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책임 - 한홍구 역사논설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바로잡지 못한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

몇 주전부터 잡고 있었던 책인데,다른 책에 밀려 계속 미루다  이제  책을 덮었다. 세월호 이후,단 한명의 국민도 구조하지 못한  국가와 이 국가를 운영하는사람들을 밝혀보고자 쓰게 되었다는 저자의 말처럼,역사와 책임은 한국현대사에 집중하고 있다.

믿을것은 우리 자신밖에 .우리 자신들이 만들어온 역사밖에 없다. 호흡을 길게 가져야 한다(중략)
우리가 믿을것은 우리 자신에 내재한 이 복원력밖에 없다.더 이상 대한민국 국호를 책임지지 않는 자들,위기의 순간에 무엇운 해야할지 모르는 자들에게 맡겨둘 수없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이들이 움직여야 한다. 역사는 책임지는 사람들의 것이다,ㅡ머리말 중 (p.11)

한홍구 교수는 역사와 책임을 통해,말그대로  역사앞에서 책임지지 않는 그들을 고발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세상은 참 변했다. 가끔 예전 이야기를 하다 격앙되는 나조차, 모르는 수많은 일을 이 책에서는 증언한다.

세월호는 우리에게 준엄한 물음을 던진다. 책임이란 무엇인가?역사앞에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속옷바람으로 도망치는 .어처구니없는 선장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저 기막힌 모습을 우리는 역사의 굽이굽이 많이 보아왔다(p.17)

한홍구 교수는  세월호의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일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생각해보면 그의 말처럼 백성은 죽는데,위정자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추석즈음 개봉할 영화 "남한산성"도  백성을 버리고 도주한 왕의 얘기가 아닌가. 그의 말처럼 참으로 오랜시간 백성들은 나라를 위해 싸웠는데, 그들은  목숨을 위해 도망쳤다.
그는 1950 년 6월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가 나로선 새삼스럽진 않다. 많은 책이나 유인물을 통해 이야기되었었고,관점이 다른다하여도 한국현대사의 수많은 자료들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을  이야기한 책과 구별될 수 있는 것이 그는 명확히 세월호로 시작하여,역사적으로 세월호를 일으킨 그들이 현시점의 문제가 아님을 고발한다.
수많은 간첩단 조작사건, 수많은  의로운사람의 죽음을 기획한 사람들,일제시대 친일파들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통합진보당 해산이라는 민주국가라면 있을수 없는 자유로운 정당을 이념이라는 잣대로 해체하여도 우리는 이념의 잣대대로만 바라본다. 그 이면에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지,모른다.
통합진보당보다  더 강력했던 것이 제헌헌법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경제 문제에 있어서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의 체제를 폐기하고는 사회주의적 균등의 원리를 채택" 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을 건국할때의 국시였던 헌법의 사상은 지금에서는 폐기 직전이다. 제헌헌법은 사실 전혀 몰랐는데, 놀랍다.정치민주주의와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를 조화하고자 한 제헌헌법의 정신이 소수의 위정자들에 의해 쓰레기처럼 폐기된데는 무지몽매한 우리의 책임도 클것이다.
특히 김기춘뎐에서 그는 한국사법엘리트의 대표인 김기춘을 통해 ,정권이 바뀌어도 기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병우라는 괴물이 하루이틀의 문제인가.
프레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를 저항없이 받아들인( 큰저항없이) 독일국민의 책임에 대해서도 묻고 있다. 역사와 책임에는 소수 위정자들의 책임만 있지 않을 것이다. 매번 되풀이되는 역사를 끊어내지 못한 우리의 책임도 클것이다.

