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실감을 덮어줄 믿음과 집을 찾아서




 

이 이야기는 가련하면서도 담담하고 느린듯하면서도 막히는 구간이 없다. 각자 다른 시기에 살아가는 세 인물들이 세 개의 에피소드를 만들고, 전혀 상관없을 거라 예상했던 에피소드들은 천천히 옅은 연결고리를 내비치며 70년이 넘는 시간을 그러모은다.

 

사랑을 잃고 두려움과 슬픔에 묶인 그들을 끌어당긴 포르투갈의 높은 산’. 그곳엔 그들이 찾아헤맨 사랑은 없었다. 하지만 높은 산으로 향하는 여정 속에서 마주한 여러 순간들이 사랑의 빈자리를 대신 채운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파이 이야기>로 유명한 작가 얀 마텔의 장편 소설로 2017년 국내에 처음 출간되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2112. 이 아름다운 소설이 새로운 옷을 입고, 한층 더 개성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파이 이야기>를 아주 어릴 때 봤다. 그것도 원작 소설이 아닌 영화로 말이다. <파이 이야기>를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난 이 책을 통해 얀 마텔 작가의 책에 입문한 셈이다. 책에 대한 사전 지식도, 그 어떤 설명도 보지 않은 채 부드러운 빛깔의 표지를 넘겼고 내 감정은 금방 절여진 배추처럼 순식간에 늘어져 버렸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엔 사랑을 잃은 세 인물이 나온다. 1집을 잃다의 주인공 토마스는 사랑하는 여인과 아들, 아버지를 연달아 잃은 박물관 학예 보조사. 2집으로의 주인공 에우제비우는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병리학자. 3의 주인공 피터 토비는 아내와 사별한 상원 의원이다. 각 이야기는 1904년 리스본, 1939년 포르투갈의 높은 산 인근, 1980년 캐나다라는 배경으로 시작된다.

 

각자 다른 시간대와 공간, 비슷한 부분이라곤 하나도 없는 세 인물들. 슬쩍 봐서는 하나도 연결될 것 같지 않은 세 개의 에피소드는 사랑을 잃은 인물들이라는 짧지만 거대한 중심에 맞춰 흡사한 곡선을 그리며 돌아간다. 지난한 시간을 넘어 언뜻 비치는 연결 고리를 발견할 때마다 연약한 찌릿함이 느껴진다. 토마스가 남긴 운명에 대한 반항의 흔적(뒤로 걷기)이 피터의 호기심을 자아낼 때, 라파엘의 흔적이 남은 가방이 피터의 뜰에 입을 벌리고 있었을 때, 2부에 들어 토마스의 차에 치인 아이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같은 순간들에 말이다.


 

사랑을 잃은 인물들에게 상실감과 두려움이 끝없이 밀려든다. 이들은 혼란하고 혼미해진 현실 속에서 슬픔의 끝을 따라 홀린 듯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다. 높은 산을 향한 여정에 그득한 몽롱하고 환상적인 순간 위에 문득 치밀어 오르는 후회, 예상치도 못한 따뜻한 온기가 얹어진다. 그리고 이들이 달리고 있는 비포장도로 위엔 삶과 죽음, 믿음에 대한 질문들이 커다란 돌부리가 되어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십자고상에 대한 믿음과 침팬지, 사랑과 슬픔. 그리고 집. 다른 시대를 살아간 세 명의 인물은 이것들의 정의를 알기 위해 높은 산으로 향한다. 여정의 끝엔 결국 무너져버린 믿음과 죽음, 슬픔. 집으로 여겨졌던 몸. 같은 것들이 애매한 흔적을 남긴 채 남아있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하면 슬픔을 지우고 안정과 정답을, 새로 시작할 공간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나 그것은 그저 환상, 몽롱한 바람일 뿐이었던 걸까? ‘온전한 답이 있는 장소가 아닌 집이었던 곳이자 안정적인 집이 되어주길 바라며 향했던 상징적인 장소 딱 그 정도인 걸까? 이들은 여정을 통해 충분한 위로를 받았을까? 아니면 더 큰 상실감을 느꼈을까? 잘 모르겠다.

