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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일
조성준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9월
평점 :
예술이 전부였던, 인생이 곧 예술이었던 이들의 이야기
예술가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미지는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예전의 나는 화려한 인생, 독특함, 특별함, 자신만의 철학. 같은 단어들을 나열하곤 했다. 예술적 재능을 열망하고 뭇 예술가들을 사랑하는 팬으로 그들을 나와 다른 존재로 추앙하던 나로서는 당연한 대답이었다. 왠지 예술가는 자신의 세계를 꿋꿋이 지켜온 완벽하고 신적인 존재 같았다. 힘든 시절도 예술에 대한 혼으로 훌쩍 이겨낸. 그런 초인적인 존재 같았달까.
내가 보고 있는 그들의 재능엔 그것을 한껏 끌어올려 준 피나는 노력과 시대의 흐름을 타는 운 같은 것도 한몫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넘어야 하는 인생의 첫 커다란 관문, 입시를 겪으면서였다. 재능이 있다고 다 되는 것도,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도, 내가 무조건 우긴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었다. 수많은 관문을 넘어야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었고, 이것은 재능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사랑하는 예술가들도 이 수많은 관문을 넘은 나와 같은 사람이었고, 그들에게도 재능을 인정받지 못한 시절이, 재능을 뽐내기 위해 이겨내야 했던 한계들이, 가끔씩은 주저앉은 순간들이 있었다는걸. <예술가의 일>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느꼈다.
<예술가의 일>은 멀게는 1700년대(가쓰시카 호쿠사이)부터 가깝게는 2010년대(데이비드 보위, 박남옥, 어리사 프랭클린 자하 하디드, 이타미 준 등..)까지 활동 또는 생존했던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각 챕터엔 건축가, 화가, 영화감독, 피아니스트, 가수, 배우 등 여러 예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의 삶을 응축해서 담아낸 글들이 담겨있다. 익숙한 이름도, 익숙하지 않은 이름도 있었고. 이름은 조금 어색하지만 알고 보니 그가 남긴 흔적 하나쯤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이 작품이 이 작가 거였어?!”하며 짐짓 놀란 챕터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영화와 연기 분야에 연관된 인물들의 이야기에 특히 마음이 많이 갔는데, 장국영 배우와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 감독님의 챕터, 그리고 <벨벳 골드마인>의 모델이었던 데이비드 보위와 최근 영화 <리스펙트>를 통해 만나게 된 가수 어리사 프랭클린의 챕터에서 꽤 오랜 시간 머물러있었다. 조금 일찍 마무리되거나 끝까지 최선을 다해 살아낸 이들의 인생에서 난 몇 가지 질문을 떠올리고, 이들이 남긴 말들을 주워 담을 수 있었다.
<예술가의 일>은 현재 이 세상을 떠난 예술가들이 주인공인 책이다. 최근(10년 이내)까지 작품을 남긴 예술가도 있고, 몇 세기 전에 유작을 남기고 떠난 예술가들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이름과 작품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영감과 기초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누군가의 인생이 변하고 마무리되는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이들의 재능과 열정,은 여전히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수많은 예술가들의 인생사를 훑으며 그들의 아픔, 열정, 그들이 살다간 시대상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시대가 변해도 변치 않는 고독과 사회적 차별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에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했고, 오래전부터 그 불편함에 물음표를 찍고 목소리를 냈던 예술가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다. 예술적 표현으로 세상에 저항했던 그들의 흔적은 퍽 아름답고 고귀하게 다가온다.
같은 여성의 눈으로 봐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특히 사회적으로 정해진 여성상에 맞서거나 그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는 이유로 질타를 받아야만 했던 천경자, 박남옥, 페기 구겐하임과 같은 인물들의 인생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이들이 세상에 남겼던 질문들이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순간 쓴맛이 올라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예술가들이 사회를 향해 남긴 질문들을 해소하는 것은 이들의 흔적을 통해 감동과 위로를 받았던, 이들의 흔적을 사랑하는 우리들의 몫일 터이다.
예술은 타고난 재능과 눈에 보이는 화려함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들은 끝없이 노력하고 자신과 사회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발전에 대한 열망과 진심, 인생의 일부를 떼어내 끝내 아름다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계량하기 어려울 만큼 가치 있는 작품들과 그것이 담고 있는 메시지는 예술가의 인생이 저물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빛나고 있다.
“삶은 짧고 예술은 길다.” 작가의 말에도 등장하는 이 말. 다소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만큼 예술가들의 삶을 표현하기에 적당한 말이 또 없다. 예술가의 일이란, 예술가의 인생이란 이런 게 아닐까. 내 인생이 마무리되더라도 누군가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 있는 흔적을 남기는 것 말이다.
예술가의 인생은 화려하기도 하고, 특별하기도 하고, 필요 이상으로 고독하고 슬프기도 하다. 예술이 전부였던, 인생이 예술이었던 33인의 예술가들의 인생을 담은 책 <예술가의 일>. 33인의 예술가들을 잘 몰랐던 사람이라도 이 책을 읽고 나면 33인의 에술가들 중 한 명쯤은 마음에 푹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이기 이전에 꽤나 인간적이었던 이들의 삶과 숨겨진 마음들을 알고 나면 그의 작품을 더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
책을 다 읽고 책 표지를 빛에 비춰보니 손자국이 꽤 많이 남아있었고, 앞표지는 살짝 들떠있었다. 그만큼 꽤 오랜 시간 이 책을 손에 들고 있었다는 뜻이겠다. 오랜 시간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고. 나는 <예술가의 일>이라는 책을 그렇게 기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