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홈카페
양수민.이현경 지음 / 테이스트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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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동물권과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며 주목받게 된 식습관비건과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자연스레 많은 이들과 가까워진 키워드 홈카페최근 가장 핫한 키워드인 두 가지를 한곳에 모아 엮어낸 책 <비건 홈카페>. 이 책은 아주 친절하다다소 멀거나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비건의 정확한 정의부터 비건 재료비건을 지속하는 방법 등으로 이뤄진 프롤로그를 지나 가벼운 식사와 간식을 거쳐 든든한 식사와 케이크까지천천히 분야를 넓혀가는 챕터 구성이 인상적이다.

 

부담스럽지 않게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간식들과 든든한 한 끼 메뉴들을 하나하나 훑다 보면 비건이란 게 생각만큼 어려운 건 아니었구나?”싶어 도전 의식이 차오르는 느낌이 든다당장 오늘 아침에 유당이 들어간 우유 대신 마신 아몬드 밀크도 비건 재료였다니적어도 비건 간식(?) 한 가지는 실천하고 있었다는 뿌듯함이 들었다면 너무 오버인 걸까.

 

비건이란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푸릇푸릇 한 샐러드였다그리고 비건 식습관을 실천하려면 육식과 밀가루유제품으로 점칠된 식습관을 당장 모두 버려야 할 것 같다는 부담감에 쉽게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었다하지만 <비건 홈카페>를 보면서 내가 비건 식습관에 꽤나 무지했다는 것을 확 실감했다비건 식습관을 유지하면서도 피넛 버터 초콜릿 쿠키와 무화과 메이플 스콘..같은 것을타르트와 파운드케이크크렘 브륄레 같은 것을 먹을 수 있다니죄책감을 덜어내면서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들을 먹을 수 있다니정말이지 신세계를 경험한듯한 기분이었다.

 

왠지 비건이라 하면 동물성 재료를 모두 걷어낸 후 남은 풀만 먹어야 하는 식습관이 아닌가생각하곤 했는데, 동물성 재료가 아니면서도 그것을 대체할 만한 다양한 식재료가 많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비건 식습관의 단계가 비건베지테리언프루테리언락토베지테리언오보베지테리언 등 9단계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 또한 처음 알았다사뭇 놀라웠다그리고 곡물견과, 씨부드럽거나 단단한 채소버섯과일가공품과 식물성 우유식초까지내가 생각했던 비건 음식들은 이 세계의 아주 작은 일부였을 뿐이었다.

 

첫 챕터 <가벼운 식사>와 세 번째 챕터 <든든한 식사>를 넘기며 재료들이 본연의 색을 뽐내고 있는 모습과 평소엔 풀떼기라 부르며 입에도 잘 대지 않았던 것들이 이렇게 맛깔스러운 모습으로 변할 수 있음에 감탄했다두 번째 챕터 <출출할 때 과자와 빵>, 네 번째 챕터 <달콤한 디저트>읽으며 오일 한 방울 들어가지 않는 비건 과자와 빵도 일반 과자처럼 만들기 어렵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고 담백한 재료들에 나도 모르게 입맛을 한번 다셨다만약 이런 디저트 메뉴들이 놓인 비건 빵집을 지나칠 일이 생긴다면 무조건꼭 한 아름 담아오리라이 간식들이라면 죄책감 같은 것 없이 2인분쯤은 먹어도 되지 않을까-하는 철없는 생각과 함께이 중에서도 조금 어려운 메뉴가 하나 있었는데그건 바로 주키니 파프리카 머핀이었다이 메뉴는 내 입에 들이민다 해도 조금.. 적응하기 힘들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챕터엔 비건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요리 기초 수업이 있다많은 요리에 쓰일 수 있는 채수부터 어디든 뿌려먹고 그대로 굳혀 먹을 수도 있는 건강한 그래놀라 만들기첨가물 없는 건강한 토마토 페이스트 만들기 등 친절한 설명과 각 단계에 해당하는 사진을 꼼꼼하게 기록해낸 양수민이현경 작가의 비법 노트 같은 챕터다꼭 비건식을 시작하지 않더라도 한 번쯤 눈에 익혀두면 언젠가 딱멋지게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비건 식습관은 어려운 것이다.” “비건 빵은 퍽퍽하고 빵답지 않다.” “비건 요리는 맛없다.”라는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책을 꼭 추천하고 싶다당장 빵을 굽고 요리를 차려내지 않아도 좋다비건의 정직한 뜻과 이 같은 식습관을 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비건이 SNS 속 한 시대의 유행이나 반짝하고 끝나는 다이어트를 위한 단기적 콘텐츠로 머무는 것이 아닌 맛있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비거니즘으로 자리 잡길 바라는 양수민이현경 작가의 바람과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 담긴 <비건 홈카페>를 읽으며 비거니즘과 건강한 음식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가져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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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밥둘리 가정식
박지연 지음 / 테이스트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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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밥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몇 가지 음식들이 있다. 엄마가 끓여준 돼지고기 김치찌개, 얇은 계란말이, 달달한 맛이 조금 강한 멸치볶음, 미역국과 장조림, 슴슴한 김치볶음밥, 꾸덕꾸덕한 카레.. 집 밥이라는 단어와 다양한 추억을 품은 음식들은 언제나 포근하고 담백한 냄새를 풍기며 내 위장과 마음을 양껏 보듬어준다.