 

슬픔을 달래줄 온기를 쫓아 무작정 달려본 느낌이다. 단박에 뜻을 알아차릴 수 없었던 아이의 사고와 떠난 아내와 덤덤한 슬픔에 파묻혀 집으로 들어간 여인을 만난 기이한 밤, 온기를 대신 채워주는 존재와 함께 보낸 두렵고도 경이로웠던 순간들과 거짓 같은 마지막까지. 거칠고 긴 여정을 함께 보내고 나니, 새로움과 깨달음, 믿음 같은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익숙한 안정감이 더욱 그리워진다. 누군가는 이 책을 아름다운 여정이라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어딘가 몽롱함을 남기는 슬픈 여정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운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 흔들리는 나를 일으켜 줄 마음 처방전
오왕근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해를 정리하는 연말이 무르익고 연초에 가까워질 때면 연례행사처럼 내년 운수, 운명을 점치는 콘텐츠들이 TV를 통해 와르르 쏟아지던 때가 있었다. 요즘엔 사주나 타로 앱 같은 것들이 정말 많아져 굳이 점집에 찾아가지 않더라도 손쉽게 오늘의 운수를 확인할 수 있게 됐지만, 몇 년(사실 한 10여 년 전쯤..?)전만 해도 경조사, 아이의 수능, 새해기념 운수를 보던 사람들이 꽤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직접 점집에 가보거나 사주를 본 적은 없지만, TV 또는 건너말로 전해 들은 무속인들의 이야기는 마치 귀신과 비슷한 공포감을 주기도 했다. 지금도 역시 신도, 운명도 잘 믿지 않는 편이기에 영적 존재와 무속인에 대한 편견을 깨지 못하고 있던 찰나, 젊은 무속인 오왕근작가님의 저서 <운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를 접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책 한 권을 통해 편견을 100% 다 타파했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그가 전하는 이야기를 통해, 무속인이기 이전에 그저 사람을 돕고 싶은 젊은 청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운명이라. 우리는 보통 우연히 마주쳤지만 강하게 끌리는 것 또는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운명을 언급하곤 한다. 이 운명이란 단어는 긍정적으로 사용될 때도 있고, 반대로 부정적인 느낌으로 사용될 때도 있다. 부정적인 예를 들자면 결국 노력해도 이렇게 되는 게 내 운명이야, 포기할래.”와 같은 말들 말이다.

 

이 책은 표지에 적힌 제목처럼 (주로 부정적으로 사용되는) ‘운명또한 작은 변화를 통해 피하거나 바꿀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와 동시에 각자의 운명을 따라 올해도 살아낸 당신은 참 멋진 사람이니 너무 기죽지 말라며 조용한 토닥임을 전한다. 가식을 빼내고 오직 진정성과 솔직함으로 물들인 젊은 무속인의 조언과 위로가 종이 위에서 가볍게 팔랑팔랑 흔들린다. 너무 진중하지도 부담스럽게 심오하지도 않은 말들에 책장이 가볍게 넘어간다.



 

젊은 무속인 오왕근 작가는 17살에 갑자기 다가온 운명과 새로운 세상을 마주해야 했다. 그는 방황하고, 기도하고, 또 버티며 무속인의 길을 걸어왔고 수많은 지친 사람들이 그의 곁을 지나갔다. 그는 20년의 시간 동안 오만가지 인간사를 접하고, 찾아온 이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단단하게 쌓여온 그의 기도가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운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라는 책이 된다.


 -

 

오왕근 작가는 나라는 사람을, 내가 받은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겐 내면을 들여다보는 방법과 나의 운명을 통해 스스로의 가능성과 그릇을 점검하는 방법을. 그리고 지나쳐간 상처와 인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는 나를 할퀴고 지나간 상처에 오래 아파하지 말라고, 오래 아팠던 상처와 염증이 있다면 그 자리를 톺아보라고. 그리고 깊은 상처를 외면하기보단 그것을 단단한 굳은살로 만들어 다시 일어설 발판으로 삼으라고 말한다.

