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전 문 앞으로 다가왔다. 

그때 이사벨라의 시녀이자 친척이기도 한카밀라 곤차가가 자기 오빠인 알레산드로라고 기쁨의 환성을 질렀다. 

당장 밧줄이 내려지고, 그는 창문으로 끌어올려졌다.

이 친척의 출현으로 이사벨라는 안심했다. 

알레산드로는 이사라에게 보고했다. 

부르봉 공작은 성벽을 넘다가 죽었다는 것. 

그의시신은 지금 시스티나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는 것. 

교황과 추기경들은 산탄젤로 성으로 달아났다는 것. 

그가 이야기를 마치기도 전에에스파냐 기사인 돈 알폰소 디 코르도나가 도착했다. 

그는 어제 부르봉 공작한테서 이사벨라가 머물고 있는 궁전을 지켜주라는 명령을받았지만,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 지금까지 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사벨라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걱정을 덜었다. 

밤 10시에 마침내페란테가 도착했다. 

이제야 많은 임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사벨라는 3년 전에 에스파냐로 떠난 이후 격조했던 아들을 진심으로 반갑게 맞이했다. 

아들은 그 사이에 늠름한 사나이로 성장해있었다.

그로부터 7일 동안 점령군은 마음껏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추기경들의 저택은 물론이고, 카를 5세의 조카인 로마 주재 포르투갈 대사의 저택도 약탈과 파괴를 면치 못했다. 

페란테는 궁전에 새로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이 ‘로마 약탈‘ (사코 디 로마로 말미암아 전성기 르네상스의 중심지였던 로마는 폐허로 변해버렸다. 

해마다 열리는 사육제 때는 화려한 가장행렬로 흥청거리고, 평소에도 사람의 왕래가 끊이지 않던코르소 거리도 이제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으며, 이따금 술에 취해 떼강도로 변한 독일 용병들의 고함과 간간이 이어진다

총성이 다 무너져내린 벽 안에 숨어 있는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래도 해가 떠 있는 동안은 나았다. 

그러나 밤의 어둠이 모든 것을 덮어버리면 사람들의 공포는 극에 달했다. 

아무도 ‘밤‘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려 하지 않았다. ‘밤‘라 노테)이 아니라 ‘죽음‘ 라 모르데)이라고 말한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코르소 거리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있는 콜론나 궁전으로 피난한사람들에게도 ‘밤‘과 ‘죽음‘은 같은 느낌을 주었다. 

게다가 굶주림의고통이 거기에 더해졌다. 

3천 명을 먹이다 보니, 이사벨라가 비축해둔 식료품도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누더기를 걸친 거지들이 얼마안되는 음식을 향해 비쩍 마른 팔을 뻗는 광경은 비참했다. 

그러나포동포동 살찐 하얀 육체를 드러내고,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보석으로 치장하고, 머리를 야단스럽게 땋아올린 귀부인들, 평소에는 대단한 은혜라도 베푸는 듯한 얼굴로 신자들에게 반지 낀 손을 내밀어반지에만 살짝 입을 맞추게 하는 데 익숙한 고위 성직자들, 거만한태도의 궁정 사람들이 빵 한 조각을 향해 앞다투어 달려가는 광경은비참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지옥이었다.

이 비참한 지옥에서 오직 이사벨라 혼자만 초연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도 공포를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다. 

황제인 콜론나 공작이자기 궁전을 숙소로 내주었고, 전사했다고는 하지만 황제군 사령관인 부르봉 공작은 그녀의 조카사위이고, 아들 페란테는 황제군 부대장이다. 

이것으로 그녀의 안전은 충분히 보장되어 있을 터였다. 

그러나 궁전 밖의 정세는 낙관을 허용치 않았다. 

질서를 잃은 독일용병들에게 ‘로마‘라는 말은 부와 재물의 창고를 의미할 뿐이다. 

하물며 일개 부대장에 불과한 곤자가의 이름이 그들에게얼마나 위협을 주겠는가. 

기대하는 쪽이 어리석다. 

이사벨라는 이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우아하고 근사하게만 지어진 로마 시내의궁전들이 약탈에 미친 그들에게 습격당하면 잠시도 버텨내지 못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도 역시 어느 정도는 두려움을 느꼈을것이다.

또한 북방의 야만스러운 루터파 교도들이 어떻게 로마 시내와 로마 예술품을 파괴하고 있는지도 아들 페란테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로마. 이 말만큼 풍요롭고 관능적인 울림을 느끼게 하는 낱말도그리 많지 않다.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릴 때 어떤 부류의사람들이 갖는 느낌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로마도 지난 2천 년 동안계속 사람들에게 주어왔다.

하물며 이사벨라에게 로마는 반평생 동경하던 도시였다. 

무언가를 타개하기로 결심할 때면 그녀의 발길은 언제나 로마로 향했다.

로마야말로 이름만 들어도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나는 유일한 도시였다. 

그 로마가 지금 아름다움의 가치라고는 전혀 모르는독일 용병들의 진흙발에 짓밟히고 있었다. 

교황조차도 로마에서 달아나 오르비에토로 피난할 수밖에 없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종말을 상징하는 이 사코 디 로마‘라는 사건의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있었던 이사벨라가 이 비극을 애도하는 감상적인 말을 남겼다 해도,
누구나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교양과 지성을 갖춘 예술의 이해자이자 후원자로서 그녀의 명성은 더욱 확고해지고,
부르크하르트도 그녀의 말을 그 명저 속에 소개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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