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배우, 좋은 연기란 무엇일까? 좋아하는 영화도 좋아하는 배우도 많지만 정작 그 영화와 배우들을 좋아하는 이유, 배우들의 연기가 빛나는 이유를 하나도 알지 못하는 영린이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도서 <배우에 관한 역설>
<배우에 관한 역설>은 18세기 프랑스의 예술 이론가인 드니 디드로가 주장하는 ‘좋은 배우가 갖춰야 할 시선’과 조건을 두 인물의 대화체로 녹여낸 책으로, 현대 배우론의 근간이라고도 전해진다. 고전의 축에 끼는 오래된 이론이지만, 그의 이론이 현대를 살아가는 독자들도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배우’라는 직업의 의미와 바탕은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 되려나.
내가 생각하는 ‘좋은 배우’란 여러 얼굴로 극의 몰입도를 높여주는 사람이다. 카메라 앞에서든 무대 위에서든 보는 이를 그 세계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가진 배우 말이다. 그러려면 일단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찰떡같이 소화해내는 연기력이 필요한데, 이 연기력이란 대체 무엇일까.
예전엔 연기란 것은 감정을 표출해내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와 여러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을 경험해보고 배우들을 관찰하다 보니 ‘연기’라는 건 예상보다 더 어렵고 복잡한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내가 맡은 캐릭터의 감정을 끌어내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연기와 해당 캐릭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함께하는 이와 템포를 맞추고, 캐릭터와 나를 구분할 줄 알면서도 나만의 색깔을 만들어내는 정확한 선을 그을 줄 알아야 하며, 촬영과 무대 환경을 모두 관찰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 이 모든 게 ‘연기’다.
<배우에 관한 역설>의 저자 드니 디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시시하고 별 볼 일 없게 연기하는 확실한 방법은 자기 자신의 성격을 연기하는 것이라고요.
배우는 연기를 하는 사람이다. 캐릭터가 되어버린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닌, 자신의 시선으로 관찰한 캐릭터를 영리하게 표현해내고 캐릭터와 자신을 정확히 분리할 줄 알아야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뛰어난 연기력을 뽐내는 배우에게 ‘메소드 연기’를 소화하는 배우라며 칭찬하던 때가 있었다. 메소드 연기란 극중 캐릭터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극사실주의 기법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이 ‘메소드 연기’가 상당히 무거운 단어라고 생각한다. 캐릭터가 배우가 되고 배우가 캐릭터가 된다면 연기를 하지 않을 때마저도 그것에 빠져있을 배우가 입을 대미지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긴 하지만 최민식 배우님이 영화 <악마를 보았다>의 살인마 역할을 촬영하고 있을 때, 자신에게 친근감을 표현하며 반말을 하는 아저씨를 보며 “이 새끼 왜 반말을 하지?”라는 생각을 한 자신에게 섬뜩함을 느꼈다는 메소드 연기의 부작용(?) 을 듣고는 이 연기에 더욱 거리감을 두게 되었다.
자신과 캐릭터, 연기와 현실을 구분하지 않고 푹 빠져 살아가는 건 ‘소름 돋는 연기’라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자신을 심하게 깎아내는 일이기에 무작정 칭찬할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 내 결론이다.
무대에서의 진실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시인이 상상해내고 배우가 종종 과장하는 어떤 이상적 모델과 행동, 말, 표정, 목소리, 움직임, 동작들의 일치입니다. 놀라운 일이죠.
천부적인 재능도 중요하겠지만, 뛰어난 배우가 되기 위해선 반복된 연습과 경험이 필요하다. 감정을 쏟아내는 것만으로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배우는 이성과 감성을 모두 갖춰야 한다. 드니 디드로는 훌륭한 배우를 ‘냉철하고 침착한 관찰자’라고 칭한다. 무대든 영화든, 그것이 실화든 아니든 어찌 됐든 연기는 현실이 아니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선 엄청난 계획과 계산이 필요하다. 무대를 위해 대본, 조명, 음향, 배우들의 동선, 소품 등 여러 조건들을 준비해야 하며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경우엔 위의 조건들이 갖춰진 후에도 여러 개의 컷을 촬영하기 위해 배우들은 같은 상황을 수십 번씩 연기한다.