 

<집밥둘리 가정식>은 식당을 하시던 할머니의 음식을 기억하고 사랑하며, 따뜻한 한 끼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투자한 저자 박지연 님의 기록이 담긴 책이다. 이 책엔 어렴풋이 남은 어머니의 음식과 유년시절 대부분을 함께했던 할머니의 손맛을 그대로 이어받은 그녀가 차려낸 소박하지만 모자람 없이 충분한 한 끼로 가득하다.

 

새벽에 잠이 안 와 책 한 권 훑어볼까?” 하고 정말 생각 없이 이 책을 집어 들었는데, 펼쳐놓고 10분도 못 봤다. 이 맛있는 한 끼 사진을 보는게 너무 괴로워서. 아는 맛이 정말 위험한 맛이라고. 큼직하고 쨍쨍하게 인쇄된 음식 사진들을 보는 순간 그 음식의 맛이 상상되는 바람에 조금 더 보다가는 폭주하겠다 싶어 책을 덮었다. 애초에 각잡고 찍은 사진들이니 내가 만든, 엄마가 차려준 100% 자연 그대로의 식탁 위 음식들과 비주얼은 조금 다르지만 익숙한 메뉴들이 많아 보자마자 식욕이 쑥쑥 수직 상승하는 기분이었다.


 

<집밥둘리 가정식>에 담긴 메뉴는 총 71가지다. 첫 챕터에는 익숙하지만 언제 먹어도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워낼 수 있는 돼지고기 김치찜, 두부조림, 소시지 채소볶음, 장조림과 같은 한국인의 밥도둑 반찬들이, 두 번째 챕터엔 돼지고기 김치 솥밥, 마파두부 덮밥, 강된장 덮밥, 장칼국수 등 냄비에 담아내거나 따뜻한 밥 위에 얹어먹을 수 있는 국물 메뉴들이 담겨있다. 세 번째 챕터엔 미국식 오믈렛, 해물크림 리소토, 새우팟타이 등 어렵지 않게 집에서도 외식하는 기분을 낼 수 있는 메뉴들이, , 다섯 번째 챕터엔 달걀 샌드위치, 콥 샐러드, 토마토 조개탕, 기름떡볶이 등 나들이와 무겁지 않은 안주류 메뉴가 주를 이루고 있다.

 

각 챕터의 시작 페이지마다 박지연 작가의 짧은 감상과 각 음식의 페이지마다 적혀있는 팁과 그녀의 추억들을 함께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달걀말이 레시피 위엔 취향에 따라 재료를 더할 수 있는 누구나 좋아하는 메뉴라는 칭찬이, 콥 샐러드의 레시피 위엔 음식의 시작점이, 옛날 샐러드나 소시지 채소볶음 레시피 위엔 어릴 적 결혼식장에 갔던 기억과 대학 시절 친구들과의 기억이 함께 적혀있다. 단순한 레시피 설명만이 아닌 자신의 마음과 추억을 적절히 섞어 엮어낸 그녀의 정성과 애정이 음식에 감칠맛을 더한다.