민주주의 시대에 정치인들에게 천리마는 시민이다. 지금 자기 등에 말안장 얹어주길 바라는 시민은 한국 역사상 그어느때보다도 많다
10 년전을 돌아보라. 역사의 기회는 생각보다 자주 온다. 싸움의 의지를 다지고 싸움의 근육을 회복할지어다. 신야를 달리는 천리마의 울음소리가 듣고 싶다.(p.253)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인은 빼앗긴들에는 반드시 봄이 온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폐허속에 싹을 틔워야 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망의 인문학 - 클레멘트 코스 기적을 만들다
얼 쇼리스 지음, 이병곤.고병헌.임정아 옮김 / 이매진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희망의 인문학은 클레멘트 코스의 기적을 이룬 얼 쇼리스 박사가 클레멘트 코스를 하게 된 계기와 코스의 과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책에서도 밝히듯 우리나라에서도 클레멘트 코스를 진행했었다고 한다,
옮긴 이에 반가운 이름이 있다. 고병헌 성공회대 교수님이 계신데,그분의 강의는 한번은 도서관 학교에서 한번은 직접 모시어 마을 공동체 강의로 진행했었다.
그때는 줏대있는 부모로 사는 것의 주제로 진행했었는데. 교수님의 강의에 웃고 울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을 깨는 책이다.
인문학하면 인간들중 성찰 할 수 있는 기본 자질이 된 지성인이 주로 배우는 학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클레멘트 코스를 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 하는 얼 쇼리스 박사의 생각은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것이다.
나조차 인문학=지성인 이라는 틀에 박힌 생각으로 읽저 읺았난 생각이 되면서,부끄러움이 느껴졌다.
솔직히 나는 이 책의 여러 부분보다 옮긴이의 말에 있었던 일화가 생각난다.

저는 교수님들이 이책을 매우 어렵다고 해서 읽기 전에 많이 긴장했어요.하지만 오늘 워크샵에 읽지도 않고 참석 할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할수없이 책을 잡았지요. 그런데 저는 책이 매우 쉽게 읽혔어요. 그리고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고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왜 그런지 말이죠. 제 생각에는 2장부터 10장까지 의 내용은 사실 교수님들의 삶의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그런 이책에서 제시한 빈곤이나 가난,무력,폭력등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개념들이 교수님들에게는 낯설 뿐 아니라 ,그런 내용이 반복되면서 지루함을 느끼셧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그 내용들은 빈곤 '안'에서 사는 우리들에게는 결코 낯선 개념일 수 없으며, 그래서 흥미롭기 조차 했어요. (p.40)

얼 쇼리스 박사의 클레멘트 코스의 기본 취지중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한다. " 그것은 대화 가운데 존재하며, 대화는 '가난한 이들도 인간이며,그들의 인간성을 가장 적절하게 존중하는 방식은 공적인 삶의 영역에서 시민으로서 대우하는 것이다.: 라는 생각에서 시작한다.(p.38) 고 밝히고 있다.
그는 왜 가난한 빈부의 격차가 발생하는지,가난이 파생시키는 사회적 개인적 문제를 직시하는 것으로 클레멘트 코스의 필요성과 기존 취지를 설명한다.

