욕적인 상태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카를 쪽에서 교황과 화해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야욕을 꺾고 나폴리와 롬바르디아까지 손에 넣은 카를 황제의 승리는 완벽했다. 

1529년 8월 12일, 그는 제노바에도착했다. 

그가 이탈리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그의 오랜 소망은 로마에서 교황이 직접 씌워주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쓰는 것이었다. 

그가 이탈리아에 온 것은 바로 이 숙원을이루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로마 사람들은 2년 전의 그 끔찍한 사건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 점을 고려하여, 로마와 제노바의 중간 지점인 볼로냐가 교황과 황제의 회견 장소로 선정되었다. 

이탈리아 각지에서 귀족들이 속속 볼로냐로 모여들었다. 

이사벨라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녀도 11월에 여느 때처럼 아름다운 시녀들을 데리고 볼로냐로 갔다.

이사벨라의 의도는 다음 몇 가지였다. 우선 만토바 후작의 지위를공작으로 승격시키는 것. 그리고 일이 잘되는 경우, 지금 조카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다스리고 있는 밀라노공국을 그가 병약하다는이유로 만토바에 합병시키는 것. 

그밖에 동생인 알폰소 데스테가 다스리는 페라리공국과 역대 교황들 사이의 불화를 카를 5세의 힘으로해소시키는 것도 그녀의 목적이었다. 

이 때문에 알폰소와 이사벨라는 자주 편지를 교환하면서 방법을 꾸미고 있었다.

간디아 공이 참살되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온 로마에 이어온 이탈리아에 퍼져 나갔다. 

유럽 여러 나라의 대사들도 각기 군주들에게 상세한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하기에 바빴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교황은 마치 고문이라도 당하고 있는듯이 괴로워했다.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자지 않았다. 

사건이 일어난 지 닷새 후에 열린 추기경 회의에 그는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가장 견디기 힘든 타격이오."

스페인풍으로 나직이 울리는 교황의 목소리가 잘 이어지지않았다.

"나는 공을 진심으로 사랑했소. 만일 모든 것을 되돌릴 수만있다면…………. 아무리 자기 죄의 업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도처참하게 죽음을 당하다니..……."
그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 추기경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교회 내부를 재편성하고 싶소. 

친족주의를 폐지할 참이오. 

앞으로 교회의 직책은 그에 적합한 사람에게 주어질 것이오."

이렇게 말하는 교황의 어조는 이제 확실했다. 

그 자리에서 추기경 코스타가 개혁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 동안에도 교회 경찰에 의한 수사가 계속되고 있었다. 

먼저그날 밤 후안과 함께 행동한 가면의 사나이가 추적되었다. 

그러나 그는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용의자의 이름이 잇달아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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