 

각자의 매력이 있는 5개의 챕터 중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건 <밥도둑 반찬> 챕터였다. 첫 메뉴로 등장하는 달걀말이와 장조림이 특히 눈에 들어왔는데, 이 메뉴들을 좋아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달걀말이와 장조림을 처음 직접 만들던 때가 나에게 강한 기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집 식탁에 올라올 땐 몰랐는데 달걀말이란 게 참 어려운 거였다.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쭉- 가족들과 함께 살았고, 맞벌이 가정이었지만 어머니의 노력, 주변 어른들의 관심 덕분에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혼자 밥을 차려먹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식탁 위에 올라오는 기본 반찬이라 불리는 것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는데, 자취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제대로 된 한 끼를 차려보려고 하니 그게 참 어려웠다.

 

고기반찬이나 명절 음식들이 어렵다는 건 알았지만 계란 프라이 예쁘게 부치기, 계란 물 말기..같은 것도 쉽지 않다는 걸 아주 늦게 알았다. 간단해 보이지만 밥 한 그릇을 뚝딱 훔쳐 간다며 좋아했던 메뉴들도 알고 보면 모두 누군가의 정성이고 시간이었다.


 

집 밥이란 건 참 신기한 것 같다. 매일 먹을 땐 소중한 걸 모르는데 멀어지면 또 가장 그리운 게 집 밥이다. 배달음식은 한번 끊으면 그럭저럭 생각이 안 나는데 집 밥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끊기면 하루하루 더 그리워진다. 음식점에서 배달, 서빙되는 음식들도 누군가의 정성이 들어간 음식이겠지만 어릴 적부터 함께했던, 수많은 추억이 담긴 집 밥을 이길 메뉴는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 밥상과 닮은 소소하고 따뜻한 한 끼가 가득한 <집밥둘리 가정식>. 오늘 식탁이 고민된다면, 습관처럼 받기만 했던 한상을 직접 차리거나 가족에게 선물하고 싶은데 어떤 것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이 책의 첫 챕터부터 함께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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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홈카페 솜솜이의 홈카페
솜솜이(박성미) 지음 / 테이스트북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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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하고 예쁜 디저트와 그와 궁합이 잘 맞는 청량하거나 깔끔한 음료수그리고 편안한 노래들이 자연스레 흘러가는 여유로운 분위기의 카페아 말만 들어도 행복하다하지만 이 작고 확실한 행복은 팬데믹 시대와 함께 바사삭 부서져버렸다이런 카페에서의 나날들을 모두 포기하게 만든 역병.. 정말 밉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카페와 디저트를 포함한 외식외출에 대한 그리움을 절실하게 느끼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요즘이다그러면서 자연스레 집 밥배달 또는 집에서 할 수 있는 취미생활에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핫한 키워드를 꼽으라면 바로 요리와 베이킹이 아닐까 싶다식사와 음식에 진심인 우리인데음식을 만들며 성취감을 얻고자랑도 할 수 있고끼니도 해결할 수 있다니이만큼 뿌듯한 취미가 또 있을까?

 

혹시나 홈 베이킹과 홈 카페에 관심은 있고, SNS 상에 넘치는 홈카페홈베이킹 사진을 보는 건 좋지만 왠지 내가 도전하면 안될 것 같은똥 손 인증만 야무지게 하고 끝날 것 같은 불안감에 선뜻 도전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오픈홈카페>. 오염에 강한 단단하고 매끈한 하드커버와 튼튼한 제본 상태각 메뉴에 대한 친절한 설명과 깨알 같은 팁그리고 깔끔하게 플레이팅된 디저트 사진까지부담스럽지 않은 심플한 구성이 퍽 매력적이다.