만약 가장 영향력있는 미국인들이 선택한 이 단어가 적절하고 사회과학자들의 이론이 정확하다면-표면적으로 확실하게 그렇게 보이는 -현대사회의 목표는 부유함이 아니라 불평등이다.
편집자이자 수필가인 루이스 랩햄은 그답지 않게 극단적인 예를 들어 이런 글이 쓴적 있다."캐비어를 먹는 한 사람이 잇으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개밥을 먹어야 한다. ".... 그는 승자와 패자,현대 세계의 게임,그리고 미국적인 방식과 같은 극단의 사례를 선택했다.(p.44)
만약 빈곤이 분화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고, 그것에서 많은 것들이 파생되었다면 ,단순하고 정확한 정의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빈곤은 물질적 결핍과 숱한 도덕적 좌절이 겹쳐져서 만들어진 복합성 그 자체다 사우스 브롱크스 여성들과 마르크스가 옳앗다. 양은 질로 진화한다. 전적으로 소득에만 기초한 빈곤선은 중산츨의 삶을 발견한 사람으로부터 빈민을 가려내는데 적합하지 않다.(p.55)
이제 24번 구역에서는 어떠한 정치 활동도 일어 날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 경제가 지배규칙이 된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한다. 세계는 경주만큼이나 상대적이며,상대적인 빈곤은 견디기가 어렵다.이것은 인류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자기존종의 모욕이다.게임의 끄트머리에서 중산층과 승자와 맺는 동맹을 선택하고 다른 모든이들을 빈민으로 규정해버리면 24번 구역에 시기심이 등장한다. 그 시기심에서 소외,증오,그리고 분노가 피어오른다.(p.58)
클레멘트 코스를 설립하기 위해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을 선택할 때 우리는 학생들의 정치적 삶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것은 교수의 강의를 듣기 위해 학생들이 앉아만 있기만 하면 되는 프랑스식 모델과는 다른것이었다.소크라테스는 글로 기록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결정을 위채'정치적 삶'을 예로 들었다. 그는 생각과 행동을 융합해 정치를 탄생시킨 것이다.정치적 삶과 정신적 삶은 비슷한 과정을 거쳤고,유사한 방법을 사용했다. 정치는 언제난 대화였다. 대화처럼 정치는 한사람만으로 이워질 수 없으며,사람과 사람사이에 펼쳐진 자유 공간, 즉 정치적 공간이 일어난다.(p.65)
어떤 집단에 속한 회원들의 행위에 대한 협상이나 정치적 삶에서 일어나는 활동은 사생활의 영역에서 발생할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는 무기력이나 폴력 행태의 반응이 정치적 삶을 대신한다. 원시사회의 의식은 정치적 삶을 허용하지 않았다. ...현재처럼 필요의 법칙에 따라 산다는 것은 무력의 법칙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 정치적 삶이란 불가능하다.그렇다고 아리스터텔레스가 정치를 안락한 삶이나, 여가의 한 유형이라고 생각한건 아니다.더욱이 정치 그 자체가 정치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필요'라는 중압감은 개인을 행동하는 삶에서 팍팍한 생존의 현장으로 밀어내버린다. 그런 상황에서는 각 개인이 지니고 있는 행복으로 이끄는 습관들이 발현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필요'에 지배당하는 삶을 노예제도와 비교했다.(p.70)
만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혁명이 일어날것 같지 않는 나라에서 사는 빈민들에게 닥친 문제는 어떻게 주류 신화를 뒤엎느냐 하는데 달려 있다. 황금시대를 버리면 그들은 그 신화를 통헤 받던 위안을 잃게 될 것이고 그 신화를 계속 붙들고 잇으면 그들은 가난 속에, 자신들의 처지를 위로해주는 설명이 필요한 채로 남겨질 것이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빈곤을 뿌리치고,주류 신화가 옥죄고 있는 이중의 속박을 깨뜨리기 위한 노력은 영웅적인 모험을 요구한다. 이 모험은 종종 비극으로 끝나기도 한다. 영웅적인 빈민들의 용기가 대단하다 할지라도 끈질기에 살아남는 것이 신화의 본질이기 때문이다.(p.81)
힘은 시민의 공적 삶이란 '행동하는 삶'의 결과이며, 힘 그자체가 '행동하는 삶'이다. 정당한 힘은 오로지 이런 행동하는 삶을 통해서만 가늖며,한나 아렌트가 말했들시 힘은 저장될수 없는 것이다. 행동이 그치는 순간 힘는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난 이러한 시민의 행동도 힘있는 집단이 서로 동의한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정치적 삶은 아노미적 상태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p.131)
결국 해결의 실마리는 '시내 중심가의 사람들의 정신적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있었다. 정치만이 무력의 보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이 공적 세계에 참여하여 정치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찰적 사고를 할 수 잇는 능력이 필요했다.그리고 이 성찰적 사고능력이 바로 비지니스 세계에서 말하는 시내 중심사 사람들의 정신적 삶이엇던 것이다. (p.170)
정치적 삶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길이라면 인문학은 성찰적 사고와 정치적 삶에 입문하는 입구였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난에서 해방 시켜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으며, 그런 탈출구는 진작부터 존재하고 잇었다. 그러나 성찰적 사고와 정치에 이르는 길을 열어 제치려면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삶을 준비하는 과정간의 차이가 제거돼야 한다. 그리고 현대 사화를작동하는 '게임의 법칙'은 평등과 동등한 대화를 촉진시킬 수 있는 법칙으로 대체되어야 할것이다. 이런 일들이 가능하려면 가난한 이들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전체를 개혁해야 한다. (p.174)
인류가 주어진 운명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던 상테에서 벗어나 '자치'를 실행하기 까지의 과정에서 정치가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자기 통제'의 개념에서 추적해낼 수 잇다. 자기 통제'라는 개념속에서 인문학,평온함,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지워낼 수 없는 어려움들을 성찰을 통해 극복하는 것 등과 같은 뜻들이 담겨잇다. '자기 통제'는 무력에 맞설 수 있는 방어 수단이며,진정한 '힘'에 대한 정의이고,인간다움 그 자체다.(p.198)
타자의 행복을 보장하는 일은 추구할 가치가 있는 목표다. 그리고 그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으로써의 민주주의는 모든 것을 무릎 쓸 만한 가치가 있는 위험이다.(p.4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타인의 방 최인호 중단편전집 1
최인호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TV문학관을 즐겨봤었다. 읽는 것만큼 보는 것을 좋아하던 나는 오랜시간 동안 TV문학관과 베스트셀러 극장을 즐겨보았다 .그러나 학창 시절 이후 한국근현대문학을 즐겨 접하지는 않았다. 일본 문학을 읽는 만큼도 안 읽었다고 이제와서야 고백해본다. 숭례문학당의 단편읽기 시즌 2에서 읽은 마지막 책은 최인호의 <타인의 방> 단편집 중 '술꾼'이다.
고등학교 2 학년때 등단하여, 어느날 누나집에서 배를 깔고 두시간만에 써내려갔다는 <술꾼> 은 도저히 두시간의 감성으로는 읽을 수가 없다. 가히 그를 천재라 하지 않으면 ,누구를 칭할 수 있을까
신들린 듯이 써내려간듯한 술꾼에서는 소년과 술꾼들, 아버지와 아픈 어머니가 나온다
아픈 어머니를 위해 술집을 돌아다니면서 아버지를 찾는 소년은 결국 그것이 허상임을 되풀이는 되는 상처임을 직시할 뿐이다. 죽은 육친을 그것이 죽음인지. 페스트의 랑베르가 겪은 생이별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소년이 세상에 홀로 남았음을 그것이 전쟁이라는 상흔의 결과임을 누구나 알수 있다.
'잊지마세요' 결국 스스로 다짐하는 아버지를 찾겟다는 다부진 ,그러나 그 시절의 상처를 누구나 알기에 더욱더 슬프고 참을 수 없는 애잔함에 몸소리 쳐진다.