 

<운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올 한 해를 열심히 살아오느라 이미 퍽 지쳐버린 누군가에게 피할 수 없는 내년의 운수, 운명 같은 것을 알려주는 무속인이 쓴 책이 아니다. 이 젊은 무속인은 어느 상황이든 듣는 이의 한계를 직접 지정하지 않으며 일단 내 앞에 놓인 운명이 좋든, 좋지 않든 어쨌든 나의 것이니 뜻대로 꾸미고 움직여보라고 말한다. 각자의 가슴 안에 품고 있는, 언젠가 만개할 운명을 가진 한 송이의 꽃이 한껏 펼쳐지는 순간이 올 때까지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샐러드 SALAD - 비밀 드레싱을 곁들인 83가지 요리법 cooking at home 3
김유림 지음 / 테이스트북스 / 2019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강경 초등학생 입맛인 나에게 샐러드란, “다이어트할 때 어쩔 수 없이 먹는 것.”, “드레싱 맛으로 먹는 것.” 또는 풀떼기에 불과했다. 푸릇푸릇하고 맛있어 보이지만 정작 내 입안으로 넣으면 쓰고 챱챱~한 것이 배도 부르지 않으니, 난 굳이 샐러드를 찾아 먹지 않는 편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인생 첫 다이어트는 샐러드가 아닌 고구마와 닭 가슴살, 계란 등으로 근근이 버티며 성공했었기에, 다이어트를 한다해도 꼭 샐러드를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 어찌어찌 오리엔탈 드레싱과 후추 닭 가슴살의 도움으로 입문한 샐러드의 세계는 말 그대로 신세계그 자체였다. 샐러드도 나름 괜찮구나? 싶었다. 물론 아직도 샐러드를 꼭꼭 챙겨 먹는 건강한 식단 같은 것은 지키지 못하고 있으며, 여전한 초딩입맛을 자랑하지만.. 그래도 예전보단 조금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아직 학생일 때, 사회생활을 시작한 주변 사람들이 전해주던 사회인의 필수 덕목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살기 위해 운동하라.’, ‘살기 위해 몸을 챙기라.’는 것이었다. 배우던 일의 특성상 1365일 불규칙한 생활패턴으로 살아왔던 나는,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회사에 출근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해 집에 돌아오고, 비슷한 시간에 잠이 드는.. 겉으로 보기엔 퍽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생활을 지키는 직장인이 되면 건강이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헛된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규칙적인 생활이고 뭐고.. 다 깨져버린 생활 리듬과 반대로 규칙적으로 착착 쌓여가는 나이와 피로를 이기긴 역부족이었다.

 

아무튼, 나처럼 이렇게 피로를 달고 사는 현대인들의 현실을 반영하듯 많은 사람들이 웰빙, 건강, 운동, 비건, 건강한 식습관 등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 확연히 느껴지는 요즘이다.

 

이러한 시기를 맞춰 나에게 온 책 <샐러드>는 딱 우리가 갈구하고 로망 하던 건강한 생활의 기초인 건강한 식단, 샐러드에 대해 소개한다. 샐러드라 하면 샐러드 가게 또는 베이커리에서 사 먹는 대충 끼니를 때울 간편식또는 야채 믹스를 물에 씻어내 닭 가슴살 같은 것과 곁들여 먹는 다이어트 끼니’, 일부 식당에서 밥 먹기 전에 나오는 애피타이저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던 나에게 이 책 안에 담긴 수많은 샐러드들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샐러드의 재료가 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다양하고 싱싱한 재료들이 적당한 조화를 이루며 한 접시에 담긴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그 맛에 대한 궁금증이 퐁퐁 솟아오른다. 다이어트를 다시 시작한다면, 아니 건강한 식단에 대한 욕심이 조금 더 생긴다면 꼭 먹어보고 싶은 메뉴들이 한가득 머릿속에 업데이트되는 순간이다.

 

다이어트를 위해서든, 건강한 습관을 위해서든. 어찌 됐든 샐러드를 챙겨 먹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면 이 책을 한번 펼쳐보길 추천한다. 샐러드를 씁쓸한 풀 한상이라고 생각해 망설이고 있다면 <샐러드>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이 선샤인 어웨이
M. O. 월시 지음, 송섬별 옮김 / 작가정신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이 선샤인 어웨이>는 그 해 여름, 실수를 남발하던 어린 소년이었던 화자의 고백록이자 실수를 통해 이뤄낸 성장 과정을 담은 뛰어난 성장 소설이다.