 

<오픈홈카페>는 저자 솜솜이(박성미)님이 애정을 담아 만든 디저트와 간단하고 멋들어지는 간단식에 대한 레시피와 사진을 꽉꽉 눌러 담은 아주 야무진 책이다홈베이킹을 시작하기 전 갖춰야 할 기본적인 도구가장 많이 쓰이는 재료들의 특징 등 베이킹의 기초부터 담백한 식사빵당장 사진을 찍어 친구에게 자랑하고 싶은 예쁜 브런치와 디저트 메뉴그리고 익숙한듯하지만 조금 특별한 메뉴들까지깔끔한 식탁 위에 각각의 개성에 맞게 플레이팅된 디저트들을 보고 있자면 당장 만들....어보진 못하고 당장 주문해 포크를 찔러 넣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홈카페홈베이킹이 단어들은 어릴 적부터 내가 꿈꿔온 로망의 집합체다홈 카페홈 베이킹이라니 이 얼마나 낭만적이고 멋진 단어인가어른이 되면자취를 하게 되면 오븐으로 쿠키와 빵을 굽고 쓰지만 깊고 부드러운 맛의 커피를 마시며 주말을 보낼 거라 다짐한 게 몇 년이던가과거의 나는 비용은 둘째치고 내가 극심한 요리 똥 손이란걸 망각하고 있었다어른이 된 후 도전했던 베이킹들은 대부분 의도와 다르게 마무리됐다직접 반죽을 만들어 구워낸 머핀은 단단한 야구공 같았고 그나마 내가 성공했던 베이킹은 모든 게 다 갖춰져 계란만 섞으면 되는 쿠키 믹스나 핫케이크 믹스 같은 것 밖에 없었다노력해도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금방 좁히기 힘든 일이 있는데나에겐 음식을 만드는 일이 딱 그렇다.

 


베이킹 책을 두고 이게 무슨 소장 욕구 떨어지는 말이냐 싶겠지만그럼에도 나는 이 책이 마음에 든다우선 이 책엔 맛있는 것들이 가득하고 그것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려는 저자의 마음이 디저트 하나하나에 부드럽게 녹아있는 것이 느껴진다솔직히 말하자면 나 같은 요리 똥 손이 이 책을 소장하게 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멋진 홈카페를 차리는 건 힘들다.

 

나에게 이 책은 뭐랄까지금 당장 해볼 실습서라기보단 백과사전에 가깝다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항상 말씀하셨다. “책을 읽을 때 단 한 줄이라도 얻었으면 그걸로 된 거다.”라고이 책을 읽으며 베이킹에 대한 기본 지식을 얻었으니 난 그걸로 만족한다매일 헷갈렸던 밀가루 종류를 구분할 줄 아는 능력이 생겼으니 그걸로 만족한다아직은 침만 삼키며 밝은 햇살 아래 빛나고 있는 디저트들을 지켜보고만 있지만 언젠가는 이 책을 집어 들고 오븐 앞에 설 날이 오지 않을까이렇게 누군가의 흔적을 따라가며 내 낭만의 세계에 한걸음 더 다가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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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
설재인 지음 / 밝은세상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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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엄마, 그거 알아? 나는 남자로 태어나지 않은 걸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


등산 후 엄마와 마주 앉아 현실로 이뤄질 가능성 없는 만약에~를 늘어놓으며 후루룩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전완근이 멋진 여자 엄주영. 그는 연달아 막걸리와 흑미밥을 품고 무거워진 속을 비우기 위해 화장실에 갔다가 자신이 생각했던 만약에가 이뤄진 평행 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남자로 태어난 엄주영을 마주한다. 그리고 남자 엄주영 앞에 앉아있는, 원래 세계에서도, 평행 세계에서도 여전히 똑같은 엄마와 아빠, 또 다른 문제로 마음 졸이고 있는 여자들을 만나게 된다.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은 평행 세계에 들어간 엄주영이 그 안에서도 여전히 고통 받는 여자들을 도우면서 원래 세계에서 저지른 실수를 인지하고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과 차후엔 포기했던 꿈을 향해 다시 한 걸음 내딛게 되는 과정을 담은 엄주영의 성장물이자 여자들의 든든한 연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너를 위해서라면 노브라의 머쓱함 따위도 별거 아니라는 듯 당당하게 속옷을 벗어재끼는 그들의 단단하고 숙성된 우정에 박수가 절로 나왔다.