"아주머니, 나술 ,술 마시러 왔어요 " "정말이지 취하고 싶어요" (P.107)
" 잊지 마세요. 우리 아버지 이름말이야요. 국.승.현 나중에 혹 술집에서 만나더라두 내가 술먹더란 말 하디 마세요. 정말이야요." (P.97)
술꾼들은 이제 너무 취해서 한사람 한사람 집을 저주하고,마누랄 저주하고, 맏아들을 둘째아들을 저주하고, 생활을,미래에 대한 희망을, 원수놈의 월급을, 도대체가 살아간ㄴ 그 자체를 , 그리고 자기 자신을 저주하기 시작했다. (P.97)
한잔의 술이 그를 자유롭게 했다. 헤어질때 들이켜는 마지막 술처럼 그 한잔의 새로운 술은 그를 기쁘게 했다. (P.102)
언덕 아래에서 차가운 먼지냄새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사냥개처럼 그 냄새를 맡으며 이를 악물고,내일은 틀림없이 아버지를 찾을 수 잇을거라고 단정했다. (P.109)
아픔도 없이 날재죽지가 양 옆구리에서 부터 돋아나와 자기를 새처럼 가볍게 하리라는 것도 알고 잇었다. (P.106)
" 우리 아바진 술만 먹으믄 울엇시오. 기리티만 난 보다시피 울딘 않아요".(P.108)
그는 자기가 갈곳이 어딘가를 잘 알고 있었다.아무리 취해도 그는 자기의 노정을 잊어버린적이 없었다. (P.105)
.“아주마니. 나 술, 술 마시러 왔시요.”
그는 자기 말을 믿어달라는 듯 애원하는 시선을 보냈다.
“……이애가 미쳤나?”
 “딱 두 잔만 먹갔시요. 돈두 있시요.”
 아이는 여인 앞에 지폐 두 장을 내보였다.
 “정말이지 취하고 싶어요. 내 주량은 내가 잘 알고 있시요. 두 잔만, 딱 두 잔 더 먹으믄 꿈도 없이 잘 잘 수 있갔시요. 지금 이 정도에서 그치면 안 먹은 것보담 더 못하구, 잠두 잘 오딜 않으니끼니.”
아이는
민물고기처럼 웃었다. 주방의 불빛이 쓸쓸히 한 줌 그의 얼굴에 비끼고 있었다. (P.107)

