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내지 않으면 잊혀졌을, 잊혀지면 안될 기록들

 

고등학생이 되었을때쯤, 친구들과 어릴적 기억에 대한 대화를 나눈적이 있다. 초등학교때 만났던 친구, 선생님, 재밌었던 일들. 친구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댔는데, 난 이야기할 거리가 많지 않았다. 크게 기억나는 일들이 없었기때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재미없게 살아왔나?’.. 정말 별거 없는 시간을 보냈구나 싶었다.

 

그렇게 내 어린 시절의 기억에 대한 마음을 놓고 있던 때, 엄마가 갑자기 오래된 사진을 정리해야 한다며 커다란 사진첩 2부를 구매했다. 엄마는 박스 안에 산더미 같이 쌓여있던 엄마의 젊은 시절, 나의 어린 시절 사진을 방바닥에 잔뜩 펼쳐놓고 며칠동안 접착 앨범을 지익지익 뜯어가며 사진을 정리했다. 나는 그 옆에 붙어 엄마와 수다를 떨며 사진 안에 멈춰있는 시간들을, 그 순간들을 떠올렸다. 지난 시간동안 반이상 묻혀 사라지기 직전이었던 기억들을 떠올리다보니 긴장된 마음이 눅진히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러한 기록이 없었다면 내 기억들은 그대로 잊혀지고 말았겠지.



무언가를 오래도록 기억하기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기록하는 것이다. 나같은 경우엔 사진으로 그 순간을 기록했고, <잊지 않음>의 저자 박민정 작가님은 잊지 않아야 하는 이야기들을 글로 기록했다. <잊지 않음>은 잊지 않아야할, 잊어선 안될, 어쩌면 사소하고 당연한, 또는 거대하고 무거운 순간들과 이젠 정말 예전엔 그랬지~’라고 추억하고만 싶은 순간들이 담긴 책이다.

 

타인의 역사, 나의 산문

인생을 끊어 팔며 글을 쓰지 않겠다고,” 한때 이런 비장한 각오를 했던 박민정 작가는 지금껏 읽어왔던 수필집들을 생각하며 지금이 아니라면 쓸 수도 톺아볼 수도 없는 글들을 모아 <잊지 않음>을 엮어냈다고 말한다.

 

<잊지 않음>은 크게 3부로 나뉜다. 1부에서는 그녀가 문학에 짓눌려있던 시절에 느꼈던 몇 여성에 대한 마음, 막 성인 여성이라는 정글로 들어선 시점의 기록, 잊지 못할 사촌 언니, 실패했던 순간들에 대한 기록이. 2부에서는 여성 혐오와 불매, 잊혀지면 안될 개인의 역사, 지워지지 않을 이름들에 대한 기록이. 3부에서는 저자가 작가로서 꽤 오래 고민해왔던 부분들에 대한 기록이 주로 들어차있다.

 

뜨거운 감자를 움켜쥐고도 묵묵히 견뎌온 사람의 덤덤한 눈빛, 거친 환경과 수많은 상처속에서도 결국 생존한 생존자의 말들, 내가 겪어온 부당한 길을 그대로 겪고있는 소녀들의 어여쁜 복숭아 뼈, 폭력의 시간을 딛고 일어난 성공의 순간, 꿈에 짓눌리고 있음을 그대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 너무 질기게 살아남은 혐오의 숨결. 박민정 작가는 이 모든것 앞에서 무력하게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던 토끼인형같은 그녀와 우리들을 위해, 이 기록들을 이렇게 써내려간다.


 

박민정 작가가 꾹꾹 눌러 담은 기록들은 나에게 꽤 무겁게 다가왔다. 내 머리속에 새로 기록된 이야기들엔 이런저런 감정과 공감이 피어올랐으나 사실 난 빈 문서 앞에서 꽤 오랜 시간 앉아있었다. 어떤것들은 내 기억속에 아주 징그럽게 자리잡은 폭력의 기억들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고 힘껏 압축되어있던, 막 정글에 들어선 순간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했다. <잊지 않음>을 읽으며 저자가 풀어놓은 타인의 역사들을 두세번씩 훑어가며 잊고싶지 않은 구절을 한두줄로 요약해 기록했다. 잊지 않고 오래도록 담아놓고 되새기고 싶은 순간들. 잊는 순간 그들에 대한 마음또한 잃어버리는것 같아서 무조건 꼭 품고 싶은 순간들. 그런 순간들이 가득했다.

더불어 꺼내놓으면, 기록해놓으면 안될것 같다고 생각해 무한히 도망치기만 했던 나의 기억들을 작은 메모장에 기록했다. 그리고 언젠가 꺼내놓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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