 

여자들은 자연스럽게 집안에 머물며 조용한 피해자가 되길 바라는 세상에서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의 여자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용기를 낸다. 때로는 강력한 전사의 모습을, 때로는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토닥이는 옆집 언니 같은 모습을 보여주며 같은 문제로 아파하는 나와 같은 여자들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나의 마음과 시간을 투자한다.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의 주인공 엄주영이 살아온 세계와 평행 세계에서 남자란, 아버지란 항상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거나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인물이다. 엄마는 엄마라 부르고 아빠는 아버지라 부르는 주영의 말버릇에서 아빠에 대한 거리감과 그가 은연중에 주장해왔을 권위가 느껴진다.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집안의 가장 엄용민씨 밑에서 엄마 배중숙씨는 딸과 가정을 위해 옷 한벌 맘대로 사 입지 못했고, 남편이 어떤 잘못을 해도 아빠니까, 가장이니까라는 말로 그를 감싸기 급급하다. 딸 엄주영은 아빠의 폭력적인 연습 강요에 질려 좋아하던 탁구를 포기하고 어른이 된 후 유도를 배운다. 꾸준한 운동 덕에 아름답게 발달한 전완근을 그는 아빠의 폭력성을 그대로 물려받지 않은 딸이라, 남자에 비해 선천적으로 힘이 약한 여자라 (힘이 강한 남자인 아빠처럼) 사람들을 괴롭힐 수 없어 다행이라며 농담 몇 마디를 던진다. 뼈가 든 농담이지만.

 

농담 아닌 농담이 한바탕 지나가고 여자 엄주영이 했던 남자가 아니라 다행이라는 말이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정말 다행이다 싶은 느낌이 확 드는 평행 세계가 등장한다. 같은 아빠, 엄마 밑에서 남자로 태어나 자라온 평행 세계의 엄주영은 여자 엄주영이 농담 삼아 던졌던 내가 남자였으면 큰일 났을일들을 그대로 행하고 있다. 엄주영은 남자 엄주영의 비뚤어진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 같은 환경에서 자랐고, 가정 폭력이라는 같은 트라우마를 가진 인물인데 성별만 다르단 이유로, 잘못된 친구를 만났단 이유로 이리도 다른 사람이 되다니. 남자 엄주영은 학창 시절부터 동창생들을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하며,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모아 불법적인 일에 투입시키는. 그야말로 동네 최고 양아치, 범법자, 망나니 그 자체다.

 

차라리 그냥 평행 세계에 사는 쓰레기 엄주영이었으면 크게 상관을 안 할 텐데, 남자 엄주영 옆엔 집을 벗어나겠다는 목표로 결혼을 외치는 어린 여자아이 연재와 여기서도 여전히 집안 남자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엄마 배중숙씨가 있었고, 남자 엄주영과 이창민 패거리에게 괴롭힘당하고 아빠의 인생까지 빼앗겨버린 베스트 프렌드 은빈도 있었다.


 

엄주영은 내가 살아온 세계와 비슷한 아픔을 안고 있는 이 여자들을 구하리라! 다짐한다. 본인도 똑같이 힘들어봐서 얼마나 아픈지 아는데, 내 세계와 이 세계의 여자들 모두가 아프고 힘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엄주영은 지키고 싶은, 아끼는 인물들에게 튼튼한 전완근을 내보이며 묻는다. “제 전완근 한번 눌러보실래요?”, 마치 너 내 동료가 돼라.”는 말처럼 어색함과 거리감을 순식간에 없애버리는 마법의 주문 같은 한마디에 여자들은 함께 꺄르르 웃으며 동료가 된다.

 


저희 엄마가 가족 빼고 친한 사람들이라고는 탁구장 회원들밖에 없는데.. 내가 모자란 죄를 엄마한테 뒤집어씌우는 거니까. 지금도 엄마는 모를걸요, 쟤네 패거리가 저 괴롭힌 거.”

 

엄주영은 적어도 나 자신은 지킬 수 있을 만큼 단단하게 자라온 여자다. 다부진 체구와 숯검정 눈썹을 가진 딱딱하고 폭력적인 아빠와 거리를 두는 법을 알고, 그를 피해 자리를 뜨는 방법도 안다. 아빠에 대한 트라우마를 떠올리곤 하지만, 그래도 그로 인해 그 자리에 주저앉거나 남자들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나름 할 말은 다 한다.