그때였다. 갑자기 사내가 잠에서 깨어난 듯 흠칫하며 나이프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나이프가 아이의 목을 겨누었다. 아이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내의 눈이 병적으로 빛나고 있었으며 말린 입술 아래로는 흰 웃음이 무기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요 술주정뱅이 꼬마 자식아.”
  사내는 짖었다.
  “내 널 편하게 죽여주마.”
  아이는 무어라고 항거하려 했으나 혀를 놀리는 것이 쓸데없는 짓임을 알았다.
  “꼼짝 마라, 이 꼬마야.”
  그의 왼손 안에서 번쩍이는 나이프는 그 아이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아이는 목 근처에 가벼운 통증이 오는 것을 느끼었고 그는 안이한 생명의 탄식소리를 들었다.
 (망할 놈의 목이다.)
 사내의 손이 출발을 알리는 체육교사의 그것처럼 잔뜩 추켜졌다. 그의 손아귀에서 칼날은 작은 새처럼 불꽃이 튀었다. 그리고 그 칼은 순간 허공을 그어 내렸다. 아이는 공기와 마찰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부싯돌을 긋는 것 같은 찰나적인 섬광이 그의 손에서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사내의 손이 제 가슴을 찌르고 탁자 앞으로 고꾸라지는 것을 보았다. 아이는 총알처럼 술집에서 퉁겨져 나왔다.
(바보 같은 자식이다.)(P.104)


 
도대체 나를 흔드는 슬픔은 무엇일까 아버지를 찾는 끈을 놓치 못하는 소년의 모습이 ,아이가 아버지를 찾는 것이 결국 그의 삶의 끈임을 서글프게 알아가는 것이 몸서리치게 슬프다.
술꾼들이 소년의 말에 대꾸하는 모습은 그 모습이 하루 이틀이 아님을 되풀이 되는 삶의 비장함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술꾼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부모를 찾아 헤매는 소년을 대한다. 자기 혐오와 경멸,그리고 어린소년에게 술을 먹이면서 위로아닌 위로를 건넬 수 있을 뿐이다. 소년의 삶이 앞으로 얼마나 참혹할지는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의 그의 하루가 지났을 뿐 되풀이 될 또 다른 하루가 올것을 예견하게 한다. 소년이 울지 않고 되풀이되는 속에서 스스로 위로를 찾는 것은 아이러니하고 전쟁에서 가장 고통받는 것이 아이들임을 드러내지만 ,아이들로 인해 새로운 시대의 하루의 희망이 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박기범의 문제아를 읽을대처럼 극 사실주의 문학은 나를 오열하게 하지만 , 그러나 그 사실적인 현실 고발은 우리에게 또다른 희망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침묵으로 가르치기 - 학생이 스스로 생각하고 배우는 핀켈 교수의 새로운 교육법
도널드 L. 핀켈 지음, 문희경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0년 5월
평점 :
절판


독서토론리더과정 3차시 교재이기도 하고 작년 책통아 학부모독서토론 도서였다. 급하게 천천히 논제를 만들기 위해, 깊이 읽어보았다.

침묵으로 가르치기는 도널드 L.핀켈 교수가 21 년간 에버그린대학교에서 실천해본 교수법이기도 하고, 장자크 루소, 존 듀이, 피아제, 일리치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
"침묵으로 가르칠수 있을까?" 는 그 이전에 교육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배움이란 근원적이지만 우리교육현실에서는 소수외에는 질문해보지 않은 원론적 이야기를 건드린다. 그래서 이책을 읽으며,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교육현실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수있다.

그는 " 말로 가르치기는 왜 틀렸는가" 를 통해, 말로 가르치기는 명백하게 틀렸다고 선언하고 있다.

자녀를 학교에 보내면서 자잘한 지식이나 배워 오길 기대하는 부모도 없다. 교사와 부모는 모두 교육을 통해 아이의 이해력이 향상되길 바란다.그러나 안타깝게도 부모들은 대개 말로 가르치는 방법으로는 아이의 이해력을 효율적으로 향상시키지 못한다는 걸 깨닫지 못한다.(p.25)

핀켈 교수는 '교육은 곧 말로 가르치기'라는 전제를 버리는 순간 새로운 교수법이 떠오른다(p.26) 고 말한다. 그것이 말이 아닌 다양한 방식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전제인식일것이다
그는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가르치는것은 고사하고 과연 가르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이책은 이 질문에 답하려고 한다(p.28)고 밝히고 있다.
그가 질문하는 것처럼 좋은 교육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교육이란 좋은 스승, 교재등의 수동적 기제인것이다. 그는 " 교육에서 교사의 가르침인
아니라 학생의 배움을 제일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학생의 배움이 최종목표이고 교사의 가르침은 목표에 이르는 수단일뿐이다." 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 교육" 을 바라보는 시각을 한꺼번에 뒤집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은 다름을 인정하고 발달단계별 분리, 교육을 실현하는 기존의 교육이 아닌 철저하게 학생의 주체적 활동과 탐구에 집중하고 있다.
ㅡ책이 말하게 하라
함축적 의미를 가진 우화에서 배우기