 

짝사랑하는 소녀 린디 심프슨에게 일어난 커다란 사건과 그를 둘러싼 소년의 사랑과 집착. 그리고 그토록 동경했던 '어른'의 길을 찾아가기 위해 허공을 유영하던 몇 해 동안의 기억. 그 안엔 소년의 고통, 상처뿐만이 아니라 사랑에 고뇌하고 주저앉고, 떠도는 어른들의 모습도 함께 곁들여진다.

 

떠나버린 아버지를 잊지 못하고 여전히 휘둘리는 소년의 어머니. 사랑과 함께 자유롭게 떠돌다 이번에도 훌쩍 떠나버린 삼촌. 딸에 대한 사랑을 펼치기엔 늦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절망감에 주저앉아버린 린디의 아버지. 사랑을 위해 기꺼이 짊어져야 하는 무게감, 우리가 가져야 하는 책임감. 소년의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여러모로 돌아볼 부분들이 참 많다.

 

깔끔히 다듬어진 문장과 생생하게 표현되는 순간의 풍경들이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인다. 최근엔 어쩌다 보 책을 읽을 시간이 늦은 밤 시간 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 이 책을 쉽게 놓을 수 없었다. 소년이 말하고자 하는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소년이 짝사랑과 린디의 사건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왜 소년은 불안한 비밀을 넣어둔 서랍을 그대로 잠그지 않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꺼내놓은 걸까? 이 편지를 받을 대상은 누구일까?

 

 

그 대신 나는 바꿀 수 있음 직한 것들에 매달렸다. 예를 들면 외모라든지, 나를 보는 린디의 시선 같은 것들이었다.

 

이야기는 1989. 평화로운 마을 배턴루지에서 시작된다. 육상부의 에이스이자 많은 남자아이들이 주목하던 여학생 린디 심프슨. 주인공 소년은 그런 린디를 짝사랑하고 있다. 언제부터였냐면, 완벽할 것 같았던 린디가 자신의 깊은 곳에 품고 있던 연약한 감정을 세상을 향해 쏟아내던 날, 소녀의 의외의 모습을 본 그 날부터였다.

 

소년에겐 사랑에 이어 시련이 찾아온다. 갑자기 떠나버린 아버지와 슬픔에 빠진 어머니와 누나들.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가정에 커다란 생채기가 생기고, 그는 자신이 현실을 바꿀 힘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그 대채제로 린디의 사랑을 갈구한다. 린디도 나에게 사랑을 느끼길, 내가 다른 이들보다 린디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되길 간절하게 바란다.

 

하지만 절실한 사랑은 커다란 엇나감이라는 결과를 낳고, 린디는 우울감에 빠지게 된다. 절실함은 항상 최상의 결과를 낼 수 없고, 아직 모든 게 서툴렀던 소년은 최상이 아닌 최악에 가까운 결과를 만들고만다. 소년은 어떻게든 이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정확한 방향을 잡지 못한다.

 

그 시절의 나를 구멍 뚫어보면 린디 옷장에 들어 있던 것들만 쏟아져 나왔을 것이다. 피 한 방울 안 들어 있었을 것이다. 집착에 사로잡힌 심장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모든 건 사랑에서 시작된다. 이야기는 온전하지 못한 사랑이 피어난 시점에서 시작되고 새로운 사랑의 탄생을 앞두고 마무리된다. 사랑이 무엇인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두근거림에 매료되었던 어린 시절, 소년은 실수를 저지른다. 실수는 뒤늦은 죄책감이 되고, 어떻게든 죄책감을 만회하려던 소년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 한다. 하지만 그 행동은 진실을 밝히려는 것보단, 무자비하게 파헤치는 쪽에 가까웠다. 사건이 극적으로 치닫는 순간, 소년은 사랑했던 린디의 울분에 찬 말을 들으며 자신이 믿었던 사랑의 의미를 짚어보게 된다.

 

당시엔 내가 하는 짓이 무슨 짓인지도 몰랐다. 제발 이해해다오. 난 널 잃고 싶어서 이런 고백을 하는 게 아니다. 남자애들은 처음으로 자위행위를 할 때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른다.

 

어른이 된 소년은 자신의 행동이 그저 사랑을 모르던 시절에 행했던 실수였다고 인정한다. 처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한참을 헤매었던 소년의 여름. 그 안에 들어찼던 커다란 실수라고.