 

그에 반해 평행 세계의 여자들은 가부장적인 남자들의 영향력과 사회적 시선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은빈은 이창민 패거리에게 괴롭힘당하고, 자신의 아빠가 이창민에게 폭행 당한 걸 알면서도 엄마의 사회생활, 자신의 경찰 생활을 위해 모든 일을 모르는척한다. 이런 일을 공론화했을 때 가해자를 벌하기보단 피해자에 대해 수군거리는 사회적 분위기와 결국은 장난을 괴롭힘으로 받아들인 예민한 여자가 되어버리는 이상한 공식 아래, 은빈은 모든 죄책감을 묻고 살아간다.


 

난 내가 여경이 되어서 막 대단한 일을 해내고 싶은 건 아니었어. 그냥, 그런 일을 쪽팔린다고 아무 데서나 말하지 못할 세상은 안 되기를. 용기 냈더니 뭐 이런 작은 걸 가지고 유난이야, 그냥 네가 운이 좀 나빴네, 너무 예민하면 삶이 피곤해, 하는 말을 듣는 세상은 안 되기를 바라서. 사람들이 흘려 넘기는 것들이 내 안엔 고여 있으니까.”

 

이 세계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고 어디까지 손을 대야 하는 걸까. 여기도 저기도 똑같이 문제가 되는 사안들. 그리고 평행 세계에서 더욱 강하게 엉켜버린 인연. 집안에 틀어박혀 자연스레 사회에서 사라져가는 여자들과 줄어들고 있는 그들의 목소리. 엄주영과 친구들은 그들을 대신해 커다란 권력자인 이창민 패거리를 끌어내리기 위해 준비한다.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의 여자들은 오래된 과거와 그때의 상처를 이유로 웅크리고 있는 수동적인 피해자의 모습을 벗고 가해자 앞에서도 당당한 여자의 모습으로 서로를 도우며 잘못된 세계를 풀어간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포기했던 나의 모습을 되찾는다.

 

사건이 해결된 후 엄주영은 연재와 평행 세계의 배중숙씨가 골라준 탁구채와 탁구화를 신고 다시 탁구를 시작했고, 이창민의 직접 피해자인 은빈과 다정은 이창민 패거리 앞에서 당당히 고개를 들고 맞선다. 그리고 그저 왜 이러나-싶어 걱정되기만 했던 연재는 언니들의 첨삭을 받은 결혼 서약서를 작성해 현명한 결혼생활을 이어나간다. 각 인물들은 서로의 곁을 지키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앞에 놓인 문제들을 차근차근 극복하고 더욱 강해진다.


 

이렇게 배불리 먹이면 막막할 때 이 집 생각이 나겠지.”

평행 세계로 뚝- 떨어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엄주영에게 은빈과 은빈의 엄마 효길은 한줄기 빛, 구세주였다. 매일 든든하게 차려지는 밥상, 아늑하고 안전한 방. 그리고 갈 곳 없는 엄주영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 품어낸 효길의 따뜻한 마음이 들어찬 이 집. 가끔 막막해질 때면 여자의 의리와 사람의 온정이 가득했던 이 집이, 거실에 함께 머리를 싸매고 앉아있었던 동료들이, 같은 아픔을 가졌던 그들이 생각날 것 같다. 같은 결의 아픔을 가진 이들이라면, 언제든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고 위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이들과 함께 막걸리 한 사바리를 비운다면 언젠가 다시 닥쳐올 아픔도 가볍게 털어낼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막막하고 힘이 들 때면 여자들의 의리와 연대가 가진 힘이 철철 넘쳐흐르는 이 책이, 주영 엄마 은빈 엄마가 아닌 중숙씨와 효길씨, 주영과 은빈, 연재, 다정이 기다리고 있는 이 책이 이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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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내지 않으면 잊혀졌을, 잊혀지면 안될 기록들

 

고등학생이 되었을때쯤, 친구들과 어릴적 기억에 대한 대화를 나눈적이 있다. 초등학교때 만났던 친구, 선생님, 재밌었던 일들. 친구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댔는데, 난 이야기할 거리가 많지 않았다. 크게 기억나는 일들이 없었기때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재미없게 살아왔나?’.. 정말 별거 없는 시간을 보냈구나 싶었다.