우화를 교육자료로 활용하는 이유는 오직 스스로 깨달아야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따라서 교사는 침묵으로 가르쳐야 한다.학습활동을 이끌어 줄때만 말하고 나머지는 우화가 말하게 한다.(p.46)
학생들이 존재자체로 책을 읽는 그대로 읽으면 그것이 바로' 책이 말하게' 하는 기법이다
(p.72)

ㅡ학생이  말하게 하라

달리 말하면 믿을 만한 권위자가 지식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과정에서 지식을 발견해야 했다. 처음에 지식을 발견한 사람이 '새로운 과정' 에서 지식을 습득했다면 ' 과정' 이 중요하지 지식을 습득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닌가.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과정을 '탐구' 라고 한다.(p.84)

그는 개방형 세미나가 학생들이 말하게 하라의 좋은 예시로 제시한다. 과학적 방법론인 " 과학으로 도출한'진리' 는 절대진리가 아니다."(p.90) 는 정신이 개방형 세미나의 바탕이 된다고 한다. 결국 교사가 전달하는 지식이 절대진리가 아니라는 전제하에 학생들이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된다면 충분히 과학정신을 실현할수 있을 것이다.

ㅡ교사와 학생이 함께 탐구하라

한 과목을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탐구 수업으로 진행한다면 학생들이 자연히 탐구하는 자세로 책을 읽고 토론하게 될 것이다
읽기, 쓰기, 연구과제,시험, 보고서, 토론, 실습,교사가 내주는 탐구활동을 비롯하여 수업시간에 일어나는 모든 활동이 탐구활동이다.(p.110)

탐구수업을 위해  여러기법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1. 논증을 분석하는 법
2. 극적 행위를 분석하는 법
3. 반어법을 알아채는 법
4. 복잡한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제기하는 법
5.보고서를 쓸 때 질문을 해결하고 명제를 옹호하는 법
6. 다른 학생의 보고서를 건설적으로 비판하는 법
7.  건설적이고 비판적이면서도 예의를 갖춰 대화를 나누는 법 (p.130)
을 익히게 하려 노력했다고 말한다.

ㅡ친숙한 글쓰기로 말하라.

교사가 펜을 들고 글쓰기 모임에 동참하면 교육효과는 두배로 커진다
우선 글쓰기라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학생의 생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두번째로는 글쓰기 모임에 적극 참여하면서 모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모임의 기틀을 잡아주고 다양한 의견이 오가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줄 수 있다. 교사가 참여하면 학생들이 모임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p.169)

ㅡ학습을 일으키는 경험을 설계하라
ㅡ민주적인 선생님이 되어라

포드 박사가 드러내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사실 박사는 정치전 수업분위기를 조성한 것이다
앞에서 두번째로 제기한 질문, 곧 포드 박사가 대체 어떤 수업분위기를 만들어낸 걸까? 라는 질문의 답이다.포드 박사는 학생 혼자서 길을 찾길 바란다.정치적 목표, 곧 민주주의를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p.225)
탐구할 때는 진실을 찾기위해 권위에 대한 믿음을 포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혼자 탐구할때는 자신의 지적능력으로 올바른 결론을 끌어낼수 있다고 믿어야한다. 여럿이 탐구할때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지적 능력을 믿어야한다. 이 같은 믿음은 본래 민주주의의에서 나온 것이다.
. . .
그 보다는 교사의 임무는 학생의 성격개발에 힘쓰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학생의 독립심,자신감,자율성, 판단력,책임감,집단의 일원으로 생산적으로 활동하는 능력을 길러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된다. 이런 성격 특질이 바로 민주시민이 갖춰야할 기본 덕성이다. 이런 덕성을 길러주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를 목표로 삼는 '정치적' 교사가 추구하는 목표다.따라서 교사 스로 '정치적' 이라고 자각하지 않으면서 ' 민주적 수업분위기' 를 조성할 수 있다. (p.226)
모두 '상식' 에 뿌리를 둔 방법이다.침묵으로 가르치려면 우선 ' 가르치기' 를 거부할줄 알아야 한다. 교사에게 주어진 권력을 행사하지 않아야 한다
(p.254)

