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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다시 제주였으면 좋겠어 - 그림으로 남긴 순간들
리모 김현길 지음 / 상상출판 / 2021년 10월
평점 :
어릴 때, 가족여행을 가는 가족들을 부러워하던 나는 자연스레 여행에 대한 로망을 품기 시작했다. 안 가 버릇 해서인지 혼자 여행길에 나설 용기도 영 생기지 않아 제대로 된 여행을 해본 적도 없기에, 날이 갈수록 로망만 짙어져갔다.
특히 국내 중에선 제주도 여행에 대한 로망이 가장 컸는데, 제주도라 함은 같은 한국이지만 왠지 이국적인 풍경이 가득할 것 같았고, 차가운 서울과 달리 겨울에도 따스한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온화한 기후에 교과서에서만 본 전통이 가득한 지역일 것 같았다.
이런저런 로망을 한가득 안은 채 어른이 됐고, 남들은 수학여행으로 한 번쯤 다 가본다는 제주도에 그제서야 처음으로 다녀왔다. 유채꽃 예쁜 곳, 동백꽃 많이 피는 곳, 바다 예쁜 곳, 깔끔한 게스트 하우스, 맛집 많은 곳, 드라이브 코스, 봄, 여름, 가을, 겨울 추천 여행지 등등 어떤 키워드를 갖다 붙여도 마법처럼 수많은 검색 결과가 나오던 섬, 제주. 먹거리도 볼거리도 놀 거리도 정말 넘치게 많았다.
따뜻한 지역 일 거란 편견(?)을 갖고 향했던 그 섬에서, 차가운 바람에 귀싸대기를 5만 대쯤 맞고 왔던 여행이었지만 한 번쯤 제주의 다른 지역으로도 여행을 가보고 싶다는 설렘도 함께 들고 돌아왔다.
하지만 정신없이 살다 보니, 또 코로나 유행이 시작되다 보니.. 이런저런 핑계로 아직도 제주도에 다시 가지 못했다. 사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시작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답답함을 못견딘 사람들이 해외 대신 가볍게(?) 제주도를 택하는 분위기지만, 걱정 많은 쫄보인 나에겐 아직 제주도를 갈 용기가 없다. 가고 싶은데, 막상 가려니 머릿속 불안 세포가 몸부림치는 게 느껴져 매번 포기했다.
미뤄놓다 보니 슬슬 선선한 날씨와 연말이 다가왔고, 그로 인해 마음도 싱숭생숭해지니 또 여행을 가고 싶어지는 찰나, 때마침 내 마음을 위로해 줄 책이 도착했다. <네가 다시 제주였으면 좋겠어>
“봄의 제주라니. 부드러운 바람과 노란 유채꽃 물결 가득했던 여행은 그렇게 우연히 시작되었다.”
"제주도를 향한 짝사랑이 그때 시작되었다.“
학부생 시절, 우연히 가게 된 섬 제주도에 마음을 뺏겨 그곳에 넘치는 애정을 부어온 '리모 김현길'작가의 책 <네가 다시 제주였으면 좋겠어>는 따뜻한 색감의 여행 스케치와 함께 펼쳐지는 제주 여행 에세이다. 강산이 한 번 변하고도 남을 시간 동안, 변치 않고 제주라는 섬을 사랑해온 이의 마음이 담뿍 느껴지는 책이었다.
보통 여행을 갔을 때, "남는 건 사진뿐이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사진은 그 순간을 기억하는 방법으로 가장 좋은 방법 중에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사진에 지지 않을 만큼 좋은 방법이 하나 더 있다. 그건 바로 그 순간을 그리는 '여행 스케치'를 남기는 것.
