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정미경작가는 작년 1월18일 갑작스럽게 별세했다.
창비블로그에 작가의 1주기 유고집이 나온다는 알람을 받기 전에는 한번도 지나치지 않는 작가이다.
나의 책 취향의 문제이긴 하지만, 갑자기 단체톡 방이 들썩들썩 하면서 '정미경 전작읽기" 방이 만들어 졌다.
여러 상도 받으면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작가인데, 그녀는 이제  작품으로 그녀 삶의 치열한 사유를 남기고 있다.

< 나의 피투성이 연인> 은 단편집이다.
나랏빛 사진의 추억
호텔 유로, 1203
나의 피투성이 연인
성스러운 봄
비소 여인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표제작은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지만 나는 맨 마지막 수록작인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가 가장 가슴에 와닿는다. 작가는 인간관계의 허위, 욕망을 담담히 그려 낸다.

" 그런데 영화를 찍어가면서 ,어떤 고통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일상의 잔인한 영속성을 미옥씨에게서 보았어요. 그걸 기록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건 아니에요. 내가 원했던건 ,이처럼 일순에 삶을 뒤엎어 버리는 가짜 같은 드라마가 아니었어요. "
" 산다는 건,싸구려 픽션보다 더한 굴곡을 늘 이면에 감추고 있을 뿐이에요. 승우씨나 나 역시 마찬가지고, 그것까지가 삶이에요 ."
(p.242)
....
몇 번이나 본 필름이었는데 어쩐지 화면들은 처음보는 것 처럼 눈길을 붙들었다. 치자 꽃이 귀에 꽂은 미옥의 얼굴이 클로우즈업 장면에서 나는 울기 시작했다.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알지 못했던 ,표지석처럼 저토록 뚜렷햿으나 내가 보지 못했던 아픔의 프로필이 거기 있었다. 누군가를 완전히 잃어버리기 전엔 보지 못하는 것이 거기 잇었다. (p.245)
....
"대부분의 우린, 별이 아니라 ,스스로 빛나지 못하는 차갑고 검은 덩어리예요. 존재란 스스로 빛날 수 없는 것, 누군가의 시선 속에서 ,타인과의 관계속에서 만월도 되고 때론 그믐도 되고, 그런것 같아요
(p.245)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중 -

이토록 슬픈 사랑가가 있을까?
사랑이란 ,삶이란 무엇인가요? 에 코엘료는 '오자히르' 를 쿤데라는 농담속의 '페이소스'를 말한다면 정미경은 그녀의 소설 자체가 형용 모순의 페이소스를 준다.
어느 블로그에서 정미경의 글은 우울하다는 평은 일견 맞아보인다.
삶의 탈출구는 보이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치달아가는 나는 결국 어쭙잡은 사랑을 버리고 나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유로호텔로 향하면서 깨지 않는 신데렐라의 꿈을 꾼다.
가지지 못한 것은 탐하는 것은 죄악이지만, 가질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해서 소유하는 것은 정열이라고 우울하게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우울함,슬픔을 담은 웃음조차 웃음이라고 호텔 유로의 나는 말한다. 나보다 10여년이나 어린 배우가 입은 옷을 사 보는 것은 욕망과 사치가 아닌 내 존재의 이유인 것이다. 유로 호텔 1203호로 들어서면서 ,

나는 망설이지 않고 초인종을 누른다. 가슴이 두근러겼지만 두려운 건 아니다. 일생 동안 열등감 따위는 느껴본적이 없는 듯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라면,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느끼는, 내가 이 도시에서 열등한 존재라는 느낌을 흔적없이 지워줄 무언가를 갖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는 내 말에 이제 주먹만을 꼭 쥔채 어두운 골목에 서서 울고 있는 남자, 말을 더듬지 않으면서도 더듬는다는 인상밖에 주지 못하는 남자는 결코 줄 수 없는 어떤 것을 (p.70)
-유로호텔 ,1203

현재를 중시하는 나에게 그의 사랑도 그의 울음도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의 죽음으로 짊어져야 하는 것은 결국 아이와 살아가는 내 현재의 삶이므로,

6.13
나의 어디가 좋아
모르겠어
말해 줘
모든게 좋아. 너의 모든 것
그렇게 많이 (p.92)
...
아아, 인생을 일천 번이라고 살아보고 싶다. 이처럼 아름다운 세상이 아름다우니까(p.94)
-나의 피투성이 연인 중

' 아아 인생을 일천번이라도 살아보고 싶다' 는 환희 목소리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이 나로 연유함이 아님을 알았을 때 나의 연인은 행복한 과거의 연인이 아닌 죽은 날 나를 떠난 피투성이 연인으로 되뇌이게 될 뿐이다. 낯선 이로 피를 흘리는 그는 더 이상 나의 연인이 아니지만 , 그가 죽은 이순간 그의 모든 것을 그의 아내라는 이름으로 차지한 나의 승리다.