ㅡ동료와 함께 가르쳐라
앞장에서 민주적의사결정 과정을 스스로 익히는 과정이 권력을 학생에게 넘기고 권위를 유지하는 교사의 교수법이라면, 동료와 함께 가르치기는 더욱더 극적인 상황 제시이다.
다양한 권위가 존재함으로써 권력과 권위가 얼마나 다른지, 몸소 배우는 과정의 실현이 고무적이다
우리 학교현장에서도 이뤄지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져본다.
ㅡ경험을 제공하고 생각을 불러일으켜라

「침묵으로 가르치기」는  제목의 생경함과는 달리 내용은 탐구수업,토론수업의 한 방법이다.
핀켈 교수가 침묵으로 가르치기를 제시한 가장중요한 것은 권위와 권력을 분리하는 민주적배움의 과정의 실천이 아니었을까?
민주적 교사로의 자각과 수업방식의 의사결정과 논의과정의 민주화가 결국 우리인간이 나아가야하는 인간존엄의 가장 기본을 배우는 것이라는 그의 말에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이 책이 아직은 한국사회에 교육현실에 시기상조라고 한다. 그 말로 얼마나 오랜시간 교육은 변함없이 우열을 가리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시작하고, 다들 진저리치게 싫어하면서도 홀린듯 올인하는 대입이라는 괴물의 입에 스스로를 공양하는 짓은 멈춰야하지 않을까.
두고두고 가슴에 새겨볼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삶의 격 -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 일상인문학 3
페터 비에리 지음, 문항심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

존엄성은 하나가 아니라 많은 것을 의미한다
이 많은 것들이 한 인간의 삶에서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일 그것을 히해한다고 자부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자기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간 존재의 광대한 지도를 그리는 자가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속에 있는 오만은 불가피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관대히 넘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1901년 리스본
패드루 바스쿠 알메이다 프라두
<중요한 것에 대하여>

삶의 격을 지키는 문제는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독일과 미국에서 공붛고 교수로 저작활동을 하고 있는 페터 비에리는 우리에게 묻는다
존엄성이란 무엇인가?
그는
1. 독립성으로 존엄성
2. 만남으로서 존엄성
3. 사적 은밀함을 존중하는 존엄성
4. 진정성으로 존엄성
5. 자아 존중감으로서의 존엄성
6. 도덕적 진실성으로서의 존엄성
7. 사물의 경중을 인식하는 존엄성
8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존엄성
이야기하면서 많은 만남과 문학적 예시,실제 사례를 통해 인간이 찾고자 하는 ,아니 내가 찾고자 하는 '존엄성'이 무엇인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이책을 읽기 전에 읽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책 읽어 주는 남자> 의 한나가 자신이 문맹인데도 보고서를 썼다고 시인하여, 종신형을 받게 된 것과 18년의 형을 마치고 석방당일 스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을 "인간의 존엄"이라는 관점으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하나의 주체로서 갖는 자화상은 현재 우리의 모습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가 되고 싶은 모습, 그리고 되어야만 하는 모습도 해당된다. 주체가 가진 능력에는 스스로를 평가대상으로 삼고 행동과 경험이 만족할 만 한 것인지, 즉 기꺼이 받아들인 만한 것인지 내쳐야 할 것인지지 자문하는 일련의 과정도 포함된다. 현재 존재하는 모습과 되고 싶은 모습사이의 갈등을 체험하는 것도 주체가 가진 본질이다(p.25)