올해 초, 지인의 영향으로 한창 그림에 대해 궁금해했던 시기가 있었다. 유튜버로 온갖 드로잉을 다 찾아보던 중 간단한 선과 수채화 물감으로 그려낸 여행 스케치 영상을 많이 봤었다. 불필요한 부분은 적절하게 생략하고, 장소의 매력을 콕콕 집어내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매력이 철철 넘치던 그 스케치들을 보며 "나도 여행을 가면, 아이패드로 한 번쯤...!"하고 다짐했던 때가 있었다. (근데 그게 벌써 1년쯤 지났다.. 이렇게 생각하니 좀 슬픈데.. 나는 뭐뭐 해야지~하고 다짐하기만 잘한다. 다짐 대마왕..)
이 책은 나의 다짐에 한 번 더 불을 붙여주었다. 다양한 재료와 화려한 표현으로 가득 찬 그림은 아니었지만, 그림들이 참 다정하고 예뻤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아낸 여행 스케치 속엔 작가님의 다정한 마음 빛깔이 그대로 물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얹어지는 여행의 순간들이 참 편안하고 아늑해서, 그래서 더 예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오래 머무는 여행, 깊게 들여다보는 여행을 지향한다는 리모 작가님은 독자들에게 그 수단으로 여행 스케치를 곁들인 그림 여행을 권한다. 본격적으로 책이 시작되기 전, 그림 여행을 위한 최소한의 짐들과 유용한 도구들을 먼저 소개하는 파트를 읽으며 마치 함께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듯한 설렘이 느껴졌다. 든든하게 그림 여행 준비를 마치고 나면 본격적으로 애정 가득한 여행기가 펼쳐진다.
<네가 다시 제주였으면 좋겠어>는 섬의 동쪽과 서쪽, 원도심과 동지역, 중산간 마을로 나눠 각 지역의 특징과 역사, 참고하면 좋을 로컬 맛집, 소품 샵, 책방 등을 소개한다. 언뜻 작다고 느껴지기도 했던 이 섬에 이토록 수많은 역사와 추억이 있었다니. 놀라웠다. 그리고 이런 섬의 시간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여행했을 작가님을 생각하니, 이게 바로 진정한 여행자이자 이 섬을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구나. 싶었다.
나는 여행을 가기 전 그저 사진 찍기 좋은 곳, 놀고먹기 편한 곳. 이동경로. 정도만 알아보고 길을 떠나곤 했는데, 이 책을 보며 여행을 위한 준비 과정을 하나 추가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밟으러 가는 땅에 어떤 시간이 깃들어있는지, 전부는 아니더라도 하나쯤은 알고 가면 더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되지 않을까.
제주를 애정 하지 않는다면 이토록 다정한 말들을 적어낼 수 없을 것 같다. 리모 작가님은 흐린 날의 젖은 어깨도 여행의 흐름을 끊어버린 작은 못의 존재도 모두 소중한 순간을 발견하게 해준 우연이라 생각하며 기록을 남긴다. 그리고 작은 동네에서 마셨던 고소한 커피 한 잔의 맛과 장엄한 자연에 숨어있는 아픈 역사, 잊혀진 마을이 지켜낸 특유의 포근함도 모두 빠짐없이 마음에 담아 그림을 그린다.
이 잔잔하고 부드러운 여행기 속에서 나도 몇 개의 장소를 뽑아 기록을 남겼다. 제주에 가게 된다면 꼭 가보고 싶은 곳들. 책의 전체 분량에서 뽑아낸지라 남원읍, 애월읍, 대평리 등등.. 장소는 꽤 중구난방이라 다 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어느 지역을 가든, 제주는 왠지 다 좋을 것 같으니, 어딜가든 후회하지 않겠다 싶다.
꽤 많은 추억을 켜켜이 쌓아 올렸음에도 작가님은 이 책의 말미에서, 아직 가보지 못한 마을이 많다며 제주에 대한 식지 않는 애정을 표현하며 가방에 간식을 넉넉히 챙길 새로운 여행을 예고한다. 이 신비하고 매력적인 섬에서, 언젠가 작가님을 만나게 된다면,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를 만나게 된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제주에 대한 환상을 한 움큼 더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