 

그는 실수를 인정하고 자신의 뒤를 따라올 아이에게 실수를 피해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자 한다. 주인공은 나의 아이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배우지 못해 실수를 반복하지 않길,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고백하며 이야기를 마친다.

 

사랑이란 그를 위해 온갖 마음과 힘을 쏟게 되는 것, 아주 단단한 사람도 주차장 바닥에 내려앉게 만드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사려 깊은 감정이어야 하는 감정이라는 것.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그가 펼쳐놓은, 1989년 평화로웠던 배턴루지의 뜨거운 여름 안에서 '사랑의 의미'를 찾기 위해 멈추지 않고 페이지를 넘기며 떠오른 생각들이다.

 

나는 소년의 고백 속에서 누구든 겪어봤음직한 사랑과 집착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것들을 그러모아 훌훌 털어 묻어버리고 싶은 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가 다시 제주였으면 좋겠어 - 그림으로 남긴 순간들
리모 김현길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릴 때, 가족여행을 가는 가족들을 부러워하던 나는 자연스레 여행에 대한 로망을 품기 시작했다. 안 가 버릇 해서인지 혼자 여행길에 나설 용기도 영 생기지 않아 제대로 된 여행을 해본 적도 없기에, 날이 갈수록 로망만 짙어져갔다.


특히 국내 중에선 제주도 여행에 대한 로망이 가장 컸는데, 제주도라 함은 같은 한국이지만 왠지 이국적인 풍경이 가득할 것 같았고, 차가운 서울과 달리 겨울에도 따스한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온화한 기후에 교과서에서만 본 전통이 가득한 지역일 것 같았다.


이런저런 로망을 한가득 안은 채 어른이 됐고, 남들은 수학여행으로 한 번쯤 다 가본다는 제주도에 그제서야 처음으로 다녀왔다. 유채꽃 예쁜 곳, 동백꽃 많이 피는 곳, 바다 예쁜 곳, 깔끔한 게스트 하우스, 맛집 많은 곳, 드라이브 코스, 봄, 여름, 가을, 겨울 추천 여행지 등등 어떤 키워드를 갖다 붙여도 마법처럼 수많은 검색 결과가 나오던 섬, 제주. 먹거리도 볼거리도 놀 거리도 정말 넘치게 많았다.


따뜻한 지역 일 거란 편견(?)을 갖고 향했던 그 섬에서, 차가운 바람에 귀싸대기를 5만 대쯤 맞고 왔던 여행이었지만 한 번쯤 제주의 다른 지역으로도 여행을 가보고 싶다는 설렘도 함께 들고 돌아왔다.



하지만 정신없이 살다 보니, 또 코로나 유행이 시작되다 보니.. 이런저런 핑계로 아직도 제주도에 다시 가지 못했다. 사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시작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답답함을 못견딘 사람들이 해외 대신 가볍게(?) 제주도를 택하는 분위기지만, 걱정 많은 쫄보인 나에겐 아직 제주도를 갈 용기가 없다. 가고 싶은데, 막상 가려니 머릿속 불안 세포가 몸부림치는 게 느껴져 매번 포기했다.


미뤄놓다 보니 슬슬 선선한 날씨와 연말이 다가왔고, 그로 인해 마음도 싱숭생숭해지니 또 여행을 가고 싶어지는 찰나, 때마침 내 마음을 위로해 줄 책이 도착했다. <네가 다시 제주였으면 좋겠어>



“봄의 제주라니. 부드러운 바람과 노란 유채꽃 물결 가득했던 여행은 그렇게 우연히 시작되었다.”
"제주도를 향한 짝사랑이 그때 시작되었다.“


학부생 시절, 우연히 가게 된 섬 제주도에 마음을 뺏겨 그곳에 넘치는 애정을 부어온 '리모 김현길'작가의 책 <네가 다시 제주였으면 좋겠어>는 따뜻한 색감의 여행 스케치와 함께 펼쳐지는 제주 여행 에세이다. 강산이 한 번 변하고도 남을 시간 동안, 변치 않고 제주라는 섬을 사랑해온 이의 마음이 담뿍 느껴지는 책이었다.


보통 여행을 갔을 때, "남는 건 사진뿐이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사진은 그 순간을 기억하는 방법으로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사진에 지지 않을 만큼 좋은 방법이 하나 더 있다. 그건 바로 그 순간을 그리는 '여행 스케치'를 남기는 것.