그가 있었고 내가 있었다. 둘 사이엔 깊은 우물이 있었다. 그가 옆에 있을 땐 우물의 존재를 몰랐다. 너무 가까이 있는 건 보지 못하는게 인간의 시력이니까. 그 심연 속에 많은 것들이 있었다. 사랑도 , 결핍도, 원심력도, 구심력도, 피로한 감정의 순간도, 은닉된 삶의 조각들도. 그 조각들을 다 맞추어도 기어이 떠오르지 않는 지난 생의 밑그림. 둘 사이의 우물은 너무 깊고 어둡고 그리고 차갑다.
인생은 생각이 있는 놈이기라도 한 듯 종종 숨겨진 현실을 일깨워 주곤 한다. 문제는 그 방식이 잔인하다는 것. (p.96)
-나의 피투성이 연인 중

남은 생을 되뇌이며 살것이다. 피투성이로 죽어간 그는 유선에게도 잔인한 피를 남긴다. 피라는 것은 우리가 모르게 수많은 혈흔을 남긴다. 그것이 물로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은 가장 잔인한 기억일 지 모른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때는 확실히 그런 순간이 있어. 사랑이란 어떤 것에 대해서는 너무 예민하게. 어떤 것에 대해서는 너무 둔감하게 만들어버리는 감정의 알러지 상태가 같은 것이니까.(p.109)
...
널 위해서가 아니야. 당신은 내 속에서, 언제까지나 ,마지막 보여주었던 그 모습처럼. 나의 피투성이 연인으로 남아 잇어야 해. 지나고 보니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게 인생이고 어떤 일도 견뎌내는 게 인간이더라. 뭘 못 견디겠어. ...
차갑긴 했지만 마지막 보앗던 당신의 얼굴을 껴안고 말이야. 당신은 언제까지나 나를 물어뜯으며, 나의 연인으로 남아 있어야 해. 피투성이의 연인,잔혹한 연인, 당신이 특별히 가혹한 사람이란 생각은 안해. 모든 연인은 더 사랑하는 자에게는 잔혹한 존재니까 (p.136)
-나의 피투성이 연인 중

더 사랑하는 사람에게 늘 잔인하지만 비천하고 미약한 우리에게는 시간이 있다. 견디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다. 쉽고 쉬운 명제지만 사랑은 ,삶은 우리에게 한순간 모든 것을 빼앗고 잔인하게 시험에 들게 한다.
<성스러운 봄> 과 <비소 여인>, <나릿빛 사진의 추억>은 훨씬 현실적이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기록이다.
기억에 대한 기억들 ,
그것은 오로지 기억하는 자의 몫이다. 기억을 거부하는 자는 기억이 혐오기고 지우고 싶은 그 무엇인가 일 뿐이다.
기억이 맞지 많은 인생의 변곡점은 과거를 파괴한다.
과거를 잊는 것, 기억하는 것은 여러모로 우위를 점하기도 하지만 정미경의 기억은 슬픔이 물처럼 배어나온 하얀 광목천 같다. 사랑이 이뤄지지 않으면 물거품으로 사라지는 인어공주의 사랑처럼 정미경이 전하는 사랑들은 자신을 태우는 부나비 같다.

같이 여행가서 찍은 필름을 맡길 돈도 없을 만큼 내가 어렵다는 걸 알고 여자는 처음에는 괜찮다고 말했고 좀 지나자 한숨을 쉬기 시작했으며 그 다음엔 이유 없이 울음을 떠뜨리곤 했었다. 여자가 떠나고 나서야 나는 그녀가 우리의 이별을 생각하고 미리 울었다는 걸 알았다. (p.11)
그랬다.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로 이루어진게 인생이었다. 그 말은 발포정처럼 내 머리 속에서 거품을 내며 천천히 풀어졌다. (p.37)
...
우주의 이면에 닿을 수 없는 것처럼, 가장 가까웠던 타인의 경우도 그러하지 않았는가. 윤미 역시 지금 내가 사진을 돌려주겠다고 불러놓고 그 사진을 다시 찍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을 것이다. (p.38)
-나릿빛 사진의 추억 중

독으로 주변사람들도 죽이는 고 스스로 죽어가는 (의문이지만) 것은  결국 윤이의 사랑일까, 명백하게 그것은 죽은 이로 얻어지는 것이 있으니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죽음의 중독일 것이다. 교미 후 수컷을 먹어야 하는 암컷 사마귀는 수컷의 머리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면서 최후의 쾌락을 느낄 것이다.

" 처음 만난 날 당신이 햇던 말이 생각나. 개미는 자신의 생을 사랑할까. 그들에게도 삶이라는 개념이 있을까. 자신의 생을 오래된 우물처럼 덮어버리고 들여다 보지 않는 존재란 개미와도 같아. 우린 닮았어. 그날 처음 만났을때 난 그걸 알았어." 형태없이 흐물거리는 녹조류처험 외면하고 싶은 의문이 여전히 우리 사이에 있었다. (p. 197)
...
그렇지만, 이 여자가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이제 잠들어 있는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 본다.누구를 상처 입히기 보다는 자기 자신의 발등에 들고 있는 돌을 떨어뜨리고야 말 것 같은 얼굴. 창백하고 소심해 보이며 누군가의 상처를 제것처럼 아파할 것 같은 얼굴. 이 얼굴로 그럴 수 있을까. 나는 물어보지 못할 것이며 물어보지도 않을 것이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은 기억의 회로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잇는 건 그것까지이다.(p.197)
-비소 여인중

남자를 이해하는 여자는 남자의 폭력과 질투에 스스로를 내맡기고, 시를 사랑하는 나는 시를 버리고 호텔로 향하는게 하는 정미경의 이야기는 인간의 깊은 우울감과 사랑의 이기를 증명하는 듯 하다.
그러나 그녀는 '막막히 살아가는 ' 삶을 이야기한다.
그녀의 주인공들은 다 그렇게 산다. 인생이 뒤틀어지더라도 자신의 인생을 산다. 그래서 정미경 소설이 우울하다는 데는 우울과는 다른 것이 더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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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8-02-03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그 단톡방이 그런 활용도가 있었네요!^^ 전 한번 들어갔다가 이게 뭐지..하고..그냥 나왔는데..전작읽기 넘 좋죠.. ^^
이 책도 좋아하는 책이라 들여다보고 갑니다 . 잘 읽었어요 !!