 

그렇게 내 어린 시절의 기억에 대한 마음을 놓고 있던 때, 엄마가 갑자기 오래된 사진을 정리해야 한다며 커다란 사진첩 2부를 구매했다. 엄마는 박스 안에 산더미 같이 쌓여있던 엄마의 젊은 시절, 나의 어린 시절 사진을 방바닥에 잔뜩 펼쳐놓고 며칠동안 접착 앨범을 지익지익 뜯어가며 사진을 정리했다. 나는 그 옆에 붙어 엄마와 수다를 떨며 사진 안에 멈춰있는 시간들을, 그 순간들을 떠올렸다. 지난 시간동안 반이상 묻혀 사라지기 직전이었던 기억들을 떠올리다보니 긴장된 마음이 눅진히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한 기록이 없었다면 내 기억들은 그대로 잊혀지고 말았겠지.



무언가를 오래도록 기억하기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기록하는 것이다. 나같은 경우엔 사진으로 그 순간을 기록했고, <잊지 않음>의 저자 박민정 작가님은 잊지 않아야 하는 이야기들을 글로 기록했다. <잊지 않음>은 잊지 않아야할, 잊어선 안될, 어쩌면 사소하고 당연한, 또는 거대하고 무거운 순간들과 이젠 정말 예전엔 그랬지~’라고 추억하고만 싶은 순간들이 담긴 책이다.

 

타인의 역사, 나의 산문

인생을 끊어 팔며 글을 쓰지 않겠다고,” 한때 이런 비장한 각오를 했던 박민정 작가는 지금껏 읽어왔던 수필집들을 생각하며 지금이 아니라면 쓸 수도 톺아볼 수도 없는 글들을 모아 <잊지 않음>을 엮어냈다고 말한다.

 

<잊지 않음>은 크게 3부로 나뉜다. 1부에서는 그녀가 문학에 짓눌려있던 시절에 느꼈던 몇 여성에 대한 마음, 막 성인 여성이라는 정글로 들어선 시점의 기록, 잊지 못할 사촌 언니, 실패했던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 2부에서는 여성 혐오와 불매, 잊혀지면 안될 개인의 역사, 지워지지 않을 이름들에 대한 기록이. 3부에서는 저자가 작가로서 꽤 오래 고민해왔던 부분들에 대한 기록이 주로 들어차있다.

 

뜨거운 감자를 움켜쥐고도 묵묵히 견뎌온 사람의 덤덤한 눈빛, 거친 환경과 수많은 상처속에서도 결국 생존한 생존자의 말들, 내가 겪어온 부당한 길을 그대로 겪고있는 소녀들의 어여쁜 복숭아 뼈, 폭력의 시간을 딛고 일어난 성공의 순간, 꿈에 짓눌리고 있음을 그대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 너무 질기게 살아남은 혐오의 숨결. 박민정 작가는 이 모든것 앞에서 무력하게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던 토끼인형같은 그녀와 우리들을 위해, 이 기록들을 이렇게 써내려간다.


 

박민정 작가가 꾹꾹 눌러 담은 기록들은 나에게 꽤 무겁게 다가왔다. 내 머리속에 새로 기록된 이야기들엔 이런저런 감정과 공감이 피어올랐으나 사실 난 빈 문서 앞에서 꽤 오랜 시간 앉아있었다. 어떤것들은 내 기억속에 아주 징그럽게 자리잡은 폭력의 기억들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고 힘껏 압축되어있던, 막 정글에 들어선 순간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했다. <잊지 않음>을 읽으며 저자가 풀어놓은 타인의 역사들을 두세번씩 훑어가며 잊고싶지 않은 구절을 한두줄로 요약해 기록했다. 잊지 않고 오래도록 담아놓고 되새기고 싶은 순간들. 잊는 순간 그들에 대한 마음또한 잃어버리는것 같아서 무조건 꼭 품고 싶은 순간들. 그런 순간들이 가득했다.

더불어 꺼내놓으면, 기록해놓으면 안될것 같다고 생각해 무한히 도망치기만 했던 나의 기억들을 작은 메모장에 기록했다. 그리고 언젠가 꺼내놓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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