올해 초, 지인의 영향으로 한창 그림에 대해 궁금해했던 시기가 있었다. 유튜버로 온갖 드로잉을 다 찾아보던 중 간단한 선과 수채화 물감으로 그려낸 여행 스케치 영상을 많이 봤었다. 불필요한 부분은 적절하게 생략하고, 장소의 매력을 콕콕 집어내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매력이 철철 넘치던 그 스케치들을 보며 "나도 여행을 가면, 아이패드로 한 번쯤...!"하고 다짐했던 때가 있었다. (근데 그게 벌써 1년쯤 지났다.. 이렇게 생각하니 좀 슬픈데.. 나는 뭐뭐 해야지~하고 다짐하기만 잘한다. 다짐 대마왕..)


이 책은 나의 다짐에 한 번 더 불을 붙여주었다. 다양한 재료와 화려한 표현으로 가득 찬 그림은 아니었지만, 그림들이 참 다정하고 예뻤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아낸 여행 스케치 속엔 작가님의 다정한 마음 빛깔이 그대로 물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얹어지는 여행의 순간들이 참 편안하고 아늑해서, 그래서 더 예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오래 머무는 여행, 깊게 들여다보는 여행을 지향한다는 리모 작가님은 독자들에게 그 수단으로 여행 스케치를 곁들인 그림 여행을 권한다. 본격적으로 책이 시작되기 전, 그림 여행을 위한 최소한의 짐들과 유용한 도구들을 먼저 소개하는 파트를 읽으며 마치 함께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듯한 설렘이 느껴졌다. 든든하게 그림 여행 준비를 마치고 나면 본격적으로 애정 가득한 여행기가 펼쳐진다.



<네가 다시 제주였으면 좋겠어>는 섬의 동쪽과 서쪽, 원도심과 동지역, 중산간 마을로 나눠 각 지역의 특징과 역사, 참고하면 좋을 로컬 맛집, 소품 샵, 책방 등을 소개한다. 언뜻 작다고 느껴지기도 했던 이 섬에 이토록 수많은 역사와 추억이 있었다니. 놀라웠다. 그리고 이런 섬의 시간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여행했을 작가님을 생각하니, 이게 바로 진정한 여행자이자 이 섬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구나. 싶었다.


나는 여행을 가기 전 그저 사진 찍기 좋은 곳, 놀고먹기 편한 곳. 이동경로. 정도만 알아보고 길을 떠나곤 했는데, 이 책을 보며 여행을 위한 준비 과정을 하나 추가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밟으러 가는 땅에 어떤 시간이 깃들어있는지, 전부는 아니더라도 하나쯤은 알고 가면 더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되지 않을까.



제주를 애정 하지 않는다면 이토록 다정한 말들을 적어낼 수 없을 것 같다. 리모 작가님은 흐린 날의 젖은 어깨도 여행의 흐름을 끊어버린 작은 못의 존재도 모두 소중한 순간을 발견하게 해준 우연이라 생각하며 기록을 남긴다. 그리고 작은 동네에서 마셨던 고소한 커피 한 잔의 맛과 장엄한 자연에 숨어있는 아픈 역사, 잊혀진 마을이 지켜낸 특유의 포근함도 모두 빠짐없이 마음에 담아 그림을 그린다.


이 잔잔하고 부드러운 여행기 속에서 나도 몇 개의 장소를 뽑아 기록을 남겼다. 제주에 가게 된다면 꼭 가보고 싶은 곳들. 책의 전체 분량에서 뽑아낸지라 남원읍, 애월읍, 대평리 등등.. 장소는 꽤 중구난방이라 다 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어느 지역을 가든, 제주는 왠지 다 좋을 것 같으니, 어딜가든 후회하지 않겠다 싶다.


꽤 많은 추억을 켜켜이 쌓아 올렸음에도 작가님은 이 책의 말미에서, 아직 가보지 못한 마을이 많다며 제주에 대한 식지 않는 애정을 표현하며 가방에 간식을 넉넉히 챙길 새로운 여행을 예고한다. 이 신비하고 매력적인 섬에서, 언젠가 작가님을 만나게 된다면,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를 만나게 된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제주에 대한 환상을 한 움큼 더 가져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