빌헴름 폰 훔볼트가 여기에 딱 맞는 말을 남겼다 " 왜냐하면, 일깨움이란 문제에 따르는 모든 가능한 해답을 앞에 제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가장 적절한 것을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도록 준비시키거나 발생가능한 모든 장해요소를 그려봄으로써 스스로 해답을 찾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p.47)
내적 독립은 타인으로부터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아야 이룰수 잇는 것이 아니다. 내면 세계 안에서 독립적이라는 것은 섬이나 지하 방공호에 들어 앉은 것처럼 외부로 향하는 문을 닫은채 그의 영향으로부터 민감하지 않거나 무관심한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내면적으로도 셀수 없을 만큼 많이 타인의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자기 계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 사이의 상호 영향은 존엄성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진정한 만남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p.77)
내면의 독립적 존엄성은 그것이 성공하느냐 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목표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부단한 노력에 달려 있다. 생각을 잘하지 못하거나 종종 실수로 넘어지는 바람에 사고가 홀로 서지 못한대 해도 존엄성을 다치지는 않는다. 누구나 생각의 과오를 저지르고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중략) 존엄은 사물의 기준으로서의 독립성이 시야에서 멀어질때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을때 상실된다.(p.81)
내적독립 : 생각하기
내적독립 : 의지와 결정
내적독립 ; 감정적 동요
내적독립 : 자아상과 검열
사람의 존엄성은, 내면의 독립성이라는 것이 모래처럼 깨지지 쉬운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런 이해심으로부터 인간 사이의 언대감이라는 값진 감정이 생겨나는 것이다(p.100)
"그렇다면 존엄성은 무엇인가?"
"사적인 것에 대해서 말을 아낌으로써 타인과의 사이에서 유지되는 간격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간격이 필요한 이유는, 침묵의 경도를 조금 무르게 함으로써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만들어 낼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리처럼 투명하다면 친밀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읻. 좁혀야할 거리라는 것이 애초부터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모두에 대해 다알고 그중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정해져 있다면 그것으로 이야기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p.245)
자신이 느끼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진짜이게 하는 의지 말이다. 거기에 한 인간의 참됨이 놓여 있다고 덧붙일 수 있다. 이 참됨을 이루는 것은 사실을 견디어 내는 용기다. (p.253)
자아 존중 유지를 결정짓는 한계선은 당사자가 스스로 긋는 다는 사실을 이예가 확인시켜 준다.자아 존중과 존엄에 대한 평가를 내릴때 타인에 의한 한계선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본인이 스스로 그은 경계이다 내가 견딜수 없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똑탕니 느끼는 것은 아니다. 어떤 행동이 그 자체 만으로 존엄성이 결여되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에게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행위를 포함한다. 신념, 감정,의지.살아가는 총체적 방법등이 이에 들어간다. 이것은 타인과 자신를 구분짓는 능력과 용기를 의미한다. 이것은 또 다른 면에서 갈등을 회피하지 않는 강함을 뜻한다. 여기서 자기 존중은 두려움이 없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p.310)
사람의 존엄성은 공공의 이익에 견주어 지는 것이 아니오 .고통과도 함께 다루어 질 수 없소. 존엄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오. 그러니까 손댈수 없다고 하는 게 아니겠소.(중략) 국가은 인간의 존엄성을 관리 할 수없소 (p.357)
또한 그동안 살면서 자신에게 금지했던 것은 무엇인지,왜 금지햇는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의 숨겨진 기준은 무엇이었는지. 또 그들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지, 방향 전환이 아직 가능한자. 그러기 위해서 어디서 용기를 얻어야 할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다. 이들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때마다 매번 달자질 것이다. 물음의 과정은 개방적이고 살아있는 과정이어야 한다.그리고 그 과정은 우리를 달라지게 할것이다. 이것은 독립성을 가진 존엄성의 한모습이기도 하다(p.395)

저자는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의 로먼과 <소피의 선택>의 소피 등, 많은 문학 작품과 영화의 예시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이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의미를 가지는 지를 이야기 한다.
이야기가 무척 쉽게 닥오는 것은 그가 든 예시와 그가 세밀하게 나누어 둔 세부 항목들 덕분일 것이다.
여러 책들에 묻혀 겨우 겨우 읽어 내렸갔다.
그러나 이책을 읽는 동안 그간 나에게 질문을 하게 한 많은 책속,영화 속 주인공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고, 내가 아직도 고민하는 여러 이슈들에 대한 나의 질문과 입장을 정리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존엄성이라는 문제를 개인의 자기 성찰이나 심리학적으로 풀어낸 책들은 기실 우리가 상황에 선택해야 할때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할 만큼 의지 박약을 만들때도 많다. 물론 나의 논리적 근거가 기초 부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만,많지 않은 분량(451페이지) 로 개인적, 상황적, 사회적, 국가적 담론을 모두 존엄성이라는 측면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음에 감탄과 그것이 지구 다른 곳에 위치한 나의 질문과 상황에 밀접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인간의 존엄성, 자아존중, 삶이라는 것은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단어들이지만 그것이 가진 깊이와 성찰의 고민은 아주 오래된것이다.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 방법> 의 여러 글들은 두고 두고 새겨보고 다시 나의 질문으로 바꿔볼 예정이다.
p.s 마지막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존엄성 부분은 아툴가왼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사상 토대로 생각해 봄직 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