작품을 감상하는 순간엔 그것이 현실처럼 느껴질진 몰라도 모든 건 철저한 계산 아래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다. 배우는 그 커다란 계획의 중심에 서서 이성과 감성을 적절히 섞어가며 일정 거리를 두고 상황을 관찰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냉철하고 침착한 관찰자로서, 예리한 비평가로서 말이다. 문득 든 생각이지만 냉철한 관찰과 이성과 감성의 구분은 연기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꽤 중요한 요건이 아닐까 싶다.
“천부적인 배우로 태어난 사람이라 해도 그의 예술 안에서 오랜 경험을 획득한 뒤, 격양된 정열이 잔잔해지고 머리가 차분해진 때에만 탁월해질 수 있지요.”
“감성적인 사람은 자연의 충동에 복종하고 꼭 심장의 외침 소리만을 낼 수 있을 뿐이지요. 그가 이 마음의 외침을 완화시키거나 강화시키는 순간, 비로소 그는 더 이상 그 자신이 아니라 연기를 하는 배우가 되는 겁니다.”
배우는 끊임없이 배우고, 연습하고 관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만일 경찰 캐릭터를 연기한다면 그 직업에 대해 배우고 관찰해야 하며 피아니스트를 연기한다면 직접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무작정 ‘이 직업을 가진 사람은,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은 이럴 거야’하고 단정 짓고 연기하는 게 아닌 실존하는 인물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듣고, 캐릭터가 가진 특징들을 흡수하며 자신만의 색으로 표현해야 한다. 관찰과 이해 그리고 끝없는 연습과 강화. 자신과 연기의 세계를 정확히 구분 지을 수 있는 이성과 관찰한 결과를 밖으로 꺼내놓을 수 있는 감수성. 말만 들어도 벅차고 무겁지만 이 모든 걸 해내는 훌륭한 배우들이 분명히 있긴 있다. 아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이들이 꽤 많다.
언젠가부터 ‘배우는 정말 영리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캐릭터에 맞춰 얼굴을 바꿔야 하고 그들을 연기하고, 매체에 따라 주변을 파악해야 하고, 캐릭터가 아닌 자신을 유지하는 일까지 해내야 하니 이 얼마나 복합적이고 어려운 일인가. 거기에 특정 매체를 벗어나면 캐릭터가 아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순간까지 있으니 화려하지만 참으로 힘든 직업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영화와 배우들을 좋아하기 전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배우들의 연기를 향한 노력과 그것을 하나의 예술로 완성해내는 사람들의 손길을 알고 나니 그 배우들을, 그들의 작품을 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배우에 관한 역설>이라는 책과 드니 디드로의 연기론이 궁금했던 건 내가 좋아하는 배우와 그들의 연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애정 때문이었다. 배우들의 이야기와 연기를 대하는 자세를 담은 글을 여러 번 읽으며 혼자 생각했다. 이들이 생각하는 연기란 이런 것이고 좋은 연기란 이런 것일까? 혼자 생각하고 혼자 궁금해 했다. 그러던 중 눈에 띈 이 책에 담긴 드니 디드로의 말은 내 생각을 더욱 깊고 진지하게 바꿔주었다. 대략 이럴 거야~하고 상상만 했던 연기에 대해 조금은 더 다가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물론 내가 이 연기론을 읽고 복기한다고 해서 연기를 잘하게 된다거나 연기자가 될 수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한 꼬집만큼이라도 더 생각해 보게 됐으니, 이제 내 배우를, 내 배우가 보여주는 연기를 더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