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의 높은 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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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감을 덮어줄 믿음과 집을 찾아서




 

이 이야기는 가련하면서도 담담하고 느린듯하면서도 막히는 구간이 없다. 각자 다른 시기에 살아가는 세 인물들이 세 개의 에피소드를 만들고, 전혀 상관없을 거라 예상했던 에피소드들은 천천히 옅은 연결고리를 내비치며 70년이 넘는 시간을 그러모은다.

 

사랑을 잃고 두려움과 슬픔에 묶인 그들을 끌어당긴 포르투갈의 높은 산’. 그곳엔 그들이 찾아헤맨 사랑은 없었다. 하지만 높은 산으로 향하는 여정 속에서 마주한 여러 순간들이 사랑의 빈자리를 대신 채운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파이 이야기>로 유명한 작가 얀 마텔의 장편 소설로 2017년 국내에 처음 출간되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2112. 이 아름다운 소설이 새로운 옷을 입고, 한층 더 개성 넘치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파이 이야기>를 아주 어릴 때 봤다. 그것도 원작 소설이 아닌 영화로 말이다. <파이 이야기>를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난 이 책을 통해 얀 마텔 작가의 책에 입문한 셈이다. 책에 대한 사전 지식도, 그 어떤 설명도 보지 않은 채 부드러운 빛깔의 표지를 넘겼고 내 감정은 금방 절여진 배추처럼 순식간에 늘어져 버렸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엔 사랑을 잃은 세 인물이 나온다. 1집을 잃다의 주인공 토마스는 사랑하는 여인과 아들, 아버지를 연달아 잃은 박물관 학예 보조사. 2집으로의 주인공 에우제비우는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병리학자. 3의 주인공 피터 토비는 아내와 사별한 상원 의원이다. 각 이야기는 1904년 리스본, 1939년 포르투갈의 높은 산 인근, 1980년 캐나다라는 배경으로 시작된다.

 

각자 다른 시간대와 공간, 비슷한 부분이라곤 하나도 없는 세 인물들. 슬쩍 봐서는 하나도 연결될 것 같지 않은 세 개의 에피소드는 사랑을 잃은 인물들이라는 짧지만 거대한 중심에 맞춰 흡사한 곡선을 그리며 돌아간다. 지난한 시간을 넘어 언뜻 비치는 연결 고리를 발견할 때마다 연약한 찌릿함이 느껴진다. 토마스가 남긴 운명에 대한 반항의 흔적(뒤로 걷기)이 피터의 호기심을 자아낼 때, 라파엘의 흔적이 남은 가방이 피터의 뜰에 입을 벌리고 있었을 때, 2부에 들어 토마스의 차에 치인 아이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같은 순간들에 말이다.


 

사랑을 잃은 인물들에게 상실감과 두려움이 끝없이 밀려든다. 이들은 혼란하고 혼미해진 현실 속에서 슬픔의 끝을 따라 홀린 듯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한다. 높은 산을 향한 여정에 그득한 몽롱하고 환상적인 순간 위에 문득 치밀어 오르는 후회, 예상치도 못한 따뜻한 온기가 얹어진다. 그리고 이들이 달리고 있는 비포장도로 위엔 삶과 죽음, 믿음에 대한 질문들이 커다란 돌부리가 되어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

 

십자고상에 대한 믿음과 침팬지, 사랑과 슬픔. 그리고 집. 다른 시대를 살아간 세 명의 인물은 이것들의 정의를 알기 위해 높은 산으로 향한다. 여정의 끝엔 결국 무너져버린 믿음과 죽음, 슬픔. 집으로 여겨졌던 몸. 같은 것들이 애매한 흔적을 남긴 채 남아있다.

 

포르투갈의 높은 산으로 향하면 슬픔을 지우고 안정과 정답을, 새로 시작할 공간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나 그것은 그저 환상, 몽롱한 바람일 뿐이었던 걸까? ‘온전한 답이 있는 장소가 아닌 집이었던 곳이자 안정적인 집이 되어주길 바라며 향했던 상징적인 장소 딱 그 정도인 걸까? 이들은 여정을 통해 충분한 위로를 받았을까? 아니면 더 큰 상실감을 느꼈을까? 잘 모르겠다.

 

슬픔을 달래줄 온기를 쫓아 무작정 달려본 느낌이다. 단박에 뜻을 알아차릴 수 없었던 아이의 사고와 떠난 아내와 덤덤한 슬픔에 파묻혀 집으로 들어간 여인을 만난 기이한 밤, 온기를 대신 채워주는 존재와 함께 보낸 두렵고도 경이로웠던 순간들과 거짓 같은 마지막까지. 거칠고 긴 여정을 함께 보내고 나니, 새로움과 깨달음, 믿음 같은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익숙한 안정감이 더욱 그리워진다. 누군가는 이 책을 아름다운 여정이라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어딘가 몽롱함을 남기는 슬픈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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